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02
* * *
“선생님! 이건 뭐에요?”
“학이야. 같이 접어볼까?”
“선생님! 전 동화책 읽어 주는게 좋은데..”
“싫어! 학 먼저 접을꺼야.”
“하나씩 다 할거니까 싸우지 마세요.”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을 모두 자리에 앉힌 유권이 동화책을 한권씩 꺼내 아이들의 손에 쥐어주었다.
“모두 점자공부는 제대로 해왔겠지? 오늘은 내가 읽어주지 않을 거야. 다 읽은 사람은 나한테 이야기를 들려주고, 학을 접고 집으로 가면 됩니다. 알았어요?”
“네!!”
밝게 대답하는 목소리들은 유권이 환하게 웃었다. 곧 민혁이 리사와 함께 저를 데리러올 시간이었다. 미리 가방을 싸면 혹 동화책을 읽는 데에 방해가 될까봐 가만히 아이들의 소리를 들으며 학을 접는 순서를 되뇌이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유권은 모르는 비밀 한 가지가 있었다. 민혁은 항상 교실뒷문에서 십여분정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유권을 바라보다가 차에 다시 시동을 건다는 것. 아이들과 함께 있는 그는 더 소년 같은 청아함이 있었다. 아이들과 학을 접기 시작하는 유권을 확인하고 밖으로 걸어나와 시동을 건다. 차안에 있던 리사와 손장난을 치고 있자 우르르 아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아저씨! 리사 한번만 만져보면 안돼요?”
“내가먼저 만질거야!”
“내가먼저거든?”
“전부 쉿, 리사는 선생님을 가장 보고싶어 할거야. 선생님이 나올 때까지 조금만 기다릴까?”
하는말에 아이들이 그가 걸어나올 복도에 귀를 기울였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오고 있던 유권이 풋, 하고 웃었다.
“어서요, 선생님! 리사가 기다려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손을 끌어당기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함박웃음을 짓고 있던 그가 운전석에서 걸어 나와 뒷좌석 문을 열어주는 그의 움직임을 소리로 쫓았다.
“리사 밥은 잘 먹었어요?”
“리사 걱정 먼저 하는거야?”
아이들이 들으면 어쩌려 그래요. 목소리를 낮추고 보이지도 않는 주변을 둘러본 그가 부끄러운 듯 타박을 했다. 리사한테 온 정신이 팔려있는걸. 걱정마. 시원하게 웃어보인 그가 유권의 도망가려는 손을 짓궂게 끌어다 잡았다.
-.
“오늘 안내견 학교에서 연락이 왔어.”
“뭐래요?”
“보행훈련 한 번 더 해보자고.”
“아...저번에 확실히 제대로 못했죠..리사도 슬슬 힘든가봐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민혁이 쓰게 웃다가 유권의 표정을 살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그만 리사를 쉬게 해주는게 좋지 않을까?”
“...역시 그게 맞는걸까요...”
“원하면 새로운 안내견을 선정해 주겠대.”
그래요...? 손을 꼼지락대던 유권이 벌써 싱숭생숭해지기 시작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다. 신호에 걸린 민혁이 손을 뻗어 포개었다. 일반가정에 분양되기 전까진 안내견 학교에 가면 리사를 볼 수 있을 거야. 다정한 목소리, 포개어진 손을타고 전해지는 따뜻함에 웃음이 나왔다.
“...리사를 보내면 새로운 아이는 분양받지 않을래요..”
“그래도 괜찮아?”
“..네”
유권의 눈빛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잡고 있던 손을 끌어와 짧게 입을 맞췄다. 이별이 힘들겠지만 내가 그만큼 노력할게. 바뀐 신호를 받는 민혁이 차를 출발 시킨다. 어딘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싫지만은 않은 유권이 옅게 미소 지었다.
“맞다. 언제온데? 장 봐야 겠네.”
“7시쯤이에요.”
“가자”
차가 부드럽게 도로를 빠져나왔다.
***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이민혁에요.”
“...이태일 입니다...”
식탁가득 차려진 음식은 눈에 뵈지도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라는 것을 믿기가 힘들 뿐. 어느샌가 이렇게 불쑥 나타나버린 이 사람은 지난날의 일들은 기억해내기 어려울정도로 바뀌어있었다. 수트에 가려진 적당히 탄탄한 몸매와 더 유순해진듯 한 인상 때문일까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식탁에 앉자 그제야 정성스레 만들어진 만찬이 보이기 시작했다. 유권을 먼저 앉힌 그가 앞치마를 벗자 말끔한 수트가 보였다. 절제된 미학, 지독하게 잘어울리는, 그를 보면 떠오르는 단어는 그것뿐이었다. 습관처럼 손톱을 물어뜯던 태일이 '맘껏 드세요. 정성스레 준비했으니까.' 하는 목소리에 유권을 살피며 포크와 나이프를 엉거주춤 들었다.
“잘 먹겠습니다아..”
눈앞의 오리고기를 서툴게 썰어먹으며 눈으로는 그의 움직임을 쫓았다. 얌전히 그가 썰어주는 고기를 바라보고 있다가 포크로 집어먹는 유권이 너무나 행복해보여서 태일은 어떻게 된 일이냐고, 일거수일투족을 꼬치꼬치 캐물으려던 마음을 누그러트렸다. 모르긴 몰라도, 맘고생이 제일 심했으니까. 근데 저렇게나 좋을까
-.
그렇게 만찬엔 와인이 곁들여져 밤이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그래서 리사를 보내야하는데...슬프고...졸려어...”
이것저것 말을 하다 고개를 푹, 그의 어깨에 박아버린 유권이 내려오는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발갛게 달아오는 볼,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태일이 이미 그를 일으키고 있는 민혁을 보곤 자리를 지켰다. 비운와인이 한 병이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자면 안 돼. 그를 달래 방에 눕히고 조용히 침실문을 닫은 민혁이 저를 빤히 바라보다가 시선을 피하는 태일앞에 자리를 잡았다. 들리는 목소리에 브로콜리를 집던 포크를 멈춘다.
-.
“...궁금했죠. 어떻게 돌아왔는지. 왜 돌아왔는지도...”
“...아”
...네. 피하던 눈을 들어 그를 마주봤다. 사실은 이 자리에 온 것도. 그게 궁금해서였으니까. 한국은 냄비근성이 너무 심한 탓에 불판에 올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던 그의 이야기는 1년이 채 안되는 시기에 수챗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뒤져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간간히 올라오는 기사로 유권 몰래 그의 상황을 대충이나마 알수 있을 정도랄까. 그래도 먼저 말을 꺼낼 줄을 몰랐는데, 생각보다 그는 된 사람 일지도.하는 섣부른 생각이 밀려와 고개를 저었다.
“...많이 놀랐어요. 다신 못 볼 줄 알았거든요. 저도, 유권이도..”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재심을 받고, 재판이 길어졌다는 소식까지만...”
“맞아요. 진절머리 날 정도로 길었죠..몸도 마음도 지쳐서 기력이 남아나지 않을 만큼.”
“...어떻게 된거죠...”
“이야기 다하려면 무지 길겠네요. 일단은 판결이 뒤집혔어요. 미국사회에서도 이례적인일이죠..어찌보면 전 행운아에요.”
“...완전 무죄판결이 난거에요?”
“...그럴리가요. 살인은 명백한 죄인걸요...”
“그럼요?”
“이슈거리로 떠올라 여기저기서 절위한 시위가 일어났어요. 그 사람들 중엔..저와 함께 미군에 근무했던 다른 동료들도 있었고, 수많은 미국시민이 사정을 알고 함께해줬어요. 그리고 1년형을 받고, 추가로 1년은 플로리다 시골에 거주하면서 작은 마을의 치안을 맡게 됐죠. 저지른 죄에 비하면..턱없이 부족한 형량이에요...”
가라앉은 목소리에 안경을 올린 태일이 고개를 숙였다. 켜놓은 촛불이 잘게 일렁이는것이 꼭 그와 닮았다는 생각을 하며 와인 잔을 만지작거린다. 민혁이 우울함 섞인 표정으로 태일을 마주보며 마른입술에 물을 축였다. 담담하려고 노력하던 목소리가 흔들릴까 걱정하면서.
“그 마을엔 리사의 가족들이 살고 있어요. 정말인지...고개를 들지 못하겠더군요. 무릎을 꿇고 사죄했어요. 그랬더니 오히려 제 상처를 끌어안으며 토닥여 주시더라구요. 말하기 부끄럽지만.. 수감기간동안 몇 번의 자살시도를 더 했거든요. 더이상 그녀의 일로 괴로워하지 말고 살아남은 나를 사랑하래요. 사실 그곳엔 제가 살해한 한사람의 가족도 살고 있었어요. 그의 가족들까지 모두 지키며 죗값을 치르래요. 지금은 오히려 현명한 재판장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네요. 그렇게 2년 재판, 1년 옥살이와 1년의 사죄를 했어요. 지금까지도...매일이 후회와 속죄의 시간 속에 흘러가고 있죠..잠깐만요, 주책맞게 눈물이 나네.”
티슈를 뽑아들으려 뻗은 손, 셔츠사이로 보이는 손목엔 상처가 선명했다. 화상자국과 새살들이 즐비한 오른손도, 목 끝까지 꽉 잠궈 놓은 셔츠단추를 풀자 가로로 깊은 상처가 이어졌다. 그의 몸은 그야말로 만신창이였다. 단정한 수트에 가려진 수많은 상처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왜 눈물이...
“그런데 정말 웃긴게 진정제와 치료, 수감을 반복하다가 보니 문득 그의 생각이 나더라구요. 이제 남은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한구석에 그가 웃는 모습이 남아있었어요. 어떤 바보가 한 말이 생각나더라구요, 저보고 아직도 사랑에 한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냐고. 그때 깨달은것 같네요. 내가 한국에 뭘 버리고 왔는지. 그제서야 정신이 드는거 있죠. 잠시 잊고 있었어요. 내 초라한 모습을 담진 못하지만 무언의 사랑을 가득 담은 눈망울을, 어쩌면 제가 외면했던 걸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수감소에서 나와 플로리다에 있으면서 왜인지 모르지만 꼭 한국에 돌아가서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웃는 모습을 한번만 더 보고 싶다는, 천진함을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이 정말 강하게 들었어요. 나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는 나를 사랑했고, 내게도 그를 향한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는걸. 그게 사랑이라는걸 알기까지는 또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죠. 죄책감도..들었어요. 이런내가 누군가를 다시 사랑한다는것 자체가 정말 말도 안되는 일이었거든요. 그쵸? 그것도 호모섹슈얼이라니.”
커다란 눈망울에 투명하게 고인 눈물이 비치는데도 민혁은 눈을 접으며 쓰게 웃어보였다. 그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래서 김유권이 홀랑 넘어가 버린거구나. 쌓이고 캐캐묵은 선입견이 와장창 부서져 버리는 느낌이랄까. 그가 건넨 티슈로 촉촉해진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잊을만하니 불쑥 나타나 또 유권의 마음을 진탕 흐트러뜨리고 제멋대로 사라져 버리는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도 조각조각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을까
“이야기 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태일씨. 시간이 늦었는데 괜찮아요?”
손목시계를 확인해보곤 바래다줄 심산인지 벗어뒀던 조끼와 코트를 입는 그의 행동에 손사래를 쳤다.
“아뇨아뇨, 괜찮아요. 아직 막차도 있는 시간인걸요. 김유권은 혼자 놔두는게 더 불안하니까,..저녁도 잘 먹었어요.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꾸벅, 인사를 하곤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현관까지 배웅 나온 그의 모습에선, 예리하게 서있던 칼날 같던 이전의 느낌은 찾아 볼 수 가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불이 켜진 유권의 집을 올려다보다가 발길을 옮겼다. 저 두 사람은 이제 충분히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으니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거겠지, 고개를 까닥거리며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추가외전)
“난 당근 싫어.”
“아 좀, 그냥 먹지?”
싫은데. 오랜만에 들린 마트, 카트에 담겨있던 당근을 기어코 꺼내 다시 놓고오는 모습에 지훈이 한숨을 쉬었다. 진짜 말은 드럽게 안들어요... 얼마전 새카맣게 염색한 뒤통수를 콱 쥐어박아버릴까, 하면서도 그가 좋아할만한 것을 생각해보다가 자신을 휙 끌어당기는 손길에 눈살을 찌푸렸다.
“쉿.”
“왜?”
엄청 낯익은 얼굴인데. 고개를 갸우뚱, 하는 그의 시선이 머문 곳을 따라 갔다.
“...아...”
이름이 뭐더라...기억을 더듬어보던 지훈이 그에게 다가가려는 지호를 끌어당겼다. 반사적으로 그의 주위를 살핀다. 분명 어디 개가 있을거야. 무심코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이어 나타난 남자에게 시선을 뺏겨버렸다. 아 그는....
불현듯 몇 년전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역행해왔다. 못 알아볼 뻔 했지만 자세히 보면 알 수 있을 정도의 변화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머리가 멍멍해지는 느낌이 계속되자 고개를 저어 정신을 차린다. 바짝 우지호를 끌어당겨 코너 뒤에 숨었다. 다시 돌아온건가? 어떻게? 수사가 끝나고는 손을 떼버렸으니까, 이후에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밀려오는 사건들에 의해 완전히 묻혀버렸다. ...탈옥, 뭐 이딴건 아니겠지? 고개를 내밀어 그의 얼굴을 한 번 더 살피는 지훈의 모습을 보던 지호가 흥미를 잃었다는 듯 그의 손을 끌어당겼다.
“배고파, 집에 가자”
“잠깐만..좀보고.”
“재미없어..가자”
“너 쟤가 누군지 기억나? 좀만 기다려봐”
“이민혁이잖아. 나 배고프다고.”
..뭐야, 알고 있으면서 집에 가자고 조르는 거야? 카트에 몰래 포개어진 두 사람의 손에 시선이 꽂혔다. 다정하게 장을 보는 모습은 마치...
“...헐...”
하고 입을 틀어막자 민혁이 휙 고개를 돌렸다. 망할 우지호가 옷깃을 확 끌어당겼던 덕에 들키진 않았지만 뒤돌아 마주한 얼굴엔 심술이 가득이었다.
“내가 둘이 오붓하게 장보는게 꿈이라고 했지. 니가 다른 남자나 살피라고 여기 온거 아니거든. 나 집에 갈거야. 짜증나 표지훈.”
뒤돌아 쿵쾅쿵쾅 걸어가며 어린애마냥 투정을 부리는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뛰어가 억지로 손을 끌어다 잡는다.
코너 뒤를 돌던 민혁이 둘의 뒷모습을 빠르게 살폈다.
“...왜요?”
“아냐, 아는 사람인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이제 과일만 좀 더 사고 집으로 가자.”
그의 보폭에 맞춰 카트를 끌고 일부러 반대방향으로 향한다. 카트손잡이 위에서 닿았다 떨어졌다하는 손끝을 느끼며, 뭐가 그리 좋은지 둘은 연신 미소를 입에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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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편은 좀늦었네요 ㅜㅜ죄송합니다 ! ㅇ암호닉 주시고 늘 함깨 해주시는 우동님, 치코리타님, 새우깡님, 해바라기님, 바게트님 정말 감사합니다! 에필로그는 왠만하면 2편에 많은걸담고 끝내고 싶었는데 원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후기와함께 3편까지 이어쓸 생각도 하고있답니다! 대신 궁금한 상황이나 원하시는 이야기가 있다면 덧글 달아주세요~ 텍파본은 바로 다음에 업어올 예정이에요. 늘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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