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09 (어떤 설렘)
"나 알지? 나야, 나. 민희…. 송민희…."
익숙히 말을 건네오는 낯선 여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듯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쉽게 떠오르지 않는 생각에 더욱 미간을 좁히곤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우리 고등학교 3학년 때… 옆 반이었는데…."
고등학교 3학년 때 옆 반이었다는 말과 송민희라는 이름을 결합해 다시금 생각을 되짚어 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기억에, 다시 여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 걘가,"
"……."
"고3 때 ○○이에 대한 이상한 헛소문 퍼뜨리고."
"……."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하던 여자애."
지난 날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쳤다. 박찬열과의 말도 안 되는 루머를 퍼뜨리곤 서로 오해를 하게 만들었던, 그날 이후론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그 여자애였다. 예전 얼굴이라곤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진한 화장 탓에 더욱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 말에 잠시 고개를 떨구곤 말을 아끼던 여자가 곧이어 비틀거리듯 내게 다가와 안겼다.
"오랜만이야, 종인아아- 보고 싶었어, 완전…."
그 모습을 가만히 내려다 보기만 하다, 취한 몸을 슬쩍 떨어뜨려 놓곤 천천히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잠깐이나마 안겨오던 모습이 꽤나 불쾌하게 느껴졌다. 이곳으로 어떻게 나타났는지에 관해선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기분만 나쁠 뿐이었다. 나를 포함해 내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줘놓고 또다시 모습을 비추는 건 도대체 무슨 낯짝인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종인아아- 아직… 가지 말아 봐…."
황급히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겨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아오는 모습에 순간 화가 치밀어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웃음을 짓더니,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곤 제 머리를 짚으며 입술을 떼기 시작한다.
"나 집에 못 가겠어…. 길 잃었는데…,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구…."
"……."
"너희 집에서 자고 가면 안 될까…?"
"싫어."
"……."
"휴대폰은 뒀다 뭐해. 네 친구한테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 해."
"… 휴대폰이 없어. 아까 술집에 놓고 왔나 봐…."
"거짓말 하지 마."
"거짓말이라니…. 아닌데에…."
"……."
"그럼 있잖아…. 나 모텔까지 좀 데려다 주면 안돼?"
피실피실 웃으며 아무 말이나 서슴없이 내뱉는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민망하게 느껴질 정도로 짧은 미니스커트와, 가슴골이 훤히 드러난 깊게 파인 니트가 보기 흉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부탁을 뿌리치고 혼자 집으로 향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잔뜩 술에 취해 걸음조차 비틀거리며 걷는 걸 보니 아마 스스로 집엔 가지 못할 테고, 아마 길바닥에서 잠을 청하게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나쁜 짓이라도 당한다면 그건…, 내게 책임이 있는 건가.
*
하는 수 없이 택시를 잡아 최대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모텔 쪽으로 향해야 했다.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아 짜증이 잔뜩 샘솟으려던 찰나, 가까스로 도착한 택시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모텔로 가주세요. 내 말에 기사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셨다. 왠지 이상한 오해를 받는 것만 같아 아니라며 말씀을 드리고도 싶었지만, 해명할 가치도 없는 오해에 말을 덧붙여봤자 입만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저 말을 아꼈다. 자는 건지, 자는 척을 하는 건지 송민희는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있었다.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정말이지, 엿 같은 기분이었다.
*
얼마 뒤 모텔 앞에 멈춰선 택시에서 내려, 제법 큰 건물을 올려다 보았다. 분위기가 꽤나 음침하게 느껴지는 게, 들어가기조차 꺼려지는 모양새였다. 살면서 이런 곳을 오게 되리라곤 전혀 예상을 못했는데, 이렇게 뜬금 없는 사람과 뜬금없이 오게 되리라곤 더더욱 예상을 못했다.
"……."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내 팔을 꼬옥 붙잡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리곤 천천히 걸음을 떼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일부러 어두운 조명을 사용하는 건지, 내부는 제법 어두우면서도 칙칙했다.
프론트에서 간단히 체크인을 하곤 카드키를 건네 받았다. 그저 낯설기만 한 절차에 고개를 갸웃하며 카드키에 조그맣게 적힌 객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도착한 객실의 문 앞에 가만히 서, 송민희에게 카드키를 건넸다. 그러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잔뜩 꼬인 발음으로 내게 말을 건네오기 시작한다.
"아니이…. 침대까지…. 으응?"
다시금 짜증이 치미는 순간이었다. 그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곤 손에 들린 카드키를 빼앗아 어설프게 입구에 댔다. 그리곤 곧이어 문이 열렸고, 안으로 발을 디뎠다. 어둠으로 가득한 내부는 불빛 하나 없이 어둡기만 했다. 일단 형광등이라도 키고자 벽을 더듬으며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도대체 스위치를 어디다 달아뒀길래 아무 것도 만져지는 게 없는 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뭐, 모텔을 와봤어야 알지…. 가만히 스위치의 위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송민희가 슬쩍 손을 뻗어 내 손에 들린 카드키를 가져갔다. 그러더니 바로 안 쪽에 위치한 카드꽂이에 카드키를 쏘옥 집어넣는다. 그와 동시에 내부엔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그저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이다, 억지로 침대까지 부축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아아, 편해…."
침대에 털썩 걸터 앉은 뒤 작게 말을 해오는 송민희를 흘끗 보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 자체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웬만한 건 갖추고 있는 듯했다. 화장대 위엔 제법 큼지막한 비닐팩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안엔 클렌징 폼, 각종 청결제, 칫솔, 치약, 면도기, 콘돔 두 개가 들어있었다. 가만히 주변을 훑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객실을 나가려던 찰나, 갑작스레 손목을 잡아오는 송민희의 행동 탓에 걸음이 멈춰졌다.
"안 가면 안돼? 자고 가, 종인아…."
"여기까지 데려다 줬잖아. 뭘 자고 가."
단호하게 말을 내뱉곤 손목을 뿌리친 채 다시 걸음을 뗐다. 그런 나를 보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금 손목을 잡아오는 모습에 점점 화가 치밀었다.
"자고 가…. 나 혼자 자기 싫어, 종인아아-"
"부르지 마, 내 이름."
내 말에 삐진 듯한 표정을 짓던 송민희가 곧이어 천천히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지,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저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짓고만 있을 때, 송민희의 겉옷 주머니에선 콘돔 두어 개가 후두둑 떨어졌다. 안그래도 싸늘하던 분위기는 그와 동시에 더욱 차갑게 변했고, 바닥에 떨어진 콘돔을 바라보며 적잖이 당황한 듯한 모습을 내비치던 송민희가 내 손을 덥석 잡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나의 결론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어디선가 알아낸 내 자취방 주소만을 믿고 이곳까지 찾아와 취한 모습, 야한 옷차림으로 최대한 어필을 한 뒤 모텔로 향하게 만드는, 결국 같이 자는 것이 목적인 셈이었다. 나름 꾸욱 참고 착한 마음으로 모텔까지 데려다 줬건만, 돌아오는 것이라곤 불쾌함과 역겨움, 더러움 뿐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꼬옥 붙잡고 있는 송민희의 손을 슬쩍 내려다보며 다시 거칠게 뿌리쳤다. 너무나도 화가 나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미친년아."
"… 조, 종인아, 난 그냥…"
"너 존나 골 때린다."
"……."
"이러려고 모텔까지 데려다 달라 했지."
"……."
"내가 그 근처 산다는 건 어떻게 알고 왔어."
"……."
"너 뒤에서 내 정보 캐고 다니냐."
입술을 꽈악 깨문 채 몸을 벌벌 떨고 있는 송민희를 내려다 보기만 하다, 바닥에 떨어진 콘돔 두어 개를 쓰레기통 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내 모습에 찔끔찔끔 눈물을 흘리던 송민희가 이내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 네 주소는 어쩌다 우연히 알게 됐어…. 뒷조사를 한 건 절대 아니고…."
"……."
"… 사실 아직 너한테 미련이 좀 남아있었어…. 근데 이런 걸 노리고 온 건 진짜 아니야…!"
"지랄하지 마."
"……."
"넌 피해자 코스프레가 취미인가 봐."
"……."
"그것도 병이다."
"……."
"노리고 온 게 아니라고? 아니야, 맞아. 너 노리고 온 거야. 나랑 잘 생각으로 모텔 온 거고, 어떻게든 나랑 할 생각으로 여기 온 거야."
"… 아니야…. 진짜 아니야…!"
"습관적으로 거짓말 하는 거 진짜 안 좋은 건데."
딱딱하게 말을 내뱉었다. 송민희에게선 더이상 어떠한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만히 주저 않아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는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다시금 입술을 뗐다.
"나 여자친구 있어."
"……."
"걔가 지금 이 모습을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
"상처 주기 싫어."
"……."
"더이상 마주치는 일 없었음 좋겠다."
"……."
"이럴 시간에 다른 남자나 찾아."
"… 어이 없어."
"뭐?"
"… 네 여친 걔지? 고딩 때 맨날 너랑 붙어 다니던-"
"응."
"걔랑 왜 사겨? 뭐 보고 사귀는데? 좋아? 마음에 들어?"
"무슨 의도로 묻는 건지 모르겠네."
"……."
"좋으니까 사겨."
"……."
"까불지 말고, 그냥 네 남은 인생이나 미련없이 보내."
"……."
"그렇게 살지 마라."
마지막 말을 내뱉곤 성큼성큼 걸어 객실을 나섰다. 아마 오늘부로 다신 볼 일이 없을 듯했다.
*
택시를 잡아 타 곧바로 집에 들어가려다 말고 오세훈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좋지 않은 기분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 해서 오세훈이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어디로 갈까요?'
'오세훈 집이요.'
'네?'
'… 아, 죄송합니다. 말이 잘못 나왔어요.'
택시 안에서 있었던 창피한 대화 내용을 떠올리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말에 적잖이 당황한 듯 보이던 기사 아저씨의 반응에 너무나도 민망하고 창피했다.
천천히 걸어 도착한 오세훈의 자취방. 단순하기 그지 없는 녀석의 집 비밀번호가 제 생일인 '0412' 라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예의상 초인종을 꾸욱 눌렀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현관 문이 철컥- 하고 열렸고, 잠을 자고 있던 건지 뒷머리가 심하게 뻗친 오세훈의 모습이 보여왔다. 잔뜩 좁혀진 미간과 찡그려진 눈매가 지금 녀석의 기분 상태를 대신 표현해 주는 듯했다.
"아, 존나 꿀잠 자고 있었는데…. 왜 늦은 시간에 찾아오고 난리야."
"나 오늘 여기서 잔다."
"존나 뜬금 없네. 마치 부부싸움에서의 참패로 집에서 쫓겨나 어쩔 수 없이 절친한 친구네 집에서 하룻밤만 묵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하는 무능력한 남편 같음."
"그거 네 미래야."
"… 충격."
잘 뜨이지도 않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제 유행어를 내뱉는 오세훈을 지나쳐 안으로 발을 디뎠다. 거실엔 빨래 건조대가 놓여있었다. 속옷 취향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건지, 건조대엔 여러 색상의 속옷들이 널려 있었다.
"넌 제발 저런 팬티 좀 입지 마."
"뭐. 무슨 팬티."
"하트 무늬."
"… 저거 우리 엄마가 선물로 사준 건데요."
"……."
"별 무늬 사줄 거 아니면 취향 존중 좀 해줘라."
제법 진지하게 말을 건네오는 오세훈을 슬쩍 흘기곤 소파에 털썩 앉았다. 빨래 건조대에 널려있는 속옷들을 보니, 문득 아까 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옷들을 전부 다른 사람에게 갖다 줘버렸다며 능청스레 말을 해오던 그 모습이 다시금 떠올라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곤 돌았냐는 제스쳐를 해보이던 녀석이 바닥에 털썩 앉았다.
"갑자기 귀여운 생각이 떠올랐어."
"뭔데?"
"오늘 수업 끝나고 집에 왔는데, 웬 여자 신발이 하나 있는 거야."
"현관에?"
"응."
"네 여친님?"
"아, 끝까지 들어."
"사실 별로 안 궁금함."
"그래서 막 소름 끼쳤어. 그리고 방에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는데, 옷장 옆에서 재채기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거 환청이야."
"……."
"… 미안. 계속 말해."
"… 아, 까먹었어."
까먹었다는 내 말에 얄미운 비웃음을 던지던 오세훈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런 녀석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또다시 시야에 들어온 빨래 건조대에, 까먹고 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라 녀석을 향해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미리 내 자취방에 와있던 거야. 언제 온 건진 모르겠는데, 빨래 건조대에 널려있던 옷들을 나 몰래 다 개서 넣어놨더라고."
"최소 우렁이각시."
"근데 진짜 귀여운 게 뭔지 아냐."
"몰라."
"부끄러웠는지 속옷만 쏘옥 빼놓고… 아…, 진짜 귀여워."
"나대지 마."
또다시 떠올리자 입술을 비집고 피실피실 웃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보며 제법 단호히 말을 건네오는 오세훈의 모습에도 아랑곳 않곤, 오늘 있었던 일들을 자랑해 나가기 시작했다.
"오므라이스도 만들어 줬어. 난 살면서 오므라이스가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 줄 몰랐어. 지금껏 내가 먹어본 오므라이스 중 제일 맛있었다니까."
"아, 나도 오므라이스 좋아하는데."
"설거지도 같이 했어. 그냥 나란히 서서 무언가를 같이 한다는 게 왜이리 기쁘고 행복한지 모르겠다."
"어쩌라는 거지."
"나보다 훨씬 작은 애가 바로 옆에 찰싹 붙어서 작은 손으로 막 그릇을 씻는데, 너무 귀여워."
"안 물어 봤음."
"아니, 인간적으로 너무 예쁘잖아. 어떻게 사람이 그러지."
"안 궁금함."
기계적인 톤으로 자꾸만 흐름을 끊는 오세훈을 향해 쿠션을 던졌다. 그러나 엄청난 순발력으로 저를 향해 날아오는 쿠션을 재빨리 받아낸 녀석이 꽤나 얄밉게 웃으며 쿠션을 꼬옥 끌어안은 채 다시 바닥에 등을 붙였다. 그러더니 천장 쪽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를 향해 말을 건네오기 시작한다.
"난 네 러브 스토리 별로 안 궁금하거든. 이 늦은 시간에 다짜고짜 왜 찾아왔을까 가만 생각해보니, 욕설없인 들어줄 수 없는 네 사랑 이야기를 공유하러 온 거였구만."
"……."
"잔인함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김종인이었습니다."
슬쩍 눈을 감곤 휘파람을 흥얼거리던 오세훈이 몸을 뒤척이더니 다시금 입술을 뗐다.
"나도 그런 애인 좀…."
"……."
"우렁이각시가 아니어도 괜찮으니, 그냥 세훈이 각시나 좀…."
이런 얘기를 할 때면 매번 한탄하는 소리를 늘어놓던 오세훈은 오늘도 역시나였다. 그런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다 머쓱히 뒷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이럴 의도로 말을 꺼낸 건 물론 아니었다. 그저 자랑이라는 걸 해보고 싶어서였다. 내 여자친구가 이렇게 예쁘고 귀엽다는 사실을 동네방네 알리고 싶었다. 내 여자가 이렇게 사랑스럽다는 걸 모든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내겐 그저 벅찬 사람인 네가 내 애인이라는 걸 모두에게 알리고 싶었다.
"알콩달콩한가 보네. 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너희 둘 사이에 껴서 조력자 역할을 했던 거지…. 지금 생각해보니 난 참 어리석었어."
다시 한 번 한탄하는 말을 늘어놓던 오세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냉장고 안을 뒤지는 듯싶더니 메로나 하나를 꺼내 껍질을 뜯기 시작한다. 차가운지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물며 인상을 찡그리던 녀석이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왔다.
"그거 ○○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인데."
"나도 좋아함."
다시 바닥에 늘어지게 누워선 아이스크림만 쪽쪽 빨고 있는 오세훈을 바라보다 소파에 몸을 뉘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꿀꿀하고 답답했던 기분이 한 순간에 싸악 가라앉은 것도 같았다. 오세훈에게 송민희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기는 커녕,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은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정말이지 신기했다.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는데. 그냥 네 생각을 조금 했을 뿐인데.
"아직도 많이 어색하냐."
"뭐가."
"그냥, 모든 게."
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오세훈이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색하다기보단 쑥쓰럽지."
"그런가."
"……."
"아무래도 너넨 여느 커플들보다 스킨쉽이 더딜 수밖에 없겠다. 알고 지내온 시간이 긴 만큼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 테니까."
"……."
"내가 예전에 어떤 책에서 봤는데, 연인들의 스킨쉽은 1단계부터 5단계로 분류가 된다더라."
"그런 건 나도 다 알고 있어."
"당연히 알고 있어야지, 인마."
틱틱대듯 말을 내뱉곤 메로나를 크게 한 입 베어먹던 오세훈이 다시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연애를 글로 배웠다며 전부터 자랑 아닌 자랑을 해보이던 녀석은 그런 쪽에 대해 잔지식이 풍부한 것도 같았다.
"근데 한 순간이야. 여자는 아직 3단계에 머물러 있는데, 다짜고짜 남자가 5단계를 요구해오는 거."
"……."
"그런 놈들은 도대체 뭘까? 연애는 왜 해? 자기 욕정을 채우려 하는 건가?"
"……."
"넌 그러지 마라. 그러지 않을 놈이라는 거 알지만, 그래도 이런 말은 꼭 해줘야 될 것 같아서."
"안 그래."
"그래야지. 네 욕심만 채우면 안돼. 연애는 공감을 하는 거랬어. 네 자신보다 네 여친을 더 소중히 여겨라."
"… 너 진로를 이쪽으로 바꿔보는 게 어때."
"그럴까 생각 중이야."
제법 장난스레 말을 늘어놓던 오세훈이 아이스크림 막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녀석을 보며 작게 하품을 하곤, 가만히 누워 하얗기만 한 거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근데 한 순간이야. 여자는 아직 3단계에 머물러 있는데, 다짜고짜 남자가 5단계를 요구해오는 거.'
자꾸만 오세훈의 한 마디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리곤 그와 동시에 의미 모를 걱정감과 불안감이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지금 실수를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넌 아직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는데, 내가 너무 앞서 나가고 있는 건 아닐까. 아직 '뽀뽀'라는 걸 어색하게 느끼려나. 낯설게 느끼려나….
저 깊은 곳에서 자꾸만 솟아나기 시작하는 불안한 생각들을 애써 고이 접곤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런 나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듯싶던 오세훈이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 TV에선 유행 지난 예능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저 가만히 소파에 누워 네모난 화면을 무료히 바라보기만 하다,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곤 머릿속에 콕 박혀있는 전화번호를 입력해 영상 통화를 걸었다. 지금쯤이면 아마 씻고 누워있겠지. 아직 잘 시간은 아닌데, 피곤해서 벌써 잠이 들었으려나.
- … 뭐야…. 웬 영상 통화야….
"뭐해. 씻고 누웠어?"
얼마 안 있어 화면엔 뽀얀 얼굴이 나타났다. 화장을 지워낸 민낯이 부끄러운 건지, 하얀 이불 속에 쏘옥 들어간 채 눈만 빼꼼 내놓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안 가려도 예쁜데. 난 네 민낯이 더 좋아. 훨씬 순수해 보이고 귀엽잖아.
- 응, 씻고 누웠지. 넌 아직이야? 옷이 그대로네.
"아, 나 오세훈 자취방 왔어. 오늘 여기서 자려고."
- 오세훈? 아, 어쩐지 배경이 좀 낯설더라….
"씻기 귀찮아."
- 그러다 잠들면 안돼. 씻고 누워야 개운하게… 아, 뒤에 오세훈 뭐야….
작게 웃으며 투덜대듯 말해오는 모습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마치 TV에 제 얼굴이 나와 몹시 신기해하는 초등학생이라도 된 양 손가락을 브이로 만들어 이리저리 흔들어 보이고 있는 오세훈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곤 침대에 털썩 앉아 다시금 휴대폰 화면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얼굴 왜 가리고 있어. 창피해?"
- 나 지금 완전 민낯이잖아….
"난데 뭐 어때."
- 너니까 안 된다는 거야.
제법 고집을 부리며 단호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곤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런 날 보며 옅게 미소를 짓던 네가 작게 하품을 했다. 눈을 꿈뻑이는 속도도 점점 느려지는 걸 보니, 아마 졸음이 밀려오는 듯했다.
"졸리구나."
- 응…, 김종인 목소리 들으니까 졸려.
"내 목소리 자장가야?"
- 자장가 같아. 나른나른해. 잠 안 올 때마다 네가 자장가 불러주면 바로 잠들겠다….
졸음에 취한 채 힘겹게 말을 꺼내놓는 모습이 너무도 귀여워 자꾸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지어졌다. 일찍부터 내 자취방에 와 이것저것 준비를 하느라 힘들고 피곤했을테니, 얼른 재우고 통화를 끊어야겠다 생각하며 슬쩍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음 같아선 밤 새도록 휴대폰을 붙잡고 통화를 하고도 싶었지만, 그건 불가능할 듯싶었다.
"아까 책상에 엎드려서 한 시간이나 잤다며. 근데 벌써 졸리냐."
- 아니, 사실 별로…. 아, 그렇게 많이 졸리진 않아.
"어쭈."
- 아이, 진짠데…?
"발음도 꼬이네. 얼른 자. 내가 너무 붙잡아두는 것 같다."
눈을 부릅 뜨며 졸리지 않은 척을 해보이는 모습이 제 딴에는 제법 그럴 듯하게 보이겠지만, 내겐 그저 귀엽기만 했다. 잠투정을 부리는 게 왜이리 귀엽게 느껴지는 건지….
"내일 만나. 데이트 하자."
- 어어? 좋아, 데이트….
"너한테 할 말도 있고."
- … 무슨 할 말?
"좀 길어. 내일 해줄게."
- 으, 아쉽다.
"아쉬워?"
- 그래. 왕 아쉬워….
"왕 아쉬운 건 뭐야."
- 왕 아쉬워….
"너 진짜,"
- 나 진짜,
"… 귀엽다."
- 귀엽… 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어버릴 줄은 몰랐지만, 아무렴 상관 없었다. 입이 닳도록 말을 해주어도 모자라다 느껴질 정도로, 귀여운 건 사실이니까.
- 종이야,
그저 살풋 웃으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 잔잔한 목소리가 다시금 나를 불러왔다. 그 목소리에 작게 대답을 하곤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 뽀뽀~
허공에 대고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는 시늉을 해보이는 모습에 순간 정신이 멍해지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멎을 것도 같았다. 방금 뭐가 지나간 건지, 제대로 된 파악조차 불가능했다. 항상 수줍어하던 모습과는 달리 제법 당당하면서도 애교있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그저 꿀꺽 침을 삼키곤 아랫입술을 꾸욱 물었다.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는 것도 같았다.
- 나 너무 졸리다. 먼저 잘게…. 너도 잘 자…!
그리곤 얼마 안 있어 통화가 뚝- 끊겼고, 멍청이같이 아무 말도 못한 채 끊긴 휴대폰 화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까맣게 변한 화면엔 내 얼굴이 비쳤다.
"아주 꼴값들을 떨어요."
거실에서 몰래 통화 내용을 엿듣고 있던 건지, 바지 주머니에 양쪽 손을 찔어넣은 채 건방지게 내 쪽으로 걸음을 옮겨오던 오세훈이 툭 내뱉듯 말했다. 그러나, 그런 농담에도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자꾸만 웃음이 지어졌다. 이게 뭐야. 너무 좋잖아. 뽀뽀 받았어, 뽀뽀….
"제 정신이 아니구만."
"……."
"여기서 멀쩡한 사람은 나밖에 없어."
"……."
"김종인한테 어울리는 꽃은,"
"……."
"존넨쉬름."
"……."
"김종인한테 어울리는 풀은,"
"……."
"개쉽싸리."
"……."
"나 좀 시인인 듯."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스스로 감탄을 해보이던 오세훈이 이내 인상을 굳히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내가 깔고 누워있는 이불을 세게 끌어당기기 시작한다.
"나와, 새끼야. 내 침대잖아."
지금 시각은 12시 29분. 평소였음 꿈나라를 한 바퀴 돌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왠지 쉽게 잠이 오지 않을 듯했다. 쉽게 잠이 올 리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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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은 특히 브금 고르기가 힘들었어요.. 앞 부분이랑 뒷 부분 분위기가 너무 상반돼서..... 큽...... 요 며칠 동안 굉장히 더웠는데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죠? 다행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더운 거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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