물감냄새. 미대건물답게 그 내부는 온갖 색채들이 풍기는 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마다 바쁘게 오가는 학생들 속에서 백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제가 다니는 경영대학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보다 열정적이고 생기있는 사람들속에 있을 흑빛의 남자가 상상이가지 않았다. 그때 백현은 맞은편 복도 끝에서 코너를 도는 남자의 동그란 정수리를 발견했다. 백현은 남자를 쫓아 인파를 헤치며 뛰기 시작했다. 꽤 오랜만에 하는 달리기였다. 정작 백현은 본인이 현재 왜 뛰고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한 가지 알 수 있는것은, 남자를 볼 때마다 묘한 감정이 고개를 든다는 것이었다. 마치 막 잠에서 깬 인간이 방금까지 몸을 적신 꿈을 애써 기억하려는 것처럼. "쪼끄만게 무지 빠르네." 코너를 돌자 바로 보이는 비상구로 들어갔을 때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백현은 넓은 보폭으로 계단을 올라 바로 윗층의 문을 열었다. 그제서야 백현은 시원스레 미소를 띄웠다. 가장 끝 쪽에 위치한 강의실의 뒷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몸을 들이는 남자의 작은 뒷모습이 보였다. 백현은 남자가 들어간 강의실 앞에 붙은 '서양학과' 라고 씌여진 펫말을 무심히 쳐다보았다. 방금까지 아영이 주구장창 늘어놓던 말보따리 중 자신이 서양학과에 다닌다는 말이 언뜻 생각나는것도 같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현의 머릿속에 아영은 없었다. 백현은 조용히 가라앉듯 흐르던 남자의 눈물을 상기시키며 천천히 강의실의 뒷 문으로 향했다. 뒷 문에 작게 난 유리창을 통해 안을 둘러보았다. 생각보다 넓은 내부에는 학생들이 모두 이젤 앞에 앉아있었다. 백현은 어렵지 않게 아영을 발견했다. 온통 화려한 빛깔의 명품 옷들로 치장한 그녀는 제법 눈에 띄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도 적지않았다. 백현은 조소했다. 마음 같아서는 이미 오래전 그들에게 아영을 떠밀고도 남을 백현이었다. "…김한결." 젊은 여교수의 낭랑한 목소리가 강의실 내부를 울렸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 석자에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남자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뻗었던 팔을 도로 내려 4B연필을 잡는 행동 하나하나에서 정갈함이 묻어났다. 김한결. 백현은 작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창가자리에 앉은 남자는 쏟아지는 봄날의 햇살을 어깨에 얹고 조심스레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고아한 모습에, 백현은 잠시 모든 상념을 멈추었다. SCANDAL4.You+I=? w.다올 저기 한결아. 자신을 지칭하는 부름에 미술도구들을 정리하던 경수가 고개를 들었다. 정확히 1년만에 듣는 '한결'이라는 이름은 경수가 포기하지 못한 대학 생활에서만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여느 대학생들과 다르지않은 캠퍼스 속 김한결. 한결같은 지조를 지닌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름으로, 민석과 종인이 머리를 맡대고 지어준 것이었다. 지난 1년 동안 휴학을 하고 미국에 다녀왔던 경수는 꽤 오랜만에 한결로 돌아와 있었다. 경수의 앞으로 다가온 선량한 인상의 과대표 남학생은 앉아있는 경수의 모자챙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한결이 너 복학하기도 했고. 오늘 저녁에 과 모임있는데 오면 좋을 것 같아서." 경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남학생 역시 별기대를 하는것은 아닌지, 더이상의 말 없이 경수의 어깨를 두어번 두드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경수는 붓에 묻은 물기를 털던것을 멈추며 남학생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경수는 과 내에서 유명한 아웃사이더였다. 그를 고립시키는 사람은 경수 본인이었다. 모자 아래로 언뜻 비추는 얼굴은 제법 귀염상이라는 말도 떠돌았지만 그것은 곧 경수의 어두운 소문들에 덮여버리고 말았다. 경수가 벙어리라는 사람도 있었고, 큰 조직의 일원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경수는 귓등으로 들리는 저에 대한 말들에 속으로 웃었다. 그것에 부정하고 해명하기위해 나서는 일은 일체 하지않았다. 그저 처음부터 자신이 하고자 했던 미술공부에 전력을 다했을 뿐이다. 경수에게는 그것 만으로도 충분히 벅찼으니까. 가방에 미술도구를 차곡차곡 넣어놓은 경수는 제일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도 없는 강의실을 주욱 둘러보던 시선이 뒷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경수는 내디던 발을 그대로 멈추었다. "こんにちは。(안녕하세요.)" 곤니찌와. 뒷 문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있던 백현이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경수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기절할 듯 놀란 마음을 애써 추스리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경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러고 보니, 변백현의 여자친구가 이 곳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는것도 같았다. 정말 기묘한 우연이었다. 경수는 속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방금 전 유창한 한국어를 알아듣는 자신을 백현이 못 보았을리가 없었다. 백현은 여전히 재미있다는 얼굴로 굳은듯이 서 있는 경수를 응시했다. 모자에 가린 얼굴은 여전히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연기 잘하네." "……." "이 말도 그쪽은 못 알아들으려나?" 비웃음과 함께 내뱉어진 날카로운 말에 경수가 미간을 좁혔다. 백현은 여전히 빙글거리는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였다. 경수는 당장이라도 그의 웃는낯에 주먹을 꽃아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그가 얕은 우연으로 스쳐가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변백현이었다. 경수는 일자로 입을 굳게 다문 채 백현이 서있는 뒷문 대신 앞문 쪽으로 향했다. 경수의 동선을 눈에 담던 백현은 복도를 통하여 앞문으로 향했다. 다시한 번 맞딱드린 그들은 제법 가까워져 있었다. 백현은 빠른 손놀림으로 경수의 모자를 벗겨냈다. "…다시한 번 다음에 만나면 우연으로 간주하지 않을거야.""…….""그땐 정말 흥미가 생길 것 같아서 말이야." 눈의 절반을 덮는 검은 앞머리 사이로 빛나는 흑색의 눈동자를 마주한 백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은 마치 가시덤불 속에 몸을 숨긴 독사의 것과 흡사했다. 백현이 잠시 호흡을 멈춘 틈을 타 경수는 거칠게 모자를 잡아챘다. "꺼져." 경수는 그대로 백현의 어깨를 밀치며 강의실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백현은 한동안 멍하니 서있다 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처음으로 들은 남자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섹시하다고 느껴졌다면, 정말 미치기라도 한 것일까. * "…그래서 제가 뭐라 그랬냐면…백현오빠?""어?""뭐에요. 내 말 안듣고 있어요?""안 듣긴. 그래서?" 백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턱을 괴었다. 파스타를 포크로 말아올리며 연신 종알대던 아영은 백현의 말에 곧 토라졌던 표정을 풀고 마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따분하고 좀처럼 이해도 되지 않는 20대 여자들의 이야기였다. 백현은 자꾸만 다른곳으로 발을 돌리는 정신을 붙잡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아까부터 머리속은 한결이라는 남자로 가득 차 있었다. 어쩐지 잊혀지지 않는 짙은 눈동자는 기나긴 여운을 남겼다. 자신을 향하면서도 묘하게 빗겨나간 백현의 초점에 말을 멈춘 아영은 수저질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백현에게 마음이 식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저, 곧 다가올 연애의 기득권을 점하기 위한 밀고당기기였다. 아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오직 아까 전의 상황만 끝없이 속으로 되풀이중이던 백현은 한참의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혹시 너희 학과에 다니는 김한결이라는 사람 알아?""김한결이요? …아 그 사람.""뭐 자세하게 아는 것 있어?""아뇨. 1년 동안 휴학 하고 왔는데 예나 지금이나 알 수 없는 사람인 건 똑같더라고요. 저보다 한 학년 위인걸로 알고 있는데 선배들도 다 못다가가요. 이상한 소문도 많고." 아영은 다시 입에 모터를 장착하고는 그간 들었던 경수에 대한 숱한 소문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백현은 터무니없는 것부터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소문들까지 집중하여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이야기하던 아영은 제 이야기를 할 때와는 180도 다르게 반응하는 백현에 불퉁하게 입을 내밀었다. 그런데 오빠, 그 선배랑 무슨 사인데요? 그녀의 단도직입적인 물음에 백현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자와 자신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에요?""아니.""그럼요?""알고싶은 사람." 미세하게 얼굴을 찡그리는 아영에 백현은 그저 웃어보일 뿐이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백현은 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허름한 주점의 미닫이 문 앞에 선 경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이 문을 열기만하면 되는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주식의 판도를 조작하기 위해 정부인사를 만났을 때도 흐르지 않던 땀이 등에서 비오듯 흘러내렸다. 하늘에 걸려있는 붉은 석양처럼 뜨거운 열기가 창호지 너머로 느껴졌다. 경수는 쉼호흡을 하곤 발걸음을 도로 돌렸다. 역시, 이런 곳은 저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 곳은 과대표가 말한 모임장소인 학교 앞 파전집이었다. 백현으로 인해 화가 나는 마음을 추스리며 빠르게 움직이던 걸음은 자연스레 이 곳으로 향했다. 술을 입에 댄지도 꽤 오래되었거니와, 이런 모임에 참여한적은 한 번도 없었다. 종인과 민석만이 아는 번호의 핸드폰에서는 아까부터 계속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다. 경수는 손에 꼭 쥔 핸드폰의 액정을 내려다 보았다. 예상대로 끊임없이 전화를 거는 발신인은 종인이었다. 그때 우당탕 미닫이문이 열리고 시끄러운 소리들이 일순간 홍수처럼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경수가 놀란 눈으로 뒤돌아본 곳에는 담배를 입에물고 나오던 과대표 남학생이 멈추어 있었다. "하,한결아. 왔어?""김한결?" 담배를 피러 몰려 나온 동기 남학생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경수를 앞에두고 벙쪄 있었다. 경수는 목언저리를 문지르며 대답을 준비했다. 역시, 이들도 반기는 눈치가 아닌데 가는게 좋겠지. 나는 그만 가보는게 좋겠… 까지 내뱉는 순간 그들은 일제히 경수를 붙잡고 안으로 밀어넣기 시작했다. 김한결 왔다! 우렁찬 외침에 파전을 뒤집던 선후배와 동기들이 놀란눈을 했다. 경수는 뭉크의 절규 속 주인공의 심정을 온 몸으로 느끼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다 변백현 때문이야! * 부드럽게 차를 멈춰 세운 백현은 피곤한 기색을 애써 감추며 조수석쪽을 쳐다보았다. 수줍은 미소를 띄우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영에 백현은 피곤이 배가 되는 듯 했다. 레스토랑에서 나와 한동안 카페에 머무르던 두 사람이 영화관으로 가려던 차에 아영의 핸드폰으로 동기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과모임이 있는것을 잊지말라고 신신당부하며 꼭 참석하라는 내용에 얼굴을 구긴 아영이었지만 백현은 속으로 기쁨의 쾌재를 불렀다. 아영은 아쉬운 듯 안전벨트를 푸르며 입을 열었다. "오늘 괜히 나때문에 고생한 거 아니에요?""나도 좋았어, 오늘.""데려다 주기까지하고 고마워요." 차에서 내린 백현은 차머리를 빙 돌아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친절이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여자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예상하는 그는 선수중의 선수였다. 아영은 감동한 듯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려 백현을 올려다 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아영은 이전과는 달리 눈을 내리 깔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엄습해오는 또 다른 직감에 백현은 눈썹을 찡그렸다. 미적지근하게 내려앉은 봄 저녁의 공기와, 못 견디게 간지러운 침묵. 지금 시각은 고백 1분 전이었다. 탈출구를 찾는 백현의 눈동자가 빠르게 주위를 배회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의 모임 장소인 주점의 문이 벌컥 열렀다. "…2차 가자고. 2차.""김한결 이거 완전 맛 갔네." 열린 문으로 물 먹은 솜마냥 늘어진 경수가 저보다 큰 남학생에게 부축을 받으며 걸어나왔다. 와인이나 양주 말고는 제대로 술을 마셔본적이 없으니 주량을 모르고 무작정 들이부운것이 화근이었다. 저기 오빠! 아영은 어느샌가 시선이 틀어진 백현을 소리 높여 불렀다. 백현의 두 눈에는 오직 비틀거리는 경수만이 오롯이 담기고 있었다. 저 할말 있다구요 오빠! 조급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흔드는 아영에 백현은 살풋 인상을 찌푸렸다. "그 할말이라는 거. 다음에 하자.""네?""다음에 오빠가 더 맛있는거 사주고, 영화도 더 재미있는 거 보여줄게." 분명 나중에 땅을치고 후회할말들 이었지만 백현은 빠르게 내뱉었다. 그리고는 아영이 그를 붙잡기도 전에 백현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지나쳐 경수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고민하는 남학생의 옆에서 눈을 느리게 꿈뻑이던 경수는 갑작스레 제 앞으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백현은 나른하게 풀린 경수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았으면 절대 성사되지 못했을 법한 오랜 눈맞춤이 이어졌다. 어쩐지 손 끝이 저려오는 것만 같았다. "얘는 제가 데려갈게요.""한결이 친구분이세요?" 백현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반색을 하던 것도 잠시, 남학생은 한결을 도맡겠다는 남자가 의심스러워 갸웃거리며 물었다. 백현은 또다시 고민하기 시작했지만, 이번 고민은 아까보다 쉽게 결단이 났다. 백현은 어딘가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이요." 힘없이 내리감겨있던 경수의 눈이 뜨이고 두사람의 시선이 다시금 얽혀들었다. 백현은 미소를 지었다. 미적지근하던 공기가 기분좋은 훈풍으로 변한것은 한순간이었다. 머리가 뜨거우실 독자분들을 위해...!< 도경수 = D.O. = 꺼먼(차림)남자 = 김한결 > 많이 부족한 글인데읽어주시는 분들, 소중한 댓글써주시는 분들, 좋아해주시는 분들 너무 감사드려요ㅠㅠ복(福) 투유!!!♡이전 글[EXO/백도] 스캔들(scandal).0311년 전 다올 l 작가의 전체글 신작 알림 설정알림 관리 후원하기 이 시리즈총 0화모든 시리즈아직 시리즈가 없어요최신 글현재글 최신글 [EXO/백도] 스캔들(scandal).04 311년 전위/아래글현재글 [EXO/백도] 스캔들(scandal).04 311년 전[EXO/백도] 스캔들(scandal).03 311년 전[EXO/백도] 스캔들(scandal).02 311년 전[EXO/백도] 스캔들(scandal).01 311년 전[EXO/백도] 스캔들(scandal).00 511년 전[EXO/백도] 백도를 아십니까? 中 411년 전공지사항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