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꽃 02]
두둑하게 부풀어 오른 지갑을 만족스럽게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맡는 돈 냄새를 잠시 만끽하고 지갑을 다시 주머니에 꽂아 넣은 학연이 무심코 건물 사이의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시선을 옮겼다. 어린 눈이 제게 꽂힌다. 그 눈빛은 점점 더 밝은 빛을 내더니 학연을 뚫어버리기라도 할 듯 쳐다본다. 학연은 그런 눈빛을 잠시 의아스럽게 보았다가, 또 다른 곳에 눈길을 빼앗겼다. 어디서 또 돈 냄새가 난다.
어깨에 걸친 가방이 꽤 번지르르하다. 진갈색의 구두도, 감색의 양복차림도. 학연은 주머니 속 지갑을 만지작거리다가 웃옷에 손을 한번 슥 닦았다. 상대는 늙을수록 좋다. 살집 있는 몸매라면 더더욱 좋다. 허나 지금 학연의 손가락이 향한 남자는 그 둘 중 단 하나에도 속하지 않았다. 짧게 말하자면 슬림한 핏의 양복이 퍽 잘 어울리는 잘난 청년이었다. 학연의 손이 뻗쳐 남자의 가방에 닿았다. 돈 빨아먹는 빨대짓이 실패한다면? 매번 늙은이만 골라잡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연습게임. 빨대가 부러지거늘 인기척을 느낀 모기새끼처럼 달아나면 그만이었다.
“아저씨, 나 데려가요. 나 일 잘해.”
학연의 손이 남자의 지갑에 닿았을 무렵, 그는 여전히 저를 쳐다보는 눈빛을 느꼈다.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나와 강렬한 눈빛을 내는 몸체를 내보인 아이는 남자의 지갑을 탐하는 학연에게로 달려들어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순간적으로 아이가 들러붙어 학연은 휘청거리다 남자의 어깻죽지에 이마를 처박았다. 아이는 그런 학연의 다리에 더욱 매달린다.
“저기, 손에 들린 거, 제 것 같은데요.”
어쩜 이리도 엿 같을 수 있나. 학연은 제 손에 들린 지갑이 자신의 뺨을 내리치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제발 정신 좀 차리라고. 우선 다리에 들러붙은 아이부터 떼어내야 했다. 학연은 일그러진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툭툭 쳤다. 불쌍한 잉여아이를 위한 친절한 웃음이었지만 아이의 눈엔 그저 화난 얼굴일 뿐이었다. 아이의 눈망울은 지갑을 향했다가 배회하듯 학연의 얼굴에 정착한다. 일 잘하는데, 날 데려가면 좋을 텐데. 입에서 습관적으로 굴린 듯 아이는 입을 멈추지 않고 학연에게서 떨어졌다. 좋다. 이제 난 모기새끼다. 학연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지갑 돌려주셨으면 하는데.”
난, 이제 모기새끼다. 물지 말라고 안 물어뜯는 모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학연은 남자를 향해 실긋 웃고는 뒤돌아섰다. 지갑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배부르게 피 빨아 먹고 날아가는 모기처럼, 그렇게 학연은 그에게서 달아났던 것이다.
“오늘은 지갑 줄 생각 있어요?”
학연의 머릿속에서 장면이 페이드아웃 되고 남자의 목소리가 훅 안면을 쓸어 올린다. 낮은 음성에 담배연기가 서렸다. 학연은 입을 달싹이다 그를 향해 묻는다.
“집은 어찌 알았대.”
“물어보니까 다 알던데요. 형 유명한가 봐요.”
형? 내가 형? 학연이 물음표 붙은 눈으로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남자는 그런 학연을 향해 능글맞게 웃는다.
“그래서, 내 지갑은?”
저게 어떻게 나보다 어린놈의 모습인가. 학연은 손을 뻗어 베개 밑이며 이불 밑을 들췄다. 제 아무리 좁은 집안이라지만 치우지 않아 잃어버린 물건은 많았다. 나오라는 지갑은 나오지 않고 쓸데없는 잡동사니만 굴러 나오니 학연은 입술을 제대로 깨물지 못해 안달이었다.
“없어요? 없으면 안 되는데.”
언젠가 동네 추리닝 무리들과 마른 술자리를 가지던 도중 안줏거리로 나온 말이 있었다. 본래 있는 놈들이 더 하다고. 당시엔 무슨 말인가 했으나 이제와 보니 알 것 같았다. 핏이 딱 떨어지는 양복을 깔쌈하게 입어놓곤 그깟 지갑 하나에 주절주절 말도 많다. 학연은 신경질적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남자를 쏘아보았다. 이불에서 일어난 담배냄새가 일렁였다. 나도, 담배 하나 줘. 학연은 자리에 주저앉아 남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남자는 그런 학연을 잠시 바라보다 안주머니에서 담배케이스를 꺼낸다. 금빛 케이스가 유난히도 반짝인다.
“담배도 좋은 거 피 무네.”
학연은 자연스레 담배를 입에 가져가 물었다. 불을 붙이려면 가스 불을 켜야 했다. 귀찮은 몸뚱이를 일으키려는데 남자가 라이터에서 불꽃을 피워내 담배 끝을 태웠다.
“너, 이름이 뭐야.”
“지갑 속은 안 봤나 보네?”
그 놈의 지갑, 지갑. 학연은 지겨운 단어가 귓전을 때리는 것에 매우 불만이었다. 남자는 그런 학연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다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물린 담배 사이로 연기를 뱉던 학연은 놀람을 감추지 못하다 이내 곧 짜증을 낸다. 제 아무리 어제 일이 실수라 할지라도, 사람을 이렇게 가지고 노는 행위는 얼마나 버르장머리 없는 짓이냔 말이다. 학연은 짜증을 덮을 수 없단 듯 왼발로 그를 차내는 시늉을 했다. 그 시늉을 맞던 남자는 아까 커피 탈 때 챙겼다며 큭큭 웃는다.
“이게, 내 이름.”
그가 내민 불투명한 플라스틱 카드엔 휘날리는 글씨체로 눈 파란 이들의 언어가 적혀있었다. 영어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었다. 학연은 한참을 바라보다 자신 없는 목소리를 내었다.
“래비?”
남자가 웃었다. 학연은 여전히 카드 위 날려진 글씨를 내려 보고 있었고, 남자는 그런 학연을 보며 호탕하게 웃었다.
“김원식.”
학연은 동그란 눈을 올려 원식을 보았다. 이 나부랭이 글씨가 어떻게 그렇게 읽힐 수 있는가. 아무리 봐도 알, 에이, 브이, 아이. 래비다. 사과가 애플이라고 읽히니까. 원식은 의문점을 지우지 않는 동그란 눈을 잠시 보았다가 지갑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들었다.
“이건 내 친구. 이 근처에서 잃어버렸는데, 혹시 몰라요?”
여기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학연은 흥미 없다는 듯 짧아진 담배를 방바닥에 지져 껐다. 누런 장판에 거먼 그을음이 번진다. 그래도 얼핏 바라본 낡은 코팅 종이엔 사내치고 퍽 예쁘장하게 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곱다란 외모와 다르게 헤진 옷을 입고 있는, 원식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학연은 사진을 곁눈으로 내려 보다 고개를 저었다. 달밤에 동네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니지만, 저런 튀는 외모는 본 적이 없다.
원식은 사진을 도로 지갑에 집어넣고는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댄다. 학연은 보았다. 커피의 잔향이 짙게 눌러 붙은 머그잔의 밑바닥을. 그리고 흘러가는 듯 가볍게 내뱉었다. 할 말 다했으면 가줬음 하는데. 아직도 목에 댕글 걸린 안대가 하품을 했다. 학연의 눈엔 하품에 의한 졸린 눈물이 맺혔다.
“밤마다 그러는 거, 할만 해요?”
지루함에 달그락 머그잔을 가지고 노는 학연에게 원식이 담담한 투로 물었다. 대답 대신 학연은 눈빛으로 경계했다.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이니, 남의 것을 빼앗아 먹지 말고 당당하게 돈을 벌라니, 그런 소리를 내뱉었다간 정말로 걷어찰 수도 있겠다. 가진 놈이 바른 소리를 하는 건 더욱이 꼴불견이었기에. 들려오는 소리가 없자 원식은 혀에 담아둔 말을 그대로 내었다. 낮은 목소리는 그저 흘러가 허공으로 소멸될 수 있었지만, 한 글자마다 강조를 한 듯 정확하게 학연의 귀를 때렸다. 그 때려 박힌 목소리 때문에, 다시금 하품을 뱉어내려던 학연은 하품 대신에 켁켁대는 기침을 뱉었다.
“할 만하면 훔쳐줘요. 나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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