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08 (로망 채우기)
학교를 다니게 된 지도 어느덧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색하고 낯설게 느껴질 거라 생각했던 학교는, 불과 일주일 만에 내 집이라도 된 것마냥 익숙하고 편한 장소가 되어 있었다. 이젠 익숙해져버린 일상이 따분하기도 했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내 마음에 불을 지피는 듯한 김종인 덕분에 하루하루가 늘 새롭고 행복했다.
오늘은 금요일. 공강이었다. 5일 중 단 하루,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 날인 오늘은 마음껏 늦잠을 자도 되는 정말이지 행복한 날이었다. 주말 못지 않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오늘은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해도 재미있고 행복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은 웬일인지 이른 시간에 눈이 뜨였다. 마음 같아선 저녁까지 늦잠을 자고도 싶었지만, 일찍 잠이 깨버린 이상 그럴 순 없었다. 아침 밥은 꼭 챙겨 먹으라는 김종인의 문자 메시지에, 어쩔 수 없이 밥을 해야만 했다. 그리곤 된장국에 밥 한 공기를 말아 맛있게 뚝딱 해치운 뒤 인증샷까지 찍어 녀석에게 전송을 했다. 풀강이라며 시간표를 찢어 없애버리고 싶다 입이 닳도록 말하던 녀석은 늦게까지 답이 없었다. 아마 수업 중인 듯했다. 설마 졸고 있진 않겠지….
*
딱히 할 게 없어 침대에 드러누운 채 뒹굴거리기만 하다, 책상 앞에 앉아 과제를 하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만 같던 과제는 생각보다 빠른 시간 안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었다. 대략 한 시간 정도 걸릴 거라 예상했는데… 40분 만에 끝나버리고 만 과제물을 내려다보며 기지개를 쭈욱 켰다. 그리곤 가만히 턱을 괸 채 찬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김종인이 마칠 시간까지 도대체 혼자 뭘 하며 시간을 때워야 할까. 쇼핑몰을 훑는 것도 이젠 지겹고, 휴대폰 게임은 재미가 없고….
"……."
그러다 문득 떠오른 좋은 생각에,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옷장에서 옷을 꺼내곤 서둘러 하나씩 갈아입었다. 그리곤 화장대 앞에 앉아 간단히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 시각은 1시 반. 제법 알맞고 적당한 시각이었다.
*
찬바람이 살짝 불긴 했지만, 제법 따뜻한 날씨였다. 대략 20분을 걸어 도착한 마트 안은 꽤나 한산했다. 뭘 해주면 좋아할까, 어떤 걸 해주면 맛있게 잘 먹어줄까 생각하며 마트 안을 이곳저곳 살피기 시작했다.
사실 전부터 꿈꿔오던 로망과도 같은 것이었다. 남자친구의 집이 비어있는 사이 몰래 찾아가 우렁이각시라도 된 양 맛있는 밥을 차려주는 것. 그래서, 공강인 오늘을 이용해 잠깐이나마 장을 보고자 마트를 들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집에서 간단한 계획 좀 세우고 나올 걸 그랬다는 후회감이 스멀스멀 밀려오기 시작했다. 널리고 널린 게 음식 재료들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음식을 만들어 주면 맛있게 잘 먹어줄까….
마지막으로 다시 한 바퀴를 돌며 코너들을 꼼꼼히 훑고 나서야 여러 재료들을 고를 수가 있었다. 길고 긴 고민 끝에 결국 고른 메뉴는 오므라이스였다. 제일 자신있는 메뉴이기도 했고, 누구나 부담없이 먹어줄 법한 메뉴이기도 해서 선택한 것이었다. 여러 재료들이 담긴 비닐봉투는 제법 묵직하게 느껴졌다.
*
버스에서 내려 나름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두어 번 가본 적 있는 녀석의 자취방이 아직 어색하긴 했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언제 도착한 건지 모를 김종인의 문자 메시지가 세 개나 있었다.
[졸려ㅕ 줃겠다]
[뭐해]
[자고 싶ㄷ어ㅓㅓㅓ]
졸린 상태로 보내온 문자 메시지엔 귀여운 오타들이 가득했다. 마치 잠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느껴져 살풋 웃곤 천천히 답장을 입력하기 시작했다. 길에선 절대 휴대폰을 만지지 말라며 누누이 말하던 김종인의 단호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떠올랐지만, 그건 이미 전송 버튼을 누르고 난 뒤였다. 수업 중인 녀석에게선 역시나 아무런 답장이 없었고, 어느새 도착한 녀석의 집 앞에 우뚝 서 작게 심호흡을 했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몰래 들어가도 될까, 하는 걱정이 뒤늦게야 밀려왔지만 이미 와버린 이상 돌이킬 순 없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작은 한숨을 내쉬곤 조심스레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비밀번호 입력하는데 가리지도 않네….'
'뭐, 가릴 이유 있나.'
'… 오올-'
'네 생일이랑 내 생일 더한 거야.'
아무렇지 않게 비밀번호에 대해 언급을 해주던 김종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떠올랐다. 곧이어 맑은 음과 함께 잠금장치가 풀렸고, 떨리는 마음으로 현관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리곤 아무도 없는 집에 '실례하겠습니다.'라는 인사말을 내뱉곤 천천히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꽤나 깔끔하게 정돈이 되어있는 거실에 작게 웃음을 짓곤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장을 봐온 재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넣은 뒤 휴대폰 홀드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저녁 준비를 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가만히 식탁 의자에 앉아 골똘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김종인은 5시에 수업이 끝나지. 집에 도착하면 거의 6시가 넘을 테고…. 그럼, 녀석이 올 시간에 맞춰 요리를 시작하면 되겠다 생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뗐다. 그리곤 소파에 살포시 앉아 주변을 스윽- 둘러보았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김종인이 혼자 사는 집에 이렇게 몰래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게만 느껴졌다. 녀석이 올 때까지 뭘 하며 시간을 때울지도 막막했다. 분명 TV에선 재미없고 따분한 프로그램들만 방영을 해주고 있을 것이었고, 컴퓨터로는 딱히 할 게 없었다. 그저 허리만 곧추세워 꼿꼿이 앉아있기만 하다 기지개를 켜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심하니 집 구경이나 좀 해볼까, 생각하며 말이다.
"……."
제일 먼저 베란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빨래 건조대엔 티셔츠부터 시작해 여러 옷가지들이 군데군데 널려있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조심스레 옷가지들을 집어들었다. 그러다, 어느 한 지점에서 나도 모르게 행동을 거두게 되었다. 속옷…. 민망한데 속옷은 어떻게 개주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속옷을 제외한 남은 옷가지들을 걷어 팔에 걸었다. 그리곤 다시 거실로 걸음을 옮긴 뒤 바닥에 털썩 앉아 옷가지들을 내려놓았다. 남색 와이셔츠와 하얀 니트…. 내가 가장 좋아라하는 녀석의 옷이었다. 내 옷이었다면 대충대충 빨리빨리 개고 집어넣었을 테지만, 녀석의 옷이라 그런지 왠지 정성들여 가지런히 개주고 싶었다. 이게 아니다 싶음 다시 펴서 예쁘게 개고, 그걸 또 반복하고…. 옷에선 포근한 섬유유연제 향이 났다. 전부터 옆에만 가면 자연스레 풍겨오던 포근하고 따뜻한 향…. 내가 좋아하는 녀석의 향이었다.
간단히 옷들을 모두 개곤 옷장에 하나하나 차곡히 정리해 넣었다. 매일 혼자 빨래를 하고 거실에 앉아 옷을 갠 뒤 이렇게 정리를 하고 있을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가정적인 모습의 김종인이라…. 꽤나 낯선 모습이었다.
구경이나 좀 해볼까 하며 들어선 녀석의 방 안은 제법 깔끔했다. 책상 위엔 여러 프린트들과 책, 전공서적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지만, 책상 위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대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을 주었다.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하얀 침대와 하얀 베개. 그러나 하얀색의 침대와는 어울리지 않게, 이불의 색은 시원한 하늘색이었다. 이불도 가지런히 정돈을 해주곤 살며시 책상 앞에 앉아 녀석의 전공서적을 펼쳐 보았다. 이런저런 필기가 되어있는 페이지들을 보자 조금씩 머리가 아파왔다.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모르겠…
"……."
다시 표지를 덮곤 책꽂이에 책을 쏘옥 꽂아두었다. 그리곤 간단히 책상 위를 정돈한 뒤 가만히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아직 녀석에게선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정말이지 따분했다. 따분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졸음도 밀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딱 30분만 자고 일어나자 생각하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딱 잠들기 좋은 분위기였다. 조용한 방 안에 들리는 소리라곤 시곗바늘 소리가 전부였다. 마음속으로 시곗바늘의 움직임을 외던 난,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정말이지 한 순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에 잠이 들어 버렸다. 딱 30분만 자고 일어나자며 굳게 다짐했지만, 급히 일어나 휴대폰을 확인했을 때 시계는 어느새 6시를 나타내주고 있었다. 한 시간이나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잔 것이었다. 아직 저녁 준비라곤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벌써 녀석이 집에 돌아올 시간이었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뗐다. 얼른 부엌으로 가 뒤늦게라도 저녁 준비를 하기 위해 방문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나 곧이어, 누군가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해오는 소리가 들림와 동시에 현관 문이 철컥- 하고 열려 그대로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빨리 오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굳이 숨을 이유는 없었지만, 왠지 작은 장난기가 발동해 옷장 옆 구석으로 다급하게 달려가 숨었다. 그리곤 무릎을 굽혀 쪼그려 앉곤 작은 소리라도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
그리곤 얼마 안 있어 김종인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성큼성큼, 작게만 느껴지던 발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미세하게 열려있던 문이 활짝 열리며 녀석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피곤한지 반쯤 감긴 눈이 꽤나 귀여웠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발라당 누워 휴대폰을 집어드는 녀석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작게 웃음을 지었다. 마치 스토커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숨어 몰래 훔쳐보는 것도 제법 재미가 쏠쏠했다. 휴대폰으로 뭘 하는 걸까. 또 게임 하나…. 아쉽게도 잘 보이진 않았지만, 곧이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대는 행동으로 보아 녀석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듯했다. 슬슬 저려오기 시작하는 다리를 몇 번 주무르곤 다시 녀석에게 집중을 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천천히 꺼내들어 확인한 휴대폰 화면엔 녀석의 이름이 띄워져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절대 받을 순 없어, 아쉽게도 끊길 때까지 무시를 해야만 했다.
"……."
곧이어, 계속 울리던 진동 소리가 잠잠해졌다. 몰랐는데, 녀석은 내가 잠을 자고 있는 사이 전화 한 통과 문자 두 통을 보내왔었다. 하여튼, 이놈의 잠이 문제였다. 머릿속으로 내 자신을 꾸짖곤 다시 자세를 고쳐잡은 뒤 녀석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몇 분을 침대에 누워만 있던 녀석은 잠이라도 든 건지,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그럼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며 걱정을 하고 있을 찰나, 가만히 누워만 있던 녀석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러더니 겉옷을 벗어 바닥에 내려놓곤 옷장의 문을 열어 갈아입을 옷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곤 곧이어 입고 있던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둘 풀기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에 황급히 눈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기대하고 지금껏 숨어있던 게 아닌데. 그냥 숨지 말고 당당하게 나가있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감이 조금씩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필 이런 타이밍에 코가 점점 간지러운 게, 아무래도 재채기가…
"에취!"
결국 재채기를 참지 못한 채 그대로 큰 소리를 내버리고 말았다. 의문의 재채기 소리를 들은 김종인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보여왔다. 그리곤, 내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기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에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 뭐야."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엔 당황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그저 어색히 웃으며 고개를 들어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덩달아 마지못해 웃어버리던 녀석이, 나와 똑같이 무릎을 굽히고 앉아 눈높이를 맞춰왔다. 반쯤 열어젖혀진 셔츠 탓에 속살이 은밀하게 보여, 어디에다 시선을 두어야 할지가 무척이나 애매했다.
"아니, 현관에 웬 여자 신발이 있는 거야. 도둑이라도 들은 줄 알고 막 소름 끼쳤어."
"아, 까먹고 신발을 안 숨겼네…. 놀랐어?"
"당연하지. 근데 여긴 어쩐 일이야. 이렇게 아무 소리도 없이."
"그게…."
"일단 일어나. 다리 아프잖아."
내 손을 잡아 일으키는 김종인에 이끌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쭈그려 앉아 있던 탓에 다리가 너무나도 저려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황급히 침대에 걸터 앉곤 다리를 주물렀다. 그런 나를 보며 자꾸 웃음을 터뜨리던 녀석이 덩달아 내 옆에 털썩 앉았다.
"수업 끝나자마자 전화 했는데 받지도 않고."
"아아, 나 그때 자고 있었어…. 책상에 엎드려서 한 시간이나 잤다?"
"그래서 이마가 그렇게 빨갛냐."
앞머리에 가려진 이마를 꾸욱 누르며 김종인이 말했다. 빨개진 이마를 슬쩍 매만지곤 어색히 웃음을 짓다, 녀석을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사실… 우렁이각시 노릇 좀 해보려고 이렇게 몰래 찾아온 거야."
웅얼거리듯 말을 하며 녀석의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다시 채워주었다. 그런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뒷 말을 기다리고 있던 녀석이 슬쩍 웃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너 올 시간에 맞춰서 오므라이스 좀 만들어 놓으려고 마트에서 재료도 다 사왔는데,"
"사왔는데."
"… 30분만 자겠다 해놓고 한 시간이나 자버렸어."
"……."
"그래서 지금 멘붕이야. 준비된 게 하나도 없어…. 내가 계획한 건 이게 아닌데."
"저기 숨어있던 건 미리 계획해 놓은 거야?"
"아니지. 그건 그냥 현관 문 열리는 소리 듣고 즉흥적으로…. 아씨, 이게 아닌데…."
자꾸만 말이 꼬여 짜증이 났다. 그저 인상을 찡그리곤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그런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짓고 있던 녀석이 다시금 내게 다가오는 듯싶더니 살며시 볼에 입을 맞춰왔다. 쪽- 소리와 함께 사라진 부드러운 감촉에,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준비가 하나도 안 되어있음 뭐 어때.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지."
"……."
"씻고 올게."
내 머리를 꾸욱 누르며 느긋하게 방을 나서는 김종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이어 화장실에선 녀석이 씻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고,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어 서둘러 방을 나설 수 있었다.
*
오므라이스는 제법 순조롭게 준비가 되었다. 그러나, 자꾸만 옆에서 느껴지는 녀석의 시선은 꽤나 부담스러웠다. 거실로 가 TV를 보고 있으라는 내 말에도 녀석은 요지부동이었다. 요리는 원래 옆에 아무도 없어야 잘 되는 법인데, 녀석이 자꾸만 내 옆을 지키고 있어 왠지 모를 긴장감과 부담감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평소엔 잘만 하던 칼질이 서툴게 느껴졌고, 작은 실수를 반복하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작게 웃음을 짓던 녀석은 그제서야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지만, 다급히 소리를 쳐오는 녀석 탓에 다시금 녀석에게 신경을 기울여야 했다. 내 옷이 통째로 다 없어졌어. 속옷 빼고. 베란다에 놓인 빨래 건조대를 보며 당황스러운 표정을 내비치는 녀석에게 장난스레 답했다. … 아, 내가 누구 갖다 줘버렸어. 내 말에 더욱 인상을 굳히곤 제 아랫입술을 꾸욱 깨무는 김종인은, 이럴 때 보면 꼭 어린아이 같았다.
완성된 오므라이스를 제법 맛있게 먹어주는 김종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비록 계획했던 대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래도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맛있게 먹어주는 모습을 보니 매일 찾아와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거지는 결국 나란히 같이 했다. 요리를 내가 했으니 설거지도 내가 하겠다는 말에 김종인은 굳이 같이 하겠다며 졸라왔다. 아침부터 수업을 빠짐없이 듣고 와 피곤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작게나마 나를 도왔다. 그런 녀석이 기특하면서도 대견해 칭찬의 의미로 엉덩이를 토닥여 주고도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행동은 그저 가벼운 장난에 지나지 않았지만, 녀석을 남자로 보기 시작한 이래로 이러한 행동은 괜스레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혼자 많은 생각과 싸우고 있는 사이, 제법 빠른 시간 안에 설거지는 끝이 났다. 제 손의 물기를 닦아내곤 내 손의 물기까지 닦아내주던 녀석이, 덥석 손을 잡으며 거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뒤늦게야 피곤함이 밀려오는지, 소파에 등을 기대며 털썩 앉았다.
"피곤해?"
"조금."
"오늘 일찍 자."
흐트러진 녀석의 앞머리를 정돈해주며 말했다. 그런 내 말에 그저 눈만 꿈뻑이고 있던 녀석이 조심스레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대 누웠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보던 장면이었다. 여자친구 무릎에 누워 잠을 자는 남자친구…. 이것도 내 로망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예고없이 무릎 베개를 해주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도 못했다. 그러나, 피곤하다던 녀석은 잠을 자기는 커녕 피식 웃음을 지으며 자꾸만 나와 시선을 맞춰오기 바빴다. 그런 녀석의 눈빛이 조금은 부담스러워, 손바닥으로 녀석의 눈을 살포시 덮었다. 순식간에 시야가 차단된 녀석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 듯싶더니, 곧이어 제 눈을 가리고 있는 내 손을 잡아 내리곤 손바닥에 짧게 입을 맞춰왔다. 그 느낌이 간지러우면서도 쑥쓰러워 입술을 꾸욱 깨물었고, 곧이어 녀석이 눈을 감은 채 낮게 말을 건네오기 시작했다.
"오늘 학교에서 힘들고 피곤했던 거, 너로 다 보상받는 느낌이야."
"……."
"고마워."
녀석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어루만지며 작게 대답했다. 나도 고마워. 맞잡고 있는 손엔 녀석의 온기가 가득 느껴졌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다시금 녀석의 입술이 열렸다.
"오늘 무슨 요일이야."
"오늘? 금요일."
"내일은."
"토요일…."
"내일 학교 가, 안 가."
"당연히 안 가지. 주말이잖아. 쉬는 날! 행복해."
"그럼 자고 가도 되겠네."
"……."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듯 말하는 김종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럼 자고 가도 되겠네. 방금 전의 한 마디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사실 이상할 건 단 하나도 없는 순수한 멘트였지만, 왠지 모르게 묘한 감정이 들었다. 마치 예전에 한창 유행하던 멘트인 '라면 먹고 갈래?'와 비슷한 류로 느껴졌다. 내가 이상한 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음란함과 음탕함에 잔뜩 찌들어 별거 아닌 말에도 이상한 생각이 드는 건가? 순진하기 그지 없는 김종인은 그저 순수한 의도로 건네온 말일 텐데, 왜 난 자꾸 이상한 쪽으로만 생각이 기우는 걸까….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 농담이다."
피식 웃으며 다시금 말을 건네오는 김종인에게 어색히 웃어보였다. 잠시나마 당황을 했던 내 모습이 왠지 민망하게 느껴졌다. 하여튼, 나 놀려먹는 데엔 김종인이 으뜸이었다. 그건 조금도 부정할 수 없는, 정말 인정할 만한 사실이었다.
*
장난스레 내뱉은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몹시 당황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물론 순수한 의도로 건넨 말이었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제대로 힘을 받은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하루종일 수업을 듣느라 잔뜩 소모가 된 에너지를 네가 다시 가득 채워넣어준 느낌. 혼자였다면 라면이나 빵으로 대충 때웠을 저녁 식사를, 너 덕분에 맛있는 오므라이스로 때울 수 있게 되었어. 같이 저녁을 먹고, 같이 설거지를 하고, 같이 양치질을 해. 그리곤 나란히 소파에 앉아 소소한 대화를 나눠. 난 네 무릎에 머리를 기대 누워. 넌 이런 내가 부끄러운지, 슬쩍 시선을 피하곤 부드러운 손으로 내 눈을 가려. 수줍어하는 네 모습이 귀여워, 난 네 손바닥에 작게 입을 맞춰. 입술이 닿을 때마다 고개를 푸욱 숙이곤 얼굴을 붉히는 네가 귀여워. 가까이 다가가면 파르르 떨리는 너의 속눈썹이 좋아서, 반쯤 감기는 너의 동그란 눈이 좋아서, 난 네 이마, 뺨, 손등에 입을 맞추고, 또 입을 맞춰. 잔뜩 수줍어하는 네 모습이 좋아서, 귀여워서, 사랑스러워서… 자꾸만 입을 맞춰.
*
결국 아홉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함께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어차피 내일은 쉬는 날이니 집에서 재운 뒤 다음날 보내고도 싶었지만, 아직은 불편하게 느낄 것만 같아 아쉽게도 헤어져야 했다.
4월의 밤 공기는 제법 쌀쌀하면서도 차가웠다. 얇게 입고 나온 네 옷차림이 걱정이 돼, 옷장에 걸린 가벼운 겉옷을 입혀준 채 집을 나섰다. 소매가 길어 두 번 정도 접어야 했지만, 추워서 감기에 걸리는 것보단 백 배 천 배 나으니 애초에 상관은 없었다. 무엇보다, 한참이나 큰 내 옷을 입고 이리저리 돌아보는 네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져 귀여웠다.
"오늘도 하늘에 별이 하나도 없네…."
손을 꼬옥 붙잡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하는 너를 따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밤하늘은 그저 새까맣기만 했다.
"종이야."
"응."
갑작스레 불러오는 너를 바라보며 작게 대답을 했다. 배싯 웃으며 윗입술을 슬쩍 무는 게, 왠지 머뭇거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어느새 도착한 집 앞에 멈춰서는, 조그만 입술이 열릴 때까지 그저 묵묵히 너를 내려다 보았다. 헤실헤실 웃는 모습에 나까지 절로 웃음이 나올 듯했다.
"오늘 우렁이각시 노릇은 제대로 못해줬지만, 어…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웠어."
"……."
"사실 완전 맛있게 된 건 아니었… 으에에- 하지마아-"
웅얼거리듯 말하는 너를 빤히 바라보다, 네 양쪽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그런 내 손을 잡곤 하지 말라며 말끝을 늘이는 네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져 피식 웃어보였다.
"아니야. 제일 맛있었어."
"진짜?"
"그럼."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러자 해사하게 웃으며 내 옆구리를 콕콕 찔러오기 시작한다. 은근히 샘솟는 부끄러움과 쑥쓰러움을 해소하기 위한 나름의 행동처럼 보여 피식 웃곤 장난을 받아주었다.
"늦었는데, 이제 들어가 볼게."
얼마 안 있어, 이제 그만 들어가 보겠다며 아쉽게 말을 해오는 네게 슬쩍 고개를 끄덕이곤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품에 쏘옥 들어오고도 남는 조그마한 너를 꼬옥 끌어안고 있을 때면, 마치 세상에 우리 둘만 남게 된 것만 같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다른 세상에 우리 둘만 동떨어진 듯한 기분….
*
집 앞까지 너를 데려다주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비록 혼자라 할지라도 외롭진 않았다. 오늘 너와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길을 걷다 보면 어느새 집이 코앞에 위치해 있을 때가 대부분이었으니 말이다. 너를 떠올리며 미친 사람이라도 된 양 혼자 피식피식 웃기도 했고, 괜히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다른 누군가가 이런 내 모습을 봤다면 분명 싫은 소리를 했을 테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 어? 종인아…. 김종인 맞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휴대폰에 이어폰을 연결하려던 찰나,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겨오던 낯선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여자는 술에 취한 건지, 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듯 보였다.
"나 알지? 나야, 나. 민희…. 송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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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좀 늦었죠.. 사실 어제 오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오늘 오게 됐네요.. 큽... 오늘 우주 최강의 더위였다고 하더라구요.. 집에만 있었는데도 전 엄청 더웠어요.. 여러분들 무사하신가요ㅠㅠ 덥다고 에어컨 빵빵하게 틀어놓고 자면 안 돼요! 이불은 꼭 덮고 잡시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감기는 다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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