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14 (비 내리는 조용한 밤)
그날은 밤새 잠을 설쳤다. 그의 얼굴을 본 이후부터, 그의 목소리를 들은 이후부터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해 공부에 집중을 할 수도 없었다. 다정스레 보내오는 김종인의 문자 메시지에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두렵기만 했다. 내 자취방은 어떻게 알았을까. 김종인이랑 사귀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왠지 묻기가 꺼려졌다. 크나큰 충격을 받게 될까 봐. 마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두려움이 더욱 크게 변할까 봐-. 그저 마음속에 묻어둔 채 꽁꽁 숨겨야 했다. 지나치다 우연히 날 본 거겠지. 다 우연이겠지.
'도경수 알지? 내 친구거든. 너랑 같은 학교인 걸로 알고 있는데. 게다가, 같은 학과.'
동명이인이 아니었다. 도경수 선배와 아는 사이인 '박찬열'이라는 사람은, 내가 아는 박찬열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 또한 소름이 끼치면서 무서웠다.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싶었다. 한동안은 도경수 선배를 마주하기도 꺼려졌다. 그를 보면 나도 모르게 박찬열이 떠올라서였다. 친구도 끼리끼리 사귄다는 말이 있듯이, 그도 같은 사람이진 않을까. 그도 무서운 사람이진 않을까. 박찬열 못지 않게 도경수에게도 불안감이란 불안감은 더욱 증폭이 되었다.
마지막 시험인 만큼 더욱 열심히 공부를 해 꼭 좋은 성적을 얻고자 마음속으로 다짐을 했건만, 결과는 못내 아쉬웠다. 어젯밤 공부도 제대로 못했을 뿐더러, 자꾸만 어제의 기억이, 박찬열이라는 인물의 얼굴과 목소리가 떠올라서였다.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시무룩한 내 말에, 김종인은 괜찮다며 위로를 해주었다. 시험이 끝난 날 녀석의 집으로 가 제대로 된 우렁각시 이벤트를 해주고자 마음을 먹었던 난, 아쉽게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정신이 없었다. 자꾸만 허공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게 됐고, 의미 모를 불안감과 초조함 탓에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게 되었다. 심지어, 머릿속도 복잡했다. 하나의 불안한 생각을 펼쳐놓으면 더욱 불안한 생각들이 하나둘 꼬리를 물며 덩달아 생겨났고, '박찬열'이라는 사람에 대한 공포증은 커져만 갔다. 또 예상치 못한 때에 집 앞에 찾아와 나를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나를, 김종인을 해치진 않을까. 집에 혼자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주변을 스윽- 둘러보게 되었다. 당분간은 혼자 있는 게 무서울 것만 같아, 밤 늦게까지 김종인과 카페에서 시간을 보냈다.
'요즘 왜이리 카페를 자주 가자 해. 메뉴 하나씩 다 먹어 보게?'
나를 향해 의아하게 물어오던 목소리가 너무나도 맑게 들려 눈물이 왈칵- 터질 것도 같았다. 최대한 오랫동안 같이 있자. 나랑 같이 있어줘-. 떼를 쓰는 듯한 내 목소리에도 김종인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하루종일 수업을 듣고 와 힘들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혼자 있기가 무서웠다. 혼자 있으면 어디선가 그가 튀어나와 나를 또 놀라게 만들 것만 같아, 너무나도 겁이 났다. 선생님을 만났어. 어느 날 선생님이 내 자취방까지 찾아왔어-. 이걸 말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수없이 고민을 하다 결국 입을 꾸욱 다물었다. 분명 걱정하겠지. 그냥 말하지 말고 혼자 간직하고만 있자. 점차 잠잠해지겠지. 그도 제풀에 지쳐 포기하고 새 사람을 찾아 떠나겠지. 마음속으로 합리화를 했다.
*
그렇게 대략 몇 주를 보냈고, 이젠 완연한 여름이었다. 얇은 티셔츠 한 장만 입고 나가도 이마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이번엔 은근 잘 통한 듯했다. 그날 이후로 또다시 모습을 비추지 않던 그는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며칠을 불안감에 떨며 두려워하던 난, 다행히 예전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렇다 해서 그의 존재가 완전히 잊혀졌다고 할 순 없지만, 내 머릿속을 뒤덮고 있던 불안과 초조의 감정은 싸악- 사라져 있었다. 이젠 밤 늦게까지 김종인과 함께 있지 않아도, 무서울 건 없었다.
오늘은 금요일, 공강 날이었다. 반대로 김종인은 풀강-. 저번에 못해준 우렁각시 이벤트를 오늘 해주는 건 어떨까, 하는 마음에 여유롭게 집을 나서 마트로 향했다. 오늘은 반찬도 여러가지 만들고 된장찌개도 끓여야지. 사실 이벤트라 할 만큼 거창할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냥 한 끼를 맛있게 차려주고… 차려주고…, 실은 그게 끝인 지나치게 소박한 것이었다. 한창 해가 쨍쨍할 시간이라 그런지 유독 덥게 느껴지긴 했지만, 금세 도착한 버스로 인해 나름 더위를 식힐 수 있었다. 제법 텁텁할 거라 생각했던 버스 안의 공기는 꽤나 시원했다. 오히려 내리기 싫을 정도라 느껴졌으니, 말은 다 한 셈이었다.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공포영화 DVD도 빌렸다. 물론 나도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포영화를 끔찍이도 싫어하는 김종인을 놀려주기 위한 의도였다. 이런 내 의도를 녀석이 눈치챘다간 최소 몇 시간은 삐져있을 게 분명해, 철저히 비밀로 해야만 했다.
*
제법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는 김종인의 집. 깔끔히 정리가 되어있는 거실을 스윽- 훑곤, 반쯤 열려있는 방문 사이로 옷가지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널려있는 모습을 보며 배싯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방 안으로 들어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옷가지들을 집어들어 말끔히 정돈을 하기 시작했다. 저번엔 깜빡 잠이 들어 계획이 엉망진창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만, 오늘은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존재를 숨길 필요는 없었다. 그저 김종인이 돌아올 시간에 맞춰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녀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반갑게 맞이를 해주는-, 그게 다였다. 여보, 나 왔어. 어머, 오셨어요? 가족 드라마 속 전형적인 부부의 모습과도 같이 느껴져 피실피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자신있는 메뉴 중 하나가 된장찌개이긴 했지만, 나를 위해서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준비를 한다는 게 조금은… 아니, 많이 떨렸다. 더운 날씨 탓인지, 부엌의 뜨거운 열기 탓인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하는 긴장감 탓인지 슬슬 온몸에 땀이 샘솟기 시작했다. 몇 가지의 간단한 반찬들은 이미 완성이 되었고, 이제 식탁 위를 예쁘게 꾸미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아니 근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늦어졌나-. 요리에만 집중을 하느라 잘 몰랐는데, 밝기만 하던 실내는 어느덧 어두워져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스위치를 꾸욱 누르곤 황급히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예상대로 시간은 꽤나 흘러 있었고, 어느덧 김종인이 도착할 시간이었다. 다행히 저녁 준비는 완료가 되었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는….
"……."
문득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언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건지,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했다. 굵은 빗줄기들이 굳게 닫힌 창문을 쉼없이 때려왔다. 그저 멍하니 창밖만을 바라보다, 오늘 아침 지나치듯 보았던 일기예보를 떠올렸다. 오늘 비가 온다 했었… 구나. 하나둘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왜 난 깨닫지 못했을까. 요리에 너무도 집중을 했나. 비가 이렇게 세차게 내리고 있는데…, 김종인은 우산이 있을까.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들어 녀석의 단축번호를 꾸욱 눌렀다. 귀에 가져다 댄 휴대폰에선 지루한 신호 연결음이 들려왔다.
"… 으음."
그러나, 웬 일인지 김종인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항상 전화를 걸면 얼마 안 있어 목소리를 들려주던 녀석이었던지라, 지금의 이 상황이 제법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휴대폰을 꺼내기 힘든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둘 길게 나열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곤 서둘러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신발장 문을 열어 가장 큰 우산을 하나 꺼내들었다. 버스 정류장까지라도 마중을 나가야지. 우산이 없다면 큰일인데. 홀딱 젖었으면 어떡하지.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이런저런 걱정을 하며 현관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밖에서 누군가 비밀번호를 눌러왔고, 띠리릭- 소리와 함께 저절로 문이 열렸다. 그저 어벙벙한 상태로 손잡이에서 손을 스르륵- 놓곤 침을 꿀꺽 삼켰다. 살며시 열리는 문의 틈새로 나타난 건 다름 아닌 김종인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모습이었다. 축축이 젖은 머리칼에선 동그란 물방울들이 톡톡 떨어졌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내 모습을 응시하기만 하던 녀석이 슬쩍 미소를 지어보이며 입을 열었다.
"뭐야. 와 있었어? 언제 왔어. 비는 안 맞았고?"
비는 네가 맞았지. 제가 흠뻑 젖은 와중에도 내 걱정을 해오는 목소리가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녀석이 건네오는 말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곤 물기어린 손을 잡아 당겼다.
"우산 안 가져 갔었어? 또 일기예보 안 봤지?"
"응. 아침엔 맑았잖아."
"바보야…,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차피 버스 탔잖아. 별로 안 맞았어. 정류장에서 집까지 그렇게 멀지도 않고."
"전화를 받을 상황이 아니었겠네…. 얼른 씻고 와. 감기 걸리겠어."
서둘러 안으로 발을 들이곤 화장실로 달려가 마른 수건 하나를 꺼냈다. 그리곤, 혹여나 바닥에 물기가 떨어질까 가만히 현관에 서 젖은 제 몸을 바라보며 인상을 찡그리고 있는 김종인에게 다가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 주었다. 그런 날 보며 연신 웃음을 짓던 녀석이 내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어왔다. 고통이라곤 단 1퍼센트도 느껴지지 않았지만, 일부러 아픈 척을 해보이며 볼을 어루만졌다.
"맛있는 냄새 난다. 오늘 메뉴는 뭐야."
천천히 안으로 발을 디디며 나를 향해 말을 건네오던 김종인이 작게 재채기를 해보였다. 그런 녀석의 등을 툭툭 치며 감기 걸리면 안 된다며 얼른 씻고 나오라 재촉을 했고, 내 성화에 못 이긴 녀석이 알았다며 제 방 안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다. 그저 소파에 가만히 앉아 다시금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빗줄기는 더욱 거세진 듯했고, 이른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늦은 밤마냥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집에 어떻게 가지….
"샤워하고 뭐 입을까. 더운데 그냥 벗고 있을까."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걱정을 그려내고 있을 때, 열린 방문 사이로 김종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잘못 들은 거라 생각하며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얼굴만 빼꼼 내민 채 씨익 웃고있는 김종인의 모습이 보여왔다. 그저 아랫입술을 꾸욱 문 채 녀석을 바라보기만 하다 작게 인상을 굳히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말도 안 되는 소릴…."
"얼굴은 왜 빨개지는데."
부스스 웃으며 내 얼굴을 가리키는 김종인의 모습에 더욱 얼굴이 붉게 익는 것도 같았다. 애써 아니라며 세차게 고개를 젓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내 모습 뒤로 녀석의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상관을 하지 말자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며 된장찌개를 데우기 시작했다.
*
맛있다. 왜이리 맛있어. 진짜 맛있네. 식사 내내 김종인이 내뱉던 말이다. 그런 말은 한 번으로도 충분한데. 자꾸 그렇게 입이 닳도록 해주면 부끄러운데. 너무도 쑥쓰러워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시간이 부족해 학교에서 점심도 먹지 못했다며 불평불만을 해보이던 녀석은 결국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제 윗입술에 밥풀이 두어 개 붙은 줄도 모르고 묵묵히 밥을 먹기만 하던 모습이 꽤나 웃기면서도 귀여웠다. 몰래 휴대폰을 꺼내들어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남겨뒀어야 하는 건데…. 뒤늦게야 아쉬움이 느껴졌지만, 이미 내 눈으로 가득 담았으니 후회는 없었다.
빗줄기는 어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거세지는 것만 같았다. 창문을 꼬옥 닫아도 세찬 빗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올 정도였다. 오늘 역시 사이 좋게 설거지를 마치곤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시원한 음료를 마셨다. 이젠 이런 일상들이 너무도 익숙하게만 느껴졌다. 누군가의 집에서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설거지를 하고, 마주보며 앉아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고…. 정말이지 행복했다. 이런 잔잔한 일상이, 기분 좋은 떨림이, 내게 하루하루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배싯 웃으며 차디찬 오렌지주스에 입술을 적셨다. 그저 생각만 해도 입가엔 절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비가…. 비만 안 오면 참 좋을 텐데-.
"… 비 언제 그칠까?"
"오늘 안엔 안 그칠 것 같은데."
"… 안 돼…."
"왜 안 돼."
"집에 어떻게 가…."
"안 가면 되잖아."
"엥?"
"자고 가."
"……."
"난 당연히… 재울 생각이었는데."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는 김종인을 바라보며 입을 꾸욱 다물었다. 그런 내 모습에 고개를 슬쩍 갸웃해 보이던 녀석이 이내 피식 웃음을 짓곤 다시금 입술을 뗐다.
"어차피 내일 주말이고, 지금 비도 많이 오는데."
김종인의 얼굴과, 빗물로 뒤덮인 창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머릿속엔 수만 가지 생각들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저번 때와 같이, 녀석은 순수한 의도로 건네온 말이었다. 그러나, 의미 모를 불안감과 난감함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하는 건 여자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진 않을까. 안 그럴 거라는 거 알지만… 혹시나, 정말 혹시. 그저 입술을 오물거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그럼 하루만…."
웅얼거리듯 작게 말을 내뱉곤 거실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사실, 기분이 조금 묘했다. 이상할 건 전혀 없는데. 이런 감정을 느낄 필요는 더더욱 없는데. 왜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만 생각이 기우는 걸까. 왜-. 알 수 없는 물음을 마음속으로 던지며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지금의 우리가 아닌 예전의 우리였어도, 과연 이런 감정일까. … 두근두근, 잔잔한 떨림이 느껴졌다.
*
"이거 괜찮은 것 같은데? 완전 편해 보여."
"안 돼. 오세훈이 한 번 입었던 거야."
"에이, 뭐 어때."
제법 편안해 보이는 반바지를 꺼내드는 내 손을 제지하며 김종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녀석의 말에 작게 웃어보이며 쿨하게 대답을 해보이자, 완강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금 옷장 안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이 꽤나 귀엽게 느껴져 푸스스 웃음을 지었다. 녀석이 결국 꺼내든 옷은, 약간의 포인트가 들어간 하얀 반팔 티셔츠와 까만 반바지였다. 아무렇지 않게 제 옷들을 건네는 녀석을 흘끗 바라보며 어설픈 손길로 덥석 받아들었다. 그리곤, 녀석이 꺼내준 파란색 새 칫솔을 꼬옥 쥔 채 화장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건 다름 아닌 면도기였다. 내가 남자 집에 와있긴 하구나. 남자 집에 와있구나, 내가. 이런저런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방금 김종인이 사용해 아직 표면에 물기가 가득 묻어있는 치약을 들어 칫솔에 적정량을 짰다.
*
"……."
김종인의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를 갖춰 입은 내 모습을 슬쩍 내려다 보았다. 큼지막한 티셔츠는 엉덩이를 반쯤이나 덮었고, 바지는 시원하니 제법 편하게 느껴졌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러워, 피식 웃음이 터졌다. 세수를 하느라 질끈 올려 묶고 있던 머리를 다시 풀곤 살짝 젖은 앞머리를 정돈했다. 민낯이나 다름 없는 얼굴로 왔기에 망정이지, 만약 화장을 하고 왔다면 크나큰 후회를 할 뻔했다. 녀석의 집엔 화장을 지우기 위한 클렌징 크림이나 클렌징 오일, 클렌징 티슈가 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후우-, 길게 호흡을 내뱉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거울에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그리곤, 잠그고 있던 화장실 문을 슬쩍 열며 먼저 한 발을 살며시 내디뎠다. 녀석은 방 안에 있는 건지, 거실엔 적막만이 감돌았다. 가만히 거실을 훑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녀석의 방으로 향했다.
"… 나 왔어."
침대에 앉아 무언갈 찾는 듯 보이는 김종인의 뒷모습에 대고 작게 말을 건넸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녀석의 시선이 내게 닿아왔다. 저도 모르게 내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던 녀석이 이내 푸스스 웃으며 제 옆 자리를 툭툭 쳤다.
"옷 많이 크냐."
"그냥, 조금."
"사진 한 장 찍을까."
"… 아니…! 무슨 소리야."
"몰래 찍지 뭐."
목소리엔 웃음기가 가득 묻어 있었다. 그런 녀석을 살짝 흘기며 침대에 털썩 앉았다. 폭신한 침대 위엔, 아까 내가 내려놓은 클러치백 하나가 놓여 있었다. 슬쩍 손을 뻗어 클러치백을 집어들곤 살며시 지퍼를 열어 보았다. 들어있는 건 별로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은 제법 가득 차 있었다.
"종이야, 뭐 찾아?"
"로션."
"로션?"
"네가 바를 만한 로션. 남자 로션은 여자가 바르기엔 좀 세잖아."
"……."
"누나가 까먹고 놓고 간 샘플-, 어딘가 있는데."
짜증이 잔뜩 섞인 듯한 목소리를 묵묵히 듣기만 하다, 클러치백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바를 만한 로션이 있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로션을 찾긴 커녕, 잃어버린 줄 알고 한참 동안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느라 애를 먹었던 립스틱이 발견되었다. 이게 여기 들어 있었을 줄이야-. 하마터면 하나를 새로 구입할 뻔했는데, 이렇게 뜬금 없는 상황에 발견하게 돼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뚜껑을 열어 보았다. 상태는 양호했다. 발라보니 너무 빨개 사놓고 한두 번밖에 사용한 적 없던 거의 새 것의 립스틱이었다.
"……."
열심히 제 서랍을 뒤지고 있는 김종인의 뒷모습을 흘끗 바라보다, 순간 치민 호기심에 립스틱으로 입술을 칠했다. 색깔이 어떻더라. 도대체 얼마나 빨갰길래 꽁꽁 아껴뒀지. 립스틱을 발라 제법 텁텁해진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서로 비비곤 작은 손거울을 꺼내들어 내 모습을 비추어 보았다. 마치 쥐를 잡아 먹기라도 한 듯 새빨갛기만 한 입술에,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살짝만 발랐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입술은 미치도록 붉었다. 아, 괜히 발랐다. 왜 발랐지, 내가. 지워야 하나. 끊임없이 자라나는 생각들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발동한 작은 장난기에, 살며시 녀석의 왼손을 잡아 부드러운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뗐다. 녀석의 손등엔 빨간 입술 자국이 새겨졌다. 갑작스레 닿아온 촉감에 흠칫 놀란 건지, 녀석이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제 손등에 새겨진 빨간 입술 자국과 내 눈동자를 번갈아 바라보던 녀석이 이내 옅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갑자ㄱ…"
적잖이 당황한 듯 보이는 모습에 더욱 장난을 걸고 싶어져, 씨익 웃으며 이번엔 녀석의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런 내 행동에 마치 돌이라도 된 양 딱딱하게 몸을 굳힌 채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이 다시금 내게 시선을 옮겨왔다. 분명 장난스러운 마음에 건넨 작은 스킨쉽이었지만, 뒤늦게야 부끄러움이 치밀기 시작했다. 그저 녀석의 눈을 마주하는 것조차 쑥쓰럽고 창피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황급히 시선을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 순간이었다. 천천히 내게 다가오는 듯싶던 녀석의 얼굴은 곧이어 바로 코앞에서 멈춰섰고, 묵묵히 내 입술을 바라보기만 하던 녀석이 이내 제 입술을 지그시 포개왔다. 지난 날의 입맞춤과는 사뭇 다른, 조금은 농도가 짙은 입맞춤이었다. 그러다 문득, 입술에 립스틱을 칠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급하게 녀석을 밀어내며 입술을 뗐다. 그런 내 행동에 천천히 눈을 뜨며 살짝 인상을 찡그리던 녀석이 작게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잠깐…."
"… 응, 왜."
"… 나 립스틱 발랐잖아."
"그게 왜."
"……."
"상관 없어. 다 먹을 거야, 내가."
"……."
"너 때문에 미치겠다."
낮게 읊조리듯 말을 내뱉은 김종인이 다시금 내 입술 위로 제 입술을 겹쳐왔다. 그 느낌이 짜릿하면서도 부드러워, 찬찬히 눈을 감고 녀석을 받아들였다. 간지럽게 맞닿은 혀로 작은 쾌감이 전해져왔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나. 리드를 해오는 대로 가만히 있을까. 아직 내게 있어 '키스'라는 건 어렵고 낯설었다. 팔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며, 고개는 어느 정도 꺾어야 하는 것이며, 숨은 어떻게 쉬어야 하는 것인지… 제대로 아는 건 아직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김종인이 이끄는 대로, 김종인이 해오는 대로 조금씩 맞춰나갈 뿐이었다. … 입맞춤은 더욱 격해지는 것도 같았다. 물론 나 혼자만의 느낌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느낌은 그러했다. 분위기에 취한 듯한 녀석은 결국 그대로 내 어깨를 살짝 밀어 침대에 눕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당황스러움이 머리 끝까지 치닫기도 잠시, 다시금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하는 혀를 살짝 밀어내며 잇새로 녀석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갈 곳을 잃은 팔은 어느새 녀석의 목을 두르고 있었다. 이래도 되나, 우리. 침대 위에서 우리… 이래도 될까.
"……."
"……."
작은 걱정이 하나둘 피어나기 시작할 즈음, 김종인이 천천히 입술을 떼어내며 제법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작게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떨구기 시작한다. 그런 녀석을 묵묵히 바라보다 덩달아 미간을 좁혔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로 녀석이 말을 건네왔다.
"나 잠깐,"
"……."
"… 화장실 좀."
그러더니 황급히 침대를 내려가 거실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 모습이 조금은 의아했지만, 그저 묵묵히 녀석을 기다렸다. 그리곤 작은 손거울을 꺼내들어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입술에 예쁘게 발라져 있던 립스틱은 어느새 잔뜩 번져 엉망진창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엄청난 창피함과 부끄러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똑같이 립스틱이 군데군데 어지럽게 번져있을 김종인의 얼굴을 보면 이보다 더욱 심한 부끄러움이 일 것만 같았다.
"……."
그리곤 얼마 안 있어 김종인의 모습이 보여왔다. 멋쩍게 웃으며 제 뒷목을 어루만지는 녀석의 모습에, 덩달아 나까지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뺨에 남아있는 선명한 입술 자국과 입술에 번진 빨간 립스틱이 참 볼 만했다. 녀석의 얼굴을 보자마자 부끄러움이 치밀 거라며 걱정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살풋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 날 보며 쭈뼛거리듯 다시 침대에 걸터 앉는 녀석의 모습에 더욱 웃음이 터졌다.
"김종인 지금 완전 못생겼어. 얼굴에 립스틱… 아, 이게 다 뭐야…."
"… 아, 진짜."
옆에 놓여있던 거울을 들어 제 모습을 비춰보던 김종인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녀석을 보며 연신 웃음을 터뜨리자, 곧이어 내게 거울을 건네온다.
"넌 지금 섹시해."
"……."
"얼른 지워. 또 하고 싶지 않으면."
쑥쓰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김종인이 작게 웃음을 짓곤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 몇 장을 뽑아 제 입술을 벅벅 닦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잘 닦이지 않는다며 인상을 더욱 굳혀보인다. 그저 벙찐 채 녀석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다, 클러치백 안에서 물티슈를 꺼내 녀석에게 건넸다. 심장이 왜 이러지. 자꾸만 빠르게 두근거렸다. 달달한 입맞춤을 나눌 때보다, 지금 더더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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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글도 초록글.. 이라니요.. 전 결심을 했습니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절을 해야겠다고.. 정말 감사해요 여러분 :) 제가 사랑하는 거 아시죠. 흐흐 전 항상 저녁 시간에만 오는 것 같네요, 어째.. 전 이미 짬뽕을 배부르게 먹은지라 사실 배가 터질 것 같아요.. 여러분도 맛있는 저녁 드셨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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