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 뼘씩 손을 벗어나는 나비처럼
꼭 한 뼘이 모자라 닿지 못하는 곳에 네가 있다
놓치다 봄날, 이은규
가라앉은 태양
김진환
"동혁아! 여기다, 여기. 이리 오너라."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반갑게 소년을 재촉하고 있었다. 서서히 떠오르는 중인 태양의 얼굴은 그 때보다 조금 더 어렸다. 붉은 곤룡포를 입은 채 잠잠한 얼굴을 하고 있던 진환이, 조용한 규장각 안을 연신 눈치로 살펴보면서 멀리에 있는 소년에게 아는 척하며 손짓했다. 곧 서장 틈에서 그를 알아본 소년이 벼락 같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많은 서적들을 조심히 피해가며, 소년은 쥐고 있는 시문을 좀 더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전체적인 윤곽조차 닮지 않은 그 둘은 지금 순간마저도 너무나도 다른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의젓하게 고상한 얼굴인 형과 그런 형이 너무나도 좋아서 조금 안달난 표정인 동생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잠시 웃었다. 찬란한 곤룡포와 평범한 사대부의 복장이 어울리지 않게 뒤섞여 빛이 나고 있었다.
"네 작은 얼굴이 다 얼었구나…. 내 처소로 가 몸을 좀 녹이지 않으련? 발간 네 뺨이 안쓰럽다."
"…아닙니다, 형님. 방금 형님이 만져주시어 다 녹았습니다."
어느 틈엔가 어두운 낯빛이 되어버린 동혁을 진환은 조금 착잡하게 바라보았다. 속이려고 하는 말이다.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가 욕심을 부려 궐 안을 돌아다님으로 인해 형에게 닥칠 피해를 염려하여 일부러 괜찮다고 고개를 저은 말이었다. 진환은 어린 동생의 찬 뺨을 잠깐 쓸어주다가 이내 조심히 손을 떼어냈다. 아직 앳됨이 가시지 않은 표정에 이렇게 어둠이 내려앉는 건 언제나 안쓰러웠다. 진환은 이번에도 동생에게 속아넘어주기로 했다. 겨울 바람에 얼고 만 뺨을 모두 녹았다고 말하는 그 거짓은 형을 속이고 그렇게 어디론가 스며들고 있었다.
겨울이 내놓은 틈을 비집으며 아주 어렵고 고단하게 햇살이 규장각 안을 침투하였다. 그 햇살을 느끼면서, 진환이 먼저 품에서 시작을 마친 종이를 꺼냈다. 존경하는 형의 모든 행동을 주시하던 동혁이 그가 꺼내고 있는 것을 보고 설렘에 크게 눈을 떴다. 흠 잡을 것 없는 수려한 필체가 동혁의 앞으로 내밀어지고 있었다.
"오늘 준 것도 네 방에 간직할 것이냐?"
"예! 제 방에도, 제 눈에도, 제 생각 안에도, 제 마음 속에도 내내 간직할 것입니다. 형님이 주신 것 모두를 간직할 것입니다!"
맑게 빛나고 있는 두 눈이 귀여워서 진환은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동시에, 앞으로 이 작고 여린 아이가 겪어야 할 많은 일들이 그려져서 서걱거리는 가련함 역시 감춰낼 수가 없었다.
보물을 바라보는 것만 같은 시선이었다. 동혁은 진환이 건넨 시 한 편을 귀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채근하는 말에 못 이겨 부끄럽게 품에 있던 종이를 꺼내들었다. 엄선했는지, 종이는 여태 보지 못한 질감이었다. 그걸 느끼고 있는 진환에게 동혁이 냉큼 설명했다.
"천한 지물에 행여나 저하의 손이 상할 것 같아, 이번에는 새로 종이를 샀습니다. 이제까지 드린 종이들은 너무 거칠고 추하지 않았습니까……. 항상 죄송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된다. 내 손은 그렇게 약한 것이 아니다, 동생아. 내게 죄송할 필요도 없다. 앞으로는 그 값을 네가 먹거나 쉴 수 있는 일에 쓰도록 해라."
진환은 명령하고 있었다. 그러나 뱉는 목소리가 너무도 부드러워서 그건 명령보다는 일종의 부탁에 더 가깝게 들렸다. 동혁은 자신을 사랑 받는 사람으로 대우하는 형이 고마워서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환은 동생에게 한 번 더 눈을 맞추며 뜻을 부각했다. 알겠느냐?
"…예. 그래도 저 때문에 저하의 수지가 닳을 일이 생기면 어찌합니까?"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터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
"어디 보자……."
진환은 짧게 대꾸한 뒤에 동혁이 가지고 온 시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글씨가 조금 비스듬했지만 진환은 굳이 그 결함을 소리내어 말하지 않았다. 형의 평을 기다리고 있는 동생의 얼굴이 긴장감에 뒤덮이고 있었다. 진환은 친히 글자를 쓰다듬으면서 흡족스럽게 웃었다. 좋은 내용의 좋은 시였다. 진환은 나날이 발전하는 동혁의 글 솜씨가 자랑스러워 예전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직도 해동되지 않은 뺨을 보는 게, 그만 가슴이 꿰질 것만 같아 그는 일부러 종이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글씨가 많이 늘었구나."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너를 두고 거짓을 고하랴?"
마치 타오르는 것처럼 반짝이고 있는 붉은 곤룡포가 몇 번 동혁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형의 손길이 좋아서 수줍게 웃고 있던 동혁이 이내 소란스러운 밖을 감지하고 황급히 이 곳을 떠날 준비를 했다. 진환은 그걸 약간 무력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안쓰럽다. 가엾고, 미안해서 차마 가지 말라는 어떤 말도 동생에게 건네줄 수가 없었다. 진환은 동혁의 친필이 담긴 값진 종이를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으로는 동생의 머리통을 포근하게 흔들고 있었다.
"……이만 가겠습니다, 형님."
"…그래…. 조심히 가거라. 배웅해주지 못해 미안한 맘뿐이구나."
"왜 그런 말씀을 입에 올리십니까……. 저는 그저, 저하께서 저를 이렇게 가끔씩 보아주시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찹니다."
동혁은 그 말을 하며 살짝 버겁게 미소 짓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규장각을 벗어나는 뒷모습을 안아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진환은 동생과 교환한 이 종이 위의 글자가, 뼈 아프면서도 아름다워서 잠시 더운 숨을 내뱉어야 했다.
어머니의 눈을 피해 동생을 만나는 일은 마냥 즐겁지 않았다. 물론 조금씩 성숙해지는 동생의 얼굴을 보는 건 좋았다. 기쁘고 행복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위에 떠오르는 어떤 주눅 들어있음과 모든 일에 지레 사양을 하는 모습은 마음이 아팠다. 왕을 제외한 전부로부터 공공연하게 미움 받는 그를 돌봐줄 수 없어서, 항상 굳세고 단단한 속이 동생을 볼 때마다 뭉그러지고는 했다.
진환은 동생이 나간 방향을 따라서 규장각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울의 삭풍 속에서도, 꿈쩍 않고 서 있는 호위무사가 보였다. 아직 그 곁으로 몇 걸음 다가서지도 못했는데 침침한 목소리는 군주를 다그치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시면 내관들께서 꾸중하실 겁니다."
"꾸중하라지. 어차피 준회, 네가 날 대신해 변명해줄 것 아니냐."
"…돌아가시지요."
"준회야, 잡히는 손이 차다……. 미안하구나. 오랜만에 보는 동생이 반가워, 기다리고 있을 너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다."
"……."
"다음부터는 안에서 함께 있자꾸나."
세자가 미안함이 그득한 표정으로 준회의 감각 없는 손을 살살 쓰다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감각 없는 준회의 눈이 그 행동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준회는 검은 두건 위로 입김을 내뿜으며 그 귀중한 손 틈을 벗어났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보드라운 그의 손길에 잡혀 있는 자신의 괄괄한 손아귀는 분명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왜 내 손에 있지 않고 벗어나는 것이냐? 내가 손 잡은 것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는 것이냐?"
"…자꾸 괴상한 농을 하시면 내관들께 저하의 탈선을 말씀드릴 것입니다."
동생과의 만남을 탈선으로 칭하는 그가 미웠지만 진환은 별로 내색하지 않았다.
"자선당 안에서 판관께서 기다리고 계시다고 하니 걸음을 재촉하시지요."
준회가 속삭이고 진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동생을 보았느냐?"
"…예."
"무사히 돌아간 것 같으냐?"
"잘 모르겠습니다, 저하."
"그러지 말고 답해보아라."
"…규장각을 나오시고, 길을 지나치는 궁녀들에게 인사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마 무탈하게 돌아가셨을 겁니다."
그는 끝까지 동생 걱정이었다. 궁의 안이라고 볼 수도 없는 초라하고 삭막한 끄트머리에 동혁의 자리를 내어준 어머니가 문득 미워졌다. 말 없이 자선당을 향해 걸으며 진환은 멀지 않은 시일 안에 옥진이 내려오리라고 예감했다.
준회는 언제나처럼 마당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형식적인 인사를 받고 있던 진환이 조용히 미소 짓다가 이내 홀로 자선당 안으로 걸음을 틀었다. 그보다 조금 더 어린 호위무사는 추위에 곧 피부가 벗겨질 것 같은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군주의 끝을 응시했다. 무엇 하나라도 놓쳐서는 안 되었다. 자선당 안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이 흩날리고 있는 체취까지도 놓치지 않아야 했다. 곧 마지막이 될 테니까.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아닙니다, 저하."
"오래 전부터 전하의 성체를 보아주시는 분이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
"…예."
송 판관은 약간 안절부절하며 세자를 맞이했다. 세자는 방 안에서 홀로 기다리고 있었을 그에게 미안해 서둘러 소반 앞에 앉았다. 소반 위에 놓인 것을 굼뜨게 확인하고 있는 진환의 눈이 이내 송 판관으로 가 닿았다. 무엇이냐고 묻는 눈빛에는 이제 아무 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진환이 동혁으로부터 받은 시편을 그에게 보이지 않도록 옆으로 내려놓았다.
"올려두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 저하의 이부가 근래에 부쩍 편하지 않으시다고 하여 약을 지어왔습니다."
부자연스러운 웃음으로 송 판관은 말하고 있었다. 그 곳 어딘가를 쳐다보는 진환의 얼굴이 드물게 무표정했다. 소반 위에 검게 출렁이고 있는 액체에선 맡아보지 못했던 향이 풍겼다.
바늘이 솟아난 것만 같은 느낌의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진환은 눈 앞의 그를 쳐다보며 맑게 웃었다. 평소에도 흔히 짓고는 하는 그런 가벼운 웃음이었다.
"제 귓병은 그렇게 불치인 것이 아니라서 진작에 다 나았습니다.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마시지 않을 겁니다."
"……."
"제 동생들에게도 이 나쁜 것을 주셨는지 묻고 싶습니다."
조선의 태양은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그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송 판관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아래로 박고 있었다. 필요 없이 부드러움만 가득한 그를 꾀할 생각이 어리석었음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너무 완벽하게 들켜버린 꿍꿍이는 침 바른 변명을 가져오지도 못한 채 실패했다. 진환은 말이 없는 그를 독촉했다.
"지금 제 말을 외면하고자 하십니까?"
"…아니, 아닙니다. 저하."
"제 동생들도 이걸 받게 하셨는지 물었습니다."
"……."
"만일 그랬더라면,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드리지 않았습니다……."
"내가 처음인 겁니까?"
"……예."
"그렇다면 이건 보지 못한 척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아무 것도 보지 않은 겁니다."
"……."
"가져가시오."
나오는 목소리가 평온했다.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사근하고 느린 음성이었다. 송 판관은 넙죽 절을 올리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까맣게 담긴 액체가 있는 그릇을 치웠다. 물러가는 그를 향해 진환은 낮게 소리쳤다.
"나를 건드리는 건 상관 없습니다."
"……."
"…그러나 내 동생은, 내 동생들은 안 됩니다."
그가 방 안을 나갔음에도 독의 기운은 좀처럼 환기되지 못했다. 답답해서 쉽게 호흡할 수가 없었다. 진환은 옆에 두었던 종이를 벽에 가시로 박아놓은 뒤에 몸을 일으켰다. 차가운 바람을 쐬고 싶었다.
밖으로 나가자 보이는 건 변함 없이 서 있는 준회였다. 도통 입 주변을 보이지 않는 그는 무거운 바람을 맞으면서 진환을 쳐다보고 있었다. 진환은 그 쪽으로 아주 천천히 다가갔다.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호위무사의 눈이 날카롭게 발광하고 있었다.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별 다른 얘기하지 않았다. 전하를 모시는 어의이면서 불편한 내 귀까지 관심할 줄 아는 좋은 분이더구나."
"바람이 차갑습니다. 외감에 드실 수도 있으니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준회야, 그렇게 재미 없게 굴다가는 여인들이 싫어하신다."
준회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한산한 눈빛으로 어딘가를 향해 고갤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준회야. 네가 내 옆에 있어 다행이다."
"……."
"…네가 나를 지켜주어서, 내게도 누군가를 지킬 수 있는 힘이 허락되는 것 같아……."
그는 이번에도 어김 없이 답하지 않았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았으나 밖은 여전히 추위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겨울 속을 시달리며 진환은 급하게 채비를 하였다. 마지막 동생을 궁 밖으로 내보낸다고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진환은 그에 크게 상처 받았을 동혁을 생각하며 잠시 쓴 한숨을 내뱉었다. 강하게 불어닥치는 바람이 이 순간에는 차갑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다급히 내전을 찾아가는 그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그런 세자의 뒤를, 그를 지키는 준회와 내관들 여럿이 따라가고 있었다.
이윽고 내전 앞에 도착한 그는 숨을 한 번 가다듬었다. 필사적이 되어야 한다. 옳지 못한 어머니의 명을 바꿔야만 했다. 그는 준회를 두고 내전 안으로 들어섰다.
"내전마마, 동궁마마 납시셨습니다."
궁녀의 외침을 끝으로 내전 안은 한동안 정적이었다. 왕후의 곁을 거두는 몇 명의 신하가 보이고, 얌전하게 서 있는 궁녀들이 준수한 세자의 얼굴에 감탄하며 마음껏 두 볼을 붉히고 있었다. 진환은 약간 화난 얼굴로 그 안을 성큼성큼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꼿꼿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간단히 절을 하는 세자는 그렇게 뜸을 들이지 않고 바로 용건을 물어 견을 내세웠다.
"…어머니, 소인이 방금 전해듣게 된 것이 있사온데 그것을 청해 물어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세자."
"……동혁을…. 궁에서 밀어내실 겁니까?"
"예."
변명하는 것 없이 깔끔하게 끝난 대답에 진환은 어쩐지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진환은 입술을 씹었다.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두 눈 뜬 채로 지켜볼 수가 없었다.
"…감히 그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내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잔인한 설명에 숨이 턱 막혔다. 진환은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잘릴 것 같이 입술을 깨물고 있다가 천천히 반대하는 목소릴 밖으로 꺼내었다.
"마마의 아들이 아니어도 전하의 자식입니다. 제 동생입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 제발이요……. 명을 거두셔야 합니다. 아직 어린 아이입니다."
태양의 간청에도 왕후는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다. 신하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세자가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한 번 내린 명은 뒤바뀔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이를 허락하셨습니까?"
"예."
한 가닥의 희망이 주저앉았다. 진환은 답지 않게 표정을 굳히고 언성을 높일 준비를 했다.
"…마마! 그 아이의 모친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왜 자꾸만 죄 없는 자들을 미워하지 못해 조바심하십니까? 당장 명을 거두지 않으시면……."
"세자."
"……."
"다, 세자를 위한 일입니다. 그 아이에 대해 흉흉한 소문을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 아이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하찮은 목숨에 지나치게 총명한 아이니…. 분명 세자의 자리를 틈틈이 노리고 있을 겁니다."
그 말에 기가 찬 나머지 진환은 그만 짧게 헛웃음 짓고 말았다. 타는 속을 모르는지, 신하들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자신을 도와 왕후의 명을 버림 받도록 해줄 것 같았던 그들이 가만히 있으니, 진환은 뜻 모를 배신감에 휩싸여서 낮은 숨을 뱉고 있는 중이었다.
진환은 인사하지 않고 그대로 내전을 빠져나왔다.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버릇 없는 그의 행동에 토를 다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
"……."
그리고, 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동혁을 보았다. 진환은 일순간 그에 대한 감정을 무너뜨리지 못하고 그대로 다가가 그 어린 몸을 안아버렸다. 그렇게 안았을 때의 동생이 너무 축축해서, 그는 그 때에서야 하늘에서 비가 내리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늘이 미웠다. 하늘이 야속하다. 왜 이런 날에 예쁜 눈을 내려주지 않고 비를 떨어뜨리는지 이해할 수 없어 서러웠다. 진환은 며칠 전의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울고 있었다. 준회가 말 없이 서서 그 모든 것을 쳐다봤다. 큰 갈모를 쓰고 비를 튕겨내면서 동혁은 잠시 형에게 안겨 있었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손에 들고 있던 동혁은 궁의 입구까지 자신을 따라오는 형이 미안해서 아무 말할 수 없었다. 진환이 젖었다. 동생에게, 내리는 비에게.
"가겠습니다. 저하."
"……."
"그동안 잘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게 평생 잊지 못할 기억들입니다."
"동혁아."
"…예…."
"미안하다."
동혁이 고갤 떨구는 형을 보며 울음을 참았다. 가고 싶지 않았다. 여길 떠나고 싶지 않았다. 형의 그늘이라도 좋으니, 미움 받더라도 여기서 살아서 여기서 죽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오늘로 인해 깨지고 말았다. 파편으로 잔류한 소원은 동혁의 살에 박혀 피 흐르게 하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피는 세차게 쏟아지는 빗물에도 쉽게 씻기지 않았다. 진환은 앞으로 자주 보지 못할 동생을 질기게 응시했다.
준회가 진환의 머리 위로 손을 폈다. 진환을 적실 방울들이 모두 그 손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진환이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동혁은 허리를 숙였다. 전혀 다른 방식의 인사는 엇갈리면서 잇닿아 흩어지고 있었다. 빗속에서 부서지는 마지막이었다.
곧 이팔청춘을 앞에 두고 있는 동생이 그렇게 궁을 떠났다.
"내 동생을 보았느냐."
"……."
"…무사히 돌아간 것 같으냐, 준회야."
"……예."
그 둘은 한동안 비를 맞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 년이 흘렀다. 키가 조금 더 자라고, 읽는 책의 수가 전보다 늘어나게 된 진환은 부쩍 잠을 설치게 되는 일이 많아졌다. 단순히 스물을 맞이한 인생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요즘 이유 모를 불면에 들볶이는 중이었다. 하루에 잠을 자게 되는 건 고작 세 시간 남짓이 전부였다. 점점 심해지는 증상에 내관들이 걱정하며 내의원에 그를 위한 약을 처방할 것을 명했지만 세자가 사양했다. 진환은 나쁜 꿈을 꾸는 것도 아닌데 자꾸만 눈 감기를 거부하는 몸이 답답했다. 그리고 피곤했다. 잠이 줄으면서 정신은 쇠약해졌다.
그런 아들이 걱정된 왕은 어느 날 그를 불러내 자신을 대신하여 잠행을 갈 것을 어명했다. 같은 일상에 지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들에게 궁이 아닌 새로운 세상을 좀 더 오래 보여주고 싶었다. 진환은 자신의 처지를 고려하는 왕이 고마워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대전을 나왔다. 근래에 외출한 적 없이 줄곧 궁 안에만 갇혀 지냈으므로 진환은 오랜만인 바깥 구경이 기대되어 설렜다. 양반 집 자제들이 입는 것과 비슷한 도포를 입고, 갓을 쓴 진환이 밝은 얼굴로 준회에게 다가갔다.
"준회야, 가자."
준회는 살갑게 대꾸하지 않았다.
봄은 따스한 햇살을 지상으로 흐르게 하고 있었다. 세자의 호위무사는 오늘 군관복을 입지 않고 그와 비슷한 색감의 선비 옷을 걸쳤다. 궁을 나오고, 한양의 중심과 이어지는 바깥으로 가면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백성들이 점차 많아졌다. 그들 중 누구도 조선의 태양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진환은 최대한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백성들의 모습을 흘긋거렸다. 잠행의 목적으로 그들의 삶을 꿰뚫어 보아야만 했다.
빨랫감을 옆구리에 쥐고 달음질을 하는 아낙들, 무거운 장독을 옮기는 또래들, 그리고 꺄륵거리며 팔랑개비를 돌리고 있는 순수한 아이들까지. 모두 진환의 눈 안으로 담기었다. 적당히 생동스럽고 행복한 모습에 진환은 기분이 좋아졌다. 훗날에 다스려야 할 이 곳 사람들의 안온한 모습들이 다친 곳 없어 보여 기뻤다.
"준회야, 엿을 좀 사줄까?"
"…저하, 단 음식을 너무 밝히시면 안 됩니다."
"이크, 들켰구나."
진환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엿과 각종 강정, 밥풀산자 등을 팔고 있는 어느 허름한 골목에 걸음을 멈춘 그는 달콤한 향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채 한참 그 주위를 서성였다. 준회는 한숨을 쉬며 염낭에서 동전 몇 닢을 추스르고 있었다. 세자는 생긴 것만큼 달달한 음식을 좋아하고 즐겨 찾았다. 멀리서 단 내음이 풍길 때부터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게 진짜가 될 줄은 몰랐다. 궁 밖에서도 단 것에 마음을 빼앗길 정도로 들쩍지근한 음식을 좋아하는 그를 위해 준회는 열심히 지불할 동전을 고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그의 눈에 어느 누추한 옷의 사내가 들어왔다.
"어이구, 귀하신 나리! 안녕하십니까. 곧 구하가 다가오고 있사온데 아량한 마음을 베푸셔서 이것들을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보따리를 가득 들고 있는 사내는 귀인에게 빌붙어 돈을 얻어내는 거북한 장사꾼 쯤으로 보였다. 진환이 걸치고 있는 도포가 보통 것이 아님을 알아채고서 이렇게 접근하는 것이다. 진환은 그저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준회가 미간을 좁혔다. 그가 진환의 팔뚝에 손 대려는 것을, 잽싸게 붙잡아 튕겨내었다.
"감히 어떤 몸인 줄 알고 함부로 손을 올립니까."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장사꾼은 순간적으로 느껴진 억센 힘에 당황하여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썩 꺼지라는 강압적인 눈빛을 보내고 있는 준회를 확인하며, 장사꾼은 겁 먹은 채 주섬주섬 보따리를 다시 챙기고 있었다.
그런 그를 진환이 붙잡았다.
"제게 물건을 팔려던 것 아니었습니까? 먼저 말을 꺼내놓고 어딜 가십니까. 물건을 보여주셔야지요."
"…예, 예! 감사합니다, 나리! 참으로 관대하신 분입니다."
풀이 죽은 장사꾼의 얼굴이 금방 환해졌다. 준회가 그의 팔목에 닿아있는 진환의 작은 손을 가만 쳐다보았다.
장사꾼에게서 부채 두 개를 산 진환이 잘 가라고 등을 토닥였다. 장사꾼은 몇 번이나 넙죽대면서 감사를 표현했다. 이내 다른 곳으로 멀어지는 한 백성을 바라보며 진환이 부채를 준회에게로 내밀었다. 학 세 마리가 그려진 부채였다.
"받아라."
"…괜찮습니다."
"엿은 다음에 사야겠구나."
거절하는 말에 아무렇지 않게 도로 부채를 가져가는 손이 조심스러웠다. 준회는 의외로 아무 말하지 않았다. 정오가 되어 중천에 떠오르는 태양이 창창했다.
출출한 것을 핑계로 주막을 찾은 둘은 마주보고 앉아 국밥을 시켰다. 익숙하지 않은 주변 분위기에 진환은 연신 호기심 있는 눈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준회는 얼굴의 반을 가린 두건을 조금 번거롭게 만지작대다가 이내 손을 내려놓았다. 왁자지껄한 소리들이 정신을 어지럽혔다.
"주모! 여기! 술 한 병만 더!"
"예, 갑니다!"
"왜, 그 집 있잖어. 허구한 날 방 안에만 틀어박힌 장남이 있다는 집. 결국 정신이 오락가락해졌다는데 그 뒤로는 도통 들려오는 소식이 없다는군."
"망할 놈의 여편네가 술 값을 안 줬다니까. 이번 한 번만 봐줘, 주모. 내 다음엔 기필코 두둑하게 챙겨오리다. 응?"
"올 해로 저하께서 스물이 되셨으니, 조만간 조선에 금혼령이 내려지겠구만."
"땅이 바싹 말라서 이번 경작은 아주 망할 것 같단 말이야,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각기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소리들이 난잡하게 섞여 진환의 속에서 천천히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준회는 여럿 목소리들을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뜨거운 국밥 두 그릇이 나오고, 술을 담은 잔을 내온 주모가 다시 바쁘게 부엌 안으로 들어갔다.
김이 모락모락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음식은 주변의 사람들이 먹는 모양을 곁눈질한 뒤에야 어렵게 수저를 들 수 있었다. 적당하게 간이 된 국은 다행스럽게도 진환의 입에 잘 맞았다. 백성들의 음식은 뜨겁고 담백했다. 진환은 수저를 들지 않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준회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먹지 않고 그러고 있느냐?"
"천해서 저하의 앞에서 손을 올릴 수가 없습니다. 겸상이 불편합니다."
"내 앞에선 양껏 천해도 되니, 어서 국을 뜨거라. 무얼 걱정하느냐."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명이니라, 준회야."
호위무사는 고집이 셌다. 끝끝내 두건을 벗지 않는 그를 잠시 안타깝게 쳐다보던 진환은 반이나 남은 국밥을 외면하고 느리게 손을 뻗었다. 준회의 입가 바로 앞에서 멈춘 손이 귀중한 걸 만지는 느낌으로 두건을 벗겨냈다. 그를 바라보는 준회의 눈이 별 다를 것 없이 창백하고 날카로웠다.
"네 입이 어디에 쓰이는지 궁금하다."
"……."
"늘 말하지 않는 입이 이번엔 먹지도 않겠다고 하니, 내 작은 마음이 소란하게 아프구나."
"……."
"나중에 사랑하는 여인과의 접문을 위해 그리 아끼는 것이냐?"
"…아닙니다."
대답하며, 준회의 눈이 아래를 향했다. 진환은 문득 그의 실어 비슷한 성격이 그 때의 뜨거움 때문이리라고 생각했다. 걷잡을 수 없이 미안해졌다.
"그럼 아끼지 말거라."
"……."
"나를 위해 쓰거라."
"…예."
"나와 말을 주고 받을 때 쓰고, 지금처럼 함께 밥을 먹을 때 쓰고, 후에 내 상대점을 읽을 때 쓰도록 하거라."
진환이 말을 마치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수저를 들어 아까처럼 국을 떠 입으로 가져가기 시작했다. 준회는 잠시 미동 없이 있었다. 평소에 입지 않아 어색한 도포 자락을 그저 강하게 말아서 쥘 뿐이었다. 준회는 상 위에 올려진 제 두건을 시선하고 있다가 이내 수저를 들었다. 그의 앞에서 수저질을 하는 일은 앞으로 몇 없을 것이었다. 호위무사는 신중하게 수저를 썼다. 따뜻한 국을 삼키고 반립을 씹으면서 이상하게 눈가가 울컥했다.
진환은 착하게 말을 들어주는 그가 고마웠다. 술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
충분한 잠행이었다. 해가 조금씩 지는 것을 확인하고 준회는 슬슬 궁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준회의 생각을 읽었는지 진환이 간절히 부탁했다. 춘화 구경을 하고 싶다고 했다. 준회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려다가 그냥 관두었다. 말 없는 호위무사를 쳐다보며, 진환은 신이 난 얼굴로 꽃이 많이 피는 언덕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회가 진환이 산 부채 두 장을 주머니에 넣었다.
노을이 보이는 작은 언덕은 진환이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해의 붉은 잔해가 만개한 꽃잎들을 무한하게 적시고 있었다. 아름다운 모습을 조금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감탄하고 있던 진환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웃음 소리에 등을 돌렸다. 준회도 그걸 따라했다. 언덕이 끝나는 곳에서, 그네가 움직이고 있었다.
유혹 당한 것처럼 그대로 그 곳을 향해 가는 진환의 뒤를 준회가 바짝 쫓았다. 꽃은 여전히 예뻤다. 이것보다 빼어난 아름다움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틀림 없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보았다. 그네 위에서 산뜻하게 움직이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는 진환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이내 아주 그 곳에 못을 박은 시선을 던지고 있는 세자는 망설이지 않고 다리를 움직였다. 꽃에 둘러싸인 그녀가 황홀했다.
그네가 멈추었다. 진환의 움직임도 멎었다. 준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눈을 가진 사내가 그녀의 곁에 서 있었다. 그 눈이 다정하지 않았다. 진환은 처음 경험하는 아찔한 기분에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느리게 깜빡이는 그녀의 두 눈을 보며, 속으로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자책하고 있을 때,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에서 오신 도련님이십니까?"
"…아아, 저, 그게……."
"그네를 타고 싶어 오셨습니까?"
"…아니, 그러니까……."
둔하게 말을 더듬는 모습에 그녀가 잠시 웃었다.
진환이 천천히 입을 움직였다. 준회는 그녀의 어딘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등을 밀어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그 말에 그녀의 뺨이 수줍게 달아올랐다. 진환은 그 미소를 보며 안심했다. 자신을 낯설게 보아주지 않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러던 차에 그녀의 호위무사가 과단성 있게 고개를 저었다. 구체적으로 여인을 만나본 적 없는 진환의 얼굴이 잠시 굳었다. 그런 그의 표정을 쳐다보던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어 감사합니다. 하지만 소녀가 부끄러워, 도련님이 그네를 태우시는 건 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죄송합니다."
"……."
"대신, 도련님의 말을 받겠습니다."
어렴풋이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벅찬 얼굴로 진환이 응시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호위무사의 손을 잡고 그네에서 내려왔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모습은 조금 전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이미 그녀에게 마음의 절반 이상을 빼앗긴 진환은 심하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어쩌지도 못하고 떨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많지 않은 삶 안에서 그가 처음으로 취하게 된 사람이었다. 그녀는 봄처럼 보드라운 웃음으로 진환을 넋 놓게 했다.
"도련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진환입니다. 빛나는 것을 떨치기 위해 가지게 된 이름입니다."
"아, 참으로 좋은 이름을 가지셨습니다. 소녀가 꼭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낭자의 이름은…."
"저하."
준회가 진환이 묻는 것을 중단시켰다. 조선에서 단 한 사람에게만 허락된 호칭에 그녀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이제 가셔야지요."
무뚝뚝한 말에 진환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졌다. 이름을 알고 싶었다. 그녀가 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진환은 그 행동을 달래려고 손을 내저었지만 그녀는 좀처럼 다시 허리를 펴지 않았다. 준회가 그녀의 호위무사를 메슥거리는 눈빛으로 한 번 쳐다봤다. 그는 말 없이 고개 숙였다.
진환은 해가 지도록 그녀와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준회의 눈이 너무나도 확고해서 차마 떼를 쓸 수 없었다. 진환은 아쉬움을 담은 표정으로 그녀를 시선했다. 마침내 허리를 펴고 있는 그녀는 눈 앞에 태양을 두고 불안하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진환이 그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갰다. 얼떨결에 손을 맞잡힌 그녀는 대책 없이 부드러운 진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갤 숙였다.
"…꽃 안에 휩싸인 그대가 살랑살랑 날아와 내 마음을 간지럽혔습니다. 나비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
"그대를……. 나비로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대가 있을 때만, 부르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과분한 이름을 받아도 됩니까?"
진환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회가 먼저 걸음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던 진환이 호위무사를 바라보며 느리게 걸음을 떼었다. 자꾸만 생각날 것 같아서 함부로 뒤를 돌지도 못했다. 뒤를 돌면 그녀가 여기를 쳐다보고 있을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칠 것 같았다. 그렇게 눈을 담아내는 일은 아직 진환에게는 무리였다. 진환은 맑은 공기에 스며든 꽃 향기를 음미하며 언덕을 내려갔다.
왕이 어명한 일탈이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종일을 돌아다녀 피곤한 다리를 열심히 움직이며 궁에 도착한 그는 내관들의 인사를 받으며 대전을 찾았다. 대전 안에서는 왕이 아들을 기다리며 턱을 괴고 있었다. 그의 앞에 선 진환이 짧게 묵례했다.
"세자. 잠행이 어땠는지 짐에게 말해줄 수 있느냐?"
"예, 전하. 행복했습니다. 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꾀 쓰는 일 없이 열심히 일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그들이 제가 다스려야 할 전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벅찼습니다. 더할 것 없이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랬느냐."
"…예, 그리고……."
침착하고 착실한 보고에 왕의 얼굴이 기쁘게 변했다. 총명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진환이 잠시 숨을 삼키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처음으로 가슴이 간지러웠습니다."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고백이었다. 진환은 마지막으로 절을 하고 대전을 벗어났다. 뒤에서 신하들이 인사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진환은 오늘 함께 궁을 나가 잠행을 위해 돌아다녔을 준회가 고마워서 잠시 그 등을 토닥여주었다. 대전 앞에서 진환을 기다리고 있던 그가, 하느작거리게 두건을 잡았다. 동궁을 향해 걷는 세자의 뒤를 그가 그림자처럼 따라갔다.
준회를 마당에 두고 자선당 안으로 들어온 진환이 복도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빈 방 앞이었다. 진환은 그 안을 잠시 살펴볼 생각을 하다가 이내 관심을 접었다. 텅 빈 곳 모두에 나비를 풀어놓고 싶었다.
마찬가지로 잠이 오지 않았다. 진환은 활활 주변을 밝히고 있는 초에 입김을 불었다. 어둠이 찾아왔다. 홀로 누운 방 안이 적막했다. 빛이 없음에 보이지 않는 천장이 광활했다. 너르게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한숨을 쉬며 눈을 감는데 그 암흑 안으로 나비가 팔랑이는 것이 보였다. 진환은 깜짝 놀라 빠르게 두 눈을 떴다. 다시 눈을 감았다. 나비가 보였다. 그 날갯짓에 잠을 빼앗겼다. 진환은 한참을 뒤척였지만 오랜만에 기분 좋은 잠에 빠졌다.
뜻 없던 불면에 마침내 이유가 생겼다.
동절에 접어들면서 조선 전역에 금혼령이 내려졌다. 진환은 스물의 끝에서 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분명 진환의 의사는 모두 무시된 채 결정될 일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그렇게 억지로 맞추게 된 인연도 진심을 다해 소중히 대할 마음이 있었다. 금혼령이 선포됨과 동시에 가례도감이 설치되었다. 거기엔 막대한 인원을 필요로 하였다. 많은 관료들을 투입한 상태에서 궁은 처녀들의 사주단자를 모았다.
초간택 날이었다. 원칙적으로 초간택에 참여할 수 없는 진환은 설레는 마음으로 밖을 빼꼼하게 쳐다보았다. 많은 사람들을 거느린 채 궁을 향하고 있는 여인들이 보였다. 모두 녹색 견마기를 걸치고 다홍 빛깔 치마를 펄럭이고 있었다. 저 안에 처로 맞게 될 사람이 있다고 하니 이상하게 마음이 떨려왔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진환은 그 때 만난 그녀도 오늘 샛노란 저고리 위에 견마기를 걸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소원하고 있었다. 진환은 이내 밖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아마 지금 쯤이면 왕족들에게 세자빈으로서의 덕을 시험 받고 있을 것이었다. 진환은 그 상황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문득 서글펐다. 그저 후에 만나게 될 처가 예의가 바른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을 뿐이었다.
초간택이 지나고 며칠이 흘렀다. 재간택이 있는 날이었다. 오늘 처녀들은 세 명으로 간추려진다. 진환은 가례에서나 보게 될 처의 모습이 궁금했지만 별로 내색하지 않는 중이었다. 만일 그녀가 그 셋에 포함됐다면, 차라리 지금 여기서 떨어지기를 바랬다. 삼간택에 뽑히고도 마지막으로 선택 받지 못한 처녀는 평생 혼인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진환은 자신의 곁을 바라는 댓가로 남은 시간들을 외로이 보내게 되는 그 절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거기에 그녀가 없었으면 했다. 덧 없는 희망이었다.
진환은 복잡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글을 읽고 있다가 마음을 고치고 자선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익숙하게 서 있는 준회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호위무사에게로 다가가 친근히 말을 붙였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만 봄이 찾아오려나."
"……."
"…저번 봄에 만난 나비를 다시 한 번 보고 싶구나……."
준회는 침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날카로운 눈 끝이 잠시 진환을 향해 있었다.
겨울이 끝나고 새로운 해가 시작될 때 즈음에 진환은 드디어 삼간택이 치러졌다고 전해들었다. 사랑해야 할 처가 정해진 것이었다. 진환은 그 존재가 궁금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 묻지는 않았다. 별궁에 있을 그녀의 모습이 궁금했다. 하지만 가례가 있을 때까지 세자는 처를 만날 수 없다고 오래 전부터 약속되어 있었으므로, 진환은 그 주변을 자주 찾아 돌아다니지 않았다. 단지 궁금한 감정으로 인해 모두와의 약속을 깨뜨릴 수 없었다.
왕후는 진환의 처가 될 사람에게 법도를 가르칠 인재로 동혁을 보냈다. 그 속셈을 헤아리던 진환은 약간의 두통을 느꼈다.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복안은 없었지만, 그래도 동혁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더불어 동혁이 부러워졌다. 그녀의 존재를 누구보다 먼저 알고 말을 나누고 있을 그가 부러웠다. 애 같지만 진심이었다. 진환은 그녀의 호위를 돕기 위해 부쩍 별궁을 드나들기 시작한 준회에게도 그 마음이 있었다.
봄이 곳곳에 스며들고 있을 무렵에 진환은 홀로 궐 안을 산책하고 있었다. 아직 따뜻함이 찾아오지 않아 밖을 돌아다니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그는 등을 돌렸다.
동혁이었다. 며칠 전에 한 번 마주친 적이 있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는 것이 반가워 동혁은 밝은 표정으로 진환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저하, 날이 추운데 홀로 어디를 거닐고 계십니까?"
"마음이 적적해 잠시 산책을 하는 중이었다. 너는?"
"…세자빈께 소학을 가르치고 나오는 길입니다."
"……아아, 그래. 고맙구나."
"…다정하신 분입니다. 저하와…. 잘 어울리는 그런 분입니다."
동혁의 말에 진환이 화색했다. 정말이냐고 묻는 말에 동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을 하며 아주 잠시 착색되는 동생의 낯빛을 진환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럼, 더 드릴 말씀이 없으니 가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예. 저하. 친히 걱정해주시어 감사합니다."
멀어지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다가, 진환이 동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조용히 걸음을 틀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 때와 별로 달라진 것 없는 모습으로, 그녀가 앞에 있었다. 갑작스런 재회에 말문이 막혔다. 그녀 역시 미처 만날 줄을 몰랐다는 얼굴로 진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진환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그녀의 의미가 무엇인지 잠시 생각해야 했다.
정적 끝에 나온 답은 하나였다. 진환의 처가 그녀였던 것이다. 실감되는 현실이 행복해서 그가 잠시 궁과의 약속을 잊고 웃었다. 운명의 장난이 고마웠다.
"나비."
"…예, 저하."
"나를 기억합니까?"
"……예. 제게 또 다른 이름을 주신 분인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긍정의 대답에 진환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녀는 수줍게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녀는 이유를 모르게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하, 죄송하오나 며칠 후에 잠시 별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의아해 묻는 말에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대꾸했다.
"제가 아직 어린 모양입니다. 친가가 그리워져 그만, 억지로 떼를 써서 그런 결정을 내렸습니다. 부디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금방 저하의 곁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대와 하고 싶은 것이 참 많습니다."
"제가 더 많습니다."
"……."
"저하와 함께 꼭 시장 길을 걸어보는 것이 제 소원입니다."
사랑스러운 미소가 얼굴 위로 번지는 것을 지켜보던 진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두가 보는 앞이 아닌, 단 둘이 있을 때에 주고 싶은 고백이 있었다.
"함부로 날아가시면 안 됩니다."
"……."
"…나는 향기 있는 꽃이 아니라서 그대를 잡아둘 수가 없습니다."
"……."
"그렇다고 거미인 것도 아니어서, 그대를 끌어안고 집어삼킬 수도 없습니다."
"…저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앞으로는 저하를 두고 어디도 가지 않겠습니다."
"내게서 없는 꿀을 매일 따다 주겠습니다……."
"……."
"…그대께서도 날지 않겠다고 약속해주셔야 합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부디 내게서 날아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셔야 합니다."
그녀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짓던 진환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등을 돌렸다. 이 이상으로 오래 얼굴을 보고 있으면 누구에게라도 들키게 될 모습이었다. 그걸 염려한 진환이 아무 일도 겪지 않은 것처럼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다시 만난 기쁨으로, 걸음은 거의 뛰는 모양새로 바뀌었다. 오늘은 잠을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그녀는 정말로 궁을 잠시 떠났다. 신경 쓰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난 적도 얼마 없고, 얼굴을 보며 말을 나눈 건 기껏해야 두 번이 전부인데도 이렇게나 마음이 적적했다. 진환은 처음으로 사랑하게 되는 일에 대해 속절 없이 흔들리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친가에서 크게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진환은 그걸 들은 동시에 어떤 부탁을 하기 위해 대전을 찾았다.
모든 신하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환은 조금 굳은 얼굴로 그 틈을 걸어갔다. 아들을 쳐다보는 왕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진환이 그의 앞에 절을 올리고, 왕은 그런 그를 잠시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세자, 무슨 일로 이 곳을 찾아왔느냐?"
"…예, 전하. 간곡히 부탁 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
"괜찮으니 말해보거라."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진환을 왕이 타일렀다. 진환은 고개를 숙이며 말을 시작했다.
"…내일, 세자빈을 만나러 가도 되겠습니까?"
고요하게 뱉어진 말에 왕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신하들이 서로의 눈을 마주치며 술렁거렸다. 왕은 그 말을 듣고 호통을 치지도 않았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저 누구보다 착실하던 아들이 중요한 약속을 깨뜨리고자 하는 것이 궁금해졌다. 가례가 있기 전까지 세자와 세자빈이 만나는 일은 없어야 했기 때문이다. 진환은 그걸 알면서도 지금 부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냐?"
"…앓고, 있다고 합니다."
왕은 차분한 얼굴이었다. 진환은 오래 이어지는 아버지의 침묵에 청을 거정 받을 것이리라고 생각 중이었다.
"그래, 그렇게 하거라."
"……."
"앞으로 얼마든지 세자빈의 얼굴을 보아도 된다."
"…정말 그렇게 해도 됩니까, 전하?"
별격적인 발언에 신하들은 아까보다 크게 술렁였다. 여지껏 이런 일은 없었다. 여태 잘 지켜오던 약속을 사소한 이유로 허물고자 하는 것이 그들은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왕은 아들을 보며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환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기쁨이 흐르고 있었다.
"대신, 동혁과 함께 가야 한다. 혼자 그 곳을 찾는 것은 예가 아니다. 한빈을 함께 보내고 싶지만 그 애는 순순히 궁 밖까지 걸음할 것 같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전하! 내일부터 하루도 빠짐 없이 그 곳을 찾을 겁니다!"
진환은 밝게 소리쳤다. 무모한 부탁이 성사된 것이 행복했다. 그는 어떤 때보다 깊게 절을 하고 대전을 나왔다.
그렇게 나오고 있는 진환을, 호위무사가 진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준회야, 참 다행이다. 전하께서 허락해주셨다."
"…그렇게도 좋으십니까."
생기 있게 웃고 있는 세자를 향해 준회가 물었다. 그는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회는 그 움직임을 끝끝내 바라보다가 이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날이 밝았고, 평소처럼 문안을 올린 뒤에 진환은 그녀의 집을 찾아갈 준비를 했다. 걱정부터가 앞섰다. 얼만큼 앓고 있을지 가늠되지 않아서 더욱 마음이 무거웠다. 진환은 저번에 궁을 나갔을 때와 비슷한 복장을 하고 동혁을 기다렸다.
"저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이윽고 자선당 앞으로 동혁이 도착했다. 세자빈이 없어 찾을 일이 없는 궁으로 굳이 걸음해 꾸벅 인사를 하는 동생을, 진환이 반갑게 쳐다보았다.
"괜히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당연히 가야 하는 곳인데요."
준회가 번뜩이는 눈으로 동혁을 확인하다가 이내 세자의 뒤로 걸음을 옮겼다. 말을 타야 하는 길에도 진환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동혁은 자신의 것과 비슷한 갓을 쓰고 있는 형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평생 익선관에만 어울리는 사람인 줄 알았다. 동혁은 문득 형이 갓을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아서 잠시 손을 접었다가 폈다.
역시나 이번에도 진환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진환은 곧 아픈 얼굴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에 속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그걸 똑바르게 쳐다볼 용기가 없었다. 동혁은 그 곳을 향해 걸으면서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준회는 마치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숨 쉬고만 있었다. 진환이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의 호위무사를 쳐다보며 잠깐 고개를 숙였다.
"귀한 걸음을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무표정한 얼굴의 호위무사가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그는 이내 말 없이 그 셋을 가옥의 앞으로 데리고 갔다.
진환은 처음 찾은 이 곳을 들어서는 게 떨렸다. 호위무사가 익숙하게 문을 열고, 진환을 먼저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준회는 밖에서 걸음을 멈추고 들어오지 않았다. 진환의 곁에 선 동혁이 천천히 입술을 짓이기고 있었다.
마당 안에서, 무수히 많은 머슴들이 절을 올렸다. 진환은 이런 대접을 받고 싶어 이 곳을 찾은 게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그들은 그 도를 넘은 공손함을 치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진환은 그들과 일일이 눈을 맞추며 호위무사가 이끄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채로 가 간단히 인사를 한 뒤에 진환은 그녀가 앓고 있다는 방을 찾았다. 별당채 앞에서 멈춘 걸음은 한동안 미동이 멎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직 보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쓰렸다. 그를 대신해 조심스럽게 문을 여는 호위무사가 이윽고 걸음을 돌려 뒤로 물러났다. 어느 틈엔가 그 곁으로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앳된 얼굴이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를 수발하는 몸종으로 보였다.
"열이 심해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습니다."
간단히 전달하는 호위무사의 말에 진환은 고갤 끄덕였다. 방 안으로 천천히 걸음하는 그의 동작이 무뎠다.
차마 그 안으로 온전히 들어서지 못하고 문턱에 걸터앉은 그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금방 돌아오겠다고 해놓고 사람을 이렇게나 걱정하게 하다니, 그런 그녀가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걱정스러움이 야속함을 이기지는 못했다. 이마를 짚어보지도 못했다.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진환은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끝 없이 그녀의 눈 감고 있는 모습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녀가 깨어날 수 있다는 것처럼.
진환은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깨닫고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형을 바라보는 동생의 눈빛이 찼다. 그가 그 곳에서 몸을 일으키고, 이번에는 동혁이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진환은 밖에 있을 준회를 생각하며 잠시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동혁이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지, 알지 못했다.
"…가겠습니다. 끝까지 제 사람을 잘 지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부디 조심히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동혁이 감정을 숨기고 진환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호위무사는 무뚝뚝하게 말한 뒤에 허리를 숙였다. 그에게 가볍게 인사하던 진환이 이내 등을 돌렸다.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자신의 무력함을 속으로 욕했다. 가만히 있는 호위무사를 채근하던 몸종이 잽싸게 다가와 가옥의 문을 열어주었다. 진환이 어린 그녀에게 눈짓으로 고맙다는 말을 보냈다. 동혁 역시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 숙이며 문을 나서고 있었다.
"…가자, 준회야."
한숨을 쉬며 먼저 궁을 향해 걸어가는 진환의 뒤로, 준회와 동혁의 시선이 풀어낼 수 없게끔 복잡히 얽히고 있었다.
다음 날에도 진환은 그녀의 가옥을 찾을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왜인지 준회가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여 관두었다. 그것의 대신으로 준회를 보냈다. 진환은 조강을 하는 내내 집중하지 못하고 안절부절하다가, 결국엔 중식까지 거르고 목을 빼며 소식을 들고 올 준회를 기다렸다. 늘 얌전하고 소란을 피울 일 없이 지내던 그의 변화에 모두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놀랐다. 진환은 해가 조금 드리워질 때 쯤에 자선당 앞으로 도착한 준회를 만나러 조금 급하게 밖으로 나섰다.
준회는 다가오는 군주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먼저 입을 열지 않는 그를 참지 못하고 진환은 물었다.
"그녀를 만나고 왔느냐?"
"……."
호위무사는 한참이 지나도록 대답하지 않았다. 진환은 시선을 높게 올려 준회의 눈을 쳐다봤다. 두 눈은 언제나 읽힐 것을 거부한 채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글자들을 읽고 쓰며 살아온 진환이지만 그런 그의 눈은 어떤 방식으로도 번역할 수 없었다. 어느 나라의 읽지 못할 글자보다 지금 준회의 눈빛을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진환은 갑갑했다.
"…왜 내게 대답을 주지 않는 것이냐? 혹시…. 그녀의 상태가 더 악화된 것이냐?"
"……."
"준회야……. 무슨 말이라도 좋으니 입을 좀 열어보거라."
"…깨어나셨습니다. 그렇게 보이는 안색이 괜찮았습니다."
걱정과 불안으로 채워지던 그의 얼굴에 못 이겨 준회가 대답했다. 진환은 원하는 것을 들은 게 기쁜지 이제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친근의 표시로 잠시 호위무사의 두건을 덮어 보이지 않는 뺨을 쓰다듬었다. 준회는 가만히 있었다. 그저 오래도록, 가만히 서 있었다.
늦은 밤이었다. 진환은 방 안에서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잠이 쏟아지기 전에 주변을 환하게 해주는 초를 잠시 쳐다봤다. 초 위의 불은 아낌 없이 빛을 토해내 진환의 시야가 어두워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었다. 그 화염을 보고 있자니, 막을 틈 없이 준회가 떠올랐다. 세자의 호위무사는 언젠가 불 속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그 불로 인해 준회는 궁의 사람이 되어 지금의 호위무사로 새 삶을 살고 있다. 불은 준회를 죽게 할 뻔했다가, 전혀 다른 생명을 부하하기도 했다. 진환은 자신에게 준회를 만나게 해준 불이 고마우면서도 싫었다.
조금 호전될 기미를 보이던 불면은 지금 더 심해졌다. 진환은 야심한 밤 안에서 상쾌히 뜨이는 눈으로 초를 한 번 더 쳐다봤다. 그는 이내 약한 숨을 불어 초를 껐다. 세계가 깜깜했다. 그리고, 목덜미 바로 뒤에서 긴장에 버무려진 달뜬 호흡을 느꼈다. 진환은 움직이지 않았다. 눈에 어둠이 익을 때까지, 날카롭게 갈린 칼날이 천천히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칼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준회라는 것을 알았다. 진환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입을 가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왜 찌르지 않는 것이냐?"
무덤덤히 나온 말에 칼의 흔들림이 일순간 죽었다. 진환은 그 방심의 틈을 이용해 고개를 돌리고, 칼을 쥔 준회의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밤인데도 준회의 눈이 밝았다. 어지럽게 반짝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진환의 눈이 그의 입 주변에서 멈췄다.
"…내가 죽어야만 네가 입을 보이고 웃을 수 있겠느냐?"
"……세자빈께선 괜찮으십니다. 깨어나셨습니다."
그 물음에 그는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다. 준회는 칼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더 넣다가 이내 포기했다.
진환은 준회가 무척이나 가련했다. 지금조차 말하지 않고 망설이고 있는 그가 너무나도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사랑 받는 게 어려워 군주의 총애마저 고개를 저어버린 그에게서 언뜻 동생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두건 안에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진환은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내 죽음을 하루만 더 미뤄도 되겠느냐?"
"……."
"…내일, 그녀를 보고 저물어도 되겠느냐. 이런 내 청을 불쌍히 여겨 허락할 수 있느냐? 준회야."
그는 이름이 불렸음에도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한참 후에, 호위무사는 칼을 챙겨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갔다. 진환은 칼에 닿지 않은 목 끝을 한 번 쓰다듬었다. 겁이 나는 건 없었다. 단지, 뜨지 않을 태양의 괴리가 걱정됐다.
잠은 오지 않았다.
날이 밝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시간을 모를 새벽의 일이 꼭 쇄편 같았다. 진환은 이른 아침부터 그녀를 찾아갈 준비를 했다. 속에는 어떤 바람도 불지 않았다. 평소처럼 고요하고 잠잠했다. 그는 자신을 태어나게 한 이들에게 문안을 올렸다. 아버지에게만 세자빈을 만나러 갈 것을 알렸다. 동생들은 보지 않았다. 그에게 나쁜 해가 갈지도 몰랐다.
아직 햇빛이 스미지 않은 길목이 침침했다. 그는 도착한 가옥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진환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어린 몸종에게 약속을 지키러 왔다고 전했다. 준비가 끝날 때까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겠다고 했다. 몸종은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가옥의 문 틈으로 사라졌다. 그녀를 볼 생각에 가슴이 저릿하면서도 두근두근했다. 진환의 옆에서 말이 없는 준회는 먼 곳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문을 열겠습니다. 조금 무거운 목소리였다. 그에 준회가 알았다는 답을 했다. 문이 서서히 열리고, 그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를 보자 진환은 순간 울컥한 것을 어렵게 달래 참았다.
"안녕하십니까, 세자빈."
준회가 그녀에게 먼저 인사했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그녀를, 진환은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세자빈. 보고 싶었습니다. 별궁으로 돌아오실 날을 손으로 꼽아가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어제 심경에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나비가 보고 싶어 무작정 걸음을 옮겼습니다.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나비란 건 대체……."
"참, 그대가 수줍음이 많다는 걸 미처 헤아리지 못했소. 미안합니다. 이건 우리 둘만 있을 때 내가 그대에게 쓰기로 한 별칭인데 내가 그만 실수를 했군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마지막인 걸 들키고 싶지 않은 탓이다. 그녀는 아직도 눈 맞춰주지 않았다.
"말씀 중에 죄송하오나 지금도 이 곳엔 두 분만 계시지를 않습니까? 저와 준회는 영영 저하의 관심 밖에 있을 터이니 부디 신경을 거두시고 세자빈에게만 시선하시기를."
그 말을 듣고 진환은 어쩌면의 생각을 좀처럼 걷히지 못했다. 그저 미약하게 웃었다.
마침내 마주치게 된 눈이 좋아서 진환은 잠시 숨 쉬지 않고 있었다. 손을 잡았다. 손을 잡고 시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처음이자 끝이 될 손 잡음에 벅차고 떨렸다. 몇 번 더 잡아보고 싶은 손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진환은 좀 더 포근하게 힘을 주었다.
"별궁에는 언제 돌아오실 계획입니까? 혼례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재촉을 드릴 마음은 없습니다. 허나, 나비가 없는 궁은 적적해서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셨습니까. 그럼, 하루 빨리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몸도 많이 나아졌으니."
"그게 정말입니까?"
웃고 있지만 속이 뒤틀렸다. 기약이 없는 걸 물었다. 그녀가 돌아오는 건 볼 수 없을 것이다.
"여기가, 나비와 절친이라던 정찬우 도령의 가게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집안이 아마, 이 근방에서 가장 재력이 있다는 가문이지요? 언제 한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분야에 사업을 뻗으신다고."
그녀의 호위무사가 대신하여 대답했다. 진환은 바라만 봐도 좋은 그녀의 얼굴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살면서 이런 감정, 이런 생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이 서툰 모든 것을 진환은 사랑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 어울리는 꽃이 있는 반지를 사서 주었다. 그걸 망설이며 바라만 보고 있는 그녀의 손에 직접 반지를 끼워주었다.
"감사합니다."
"…다음엔 더 좋은 것을 사드리겠습니다."
그게 이루어질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단 하나만 확실했다. 그걸 주는 이는 이제 진환이 아니게 될 것이다. 진화은 잠시 애처로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시장이 끝났다. 그녀와의 만남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진환은 아쉽고 미안한 마음을 어렵게 어렵게 숨기다가 그녀에게 말했다.
"전에 약조했던 게 갑자기 마음에 걸려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나비가, 저와 함께 꼭 시장을 둘러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억해주시고 약조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별궁에 돌아오실 때에 귀띔을 주시면,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럼."
끝까지 그녀를 속이는 말을 했다. 진환은 그녀에게 보이지 않게 잘게 입술을 떨었다. 서로의 인사를 받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시 돌리지 못했다.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 모든 걸 제치고 달려가 와락 안아버릴 것 같았다. 진환은 그녀의 온기가 닿았던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미안했다. 이 손으로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음에 슬펐다.
딱 한 번 숨을 쉰 적이 있는 곳인데도 평생을 지내온 자리처럼 익숙했다. 그 때처럼 꽃이 하늘거리는 언덕은 아침에 봐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진환은 어떤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말을 하면 그녀가 보고 싶을 것 같았다.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는 장소에서 준회는 계속 갈등하고 있었다. 군주를 죽일 수 없다. 칼을 찌르고 심장을 토맥내 죽일 수 없었다. 그녀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태양을 저물게 할 용기는 애초부터 지운 상태였다. 그토록 바라던 일이 바로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준회는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진환은 이내 삶에 대한 것들을 모두 정리했는지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 둘은 어느 내리막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태양이 그림자에게 전했다.
"그동안 나를 보필해주어 고맙구나. 하나 약속해야 한다. 내 동생들은 건드리면 안 된다."
"……."
"…어리석은 잘못으로 네 부모를 불에 데이게 해 미안하다. 꼭, 안부를 전해드리겠다."
"……."
당신의 아들이 끝까지 나를 잘 지켜부었다고. 진환은 말을 마치고 조금 쑥맥처럼 웃었다.
"나비를 부탁하마."
"……."
"쉽게 떠나 날아가지 않도록…. 부디 부탁하마."
그 속 마음을 꺼내면서 진환은 아마 조금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천천히, 그러나 치밀하게 주비의 소속들이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적 드문 곳에, 이제는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무리들뿐이었다. 그들 중에는 조금 낯선 인상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주비와는 다르게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검을 빼고 있는 중이었다. 정 씨의 부름을 받고 온 사람이다. 검은색 무리에게 점점 포 위 당하고 있는 진환은 가만히 있었다. 묵묵히 죽음을 기다리는 그의 표정은 그렇게 다양하지 않았다. 멈춰 있었다. 그녀의 대한 생각으로, 멈춰 있는 중이었다.
검이 목 끝을 가리켰을 때, 준회가 빠르게 그 잔상을 치워냈다. 갑작스런 행동에 주비는 일순간 공황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검이 어디론가 날아갔다. 준회가 세자의 몸집을 막아서며 그 중심인 묘목을 노려봤다.
"비키거라. 준회야."
"…저하를 건드리실 수는 없습니다. 제 군주의 숨을 거두려거든 저를 먼저 치셔야 할 겁니다."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
"……."
"비키거라."
준회는 듣지 않은 척했다. 미동 없이 서 있는 그를 바라보다가 묘목은 억센 손으로 그 뺨을 내려쳤다. 강한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간 준회는 잠시 비틀거렸다. 이렇게 해도 비키지 않을 것인지를 시험하던 묘목이 한 번 더 뺨을 치기 위해 높이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 손길은 진환의 붙잡음으로 인해 무산됐다.
"그 아이에게 손 대지 마시오."
"태양과도 같으신 세자저하, 죽음을 앞두시고 그런 말이 나오십니까? 참으로 오지랖이십니다."
뒤에서 비아냥대는 소리에도 진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곧 거칠게 진환을 뿌리친 묘목이 괴상하게 웃었다. 그걸 바라보는 진환의 얼굴에서 찬 냄새가 났다.
어느 틈엔가 검을 가지고 돌아온 그가 진환에게로 팔을 뻗었다. 그리고 살이 파인 건 준회였다. 대신 검을 맞은 그의 몸이 잠시 약하게 떨렸다. 콸콸 쏟아지는 피에 진환의 눈이 커졌다. 올바른 초점을 잃은 준회의 눈이 어지럽게 방황하고 있었다. 피 묻은 검을 쥔 그가 당황하면서 쓰러지는 준회를 쳐다봤다. 이내 그는 망설임 없이 다시 칼을 휘둘렀다. 정확히 심장을 찌른 검에서 두 개의 피가 뒤섞이고 있었다.
힘겹게 정신을 차린 준회가 황급히 진환의 몸을 확인했다. 천천히 눈이 감기고 있는 모습에 울음부터 나왔다. 안 된다. 죽으면 안 된다. 이건 아니었다. 피 섞인 손으로 세자의 뺨을 두드리는 움지임이 느렸다.
"…저하, 왜 눈 뜨지 못하십니까. 저는 나비를 맡아드릴 수가……. 저하, 저하……. 세자저하……."
태양의 광채가 조금씩 멎었다. 준회는 그 이후로 처음 울고 있었다. 뒤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묘목이 무어라고 준회에게 지시하고 있었으나, 흐린 정신 안에서 그는 오로지 군주의 이름만을 부르고 있었다. 붉게 변하는 그에게서 빛이 없었다.
조선의 태양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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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6233입니다. 낮에 인사를 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늦게 올려드려 죄송합니다. ㅠㅠ 의도치 않은 분량 폭발에 읽는 데 지루하진 않으셨을지 걱정이네요... 흐유 저는 대체 잘하는 게 뭘까요 ^^ ㅋㅋㅋ 오늘 역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 많지만 ㅠㅠㅠ 나중에 후기에서 털어놓기로 하고! 많은 말하지 않겠습니다. 관심 가져주시고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사랑해요... (손가락 하트)
진환이는 참 좋은 왕이 됐을 텐데... 결국엔 저물었군요... 진환아 가지마 ㅠㅠㅠㅠㅠ 제목의 伯은 본문에도 한 번 나온 적이 있는 글잔데 맏이를 뜻하는 글자랍니다!
BGM은 공주의 남자-끝내 입니다. 추천해주신 눈물점 님... 더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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