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은 한꺼번에 듣기를 추천해드립니다♡)
"... 그럴 수 없으니까."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다, 혜선이 뒤를 돌며 눈시울이 붉어진채로 입술을 떼었다.
"... 그럼. 제가 죽으면 이루어질 수 있어요?"
"....."
"그런거라면, ... 그런거라면 저 일찍 가도 괜찮아요. 살아서 안되는 인연이라면, 저 정말 괜찮아요."
"... 혜선아."
"좋아해요."
... 좋아해요. 그 말을 내뱉어버렸다. 혜선이가.
"......"
".. 좋아한다구요."
말을 내뱉고 어쩔 줄 몰라하던 혜선이는 다시 뒤를 돌아 먼저 저멀리 뛰어가버렸다. 점점 내게서 멀어져 점이되는것에 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부터 어떻게 할 지 그 어떤 생각 조차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리곤 그대로 뒤로 누워 불어오는 바람에 눈을 감았다. 귓가에 속삭이는 바람은 알고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를. 알고 있다면 더 크게 속삭여주면 안되는걸까.
"... 그 어떻게라도 해보게."
사신
"혜선아, 어제 뜰가서 무슨 일 있었어? 어제도 눈 부어있더니, 오늘도 그러네."
"... 아냐, 아무것도."
"피곤해서 그런가보다. 오늘은 좀 쉬어."
"아냐, 괜찮아 정말."
그저께부터 오늘까지 혜선은 한없이 우울해진 기분에 사로잡혀있었다. 혜선은 자기 욕심이 과해서 그런 것이라며, 곧 죽을 목숨이 바라는게 많아 그런 것이라며 속으로 자책했다. 오늘 입을 옷가지들을 보는데, 마땅한 옷이 없어 당황하다, 저번에 월매에게 빌린답시고 모든 옷들을 세탁해버린 것이 생각났다. 맞다, 오늘이었지. 같이 장신구가게 가기로 했던 날.
"어, 혜선아!"
"... 아, 응."
월매도 혜선이 옷을 찾는 지 알았는지, 곧바로 손을 흔들었다. 월매에게 다가가니 갖가지 화려한 옷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 예쁜 색감들의 옷들을 보며 놀라워하다, 월매가 먼저 한 옷을 혜선에게 가져다대었다. 빨간치마에 노란저고리가 단순해보이긴 커녕 고급스러워보였다.
"이거 예쁘다. 나는 이런 색 안어울리는데, 넌 잘어울리네?"
"... 괜찮은 것 같아?"
"어. 완전. 이 옷 그냥 너 줄게. 어차피 난 입지도 않는데."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곧바로 옷을 챙겨입는 혜선이다. 다 입고나니 그 모습을 보던 월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혜선을 바라보았다. 차갑기만 한 모습에서 밝은 옷을 입으니 인물이 사는 듯 했다.
"야, 너 진짜 예뻐. 빈말 아니고."
"그래보인다니 다행이네."
칭찬을 받고나니 우울했던 기분이 한결 나아지는 혜선이다.
'월매! 여기와서 물 뜨는 것 좀 도와주라, 오늘 큰 손님들 오시는데 일손이 부족해'
"아, 네네! 내려갈게요. 하여튼 나만 찾아, 저번에 도와줬더니. 나 가본다?"
부름에 급히 내려가보려는 월매를 혜선이 붙잡았다. 아무래도 저번 조짐이 영 찜찜한 모양이었다.
"... 어, 잠깐. 월매야."
"... 왜?"
"... 이거."
"노리개?"
그냥 내려가려는 월매에게 자기 노리개를 빼내어 달아주고는 됐다, 며 고개를 끄덕인다.
"혹시나해서. 정말 우물가 귀신이 있으면 어떡해."
"야, 너도 그걸 믿.. 뭐 하여튼간에... 고맙다, 생각해줘서."
툭 한마디 내뱉으려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돌아서는 월매를 혜선은 그저 귀여운듯 넌지시 웃어보였다. 그러고는 이내 자신도 나가보려는듯 작은 손거울로 모습을 비춰보며 무표정인 얼굴에서 입가를 올려보는 혜선이다. 속은 미어져도 겉으로 표를 내서는 안되니까.
아까까지도 있던 사람이 어딜간거야. 우물 밖으로 나오니 사신은 온데간데 없다. 우물가에 걸터앉아 여느 때와 같이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데, 오늘 무슨 큰 손님이라도 오는건지 다른 때보다 더욱 바빠보였다. 우물에 물을 길으려는 사람들도 많고. 누가 오길래 그런담.
"어후, 사람이 이것 밖에 안돼?"
"다들 요리하느라 바쁘죠."
"안되겠다. 월매 불러와야지."
"괜찮겠어요 월매? 안그래도 저번에 우물에 빠질 뻔 했는데."
"이그 이 사람아. 그걸 믿냐 믿어? 됐고, 가서 월매나 불러와."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자니 아무래도 저번에 나한테 사람 좀 봐가면서 빠뜨리라던 사신 말이 떠오른다. 무슨 소문이 돌긴 돌았나보네. 그나저나 월매라니, 잘됐네. 우물 안에 들어가있어야지.
"월매! 여기와서 물 뜨는 것 좀 도와주라, 오늘 큰 손님들 오시는데 일손이 부족해"
"아, 네네! 내려갈게요."
옳거니. 얼른 와라. 아마도 오늘인듯 하네, 드디어 한 푸는 날이.
"여기다 물 다섯 바가지만 받아줘. 나 부엌에 일이 많다."
"하여튼 언니는 나한테만 그런다니까? 내가 돕질 말아야지 원."
월매 목소리와 함께 우물 바가 내려오기 시작한다. 중간쯤 내려올 때, 월매의 고개가 살짝 숙여진다. 그 때에 줄을 잡고 있는 월매 손을 끌어당겼다. 오늘은, 오늘은 기어코 ...!
"어, 어... 아악!!"
"월매야!!!"
"어어, 저기 저!!!"
주변 사람들 가는 듯 했더니만. 아직 남아있었어? 에라 모르겠다하며 신경쓰지않고 더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발 끝을 잡아당기는 사람들 때문에 더 힘이 부치기 시작한다. 온 힘을 쏟아부으니 밑으로 떨어져가는 힘 때문에 쉽게 내려온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하고 끌어당기는 순간, 누군가의 손이 월매 손 위로 겹쳐올라온다. 거의 다 됐는데, 왜!
"이거 놔!!!! 놓으라고!!"
월매의 발악하는 소리에 집중도 안되는데, 겹쳐올라온 이름모를 손에 당황스럽기만 할 뿐이다. 누구야, 이거. 그냥 확 다 끌어내려버릴...!
'월매 향만 맡고 죄없는 자들까지 끌어당기지 말 것.'
'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야. 하나는 네 눈을 똑바로 뜨는 것.'
'또 하나는 아예 그 누구도 끌어당기지 않는 것.'
아, 맞다. 약속했었지 나, 사신이랑. 아무나 끌어당기지 않겠다고.
"그런다고 바뀔 것 같아? 너는 죽었다고! 이미 진환선비님도 너 생각안한단 말야!!!"
" ... ...!"
아마 거기서 고삐가 풀려버린 것 같다. 월매의 미쳐버린 그 발악을 듣고나서. 그 겹쳐진 손이 누군지 상관없이 월매와 같이 그대로 힘껏 끌어내려버렸다. 미안해요 사신님. 나는 안되나봐. 이름모를 또 다른 아이를 떨어뜨린 그 죗값은 달게 받을게요. 그 누구도 피해 안가게 할 수도 없었고, 이미 죽어버린 내 눈을 똑바로 뜨는 것도 못했어 나는. 미안해요. 미안해요 사신님.
"... 난.. 못하겠어요."
월매, 그리고 이름 모를 그 아이까지 밑으로 쑥 빠지며 재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는데, 위에서 누군가 내려오더니 떨어지고 있는 이름 모를 그 아일 붙잡았다. 잡지 않은 월매는 그대로, 물 속으로 빠져버렸지만.
"... 너 진짜!!!!!"
"... ..."
사신이였다. 날 보며 버럭 화를 내는 것에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점점 시야가 흐려지더니 사라져가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다. 뭐지, 한... 한을 풀어서 그런건가.
"... 한 풀어서 참도 좋겠다. 죄 없는 애까지 죽이려들고."
"... ... 미안해요 사신님."
"아마 네 죗값은 위에서 달게 받을거다. ... 올라가, 얼른."
그렇게 사신님은 이름 모를 그 아이를 데리고 다시 우물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며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찔끔 나려다 정신을 차리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이젠 정말 마지막이 될 기도를 했다. 진환 선비님, ... 월매 내가 데려가요. 진환 선비님은 이제 우리 둘 다 잊고 행복하게 살아요. ... 부탁이에요. 정말로.
그 기도를 마친 후, 그대로 홍주는 정신을 잃었다. 뭐, 혼령이 정신이 어디있겠냐만은. 그렇게, 홍주. 우물가는 영원히 하늘로 올라가게 되었다. 얼마 안있어 월매 또한 사신이 직접 내려와 그 혼령을 데려갔다. 그렇게, 영주각의 길고 긴 삼각관계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한빈은 오늘 가기로 한 장신구 가게가 열렸나 보고 오는 참이었다. 저번까지만 해도 한참 준비 중이던 것이 이유였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뛰어 들어가니, 우물가에 한가득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저번에 약속했는데, 이번엔 아니겠지 하고 보는 순간 한빈은 놀라고 말았다. 다름 아닌 혜선이었다. 월매를 구하려 같이 손을 뻗은 듯한데, 그 모습을 보며 한빈은 오늘이 마지막인 날인 줄도 모르고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잡아야 했다. 잡아서, 어떻게든 잡아서 말해야 했다. 진심을.
"혜선아!!!"
재빠르게 떨어져가는 혜선을 한빈이 곧 붙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안아 밖으로 나오고 싶지만 사람들 눈이 문제였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나갔다가는 큰일 날 테니까. 어떻게든 일단 혜선이를 올려야 했다. 주변에 보이는 것 아무거나 찾다, 바를 발견했다. 혜선이를 바에 올려 사람들이 끌 수 있도록 밑에서 바쳤다. 떨어지다 바에 걸린 거라 생각했는지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바를 끌어올렸다. 가까스로 구해진 혜선은 우물 옆 정자에 눕혀졌다. 그 옆을 한빈이 지키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혜선이 천천히 눈을 떴다.
"... 나리."
"혜선아, 이제 좀 괜찮은 것이냐"
혜선이는 대답 대신 자기 몸을 힘겹게 일으켰다. 일어나 앉는 것을 한빈이 도와주는데, 혜선이 한빈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찼다. 원래 이렇게 손이 차지 않았던 듯한데. 손을 내려다보던 혜선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 후생은 없다지요. 그렇게 사람들이 전생, 현생, 후생 하지만. ... 후생이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 ...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이냐. 후생이라니."
"나리가 아니었다면 저는 물에 빠졌을 것입니다. 허나, 그러지 않았지요. 나리가 도우셨으니까요."
"혜선아 무슨...!"
혜선이를 부르는 한빈의 입술 위로 차가운 입술이 포개어졌다. 오로지 둘만이 느낄 수 있는 감촉. 다른 이들은 보지 못하는, 오로지 혜선의 눈에만, 그리고 혜선만 느낄 수 있는 한빈의 입술. 그렇게 잠시 동안 포개어진 입술은 혜선이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혜선은 한빈을 슬프게, 아련하게 바라보다 점점 사라져갔다. 한빈이 그 모습을 보며 놀라 어쩔 줄 몰라 하자 뒤에서 준이 걸어왔다. 예상한 듯한 눈치였다.
"... 오늘이 마지막거, 알면서 구한거야?"
"......"
"법도를 어겼어. 법도 따라, ... 연기처럼 사라지는거야."
한빈은 지금 자신에게 하는 말들을 한귀로 흘려버리고 싶었다. 사라져가는 혜선을 향해 손을 뻗어도, 잡히는게 없었다.
"혜선아, 혜선아.. 혜선아!!!"
아무리 발악을 해보아도 듣는 혜선이는 없었다. 아직, 아직 못한 말이 너무 많은데. 오늘은, 오늘은 해야겠다 마음 먹었는데.
"..혜선아... 혜, 혜선아 ...."
한빈은 오열했다. 그리고는 후회했다. 나 하나 못 바쳐 너를 지키지 못한 것에. 어깨너머 들었던 그 이야기의 끝이, 결말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해봤어야 하는 건데, 어떻게든 해봤어야 하는 것인데. 한참을 울부짖던 한빈은 그렇게, 몇날 며칠을 새었다. 혜선이 떠나버린 그 정자에서. 더는, 더는 혜선의 따뜻함을 느낄 수 없는, 그 정자에서.
그것이, 1785년. 한빈이 처음으로 사신이 되어 누군가를 떠나보내었던 일이었다.
"......"
".. 좋아한다구요."
잊지 못할, 잊어서는 안 될, 잊고 싶지도 않은 한빈의 첫,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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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252 입니다♡
드디어 과거편이 끝이 났어요! 후련하다 후련해.
6편 부터는 이제 본격적인 현재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5편까지의 이야기는 한빈이가 가지고 있는 아픔이라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럼 우리는 6편에서 만나요! 안녕♡
맞다! 2편이 초록글에 올라가있더라구요! 감사합니다♡ (3편도 올라갔다는데 못찾겠네요. 거 참. ㅠㅠ)
사신은 사실 제가 즉흥적으로 쓰기도 했어서 참 많이 걱정했는데 좋아해주시는 분들도 계셔서 정말 다행인 것 같아요 흐헝. 사랑해요!♡
암호닉! (암호닉은 댓글로 달아주시면 됩니당♡)
주네띠네 님♡ 구닝 님♡ 초록프글 님♡ 핫초코 님♡ 뀰지난 님♡ 바람빈 님♡ 비비빅 님♡ 부끄럼 님♡ 0324 님♡ 마그마 님♡ 까까 님♡ 깜냥 님♡ 준회윙크 님♡ 환생 님♡ 김밥빈 님♡ 바나나킥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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