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비 와요."
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기분이 묘해진다.
괜히 옆에 앉은 석진의 등허리를 와락 감싸안는다.
"오늘 따라 왜 그래."
"그냥."
고개만 살짝 들어 밖을 보니 세상이 회색 빛이다. 도로 위를 빠르게 달리는 하얀 차도 회색 빛, 저기 지나가는 빨간 우산도 회색 빛, 쏟아지는 비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으며 걸어가는 사람의 표정마저 회색 빛이다. 기분이 좋다. 단색으로 밖에 안 보이는 창 밖인데, 회색으로 밖에 안 보이는 풍경인데. 심지어 비가 들어오지 않는 이 방 안 마저 어두침침한데도 기분이 좋다.
사실 다 거짓말이야.
아무렇지 않게 그를 감싸고 있는 내 팔이 싫다. 나른해지고 눈이 감긴다. 이런 내가 참 싫다. 할 일이 많은데 몸을 일으킬 수 없다. 기분이 나쁘다. 아아 오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계획 돼있던 일들을 잊으려 다시 그의 넓은 등에 얼굴을 묻는다.
내 시야를 가득 채우는 부드러운 분홍색 니트.
"너."
"……."
"아직도 나 좋아,"
"무슨 소리야."
"근데 왜 이러고 있어."
"싫으면 일어날게요."
라고 말 하면서도 내 몸은 반대로 행동했다. 꿋꿋하게 자세를 유지했다. 그도 딱히 싫지 않는 눈치였다.
"왜 갑자기 궁금해해요?"
"그냥."
아까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석진이다.
"아직도 좋아해요."
"……. 뭐를."
"뭐가요. 물어봤었잖아요. 아직도 좋아한다니까."
"누구를."
"아, 진짜."
"나 진지하다. 빨리 말 해. 몸 일으키기 전에."
"하."
내가 누군가를 끌어안고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걸 기억하고 있구나. 예나 지금이나 아무렇지 않게 나 놀리는 건 그대로다.
"그래서. 아직도 뭐."
"좋아해요."
"누구를."
"너."
"내가 니 친구냐."
갑자기 저를 감싸던 내 팔을 풀고 나와 마주보고 앉더니 나를 안았다.
방금까지의 나처럼 내 허리를 감싸고 꽉 안았다. 그러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고마워."
"뭐가요."
"그냥."
"뭐가 그냥인데."
"음……. 너라서?"
"아 진짜 오글거려."
축축하던 비는 조금씩 촉촉해지고 있다.
동시에 저기 밖에 회색 간판은 하얗게, 비에 흠뻑 젖은 회색 니트는 빨갛게, 으슬으슬 떨며 걸어가는 사람의 표정마저 점차 발그레하게 모든 게 제 색을 찾아가고 있다.
본래의 빛깔로 돌아가는 밖과 달리 여전히 이 방은 어두침침하지만 나쁘지 않다. 오히려 아늑하게 느껴진다.
기분이 좋다.
이번엔 정말로.
그냥, 기분이 좋다.
오랜만이에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