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이 눈을 떳을 땐 예전 어멈과 함께 숨어 있던 그 암자였다. 사내들에게 쫓기면서 백현은 자신도 모르게 암자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멈과 함께 지내며 어멈이 자신을 지켜준 곳이라는 인식이 백현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암자 주변은 을시년스러운 바람소리만 있을 뿐,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백현은 안심할 수 없었기에 조용히 숨 죽이고 있었다. "흡....흐윽....어멈..." 아무생각없이 자리에 앉아있으니 어제 일어난 일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갔다. 이제 어멈은 자신의 곁에 없었고 자신은 홀로 의지할 곳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낭떠러지에 내버려졌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러는 와중에 백현은 아랫배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아이의 발길질이었다. 제 어미가 힘들어 하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위로를 하는 듯 했다. 백현은 어멈이 자신을 위해 희생한 것처럼 자신도 이 아이를 꼭 지켜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멈이 자신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준 만큼 자신도 이 아이에게 그러고마 하고 다짐했다. "아가야... 미안해..." 백현은 이제 다섯 달이 지나 부른 배를 조심히 쓰다듬으며 사과했다. 힘든 일을 겪게 해서 미안하다고 이 부족한 어미에게 와줘서 고맙다고. "아휴... 이게 무슨일이람... 새댁이 홀몸도 아닌데 밭일을 하려고?" "할 수 있어요. 손이 느리면 주방에 가서 새참이라도 받아올게요... 제발 일 시켜주세요..." 백현은 다시 그 자객들이 들이 닥칠 것이 두려워 암자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마을과는 꽤 거리가 있는 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지만 어멈과 함께 숨어 있던 이 곳을 떠나기가 싫었다. 그리곤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그동안은 어멈이 마을의 일손을 도우며 생활을 유지했지만 이젠 자신이 혼자서 해나가야 했다. 아이를 가져서 먹는 것도 배가 되었기에 일을 해야만 했다. 마을 사람들은 백현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리고 백현이 도와달라고 했을 때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까봐 모른척하고 돌려보내기 쉽상이었다. 그러나 백현을 가엽게 여긴 아주머니가 밭일을 돕게 해주었다. "이거 가져가서 먹어. 새댁." "아..감사해요..." 일을 마치고 암자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데 뒤에서 아주머니가 옥수수 몇개를 챙겨주셨다. 아직 따뜻한 옥수수를 품에 안고 암자에 도착하자 마자 백현은 걸신들린 사람처럼 먹기 시작했다. 밭에 나가 일을 할 때는 눈치가 보여서 많이 먹지 못했다. 그러나 암자에 돌아오면 백현은 먹기만 했다. 암자에선 음식을 할 수가 없어서 마을에서 얻어 온 찬밥과 반찬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음식을 아무말없이 먹어치우곤 잠이 들었다. 산모에게 고된 밭일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우욱...욱..." 백현이 잠에 든지 세 시간이 지나 저절로 눈이 떠졌다. 백현은 항상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폭식을 하고 새벽마다 일어나 모두 게워냈다. 옆에서 보듬어 주는 이 하나없이 홀로 음식을 게워내는 백현의 모습은 안쓰러워 보였다. 이제 아이는 여섯 달이 되어 점점 배가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백현의 몸은 고된 일과 충분치 못한 식사로 인해 말라가고 있었다. 아침 해가 뜨고 백현은 부른 몸을 이끌고 발을 절뚝이며 밭으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자신의 위치로 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백현은 어젯 밤에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하고 아침도 먹지 못해서 기력이 없었다. 아주머니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모두 끝마쳐야 하는데 점점 손에 힘이 빠졌다. 정신이 몽롱해서 눈 앞의 사물이 흐릿해 보였다. 백현은 정신을 차리려고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결국 눈이 감겨서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새댁...!!" 같이 일을 하던 사람들이 쓰러진 백현을 발견하고 달려와서 동네 의원집으로 향했다. 백현은 눈을 떳을 땐 의원과 아주머니가 곁에 있었다. "영양분이 부족하여 정신을 잠시 잃은겁니다." "뭐 잘못된건 없지요?" "배가 부른 것으로 보아 여섯 달은 되었을텐데 태중에 아이가 많이 작습니다. 산모의 몸이 아직 많이 어려서 아이를 감당하지 못할 텐데 밭일을 하니 더 무리가 간 것입니다. 앞으로 조심만 하면 될텐데..." 백현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아이가 많이 작다는 소리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이 많이 부족해서 아기가 힘들어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좋았다. 아주머니의 부축을 받고 암자에 도착한 백현은 앞으론 밭일말고 아주머니의 집에 들어와서 집안일을 도우라는 제의를 받았다. 백현은 더 이상 짐이 될 수 없다며 아주머니의 집에 들어가 생활하는 것은 거절하고 집안일을 도울 테니 먹을 거리만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주머니는 백현을 안쓰럽게 보다가 내일보자며 산을 내려가셨다. "새댁 이거 할 수 있겠어?" "할 수 있어요. 주세요." 아침일찍 도착한 백현은 밭일을 하는 마을사람들의 옷을 빨래해달라는 아주머니의 걱정어린 눈빛에 오히려 자신있게 말했다. 꽤 양이 많아서 힘들 수도 있지만 아이를 잘 키우려면 못할 일이 없었다. 마을 중간으로 흐르는 냇가엔 각 집의 아낙네들이 나와 빨래를 하고 있었고 백현도 팔을 걷고 쭈그려 앉았다. 배가 많이 불러서 힘이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직은 차가운 냇물이 백현의 손을 얼게 했다. 그 작은 손이 익숙치 않은 빨래를 하려다 보니 속도가 나지 않았고 시간이 길어 질수록 백현의 배는 압박을 받았다. 절반 정도의 빨래를 겨우 하고 잠시 허리를 펴려는 순간 백현은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한번도 이런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느껴지는 통증에 무서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 아가야... 미안해..." 배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말하는 소리를 아기가 들었는지 점점 고통이 사그라 졌다. 백현은 그럼에도 일을 안할 수가 없어서 나머지 빨래를 모두 한 후에 자신의 몸만한 광주리에 젖은 빨래를 담아서 아주머니의 집으로 향했다. 빨래는 물에 젖어서 무게가 어마어마했고 백현은 불편한 다리를 낑낑거리며 걸어갔다. "아휴... 이만하면 됐으니 들어가서 밥이라도 먹어. 새댁." "네... 감사해요." 백현은 몸이 고되어서 그런지 밥맛이 없었다. 늦은 입덧을 하는 것인지 음식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았다. 결국은 한 술도 뜨지 못하고 암자로 향했고 먹은 게 없어서인지 힘이 없어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이후로 백현은 아주머니 집에서 빨래, 새참과 같은 소일거리를 해주었다. 절름발이 신세였지만 최선을 다해서 일했다.그러곤 음식을 거의 입에도 대지 못하고 잠이 드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백현의 작은 몸은 더 말라서 볼록 튀어나온 배가 아니면 산모라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으윽..." 그리고 백현은 산달이 점점 다가오자 밤마다 느껴지는 복통에 잠에 들지 못했다. 아이가 잘 못된 것인지 불안해서 의원에게 가보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가 볼수 조차 없었다. 음식도 먹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백현은 하루하루가 고통이었다. 작은 일도 손이 떨려서 하지 못했고 눈을 뜨고 있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도 아이를 낳으려면 아주머니가 조금씩 챙겨주시는 푼돈을 모아야 했기에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새댁. 이거 저기 논에 새참 좀 가져다 줘." "예." 마을 사람들이 먹을 새참을 가져다 주기 위해 백현은 이제 곧 산달이 되어 남산만하게 부른 배를 잡고 일어났다. 백현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 때문에 힘겨워하자 불안하게 쳐다보는 아주머니에게 웃어주며 새참이 들어 있는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논으로 향했다. 중간에 몇번 힘에 부쳐 쉬다 갔지만 무사히 논에 도착하고 새참을 건내주었다. 다리를 잘뚝이며 걸어온 백현을 안쓰럽게 보는 사람들이 쉬어 가라며 새찬을 권했고 어르신들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어서 백현은 잠시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번에 조정에서 우리 마을에 사람을 보낸다지?" "마을에 무슨 큰일이 있는 모양이야..." "글쎄... 관아에선 아무말 없던가?" "아휴... 난리가 이런 난리가 없다네. 감찰사가 온다고 사랑채도 비우고 음식도 하고 사또도 별 수 없구만.쯧" "소문으론 사또가 세금을 징수를 안해서 그렇다는데, 우리가 언제 밀린 적 있냐고! 그 사또란 사람이 뒷돈을 챙겼을 것이 분명해." 백현은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들으며 아까 산에서 내려오다 마주친 긴 행렬이 감찰사가 마을에 오는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빈 그릇을 가지고 마을로 가고 있는데 백현의 앞이 시끌벅쩍했다. 감찰사와 사또란 사람이 마을을 둘러보는 듯 했다. 마을사람들은 감찰사에게 뭔가 하소연하며 큰 소리를 내고 있었고 옆에서 사또는 안절부절하며 서 있었다. 백현은 그 모습을 보다가 감찰사의 얼굴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손에 들고 가던 광주리를 놓쳐버렸고 식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에 사람들이 백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찬열은 고개를 돌리자 있는 백현과 눈을 마주쳤다. 주중에 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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