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한 전 남편과 우결에서 만난 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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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 내추럴 플러스 - 출발 했으니
“국가대표일 때부터 굉장히 팬이었어요.”
가로수길 인근 카페에서 그와 만나게 되었다.
여전히 증오심만을 품고 있던 내게 처음 보는 사람인 양 말을 걸어오는 김민석.
굉장히 불쾌했다.
말은 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한때는 사랑했으며, 몸도 섞었던,
그런 사이인데 단지 팬일 뿐이다….
“팬이라…. 감사해요. 저도 엑소 팬이에요.”
우리에게 대본 따위는 없었다.
스물다섯의 동갑내기 커플을 그려보겠다는 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뜨리며 우리의 대본을 없애버렸다.
그렇게, 난 김민석과 불편한 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제가 학창시절에 엄청 팬이었거든요. 한국에서 열리는 경기가 있으면 다 쫓아갈 정도로.”
당연한 얘기겠지.
그때는 우리가 한참 어렸으며 한참 사랑했으니.
김민석의 말을 듣고 있으니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나와 있었던 그 소중한 추억들을 저렇게 세탁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세탁을 해야만 했을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김민석이 조금은 미웠다.
“시간 되면 같이 경기나 보러 가요.”
김민석과 함께 경기를 보러 갈 생각 따윈 추호도 없다.
단지 방송용 멘트일 뿐.
‘조정’ 생소했던 그 이름을 내가 효자종목으로 탈바꿈을 시켰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출전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당연하다는 듯 선배들을 제치고,
그렇게 난 국가대표가 되었고. 김민석과 함께 그 기쁨을 나눴다.
올림픽에 출전하기만 하면 언제나 그렇듯 금메달을 쓸어왔다.
지금의 김연아 정도라고 할 수 있겠지.
임신과 십자인대 파열만 아니었으면…, 찬란하디 찬란한 나의 선수생활은 그렇게 끝이 나지 않았을 텐데….
오로지, 김민석 탓으로 돌리고 싶었다. 아니, 돌려야 했다.
내 아이를 떠나보낸 슬픔과 한순간에 구렁텅이로 빠져버린 내 현실을 직시하는 순간 죽고 싶었으니.
“…좋아요. 저야 영광이죠. 미션이나 확인해요.”
시켜놓은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뒤 살짝 뜸들이며 말하는 김민석.
약간은 당황한 눈치였다.
빈정거리는 말투 하며, 저 가소로운 눈빛까지.
어쩜 저렇게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인지.
이혼할 때 나에게 건넸던 눈빛과 아주 흡사한 눈빛을 보내는 김민석에게 남은 정나미마저 뚝뚝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벌써 5년이나 더 된 이야기를 꺼내서 뭐하나 싶다.
이미 김민석과 나는 남남이며, 연애를 했다는 그 실마리조차 없는데.
***
**
*
“연기 좀 하더라 너. 언제 연기자로 직업을 바꾼 거야?”
다행히도 촬영은 빠른 시간 안에 끝이 났다.
억지로 화를 꾹꾹 참으며 웃었던 탓일까, 입술에 경련이 일기 시작했을 무렵
김민석이 내 앞으로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시큰둥한 표정과 시큰둥한 말투로.
5년이란 시간 동안 철조차 들지 않은 걸까,
“내가 연기자로 전향한 거 모르는 사람 너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리고, 왠만하면 신경 쓰지 말아줘. 우린 철저하게 비즈니스 적인 관계일 뿐이니까.”
나에겐 한없이 착하고 다정했던 남자가 맞았는지 의문이었다.
이혼을 하는 그 순간마저도 눈빛은 차가웠지만, 말투만은 다정했던 그였는데
인기를 얻고, 수 많은 팬을 얻고, 여자 연예인에게 대쉬도 받으며 저렇게 기고만장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김민석을 좋아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건 멀리 보내버린 내 아이에게 미안해서 애써 김민석을 더욱 차갑게 쳐내려 했다.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채 보내버린 내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벌레만도 못한 새끼라고, 항상 그렇게 김민석을 생각해왔다.
“꼭 그렇게까지 말 해야되? 너 왜 이렇게 꼬였어?”
내 말투가 어지간히 거슬리긴 한 것 같다.
예전과 같게 거슬릴 때면 짓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김민석이 조금은 웃겼다.
왜 이렇게 꼬였느냐, 꼬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동안 나에게 있었던 일이라곤 모두 안 좋은 일 뿐이니.
너는 달랐겠지, 휘황찬란한 날의 연속이었을 테니.
가소롭다.
“다시 한 번 말하는데, 우린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야.”
“내가 꼬이든 말든 나한테 신경 쓰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좀 불쾌하네.”
그렇게 내가 할 말만을 남기고 김민석을 지나쳤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은 채
나와는 반대쪽으로 걸어가는 김민석을 뒤돌아 한참 동안 바라보다 그대로 나도 자리를 떴다.
나중에라도 아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아이에게 부끄러워하며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다.
지난 5년간 난 항상 그 마음이었다. 김민석을 증오하며 내 아이에게 미안하며 면목이 없었다.
***
**
*
"아이가 보고 싶지는 않니?”
아버지와 나눈 첫 대화는 아이의 이야기였다.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내 표정을 살피던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내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항상 보고 싶죠. 얼마나 컸을까, 좋은 부모는 만났을까, 하면서.”
내 어깨를 살며시 다독이곤 방으로 들어서는 아버지를 향해 말을 뱉었다.
아버지께는 처음으로 속마음을 말해서일까,
괜스레 눈물이 나버려 아버지를 등진 채 눈물을 훔쳐버렸다.
항상 난 아이가 없었던 사람인 양, 그렇게 살아왔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 속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난 아버지와 어머니 앞에선 언제나 괜찮고 철이 든 그런 딸이었다.
철없던 날의 선택을 후회하는, 그런 딸.
부모님 앞에서 쓰디쓴 눈물을 속으로 삼켜내며 속이 문드러지는 동안
난 그렇게 철저하게 로봇이 되어갔다.
감정 없는, 혹은 연기만을 하는 그런 로봇이.
사랑이라는 감정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김민석 이후 그 누구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