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27 (나와 너의 행복)
'야, 도경수! 너희 아빠 사기꾼이라며?'
'존나 대박이네. 그 아빠에 그 아들이라고, 혹시 네 미래도 사기꾼?'
'보나마나 이 가방도 지 아빠가 사기쳐서 뜯어낸 돈으로 산 거겠지.'
'학교 다니기 쪽팔리지도 않냐? 무슨 낯짝으로 매일매일 등교를 해?'
듣기 괴로운 말들이 마음속을 쿡쿡 찔러왔다. 여러 목소리들은 생생하게 들렸지만 정신은 흐릿하면서도 몽롱한 게, 이건 현실이 아닌 꿈인 듯했다. 난 꿈을 꾸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몇 년 전인 고등학생 시절, 교복을 단정히 입은 채 책상 앞에 앉아 영어 지문을 해석하고 있던 내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사실, 다신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다.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시절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뜬금없이 그게 왜 꿈속에 나타난 건지, 정말이지 의문이었다.
"……."
가위와도 같은 지독한 악몽에서 깨어나 번쩍 눈을 떴다. 이마엔 어느새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고장이라도 난 듯한 침샘 탓에 바싹 메마른 입안이 너무도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뻐근한 몸을 이끌며 침대에서 내려와 바닥에 발을 디뎠다. 머리가 살짝 어지럽긴 했지만, 걷지도 못할 만큼의 심각한 어지러움은 아니었다. 밖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미 빗물로 뒤덮인 유리창은 바깥 세상을 뿌옇게 보여주고 있었다. 주룩주룩- 세찬 빗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우는 것만 같았다. 씨발, 시끄럽다.
*
어릴 적부터 난 어두운 아이였다. 성격이 어둡다거나, 표정이 어둡다거나, 이런 식의 구체적인 부분 말고 그냥 모든 것이 어두운-. 내 주변의 얼마 되지 않는 몇몇 사람들은 항상 내게 말하곤 했다.
'경수야, 넌 왜 표정이 없어?'
'도경수, 너는 좀 어두운 애야. 그래서인지 말 거는 게 조금은 무섭달까-.'
그들이 그런 말을 건네올 때마다 난 해줄 대답이 없어, 항상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아예 그 자리를 피해버리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내 행동마저 이상하다 생각한 건지 하나둘 내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침대에 편히 누워 거의 세 시간 동안 깊은 생각에 빠져있기도 했다. 생각의 주제는 물론 내 자신이었다. 왜 다들 날 어둡다 생각하는가. 정신 차려 보니 왜 내 곁엔 아무도 없는가-. 오랜 시간을 고민에 빠져 있었지만, 결국 제대로 된 답은 단 하나도 얻어낼 수가 없었다. 뭐 때문일까. 도대체 무엇이 내 삶을 이토록 단조롭고 외롭게 만들어 놓았을까.
평범함에 살짝 미치지 않던 형편이었지만, 먹을 건 다 먹고 입을 건 다 입으며 나름 만족스럽게 자라왔다. 우리 가족은 엄마, 아빠, 나, 형. 이렇게 넷이었다. 여느 가정과 다름없이 평범하기만 하던 우리 집이지만,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돌변하는 아빠 탓에 마냥 편안하게 지낼 순 없었다. 아빠가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는 날이면 항상 긴장감을 가득 끌어안은 채 방 안에 코옥 박혀 책을 읽어야 했다. 가끔 이유없이 머리를 얻어 맞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만 아빠의 팔을 잡고 버럭 화를 내기도 했지만, 돌아오는 건 무시무시한 그의 폭력이었기에 힘없이 차가운 바닥에 내쳐져야 했다.
날로 심해지는 그의 폭력이 두렵고 무서웠던 건지, 엄마는 결국 집을 나가 버렸다. 나와 형에겐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런 그녀의 행동이 물론 이해는 됐지만, 당시의 난 원망감만을 품고 있었다. 남은 나와 형은 어떡하라고 그냥 나가버린 걸까. 단지 뱃속에서 나오기만 했을 뿐이지, 당신한테 우린 아무것도 아닌 건가. 배 아파 낳은 자식들이긴 한데 그리 중요한 존재들은 아니라는 건가. 어떻게 한 마디 말도 없이-.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도 같은 아빠는 매일 술을 달고 살았다. 그 놈의 술이 뭐길래 회사도 짤리게 만들고, 사람 하나를 병신 머저리로 만들어 놓는 건지-. 이 세상에서 술이라는 게 없어졌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엿 같은 술 때문에 아빠가 폭력적으로 변했고, 그 폭력에 못 이긴 엄마는 집을 나갔다. 주정뱅이가 되어버린 아빠는 회사마저 짤리고 말았다. 그랬기에, 형이 대신 아르바이트를 해 기본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신경 쓰지 말고 학교 공부에나 열중하라던 형의 말에 고개를 주억이긴 했지만, 난 몰래 몇몇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남아 야간 자율학습을 하겠다던 내 말을 굳게 믿고 있을 형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난 그 시간에 시내로 나가 전단지를 돌렸고, 주말엔 독서실에 가 공부를 하겠다며 거짓말을 한 뒤 고깃집에서 일을 했다. 형 혼자 힘들게 일을 한다는 게 내심 미안하기도 했고, 일단 그 돈으론 하루 세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일을 한다 해도 그가 버는 돈은 생계를 유지해 나가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급식비를 내지 못해 급식을 먹지 못하는 쪽팔림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라도, 난 내 시간을 아르바이트에 투자해 돈을 벌어야 했다.
'야, 도경수! 너희 아빠 사기꾼이라며?'
'존나 대박이네. 그 아빠에 그 아들이라고, 혹시 네 미래도 사기꾼?'
'보나마나 이 가방도 지 아빠가 사기쳐서 뜯어낸 돈으로 산 거겠지.'
'학교 다니기 쪽팔리지도 않냐? 무슨 낯짝으로 매일매일 등교를 해?'
여러 세포들로 구성이 되어있는 우리의 몸은 작은 우주계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딱 이 문장을 해석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의 발길질로 인해 내 책상이 옆으로 밀려났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옮긴 곳엔, 비소를 지은 채 짝다리를 짚고 서있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사기꾼…. 나를 사기꾼 아들로 취급하는 그들의 거친 말에도, 난 아무런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사기꾼이 맞았다. 제대로 말을 해주지 않는 형 때문에 사건의 전말은 자세히 알 수 없었지만, 아빠가 사기 혐의로 구속이 되었다는 것쯤은 막연하게 알 수 있었다. 작게나마 인터넷 기사에 올라왔던 걸 반 애들이 본 건지, 그들은 내게 해코지를 해오고 있었다. 하긴,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 중 성씨가 '도'인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소문이 어떻게 퍼진 건진 모르겠지만, 이미 우리 반을 비롯해 다른 반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아 저들끼리 쑥덕거리기 바쁜 듯했다.
'사기꾼 아들이래, 사기꾼.'
'아빠가 경찰서에 있대.'
'도경수, 담배 좀 사와라. 네가 사기 좀 쳐서 몰래 담배 한 보루 쌔벼 와. 그 아버지에 그 핏줄인데, 너도 사기꾼 기질이 조금은 있을 거 아니냐.'
소위 양아치라 불리는 몇몇 학생들은, 좁디 좁은 교실의 왕이라도 되는 듯 하루를 마다하지 않고 여러 방법으로 나를 괴롭혀왔다. 그런 날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난 왕따보다도 더한 은따를 당하게 되었고, 많은 이들의 이야깃거리 주제가 되었다. 나를 보며 수군거리는 이들의 대화 속엔 사기꾼이라는 단어가 매번 들어가 있었다. 그 단어를 들을 때마다 노이로제라도 걸릴 듯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나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나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는 이들에게 아니라며 이것저것 따지고도 싶었지만, 일단 그들의 말은 모두 사실이기에 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멍청이가 된 것도 같았다. 떡하니 입도 달려 있는데, 모두 맞는 말이라 딱히 할 말이 없다는 게 너무도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차라리 전부 거짓이었음 좋겠다. 모두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이면 좋겠다. 혼자인 건 상관 없었지만, 마치 하찮은 것을 보는 듯한 눈빛들이 싫었다. 내가 하찮아? 내가 잘못한 거 아니야. 사기꾼의 아들은 맞지만, 같은 핏줄이라 해서 나도 사기꾼인 건 아니야. 나도 보통 아이들처럼 친구를 사귀고 싶어.나도 웃고 떠들고 싶어, 남들처럼-.
'도경수 씨발새끼야.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좆 같냐? 병신이 도대체 말을 어떻게 알아 처먹는 거야, 씨발.'
레종 프레소 사오라 했지. 웬 던힐 라이트를 사와서 지랄이야, 지랄은. 뒤이어 들려온 말에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럼 나 줘. 내가 피우게-. 제 앞으로 손을 척- 내미는 내 행동에 비웃음을 짓던 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주먹을 날려왔다. 크나큰 마찰음과 함께 난 교실 바닥을 나뒹굴었고, 당연하듯 반 아이들의 시선은 온통 내게 꽂혀왔다. 내가 만만한가 보지, 넌. 내가 사기꾼 아들이라는 게 아니꼬와서 그런가 봐. 해주고 싶은 말은 많은데, 입술은 꾸욱 닫힌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만해.'
아예 내 위로 올라와 얼굴을 집중적으로 쳐오던 놈의 행동이 순간 거두어졌다. 힘겹게 시선을 옮겨 놓은 곳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한 남학생이 있었다.
'시끄러워서 모의고사 문제가 잘 안 풀리잖아.'
남학생의 하얀 명찰엔 까만 실로 이름이 수놓여 있었다. 박찬열. 우리 반 1등인 것으로도 모자라 집안까지 부유한 놈이었다. 녀석의 한 마디에, 시끌시끌하던 주위가 금세 조용해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들 다시 제 일을 시작하기 바빴고, 방금 전까지 담배 문제로 내게 시비를 걸던 놈마저 머쓱히 제 자리를 찾아갔다. 그때 난 다시 한 번 느꼈다. 박찬열은 남들과 많이 다른 놈이라는 것을. 얼굴이나 키, 집안, 성적이 모두 우수하다는 이유로 모든 이들이 쉽게 다가서지 못할 뿐더러 애초에 누구나 녀석의 말을 고분고분 따르게 되는, 그런 놈이라는 것을. 나와는 정반대인 놈이었다. … 씨발, 부럽네.
그날 이후로 난 줄곧 박찬열과 다니곤 했다. 내가 먼저 다가갔던 건 물론 아니지만 우연히 앞뒤로 자리를 앉게 됐던 게 그 이유였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난 녀석과 제법 친밀한 관계가 되어 있었다. 박찬열의 옆에 있으면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다. 담배를 사오라 매일 재촉을 하던 놈도 이젠 아예 내게 무관심이었다. 이쯤 되니, 박찬열이랑 같은 반이라는 게 정말이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국문학 관련 직업을 갖고 싶다 누누이 말하던 박찬열은, 다른 과목들보다 국어 과목에 더욱 열정을 가했다. 녀석이 다른 과목을 공부했던 적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국어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들마저 1,2등급을 잘도 받아내는 것인지가 정말 의문이었다. 원래 공부에 별다른 흥미가 없던 나지만, 녀석을 따라 국어 공부에 제법 시간을 투자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모의고사의 성적이 두 등급이나 올라 있었다. 성적이 두 등급이나 올랐다는 건 물론 기쁜 일이었지만, 사실 그리 기쁘진 않았다. 어차피 자랑할 사람도 없었다. 자랑스럽게 말하는 내게 잘했다며 칭찬을 해줄 부모님도 없었고,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바쁜 형도 집에 없었다. 친구 한 명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난 여전히 외로웠고, 혼자였다.
스트레스를 받는 날엔 몰래 담배를 피웠다. 저번에 잘못 산 던힐 라이트를 가지고만 있다 호기심에 한 번 피워봤던 게 화근이었을까, 난 어느새 담배라는 것에 중독이 되어버린 듯했다. 담배 심부름을 꽤 자주 해봤던 탓에, 어느 편의점을 가야 미성년자에게도 담배를 주는지에 대해선 빠삭했다. 대놓고 교복을 입고 가도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도대체 뭘 믿고 그런 불법적인 판매를 하는 건지 궁금했지만, 사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박찬열은 역시 좋은 대학에 합격을 했다. 수능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 난 어쩔 수 없이 재수를 선택해야 했고, 박찬열이 풀던 문제집 몇 권을 받아 필기를 모두 지운 채 공부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겉으로 티를 낸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지만, 내게 있어 박찬열은 정말이지 고마운 친구였다. 박찬열로 인해 학교생활이 조금은 수월해졌고, 나를 괴롭히기만 하던 외로움이 조금은 사라졌다. 사실 초반엔 나를 방어할 용도로 녀석과 가깝게 지냈던 것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난 서서히 녀석에게 마음을 열며 진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먼저 손을 내밀었던 건 나도, 박찬열도 아니었다. 친해지게 된 계기도 딱히 없었다. 그냥 나도 모르게…. 모든 이들의 선망을 받는 존재인 박찬열이 어떻게 나와 친해지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당시엔 밥 먹듯이 하곤 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나를 부러워하는 이들이 많을 것도 같다는 생각 또한 누누이 들었다. 박찬열은 여자들에게 고백도 많이 받았다. 고백을 받는 족족 거절을 하지 않던 탓에, 녀석의 연애 경험은 웬만한 카사노바 뺨칠 정도로 많았다. 과연 진심을 다해 여자를 좋아했던 건지, 단지 거절을 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어쩔 수 없이 고백을 받아들였던 건진 모르겠지만, 내 생각으론 아마 후자일 듯했다. 박찬열은 감정 없이 여자를 사귀곤 했다. 그래서였을까, 녀석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가 누굴 좋아하는 감정을 처음 느껴 본다는 건 나도 잘 알겠는데,'
'…….'
'솔직히 좀 유치하다는 생각 안 드냐.'
'…….'
'게다가 좋아하는 남자애도 있는 것 같다며."
'나 원래 유치한 놈이야.'
'…….'
'유치한 놈이니까 유치하게 나갈 거야. 지금도, 앞으로도.'
'…….'
'… 씨발.'
'…….'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거지?'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으니까.'
난 진심으로 박찬열과 그 여자의 사이를 응원하곤 했다. 박찬열이 좋아하는 감정을 처음 느끼게 된 여자이기도 했고, 그만큼 녀석에게서 간절함이 느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찬열은 옳지 않은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사랑이 과해진 탓일까, 녀석은 집착 아닌 집착을 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이 조금은 무서워지면서 왠지 모를 이질감까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내가 알던 박찬열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매일 바보같이 웃고만 있던 녀석인데.
내게 있어 박찬열은 소중한 존재였다. 그랬기에 난 진심을 다해 녀석을 말리고 싶었다. 그건 옳은 방법이 아니라고. 그건 사랑이 아닌 집착이라고. 잘난 것 하나 없는 어둡기만 한 나지만,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에 대해서도 구분 못할 정도로 병신은 아니었다. 점점 망가져가는 박찬열을 말려야 했다, 난.
박찬열이 마음에 두고있는 여자가 나와 같은 대학의 같은 학과, 같은 강의실에서 같은 수업을 듣고 있는 그 아이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했지만, 사실 속은 그 반대였다. 역시 세상은 좁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뜻밖의 인물을 마주할 순 없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박찬열은 그에 비례하듯 점점 미쳐만 갔다.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녀석의 집착은 늘어갔고, 점차 새로운 방법을 이용해 행복한 둘의 사이를 갈라 놓으려 애썼다. 무심결에 확인해본 녀석의 휴대폰은 그 아이의 사진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과 페이스북에 짧게나마 올려 놓았던 여러 글들의 캡쳐본부터 시작해 직접 도촬한 사진까지-. 심지어 집 안 화장실을 촬영한 사진도 있었다. 그것들을 눈으로 확인함과 동시에 온몸엔 소름이 돋았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왜 굳이 옳지 않은 방법을 택해 본인을 망가뜨리는 걸까. 한없이 여리기만 한 아이에게 왜이리 불안감을 안겨주는 걸까. 곁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사랑만 받아도 모자랄 애한테, 왜 굳이 네가 상처를 주는 거야.
'난 진심으로,'
'…….'
'너랑 인연을 끊고 싶다.'
넌 그 아이의 세상에 초대될 수 없어. 넌 그냥 손님일 뿐이야. 잠시 머물렀다 가는 손님. 오히려 불청객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까.
미친새끼.
박찬열은 결국 병원 치료를 받기로 결정을 했다. 그동안의 행실을 녀석의 부모님께 사실대로 말씀 드리기까진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아무렴 좋은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 상담을 받는 것조차 꺼려하던 박찬열은 당연하듯 입원 또한 거부를 했다. 그러나, 녀석의 증상은 날이 갈수록 더하면 더했지 결코 나아지진 않았기에 입원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꽤나 충격을 받은 듯 연신 한숨을 내뱉기만 하시던 박찬열 부모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리 말렸어야 하는데, 죄송해요-. 그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멘트를 전하던 무미건조한 내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아른거리는 것도 같았다.
박찬열이라는 두려움에 갇혀 하루하루를 불안감에 떨던 그 아이는, 녀석의 친구라는 이유로 가끔 나를 피하기도 했다.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당연히 거부감이 들겠지. 저를 괴롭히는 사람의 절친한 친구라는데, 거부감이 들고도 남았을 거야. … 내가 그 입장이었어도 분명, 거부감이 들었겠지.
나에게까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너를 위해, 난 온 힘을 다해 너를 돕고자 노력했다. 물론 겉으로 티는 안 났겠지만, 난 알게 모르게 뒤에서 너를 지키고 있었다. 박찬열이라는 그늘에 뒤덮여 좋아하는 사람과 편히 사랑을 하지도 못하는 네가 안타까워서였을까, 망가져가는 박찬열을 다시 바로잡기 위해서였을까. 그건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무슨 운명의 장난이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조별과제란 조별과제는 모두 너랑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너와 난 서서히 말도 텄고, 매일이다시피 점심 식사도 함께 했고, 나란히 앉아 수업도 같이 들었다. 덕분에 난 나도 모르는 사이 묘한 감정까지 느껴야 했다. 사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라, 그것이 마냥 좋은 감정이라곤 할 수 없었다. 20년도 훨씬 넘게 살아왔지만 난 지금껏 연애 경험이 단 한번도 없었고, 마음속에 좋아하는 사람을 품어본 적 또한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난 모든 게 낯설면서도 두려웠다. 이게 아닌데. 이러면 안 되는데. 친구가 좋아하는 여자일 뿐더러 이미 애인까지 있는 여자가 자꾸만 눈에 밟히고 있다는 사실에, 괜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사람 마음은 예상과는 달리 참 단순한 것만 같았다. 너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얼마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너와 내가 뭘 얼마나 붙어 있었길래,
'선배는 여자친구… 안 만드세요?'
좋아하게 되어버린 걸까.
'좋다는 생각이 드는 여자도 없고,'
거짓말이야.
'나 좋다는 여자도 없네.'
사실, 네가 좋은 것 같아.
네 옆에 좋은 남자친구가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네가 좋은 사람인 만큼 네 곁에 있는 남자친구 또한 좋은 사람이라, 정말 다행이야. 널 좋아는 하지만, 널 갖고 싶진 않아. 그냥 네가 행복했음 좋겠어. 널 행복하게 해줬음 좋겠어, 네 남자친구가.
요즘들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곤 한다. 그 아이에게 애인이 없었더라면 난 쉽게 다가설 수 있었을까-. 물론 아니었다. 난 절대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다. 난 절대 다가가지 못해. 나랑 있어봤자 넌 절대 행복할 수 없잖아. 모든 게 어둡기만 한 난 널 행복하게 해줄 수도 없고, 매일을 웃게 해줄 수도 없어. 난 자신이 없어, 널 가장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 줄-. 지금의 네 남자친구 만큼 넘치는 사랑을 주지도 못해. 난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지금의 네가 가장 예쁘고 행복해 보여. 네 옆에 김종인이 있고, 김종인의 옆에 네가 있는 게 가장 어울려. 둘 다 행복했음 좋겠다, 내 몫까지.
*
잡생각을 너무 오래 해버렸다.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생각들을 쓸데없이 질질 끌고 있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많이 흘러 있었다.
"……."
딱히 할 일이 없을 땐 산책도 할 겸 박찬열을 만나고자 집을 나섰다. 매번 무표정으로 나를 맞는 딱딱한 녀석이지만, 홀로 심리치료를 받으며 외롭게 있을 모습을 떠올리니 살짝 딱하긴 했다. 지금쯤 녀석은 뭘 하고 있을까. 사실 궁금하진 않았지만, 병원을 다녀온 지도 꽤 됐으니 왠지 오늘은 한 번쯤 가봐야 할 것도 같았다. 거세기만 하던 빗줄기는 어느새 많이 약해져 있었다. 후덥지근하게 느껴지는 축축한 날씨가 제법 불쾌하기만 하다.
*
삭막하다 느껴질 정도로 냉랭하기만 한 병원의 내부는, 자주 와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익숙한 병실의 문을 똑똑 두드리곤 살며시 문을 열었다. 열린 틈 사이로 박찬열의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 무언갈 열심히 하는 듯 보이는 녀석은, 아직 내 인기척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
"……."
작게 한숨을 내쉬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박찬열은 살짝 살이 빠진 것도 같았다. 힘없이 감겼다 떠지기를 반복하는 녀석의 눈꺼풀이 나른하게만 느껴졌다.
"박찬열."
낮은 부름에 박찬열의 시선이 곧이어 내게 꽂혀왔다. 안녕. 작게 인사말을 내뱉던 녀석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제가 하고 있던 일을 마저 해나가기 시작했다. 예전보단 한층 누그러진 어투와 표정이었다.
"뭐 하냐."
슬쩍 시선을 옮겨, 녀석의 무릎 위에 놓인 몇 장의 A4용지들을 바라보았다. 하얀 종이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림이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 샘솟는 것도 같아, 손을 뻗어 여러 장의 A4용지를 빼앗아 들었다. 첫 장과 다음 장, 그리고 또 다음 장, 다음 다음 장…. 모두 저와 그 아이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공부만 잘하던 게 아니라 그림도 곧잘 그리던 녀석은, 제법 섬세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림으로도 예쁘지, 우리 ○○이-."
씨익 웃어보이는 박찬열의 까만 눈동자를 멍하니 응시했다. 나아진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괜히 소름이 끼치는 것도 같았다. 종이 뭉텅이를 꼬옥 쥐고 있는 오른쪽 손에 힘이 들어갔다.
"… 나가 죽어, 개새끼야."
딱딱한 말을 내뱉곤 박찬열이 보는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그림들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내 손짓 몇 번으로 인해 종잇장들이 퍼즐마냥 작은 조각들로 쪼개졌다. 박찬열의 그림이 망가졌다. 그러나 녀석의 모습은 한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제가 정성스레 그려놓은 그림을 내가 망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런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다 종잇조각들을 쓰레기통 속에 거칠게 집어넣었다.
"그만해. 넌 네가 여기 왜 있는 건지, 그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아."
"그러게."
"그러게?"
"……."
"제발 그만하자. 부탁할게, 내가."
하루 빨리 원래의 너로 돌아와 주라. 난 더이상 망가져가는 널 볼 수가 없고, 너로 인해 괴로워 할 그 아이의 모습 또한 볼 수가 없어. 여기서 그만하자. 힘들잖아. 나도, 너도, 그 아이도-. 행복하게 해줘. 행복할 수 있게 해줘. 네 행복은 내 행복이고, 그 아이의 행복도 내 행복이나 다름 없어. 난 행복하고 싶어, 찬열아.
우리 행복하자. 제발 행복하자, 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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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수.. 물론 여주를 마음에 품고 있긴 하지만, 나쁜 역은 절대 아니에요. 엮이게 될 일도 전혀 없답니다. 그니까 안심해요오오로롤오랄라ㅏㄹ라 저 좀 오랜만에 온 듯해요. 방학 땐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왔던 것 같은데.. 크흡... 역시 개강이 문제였군요.. 개강이 잘못했네..☆
참, 이번 편부터 암호닉 신청을 다시 받기로 했어요!
신청은 매우매우 간단합니다.
댓글의 앞, 중간, 끝, 아무데나 상관 없이 [암호닉] 요렇게만 달아 주시면 돼요. 저와 조금이나마 소통을 하고 싶은 분들이 계시다면.. 주저하지 말고 옴팡지게 다가와 주세요^ㅠ^
기존에 신청을 해주셨던 분들은 다시 하지 않으셔도 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