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13 (사랑=집착)
오랜만에 마주하는 눈동자. 오랜만에 느껴보는 시선. 오랜만에 지어보는 미소. 모든 것이 오랜만이었다.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치미는 반가움에 와락 끌어안고도 싶었지만, 애써 본능을 꾸욱 누르곤 그저 씨익 웃어보였다. 너도 내가 반갑지. 몇 년 만에 마주하는 내 얼굴, 그동안 보고 싶었지. 예쁘네. 더 예뻐졌다. 더 여성스러워졌다.
"어디 갔다 와? 편의점? 음료 아까워서 어떡해. 다 쏟아졌네."
바닥 위를 나뒹구는 캔을 흘끗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딱딱한 아스팔트에 이미 긁히고 흠집이 난 캔은 한껏 찌그러져 있었다. 캔을 지그시 눌러 밟곤 다시 시선을 옮겼다. 날 바라봐오는 눈동자가 바들바들 떨린다. 까만 눈동자는 어째 투명해 보이기도 한다. 저 투명한 눈동자 속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김종인 생각? … 아무 표정도 걸리지 않은 얼굴엔 분명 많은 감정들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 뽀얀 얼굴을 쓰다듬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모습에 의미 모를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방금까지 내 눈을 마주하고 있던 여린 시선이, 이젠 아예 아래 쪽을 향하고 있다. 바닥에 별이라도 박혔나. 보물이라도 숨겨져 있나. 내가 뭘 했길래. 난 그저 네 얼굴을 한 번 쓰다듬었을 뿐인데. 왜 피하지. 왜 뒷걸음을 치지. 왜 고개를 떨구지.
"나 안 보고 싶었어?"
"……."
"○○아,"
"……."
"안 보고 싶었냐고."
"…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
"소름이… 끼쳐서…."
어떻게 알았냐니. 다 아는 수가 있지. 다 아는 수가 있어. 소름이 끼친다는 네 말이 조금 어이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다. 목소리는 예전 그대로네. 목소리 예쁜 건 한결 같다. 이런 좋은 목소리를, 김종인은 매일 듣겠지. 뽀얀 피부와 아기 같은 손을, 김종인은 매일 만지겠지. 적당히 빨갛고 작은 입술에, 김종인은 짐승마냥 달려들어 제 입술을 부벼대겠지.
씨발.
"너랑 나랑 이렇게 같이 있는 거, 싫어하겠지?"
"……."
"종인이가 분명 싫어할 거야."
내가 네게 입을 맞추면, 김종인은 얼마나 큰 화를 낼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질색을 하던 새낀데-. 내가 네 손을 잡으면, 포옹을 하면, 입을 맞추면, 같이 자면- 김종인은 얼마나 큰 화를 낼까. 궁금하다. 보고 싶어. 열받게 만들고 싶어. 불안한 마음에 잠을 설치게 만들고 싶어. 더 안달나게, 질투를 넘어선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어. 망가졌으면 좋겠다. 여자 하나에 미쳐 서서히 망가져가는 꼴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들어가 봐. 종인이가 기다리겠어."
"… 네?"
"종인이 연락 계속 오던데, 아까부터."
"……."
"나중에 또 올게."
짐짓 웃어보이며 먼저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홀로 걷는 밤길이 조금은 서늘하면서도 재미가 없었다. 집에 가서 뭘 할까. 술이나 마실까.
[시험 공부 중이냐? 너희 집 간다.]
묵묵히 걸음을 옮기다 휴대폰을 꺼내들어 도경수에게 간단한 문자 메시지를 전송했다. 원체 답장을 잘 하지 않는 녀석인지라, 답장이 올 거란 기대는 조금도 없었다. 여기서 그리 먼 거리에 위치해 있지 않은 녀석의 집은 버스로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걸어 갈까, 버스를 탈까. 그냥 버스를 타야지. 하도 자주 다녀 이쪽 길은 익숙했지만, 그래도 혼자 걷는다는 건 쓸쓸했다.
*
'선생님, 여긴 또 무슨 일이세요?'
'오늘은 어쩐 일로….'
'… 또 오셨어요?'
몇 년 전, 집 앞에 우뚝 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내게 건네오던 몇 마디들. 내 대답은 언제나 한결 같았다. 그냥. 보고 싶어서. 그러나 이런 내가 부담스러웠던 건지, 아이는 슬슬 나를 피하기 시작했다. 매일이다시피 집 앞을 찾아가도 얼굴을 볼 수 없던 날이 많았다. 전화가 되기는 커녕, 아예 문자조차 확인하지 않는 듯했다. 아니, 확인하고 씹는다는 게 더욱 정확한 표현이겠지.
네가 나를 안 만나주는데, 그럼 안 가야지. 다른 방법을 노려야지. 어떻게 하면 날 만나줄까. 어떻게 하면 내 얼굴을 봐줄까. 다른 방도를 찾아야지.
한동안 그저 집에서 가만히 휴식을 취했다. 복학 준비도 해야 했고, 나름의 여러 할 일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며칠 얼굴을 못 봤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괜히 마음이 불안하면서도 답답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누군가 내 것을 탐하고 있는 듯한 찝찝한 느낌도 들었다. 정말이지 느끼 싫은 감정이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내가 이런 감정을 왜 느껴야 해. 내가 왜-.
'정시 결과는 나왔어?'
'… 네, 국문학과요.'
'아, 그래? 학교는 만족하고?'
'네, 만족해요. 감사합니다.'
그때,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모른다. 왜 학과만 물어 봤을까. 왜 학교가 어딘진 묻지를 않았을까. 그렇게 내 자신이 병신처럼 느껴졌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생각이 딱 거기까지밖에 미치지 않는 새끼.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멍청한 새끼. 나에 대한 자책을 하며 며칠 간 눈에 불을 켜고 내 휴대폰을 뒤졌다. 어딘가 흔적을 남겨뒀겠지. 어딘가 하나쯤은 흔적이 있겠지. 하지도 않는 페이스북까지 깔아 아이의 계정을 찾았다. 그리곤 밤새 기록을 뒤져가며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캡쳐해 저장을 했다. 어젠 저녁으로 참치김밥을 먹었구나. 오세훈이라는 애는 어떤 애지. 예상 외로 대학이 어딘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이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도경수와 같은 학교- 게다가, 같은 국어국문학과였다. 세상은 참 좁구나. 어떻게든 이어질 수밖에 없구나. 너와 나 사이에 미세한 연결고리라도 존재하고 있던 걸까.
그날 밤은 유난히 잠이 잘 왔다. 두툼하기만 할 뿐 그 외엔 아무런 장점이 없던 이불이 제법 포근하게만 느껴지던, 어느 봄 날의 밤이었다.
'야, 너랑 같은 학교래. 게다가, 같은 학과.'
'누가.'
'누구겠어.'
'그 고딩?'
'어.'
'그렇구나.'
잔뜩 들떠 말을 하는 내 모습에, 도경수의 반응은 시큰둥하기만 했다. 이미 예상한 반응이긴 하지만서도 은근한 섭섭함이 느껴져 작게 인상을 굳혔다.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면, 도경수는 당시 휴학 중이었다. 은근 마주칠 기회가 많을 거라 생각했던 내 예상과는 달리, 둘 사이엔 일말의 접점도 없었다. 오랜만에 얼굴 좀 보고 싶은데 학교로 찾아가 볼까- 라는 생각이 수없이 치밀었지만, 차마 그럴 순 없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는 바빴다. 학교 일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치여 살기 바빴고, 잠깐이나마 찾아가 얼굴을 볼 여력조차 없었다. 그러나 마음만은 행복했다. 제법 쉽사리 학교를 알아냈고, 내게 간단히 소식을 전해줄 뜻밖의 인물도 생겼다.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대략 3년을 보냈다. 사실 학교 일에, 교생 실습에 너무나도 바빠, 내게 3년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만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나름 기대를 많이 했던 교생 실습은, 꽤나 실망스러웠다. 내가 맡은 반은 남학생 열여덟 명과 여학생 열네 명으로 이루어진 평범한 학급이었다. 한 달 동안 함께 지낼 남자 교생선생님이셔-. 간단히 나를 소개하던 담임선생님은 30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턱에 삐죽삐죽 나와있는 까칠한 수염이 제법 지저분한 인상을 그리고 있었다. 와아아- 교실 안으로 발을 들이자마자, 학생들은 저들끼리 약속이라도 한 듯 크나큰 환호성을 터뜨려왔다. 그저 어색히 웃으며 내 소개를 하곤 가만히 학생들을 훑기 시작했다.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반인가. 사고만 치기 바쁜 양아치들을 어떻게든 졸업만이라도 시키고자 따로 만들어 놓은 교실인가. 머릿속엔 무수한 생각들이 피어올랐다. 여학생들은 하나같이 다들 치마가 짧으면서도 타이트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밝은 갈색의 긴 머리 여학생이 가장 눈에 들어왔다. 굵게 넣어진 웨이브는 헤어 스타일을 더욱 풍성하게 보여주었다. 제법 덩치가 있는 남학생의 무릎 위에 앉아 풍선껌을 불고 있는 모습은, 내 시선을 끌기 충분했다. 남학생의 손은 여학생의 반쯤 드러난 허연 허벅지 위를 더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일 것만 같았다.
'선생님은 여친 있으세요?'
'쌤, 첫 경험은요?'
상담을 신청해오는 학생들은 모두 여학생이었다. 말이 상담이지, 쓸모라곤 단 하나도 없는 봉사활동과도 같았다. 특히, 마지막에 만난 세 명의 여학생들이 가장 최악이었다. 다짜고짜 찾아와 그룹으로 상담을 받고 싶다며 되도 않는 애교를 부려오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이 운동장으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친밀하게 팔짱을 껴오는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다리라인을 과시라도 하듯 일부러 두 걸음 앞에서 걷는 여학생도 있었다. 속옷이 보일락 말락 하는 게, 꽤나 한심하게 보였다. 그들의 목적은 결코 대학 입시 상담이 아니었다. 대학, 수능, 공부에 대해선 단 1퍼센트의 관심도 갖고 있지 않은, 말하자면 생 양아치였다. 문학의 '문'자도 모르는, 수학 공식보다 담배 종류를 더욱 빠삭하게 외우고 있는, 그저 병신 머저리였다.
'담배나 끊고 와.'
딱딱한 한 마디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보이던 그 가식적인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게 순수한 눈망울을 가졌으면서 왜 마음속은 그리도 썩어 문드러졌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에 관해 동정심이라든가 안타까움, 불쌍함 등은 느껴지지 않았다. 인생은 자기 마음대로 꾸려나가는 거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면 되는 거야. 니네 인생이지, 내 인생 아니야. 니네 인생, 니네가 알아서 살아.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 거야.
그렇게, 졸업도 했다. 졸업을 했으니, 그저 집에서 놀고 먹는 백수가 된 것이나 다름 없는 셈이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잠시라도 네 생각을 안 했던 적이 없어. 우리, 언제 볼까. 언제쯤 만날 수 있어-.
더이상 주저할 순 없을 듯했다. 그냥 실행에 옮기지 뭐. 이제 남는 게 시간인데, 24시간 중 몇 시간을 투자해봤자, 그러고도 시간은 아직 충분히 남아있지.
까만 스냅백을 푸욱 눌러쓰곤 집을 나섰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걸, 이젠 천천히 하나씩 보여줄 때였다. 제대로 된 과정을 밟았다면 지금 4학년인 게 맞는 것이지만, 넌 2년 휴학을 했지. 그러니 지금은 2학년. 이것도 다 페이스북을 뒤져 알아낸 정보였다. 넌 결국 김종인이랑 사귀게 되었지만, 상관 없어. 날 좋아하게 될 거야. 오늘 다행히 공강이 아니네. 개강하고 듣는 첫 수업일 테니, 예정 시간보단 일찍 끝나겠다. 버스에 올라타 페이스북에 올려진 시간표를 망설임없이 저장했다. 이렇게 멀리서나마 네 하루를, 네 시간을 알 수 있다는 게 마냥 뿌듯하기만 했다.
예정 시간보다 일찍 끝날 거란 내 예상이 딱 들어 맞았다. 학교 정문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조그마한 카페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홀짝이고 있을 무렵, 유리창 밖으로 익숙한 모습 하나가 보여왔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작스레 심박수가 증가했다. 황급히 일어나 반쯤 남은 아메리카노를 대충 쓰레기통 속에 집어넣곤 카페를 나섰다. 네 걸음이 빠른 건지, 내 걸음이 느린 건지-. 네가 향하던 버스 정류장으로 가기 위해 신호등을 건너고 나니, 넌 방금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 빠르게 뛰어 덩달아 버스에 몸을 실었다. 날 보지 못한 건지, 넌 휴대폰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시킨 채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등학생일 때와는 달리 제법 화장기 있는 모습이 정말이지 예쁘게 보였다. 훨씬 예뻐졌네. 진짜 예쁘다-. 일부러 맨 뒷자리에 앉아 네 뒷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몇 년 만에 보는 모습이, 마치 꿈만 같았다.
내릴 정류장에 다다랐는지, 벨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널 보며 같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장 집으로 갈 줄 알았는데 웬 서점으로 걸음을 옮기는 네 모습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제법 멀찍이 떨어져 네 뒤를 밟았다. 그리곤 더욱 멀찍이 떨어져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펼쳐 보았다. 이 책은 2학년 때 꽤나 애를 먹었던 책. 이 책은 독후감 쓰기가 유난히도 어렵던 책. 표지가 다양한 책들을 눈으로만 스윽- 훑다 다시 시선을 옮겨 너를 바라보았다. 잠시 한 눈을 팔고 있던 탓일까, 네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다시금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목격해 버리고 말았다. 언제 온 건지 모를 김종인의 뒷모습에 가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백허그 자세였다. 그 다정한 모습에, 잠잠하던 머릿속이 순간 폭발하는 것도 같았다. 뒤이어 볼에 입을 맞추는 모습까지도, 전부 보기가 싫었다.
그렇게 계속 뒤를 밟아 알아낸 자취방. 이런 곳에서 자취를 하는구나. 자주 찾아와야지, 자주.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매일이다시피 출석 도장을 찍어야지. 잠깐이라도 얼굴을 봐야겠어. 오랜만에 보니 더 좋다. 비록 옆엔 방해꾼이 있지만, 그래도 네 얼굴을 보니 좋아.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랄까. 그냥 행복하다.
'새끼야, 넌 왜 전화를 이제서야 받아.'
- 수업 중이었어.
'찾아 봤어? 내가 생김새 말해줬잖아.'
- 몰라, 누군지.
'씨발….'
친구라는 놈이 이렇게 무성의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놈이었다. 듣는 수업마다 강의실 안을 샅샅이 살피며 내가 말해준 생김새의 여자가 있는지 보고를 해달라 그렇게 부탁을 했건만, 돌아오는 답이라곤 무미건조하기만 했다. 정말 모르는 건지, 아님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는 건지…. 그래도, 일단 도경수라는 접점이 있다는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은근슬쩍 접근할 이유라도 생긴 셈이니-.
부모님의 권유로, 며칠 전엔 소개팅을 나갔다. 맞은 편에 앉은 상대는 꽤나 수줍음이 많은 듯 보이는, 여성미를 한껏 갖춘 여자였다. 나보단 두 살 어렸고, 바이올린을 전공으로 삼았다 했다. 대화 중에도 내 눈을 바라보지 않던 여자는 단 한 번도 나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꽤나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별다른 흥미와 관심없이 그저 의무적으로 나간 소개팅이니 만큼 별로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저…, 연락… 할게요.'
어벙벙한 어투로 건네오는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먼저 등을 돌렸다. 그리곤 휴대폰을 꺼내 그 여자의 번호로 왔던 문자 메시지 목록을 깔끔히 지웠다. 흔적조차 없이-. 그 후로도 몇 개의 문자 메시지가 왔지만, 일체 무시를 했다. 더이상 아무 볼 일도 없는 사람이니, 그런 행동을 취하는 게 마땅한 것이었다. 거절하는 방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아직 어색하긴 하지만, 난 내 생각에 뚜렷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주 찬찬히, 서서히-.
지금껏 만났던 여자들은 내게 사랑이 아닌 잠자리를 요구해왔다. 찬열아, 넌 날 사랑하지 않나 보구나. 우린 왜 스킨쉽에 진전이 없어? 날 사랑하지 않아? 질리도록 들은 말이었다. 그런 말을 해올 때면 난 항상 같은 답을 건넸다.
'마음에 안 들면, 네가 날 떠나면 돼.'
'마음에 안 들어? 그럼 날 떠나.'
넌 참 신기해. 유일한 사람이야, 내게 어떠한 걸 요구해오지 않는-. 왜 넌 내게 사랑을 갈구하지 않지. 왜 잠자리를 요구하지 않지. 너라면 모든 걸 줄 수 있는데. 난 너라면 뭐든 줄 수 있는데.
*
그렇게 창밖에 시선을 둔 채 깊은 생각을 하고 있다 보니, 어느새 버스는 내려야 할 정류장에 다다라 있었다. 여유로이 벨을 누르곤 곧이어 멈춰선 버스에서 내려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꽤 늦은 시간에 이렇게 누군가의 집으로 향한다는 게 사실은 민폐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몇 분을 걸어 도착한 어느 아파트 단지. 금세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곤 7층 버튼을 꾸욱 눌렀다. 엘리베이터 안의 탁한 공기가 온몸을 짓누르는 것도 같아 답답했다. 여러 사람들의 손자국이 가득 새겨진 거울과, 그런 거울의 군데군데 붙여진 중국집, 피자집, 치킨집 스티커가 꽤나 지저분하게 보였다. 7층입니다. 곧이어, 상투적인 여자의 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도경수의 집을 와보긴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슬쩍 손을 뻗어 초인종을 눌렀다.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들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현관 문이 열렸다. 열린 문의 틈새로 녀석의 모습이 보였고, 그저 말없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공부 중?"
"어. 내일이 마지막이다."
"소주 있냐."
"오자마자 그 소리냐. 너 먹을 건 없어."
틱틱대듯 내뱉어진 말과는 달리, 부엌으로 걸음을 옮기며 소주병과 소주잔을 꺼내드는 녀석의 행동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줄 거면서-. 제법 오랜만인 녀석의 집 안을 슬쩍 훑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이쪽으로 걸음을 옮겨온 녀석이 내게 잔을 툭- 던졌고, 가볍게 한 손으로 잔을 받았다. 안주는 없어. 딱딱하게 말을 내뱉은 녀석이 바닥에 털썩 앉았다.
"오늘 걔 만났어."
"……."
"맨날 멀리서 보기만 하다가, 오늘은 가까이에서 직접."
"자취방을 알아? 네가 어떻게 알아."
"말하자면 길어."
"뭐래, 걔가."
"소름 끼친대."
"……."
"……."
"맞아. 너 소름 끼쳐."
짙은 초록색의 병뚜껑을 열어 대충 테이블 위에 내려놓은 뒤, 병을 기울이며 조그마한 잔에 술을 따랐다. 투명한 액체가 소주잔 너머로 살짝 넘쳐 흘렀지만, 상관은 없었다. 느리게 눈을 꿈뻑이며 나를 유심히 바라보고만 있던 도경수의 입술은 한동안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렇지 않게 소주잔을 들어 한 입에 술을 털어 넣었다.
"솔직히, 기분 존나 더러워."
"왜."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가 안 돼."
"……."
"……."
"네가 말하는 애-. ○○○, 맞아?"
"……."
"나랑 교양 같은 거 들어. 최근에 조별과제도 같이 했고."
"… 그걸 왜 이제 말해."
"나도 확신이 없었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곤 소주병을 들어 제법 길게 한 모금을 마신 뒤 다시 병을 내려놓는 도경수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뱉었다. 그러자, 다시금 입술을 떼 말을 건네오기 시작한다.
"잘 어울리더라, 남자친구랑."
"……."
"박찬열-, 알아? 넌 불청객이야."
"……."
"언제까지 네 멋대로 행동할래."
"… 도둑놈한테 빼앗긴 기분이야."
"지랄하지 마."
"……."
"애초에 네 것이 아닌데 도둑놈한테 빼앗기긴 뭘 빼앗겨."
"……."
"오히려 도둑놈은 너지."
단호하면서도 단조로운 어투에, 비소를 지어보였다. 왜 내 뜻을 몰라주지. 애초에 내 것이 아닐 건 뭐야. 왜 내 것이 아닌 건데.
"왜 넌 내 편이 아닌 거야."
"난 누구의 편도 아니야. 이게 편가름을 할 정도로 가치있는 일도 아닌 것 같고,"
"……."
"근데, 네 편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넌 잘못된 길을 걷고 있잖아."
"……."
"좋아한다며. 일방적인 집착은 사랑이 아니지. 넌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
"좋아한다면 양보를 할 줄도 알아야지."
"왜 양보를 해."
"……."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
"알아서, 내 마음대로."
"넌 존나,"
"……."
"싸이코 같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담뱃갑을 집어드는 녀석의 행동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던힐 라이트. 아직도 저거 피우네-. 취향 한 번 한결 같은 새끼.
"포기해."
"뭐를."
"알면서 왜 물어."
"그러는 넌 내 대답 뻔히 알면서 왜 그딴 말을 지껄여."
"……."
"……."
"난 진심으로,"
"……."
"너랑 인연을 끊고 싶다."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재떨이에 꽁초를 대충 비벼끄던 녀석이 제법 진지하게 말을 건네왔다. 그러나, 그런 말에도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잔에 담긴 술을 들이키기만 할 뿐, 녀석의 말에 어떠한 대답도 내뱉지 않았다. 그런가 보다. 그렇구나. 포기하라는 말,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라는 거 뻔히 알면서. 내 인생에 간섭할 시간에 네 애인이나 만들지 그래.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지금껏 연애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너보단, 그래도 내가 정상적이겠지. 들리지 않을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다시 잔에 소주를 가득 채웠다. 하지 말라는 말은 내게 하나도 와닿지 않았다. 어차피 할 거니까. 하고 싶은 건 해야지. 난 그렇게 배워왔거든. 한 번 뿐인 인생, 하고 싶은 건 다 하면서 살 거야. 빼앗는다는 게 아니야.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다는 건 더더욱 아니지. 내가 찜해놨으면 그건 내 거인 거야. 김종인이 빼앗아갔어. 내가 찜해놓은 내 것을 김종인이 앗아갔어.
"다 전해줄게. 네가 방금 했던 말들."
무미건조한 어투로 말을 건네오는 도경수의 얼굴엔 그 어떠한 표정도 걸려있지 않았다. 전혀 감흥 없는, 위압감이라곤 단 1퍼센트도 느껴지지 않는 멘트였다. 그런 녀석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
"상관 없어."
"……."
"어차피 내 목적은 하나야."
무심결에 소주잔 쪽으로 손을 뻗다 그만 병을 건드리고 말았다. 소주병은 쿵-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찍고 데굴데굴 굴러 바닥으로 직하했다. 찢어질 듯한 소리를 내며 옆 부분이 살짝 깨졌고, 틈새로 맑고 투명한 액체가 콸콸 쏟아져 나왔다. 이미 바닥을 흠뻑 적셔버린 투명한 액체를 묵묵히 내려다보다, 작은 유리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유리 조각은 제법 투박한 모양새였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도경수의 시선이 가득 느껴졌다. 그런 녀석을 흘끗 바라보다, 아무 생각 없이 유리 조각으로 천천히 손등을 그었다. 날카롭고도 찢어질 듯한 느낌이 영 이상했다. 순식간에 맺히기 시작하는 핏방울에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 미친놈이냐?"
그냥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프다는 느낌도, 따갑다는 느낌도, 전혀 들지 않았다. 왜 손등을 그었냐고 물으면 난 할 말이 없었다. 그냥. 그냥 그었어. 단순히 차오른 호기심 때문도 아니고, 의미 모를 자괴감이 느껴져서도 아니야. 그냥 나도 모르게-. 난 감정이 없는 사람인가. 아닌데-. 김종인과 같이 있는 꼴을 보면 미치도록 화가 나는 걸로 보아, 난 감정이 있는 사람인데.
"야, 닦아. 피 나잖아."
인상을 잔뜩 굳힌 채 휴지 서너 장을 던져주는 도경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얇디 얇은 휴지 몇 장으로 손등을 감싸며 짐짓 웃어보였다. 분명 웃고는 있지만, 얼굴 근육이 그리 유연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박찬열."
"왜."
"내가 보기엔,"
"……."
"넌 감정이 아예 없는 게 아니라, 부족한 것 같아."
"……."
"병원을 가보는 거 어때."
가만히 도경수를 바라보았다. 나를 정신 이상자로 취급하는 것도 같은 제법 신랄한 한 마디에,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왜 날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지. 난 분명 정상인데.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냐."
왜 날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지. 난 분명 정상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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윽.. 저번 글도 초록글..☆ 다들 정말 감사드립니다 :) 저녁 시간인데 밥은 드셨는지요. 전 배부르게 먹고 왔습니다ㅠㅠ 아직 안 드신 분 계시다면 꼭 챙겨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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