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우리는 룰을 정했다.
“어떤 이유로 싸우던 간에 마지막엔 키스하기.”
“...”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이렇게 하면 화해하기도 쉽고 좋대요.”
“아 예.”
“아 건성으로 듣지 말고”
“진지하게 들을 만한 소리를 해야 듣지”
“왜요? 나 지금 충분히 진지한데?”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 대사가 귓가에서 어? 어어?? 하고 보채는 김남준의 목소리에 자꾸만 묻혔다. 일하다말고 갑자기 방문을 박차고 나와서 한다는 말이 고작, 나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게 뭐야. 아니, 대체 싸우다 말고 그걸 할 겨를이, 애초에 키스는 누가 누구한테 해야 하는 건데.”
“음, 그러네.”
“우린 별로 싸우지도 않잖아. 쓸데없는 말 하지 말고 좀 떨어져봐.”
“누가 누구한테 해야 할지...”
“김남준”
“으음...”
“쫌!!!”
“그럼 가위 바위 보 해서 지는 사람이 먼저 키스해주기??”
“아, 마음대로 하세요, 아이고 답답해 좀 놔봐”
“오케이!”
뒤에서 꽉 끌어안고 있던 팔이 풀렸다. 잽싸게 품에서 빠져나왔다. 텔레비전에 시선을 집중했다. 남준이는 내 뒤통수에 입술을 꾹 눌렀다 떼곤 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룰 같은 건 까맣게 잊어버렸다.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가위, 바위, 보
곧 자정을 향해가는 시각이었다.
“그냥 가도 되는데.”
- 거기 우리 집 근처잖아. 시간도 늦었고, 오늘 자고 가요.
“되게 춥다. 너 옷 잘 입고 나갔어?”
- 밖에 나와 있어요?
“어어. 안에 너무 시끄러워서.”
- 그러다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요?
목소리가 좀, 날카롭다. 신발 코끝을 바닥에 툭툭 치며 지금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한참 만에 이따 봐요 하고 짧게 대답한 남준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평소에 기분이 안 좋으면 왜 그러는지 바로바로 말해주고 양해를 구하거나 무작정 나를 끌어안고 충전을 하겠다며 너스레를 떨던 애가 오늘따라 예고도 없이 저기압인 이유를 완전히 모른다면 거짓말이다.
“야 너 여기서 혼자 뭐하냐”
“아 선배.”
“뭐해 추운데”
“애인이 데리러 온다고 해서, 나 먼저 가려고”
“뭐어? 이 배신자새끼”
이전에 작업을 함께 했던 선배들과 오랜만에 갖는 모임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드문드문 나오던 언니들도 바쁘다며 자연스레 모임에서 하차하면서 나는 모임의 홍일점이 되었다. 물론 성별만 여자인 남동생 취급을 받고 있긴 하지만.
“얼굴만 비추고 간다고 했잖아요. 어으 추워 나 인사 안하고 먼저 가요.”
“오빠 담배 피우는 것만 좀 기다려주고 같이 드가자”
“내가 왜요?”
“헐. 애인 생기더니 변했어”
“원래 이랬거든요.”
“술도 한 잔 안하고 말이야”
“선배들도 술 좀 작작 마셔. 그러다 훅가요”
연말이 시작되면서 남준이도 망년회 일정이 일찍부터 잡혀있었고 오늘도 꽤 중요한 모임에 나간다고 했다. 나도 오늘의 일정을 말해주었더니 수화기 너머 남준이는 아까처럼 잠시 말이 없었다. 나 혼자 여자인 자리를 탐탁찮아 하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가지 말까 생각도 했었지만 모여서 놀기만 하는 게 아니고 일 얘기도 많이 하기 때문에 완전히 빠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친히 나를 데리러 오겠다는 애인의 마음의 평화도 중요하니까, 나는 가방을 들고 나오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 취해서 비틀거리며 담배를 피우는 선배의 어깨를 툭툭 쳐주고 곧 도착할 남준이가 어디만큼 왔을지 생각하며 걸음을 움직였다. 뒤에서 선배가 옷을 붙들고 늘어졌다. 아 취해가지고 왜이래요 좀. 선배는 킬킬대며 장난스럽게 두 팔을 벌리고 나를 향해 걸어왔다. 저리 가요 이 아저씨야 짜증스럽게 소리를 치는데 순간 몸이 휙 돌아가며 찬 기운이 섞인 익숙한 체향이 코끝에 확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형님”
“아, 어, 애인님 오셨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네요. 야, 너 가라 내가 애들한텐 알아서 말해줄게”
“감사합니다, 형님”
“하하하”
선배가 민망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슬쩍 고개를 들었더니 재킷에 목티 바지까지 모두 블랙으로 깔끔히 차려입고서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김남준의 입술도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포옹하듯 양 어깨를 쥐고 있던 손을 내려 내 손목을 그러쥔 남준이 나즈막히 말했다.
“가요, 자기.”
마주친 두 눈은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현관문이 닫혔다. 꽉 쥐고 있던 손을 풀어내고 먼저 들어선 남준이 신경질적으로 재킷를 벗었다. 얼얼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물어보았다. 내가 그렇게 잘못한 거야? 돌아서서 나를 보는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그럼 지금 잘했다는 거예요?”
냉정한 말투에 핀트가 조금 엇나갔던 것은 사실이다.
“내가 잘못한 건 뭔데.”
“자기가 왜 그 모임에 가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가요.”
“오랫동안 본 선배들이잖아. 너도 얼굴 다 알고.”
“자기를 무슨 남자애 다루듯 하잖아, 틈만 나면 건드리고. 왜 그 사람들이 막 대하게 그냥 두냐고요.”
“그럼 일일이 다 쳐내? 아무 의미 없이 그러는 거야.”
“그게 제일 나빠요. 의미 없는 짓은 하질 말아야지. 항상 술 잔뜩 먹이는 것도 싫은데,”
“오늘은 안 마셨어.”
“내가 늦게 도착했으면 결국 들어가서 마셨겠지.”
비꼬는 목소리에 순간 화가 치밀었던 것도, 사실이다.
“...너는 안 그래?”
“나 뭐요.”
“너도 녹음실 여자들이 농담 걸면 다 받아주잖아.”
“지금 그거랑 이거랑 같아요?”
“뭐가 다른데? 네가 하는 건 매너고 내가 하는 건 흘리고 다니는 거야?”
“하, 진짜”
“너한테도 그 여자들은 그냥 동료잖아. 아무 감정도 없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보이질 않아서 하는 말이잖아요. 사실은 자기한테 다들 눈독들이고,”
“내가 그런 것도 모르고 휘둘릴까봐?”
“...”
“내가 너보다 일을 몇 년이나 더 일찍 시작했는데 사회생활에 대해서 왈가왈부,”
“이럴 때 나이 얘기 꺼내지 말랬지”
“...야,”
“야야 거리지도 말자던 거 기억 안 나? 그거 하나 지켜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 악화될 줄은 몰랐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내 마음과 상관없는 말들이 튀어나오고 있었고 서로의 점점 굳어져가는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걸음 가까이 다가온 남준이 그르렁대듯 말했다.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왜요, 내가 자기 애인인데, 나한테 그만한 자격도 없어? 그럼 날 도대체 왜 만나는데, 그냥 어리고 만만해서 옆에 끼고 다녀?!”
“김남준!”
“왜!!”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험악해졌다. 나는 제 머리를 잡아 뜯을 듯 헝클이고 있는 남준을 싸늘하게 지나쳐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면대 앞에서 씩씩대는 사이 남준이도 작업하는 방에 들어간 건지 탁 하고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을 틀고 손을 빡빡 씻었다. 어리고 만만해서 옆에 끼고 다니냐니, 어떻게 그런 말을, 진짜 못됐어 김남준.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실은 잘 알고 있었다. 백 프로 내 잘못이다. 인정하자마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정말 오래간만의 싸움이라 당황스럽고 난감했다. 이제 어떡하지.
그때였다. 까맣게 잊고 있던 문제의 ‘룰’이 떠오른 것이.
“나 들어간다.”
노크를 몇 번 해봐도 답이 없어서 일단 밀어붙이자 하고 말이 끝나자마자 문을 열었다. 힉. 열린 문 너머로 남준이 컴퓨터 의자에 앉은 것도 선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로 굳어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부루퉁한 얼굴을 바로 바닥 쪽으로 돌려버린다. 나는 침을 크게 한 번 삼켰다.
“가위 바위 보 언제 할 거야”
“...?”
“니가 보 내.”
“...”
“보자기 내라고, 어?”
“...”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내 최선이라고.
“내, 내가 주먹 낼 거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눈을 슬쩍 떴더니 남준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한숨을 푹 쉬며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패배의 기운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가뜩이나 화난 애한테 사과는커녕 나 불 지른 건가 지금. 불안해서 발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남준이 손을 거두고 나를 빤히 본다.
“뭐해요.”
“어, 어?”
“...가까이 와야 가위 바위 보를 하지. 이리 와요.”
홀린 듯 다가가 앞에 섰다. 남준이 검은 소매를 걷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얼떨떨한 가운데 가위 바위 보를 외쳤다. 주먹을 내밀었다. 내 말을 아예 안 듣기로 작정했는지 얄미운 김남준의 커다란 손은 가위를 만들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어어 하고 작게 외치는데 거의 동시에 양손으로 허리를 감싼 남준이 나를 자기 무릎 위로 앉혔다. 좁혀진 거리에서 남준이 냄새가 다시 진하게 느껴졌다.
“내가졌네.”
“뭐, 뭐야, ”
“내가 말할 땐 관심 1도 없어 하더니.”
“나 일어날,”
입술 위로 따뜻한 숨이 퍼진다. 남준이 나를 끌어안으며 고개를 깊게 틀어왔다. 놀라서 어깨를 붙들었더니 입술을 잘게 떼었다 붙였다 하며 중간 중간 중얼거렸다. 아직, 화, 안, 풀렸어요, 나. 과장되게 일그러뜨린 눈썹이 나를 놀리고 있었다.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남준의 목에 팔을 둘러 내 쪽으로 당겼다. 아직도? 속삭였더니 멈칫하다가 눈을 깜빡깜빡하며 아직 안 풀렸단다. 잘생긴 귀를 살살 쓰다듬으며 더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래도? 멍하게 나를 보던 남준의 눈꼬리가 억울하다는 듯 쳐진다.
“진짜 여우야.”
“...미안해. 내가 말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어. 너는 나한테 진짜 소중한 사람이야. 앞으로 조심할게. 너 안 아프게.”
조심스럽게 늘어놓은 말에 남준이 대답 대신 내 목덜미 깊숙이 고개를 묻는다. 도저히 당할 수가 없다니까. 툴툴대면서도 다정해진 말투에 묵직하던 마음 한켠이 그제야 편안해졌다. 그니까 잘 해, 인마. 장난치듯 받아쳤더니 어쭈우 하며 옆구리를 마구 간지럽힌다. 자지러짐의 끝에 다시금 입술이 진하게 맞붙었다.
그리고,
“근데 이거 좀 위험하다”
“뭐가요?”
“만약 우리가 진짜 헤어지기 전에 싸우는 거면 키스 못 할 거 아니야”
“...”
“왜 또 그렇게 보는데.”
“왜 진짜로 헤어지는데.”
“아니, 헤어질 수도 있는 거잖아”
“왜?”
“아니 그럼 천년만년 만나??”
“...안 만나? 자기랑 나 잠깐 즐기다가 빠이빠이야?”
“아 진짜 내 말 뜻은 그게 아니잖아.”
“솔직히 말해 봐요. 키스 또 하고 싶어서 지금 불 지르는 거지.”
“뭔 소리야 또오?”
“됐고 우리 지금 싸웠으니까 가위바위보나 해요”
“아 왜 또”
“안내면진다가위바위보”
“악, 잠깐, 그렇게 급하게,”
“안냈어. 졌어. 빨리 키스해”
“야,”
“야아?”
“...가 아니고 남준아 그렇게 갑자기”
“안 해요? 그럼 내가 해.”
“어으읍!”
오래간만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할 만큼 오래간만입니다! 잘 지내고 계셨나요? 마지막 글을 확인하니 벌써 2개월이 지났...(무릎을 꿇고 손을 든다) 저는 바쁘고 정신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ㅠㅠ안그래도 섹시한 남준이가 점점점점 지나친 섹시함을 발산하는 요즘 저는 하루에도 몇번씩이나 심장을 부여잡고 오열한답니다. 남준아....내남준...(아님)저렇게 세련되고 싴하게 차려입어놓고 유치하고 귀엽게 가위바위보로 화해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끄적여 보았어요. 써놓고 보니 너무 정신 없는 글이 된 것 같기도 하네요, 헤헤. 여러분 날이 많이 추운데 감기 조심하세요. 감기 너무 지독하네요ㅠㅠㅠ
읽어주시고 댓글달아주시는 모든 분들(이 과연 계실까?..)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