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 볼에 떨어졌던 입술이 다시 들어올려지며 잠시 머뭇거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반쯤 벌어진 입술이 마찬가지로 반쯤 벌어진 붉은 빛을 띤 제 정인의 입술 위로 떨어진다.
가볍게 떨어졌던 입술에 힘을 주어 입술을 내려찍자 입술 모양이 뭉개져 본래의 형체를 잃는다. 준면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황국(黃國) 승상(丞相) 김준후의 장남
황국(黃國) 승상(丞相) 김준후의 여식의 유일무이(有一無二)한 혈연
김준면(20)
"새가 자유롭게 날기 위해서는, 둥지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EXO/민석준면찬열경수세훈] 인연(因緣) 16
[명사] 1.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2.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
-이어지는 글입니다. 1편부터 보고 와주세요 제! 발
경수는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이었다. 본래 계획에는 없던 일이 생긴 탓에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생각보다 꽤 많이 지체되었으니 제 발걸음은 다급해야만 했다.
어찌된 일인지 영 제 발걸음은 움직임에 속도를 붙일 생각이 없는듯해 보였다.
계속해서 머리 속에 어떤 얼굴이 지워졌다 생겨났다 반복을 해대는 것이 거참 자기가 미치기라도 했나 고민을 해야할 정도였다.
"하아-"
왠지 모르게 답답한 마음에 입 밖으로 한숨을 내어 쉬면 뽀얀 입김이 차가운 겨울 공기를 타고 모습을 드러낸다.
작은 구름 모양을 만들어 내고는 빠르게 사라져 버리는 희뿌연 공기 덩어리에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경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어째선지 아까 부닥친 작은 여자아이가 자꾸 머리 속을 헤집고 돌아다녀 영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열감기에도 걸린 것 마냥 띵하니 어지럽기만 했는데 정체모를 호기심과 불쑥불쑥 치고 들어오는 아까의 아이의 얼굴에 괜히 속이 메스꺼웠다.
승상(丞相) 김준후, 이 황국(黃國) 내에서 그 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자타(自他)가 공인하는 황국(黃國) 최고의 직위에 올라있는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그의 아들 김준면이라는 자는 아직 나이가 어림에도 불구하고 그 아비의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일컬어지는 대단한 도련님이 아닌가.
하지만, 그의 여식이라는 자에 대한 정보는 없었다. 단순히 그 근거가 불분명한 소문만이 무성했다.
얼굴이 참 곱다더라. 혹여 누군가에게 보쌈이라도 당할까봐 그것이 두려워 집 밖으로 내놓질 않는다더라.
너무 귀한 딸이라 이름도 붙여주지 않고 그저 딸아이로만 지내게 했다더라.
아니, 아니. 얼굴이 참 흉측스럽다더라. 잘난 집안의 명성에 누를 끼칠까 싶어 집 밖으로 내보내질 않는 것이라더라.
실은 몸에 장애가 있다더라.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라더라. 귀가 들리지 않는 병신이라더라.
말 그대로 뜬구름같은 소문에 평소 그 김준후의 여식이라는 누군가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저였다.
하지만, 제가 오늘 만난, 저 스스로를 승상(丞相) 김준후의 여식이다 당당히 밝하던 그 곱기만 하던 아이는, 그리고 그 아이의 곁에 서있던 그 노란빛 한복의 남자는.
제가 본 그 아이는, 모든 소문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 마냥 곱기만 했던 얼굴에 낭랑하니 울려퍼지는 그 목소리가 아직까지 저를 괴롭히는 것을 보아 구미호라는 소문은 얼추 맞을지도 모른다는
바보 천치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제가 불쑥 불쑥 손을 내밀 때 마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면서 주춤주춤 물러나던 그 모습을 영락없는 정숙한 여인의 그것이었기에
빠르게 멍청한 생각을 지워냈다.
"제길."
낮게 욕을 읊조린 경수가 발걸음을 돌렸다.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 반대 방향이었다.
제가 지금까지 힘겹게 한걸음 한걸음 떼어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가리라 그리 마음 먹었다.
지금 당장 내 눈 앞에 그 아이를 세워놓지 않고서는 도저히 집에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경수는 장터로 다시 발걸음을 한번 더 옮겼다.
그 커다란 집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핑계가 필요했다. 떨어뜨린 물건이라며 돌려줄 물건을 사야했다.
그렇게 대단한 승상(丞相) 집안에서 저따위 천한 장사치의 집안의 자식을 들여보내줄 리가 없었으니, 적절한 핑계가 필요했다.
"뭐가 좋을까.."
"찾으시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여인의 물건을 찾고 있습니다."
"부인되시는 분이 좋아하시겠습니다."
넉살좋게 웃으며 말을 건네오는 상인의 말에 멍하던 경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더니 이내 양 볼이 벌겋게 물들었다.
부인, 부인이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버럭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꾹 다물린 입은 부정의 대답을 토해내지 않았다. 그저 정신나간 머리통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것은 어떠십니까?"
"어디에 쓰는 물건입니까?"
"머리에 꽂는 장신구인데, 아, 이 물건은 안되겠습니다."
"예?"
"아직 혼인을 올리지 않은 계집아이들이 사용하는 것입니다.
부인되시는 분께서는 비녀를 사드리는 편이,"
"아니, 아닙니다."
환하게 웃음을 지은 경수가 제 앞에 내밀어진 작은 빗처럼 생긴 장신구를 받아들었다.
그 긴 머리를 총총히 땋아 빨간 댕기로 묶어놓은 모양새를 얼마 전까지 제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제가 연(聯)이라 이름붙였던 그 아이는 분명, 아직 혼인을 올리지 않은 숫처녀임이 분명했다.
그 사실에 왜 제가 기분이 좋아지는지도 모르는채 경수는 재빨리 장신구의 값을 치르고 그것을 손에 꼭 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단순히 이 장신구가 잘 어울릴 것만 같아서, 그렇게 제 기분을 멋대로 정의내리고는 앞으로 내딛는 발에 힘을 줬다.
"아.."
"다시 뵙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수는 발걸음을 멈춰 세울 수 밖에 없었다. 경수의 단정하던 얼굴이 잠시 찡그려졌다가 이내 곧 평온한 빛을 되찾았다.
얼굴이 찡그려진 것은 경수와 맞닥뜨린 민석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민석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그 하얗고 말간 얼굴 가득히 인상을 쓴채로 민석은 경수를 노려봤다. 노려보는 그 눈빛이 꽤나 매서워 경수는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어딜 가시는 길입니까?"
날선 목소리로 제게 질문을 해오는 민석의 표정이, 나는 네가 어디에 가는지 다 알고 있다는 그런 무언의 암시와도 비슷하게 들려 경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얼마 전에 처음 만난 사내임이 분명했지만 이 사내는 저를 처음 보는 그 순간부터 적대감을 마음껏 표출하고 있었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할까. 솔직히 대답을 해야할까. 고민을 하며 입술을 두어번 소리없이 달싹인 경수가 윗입술로 아랫입술을 슬쩍 짓누르더니 입을 다시 열었다.
"승상(丞相)의 댁에,"
"그것을 물은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질 않느냐."
얼굴 표정을 사납게 굳히고는 제가 언제 존대를 사용했냐고 따지기라도 하듯 곧장 하대를 해오는 민석에 경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저와 얼마 연배 차이가 나 보이지 않는 그 어린 얼굴을 한 자가 제게 하대를 해도 저에게는 불만을 표할 권리며 자격 따위는 없었다.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곳 황국(黃國)에서의 신분 체계는 절대적이었다.
"아씨께서 두고 가신 것이 있어 잠시 들렀습니다."
"내가 전달할 것이니 내어놓아라."
제 말에 경수의 미끈하던 미간에 곱게 주름이 새겨지는 것을 본 민석이 허-소리를 내며 실소를 터트렸다.
어딜, 천한 장사치의 피붙이 주제에, 제가 금이야 옥이야 아껴온 제 것에 손을 댄 것도 모자라 이제는 몸소 찾아가시기까지 하려고 한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고 심사가 뒤틀려 금방이라도 단정하기만한 경수의 얼굴에 침을 뱉을 것 같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는 민석이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호오, 어째서냐?"
"직접 뵙고 돌려드려야 합니다."
"어째서냐 묻고 있질 않느냐. 어릴 때 부터 교육을 받질 않아 말귀를 제대로 알아먹지를 못하는 것이냐.
도형원의 자식이라면 어릴 때 부터 돈은 넘쳐났을 터인데,"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던 민석의 폭언을 제지하는 경수의 목소리가 꽤나 단호했다.
제 말이 중간에 끊긴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민석이 허-허- 하는 웃음을 간헐적으로 토해내며 한참을 가만히 서있더니 급기야 뒤로 허리를 젖혀가며 크게 웃어댔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는 제 부탁을 듣지 않고 쫄랑쫄랑 뛰어다니다가 그 아이를 만난 것이 하필이면 이런 사내인걸까.
왜 이다지도 단정한 얼굴을 하고 공손한 말투를 사용하며 제 무례한 행동에도 일언반구도 없을 정도로 병신같이 예의범절만 투철한 이런 사내인걸까.
제가 진심을 다해 화를 내지도 못하게 만들 정도의, 이런 사내를 어디서 물어와서 저를 이다지도 괴롭힌단 말인가.
"그대로 쭉 걸어가다 보면 승상(丞相)의 집이 나올 것이네."
"그렇습니까."
"직접 만나고 전해드리게. 그 아이의 성격에 제 물건이 사라진 것을 알면 울고 불고 난리를 쳐댈것이니."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또 마주칠 일이 생기거든, 그때에는 웃으며 마주할 수 있길 바랍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단정하게 인사를 해 보인 민석이 싱긋이 본연의 그 고운 웃음을 얼굴에 띠고 경수를 바라보며 등을 돌렸다.
더이상 저런 상대를 대상으로 되도 않는 화를 내어 무엇하리. 그리 생각하고 취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탁탁 하는 다소 거친 발걸음 소리가 잠시 이어지더니 제 팔목을 낚아채는 손길에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리면
또 그 단정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눈 앞에 펼쳐진다.
"더이상 무슨 용무라도,"
"죄송합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좀전의 부탁은, 제 쪽에서 들어드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예?"
"도저히, 귀공과는 웃으며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생기질 않습니다."
"어째서입니까?"
"귀공과 다시 만나게 될때는, 필히 그 아씨께서도 옆에 계시겠지요."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사랑하는 정인을 두고, 그 연적과 마주하며 웃을 정도로, 착해빠진 놈은 아닙니다."
제 할말을 마치고 꾸벅 고개까지 단정히 숙여 보이더니 등을 돌리고 다급한 발걸음으로 뛰어가는 경수의 뒷모습을 확인한 민석이 입술을 짓이겼다.
제길, 완벽한 제 패배였다. 부졍할수도, 부정해서도 안되는 사실이었다.
도경수(18)
황국(黃國)대부호(大富戶) 황국의 큰 손 도형원의 장남
"제 정인 한명 정도는, 지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민석 (18)
황국(黃國) 태위(太尉) 김민준의 막내아들
황국(黃國)의 승상(丞相) 김준후의 여식의 죽마고우(竹馬古友)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