츤데레 남사친과 능구렁이 남친 사이 2
26 (벅찬 마음)
커튼 사이로 새어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 하나가 따갑게 눈을 찔러와, 마지못해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깜깜하기만 하던 밤이 가고 어느새 아침이 온 듯했다.
"… 우응…."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건지, 내 팔을 베개 삼아 아기같이 누워 곤히 잠을 자고 있던 네가 작게 소리를 냈다. 얼굴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는 긴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 주었다. 자는 모습도 이렇게 천사 같을 건 뭐야. 예뻐 죽겠다.
"○○아,"
곤히 잠이 든 네 얼굴을 빤히 응시하다,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작은 부름에도 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많이 피곤했나 봐-. 뒤척이지도 않고 잘 자네. 같이 덮고 있던 이불을 네 쪽으로 더욱 끌어 덮어주곤,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어젯밤 벌어졌던 일들은 여전히 생생하게만 느껴졌다. 마치 행복한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분명 꿈은 아니었다. 피부로 가득 느껴지던 체온, 하염없이 귓가를 맴돌던 달뜬 목소리가 생생하게나마 머릿속 정중앙에 남아있는 걸 보니, 어젯밤의 일은 현실이었다.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행복한 현실-.
어제는 결국 새벽 네 시가 되어서야 잠이 들었다. 사실 어제라 칭하기도 애매할 만큼 늦게 잠이 든 건 사실이지만, 많은 시간을 자지 못했다 해서 아쉬움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다. 누가 먼저라 할 거없이, 어젠 거의 동시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그 후 두어 번 더 이루어진 행위에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은 탓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 뒤에야 잠을 편히 이룰 수 있었지만-. 더한 것도 했으면서 부끄럽다며 샤워는 같이 못하겠다던 네 모습이 여간 귀엽게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을 밝히고자 스위치 쪽으로 팔을 뻗으려는 내 행동을 제지하며 쑥쓰럽다는 말을 해오던 작은 목소리와 귀여운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괜히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어떻게든 분위기를 잡아 거사를 치르려던 목적을 가지고 있던 건 물론 아니었고, 성욕이 넘쳐나는 사람마냥 관계를 갖고자 너를 집으로 데려온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근데 어쩌다 내가-.
'불편하다니…. 하지만 종이니랑 헤어지기 싫어서, 어쩔 수없어.'
'왜! 나도 종이처럼 뽀뽀 귀신이 될 거야아-.'
'난 아무거나 다 좋아, 종이니 옷이면!'
술에 취한 네 모습은 내게 활력을 안겨줌과 동시에 고통을 안겨주었다. 귀여워서 미칠 것 같은데, 그게 왠지 야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아 더더욱 미칠 것만 같았다. 순진한 너한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한없이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애교 섞인 네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불러올 때면 머릿속에선 폭죽이 터졌다. 형형색색의 불꽃들이 팡팡 터지며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도대체 왜 이래, 나한테. 안 그래도 귀여운 애가 술을 마시면 왜 더 귀여워지는 건데. 왜 스킨쉽 귀신이 되어 버리는 건데. 미칠 것 같잖아-.
그나마 화장실 안에선 숨통을 틀 수 있었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는 와중에도 자꾸만 네가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마음속으로 애국가 완창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도대체 애국가를 부르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는 거짓말은 누가 한 건지, 그 사람을 찾아가 순 엉터리라며 따지고 싶었다. 진정이 되기는 커녕, 오히려 자극이 되는 것만 같았다.
난 생각보다 쉽게 무너졌다. 절대 안 그러겠다, 지금껏 잘 참아온 만큼 이번에도 거뜬히 참아내겠다 다짐을 했건만,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너를 대하는 난 너무도 무뎠다. 네 한 마디에 넋을 잃어버렸고, 네 작은 손짓에 온몸이 굳어버렸고, 네 부드러운 손길에 이성까지 잃어버렸다. 끝까지 참아내겠다던 다짐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수줍은 얼굴로 내 무릎에 살포시 앉아오는 모습은 은근한 도발처럼 느껴졌다. 원래 아무런 소용이 없던 애국가가, 이 순간만큼은 더더욱 소용이 없었다. 여러 생물들이 한데 어우러진 푸른 바다와 드넓게 펼쳐진 초원을 떠올려도… 아니, 하다 못해 오세훈의 말대로 드넓은 브라질 열대림의 목축업 현장이라도 떠올려 보았지만, 역시나 붕붕 뜬 마음을 가라앉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물론 지금 생각으론 네가 알아서 할 수 있다 생각하겠지.'
'같이 술을 마셔, 어제처럼 집에서 둘이. 근데 네 여친이 생각보다 너무 많이 취한 거야. 그래서 막 안기고, 뽀뽀해달라 조르고, 장난 아니야.'
'내가 예상하는데, 너 분명 그러다 큰코다친다. 애국가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언젠간 들이닥칠 거라고.'
귓가에 아른거리는 오세훈이 목소리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는데, 어째 오세훈의 말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쩌지. 어쩌지, 이제. 너무 먼 길을 와버렸어. 같이 자자는 말에 좀 강압적으로 나왔어야 하나. 키스해 달라는 말을 왜 했지, 내가. 참지도 못할 거면서-. 그러나 한편으론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 여자친구가 귀엽게 유혹을 해오는데, 과연 어느 남자가 안 넘어가고 배길까. 그런 면에서 난 지극히 정상적인 남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그토록 빠르게 뛰던 건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고백을 건넬 때 만큼이나 세차게 뛰던 심장은 한시도 진정되지가 않았다. 살이 닿을 때마다 움찔거리던 네 모습, 애써 괜찮다며 나를 다독여오던 네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예뻤다. 소중히 대하고 싶은 마음에 네게 함부로 손을 대지 못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자꾸만 걱정이 샘솟는 바람에 중간중간 네 모습을 살피며 이런저런 물음들을 건네던 내 모습도 덩달아-. 내 자신 만큼이나… 아니, 내 자신보다도 네가 더 소중했다. 이 감정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말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벅찬 마음에 눈물이 지어졌다. 널 내게 줘서 고맙다는 말론 표현이 한없이 부족했다. 차오르는 감정을 표현하기엔 고마워, 사랑해- 라는 말도 허무맹랑하기만 했다.
관계를 가진 것에 대해 후회는 없었다. 그저 내 처음이 네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가 내 마음을 붕붕 뜨게 만들 뿐이었다. 내 처음은 모두 너였다. 첫사랑의 상대, 첫 연애의 상대까지 모두 다-. 내게 있어 처음이 모두 너였던 것처럼, 모든 끝도 네가 되어 주었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어느새, 네가 아니면 안 되는 바보가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
결국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 되어서야 눈을 뜬 네가 인상을 잔뜩 찡그려 보였다. 점심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배는 고프지 않았다.
"… 벌써 아침이야?"
"아침은 무슨. 대낮이야."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떠보이며 창밖과 시계를 번갈아 바라보기 시작한다. 시간이 꽤나 흘렀음을 자각한 건지, 이내 울상을 지어보이는 모습이 여간 귀엽게 느껴지는 게 아니다.
"… 왜 웃어…."
"그냥."
내게 건네오는 물음에 식상하기 그지없는 답을 해주자, 싱겁다는 듯 입술을 삐죽여 보인다. 그 모습마저도 귀엽게 느껴져 다시금 푸스스 웃음을 짓곤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이대로 또 잠이 들어 버리고 싶었다. 침대를 벗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허리는 어때."
"… 어? 아,"
"안 아파?"
"그냥 조금…."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말하곤 부끄러운지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허리를 꼬옥 안아오는 네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작은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을 내려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자, 간지러운 듯 몸을 움츠린다. 네가 이렇게 나오면 내가 또 정신을 못 차려. 너와 나한테서 같은 향이 난다는 게 이리도 흥분될 일인가-.
"배 안 고파? 밥은."
"안 고파…. 너는?"
"나도."
귓가에 속삭이듯 대답을 하자, 간지러운지 몸을 부르르 떨며 다시금 내 허리를 꼬옥 감싸온다. 아, 예쁘다. 내일 죽어도 좋을 만큼 행복해. 아니지, 오래 살아야 지금처럼 너랑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을 텐데.
"이렇게 누워서 계속 안고 있을까. 그리고 밤에 또…."
"… 안 돼…."
"장난이지."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젓는 모습이 정말이지 귀여웠다. 머리칼을 넘김과 동시에 드러난 하얀 목덜미엔 지난 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내가 언제 이런 걸 남겨뒀더라. 하얀 피부 군데군데 위치해 있는 붉은 자욱들에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걸 아침이 되어서야 발견하다니, 나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짝 입술을 깨물곤 엄지손가락을 세워 목 부근에 새겨진 작은 열꽃을 어루만졌다.
"… 내 거라고 도장을 너무 많이 찍어놨나."
"… 나 이러고 밖에 절대 못 나가…."
"괜찮아."
"뭐가 괜찮아…."
"안 나가면 되지. 나랑 있으면 돼, 이렇게 계속-."
작은 몸을 더욱 끌어안았다. 흘러내린 머리칼에선 은은한 샴푸 향이 풍겨왔고, 가슴께에선 잔잔한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좋아서 행복하다. 너무 행복해서 좋아.
*
"종인아."
"……."
"김종인."
"……."
"김종인~"
"……."
"… 잠들었다니."
내 무릎에 누워 지그시 눈을 감고있던 김종인은, 은근 피곤함이 느껴졌던 건지 어느새 스르르 잠에 빠져 있었다. TV에선 어느 남자 아나운서 한 명이 나와 강의 비스무리한 것을 하고 있었다. 작게 하품을 하곤 리모콘을 들어 빨간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밝기만 하던 화면은 까맣게 변했고, 시끄럽던 주위는 어느새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살짝 말려 올라간 녀석의 티셔츠 자락을 말끔히 내려주곤, 흩어진 머리칼을 바르게 정돈해 주었다.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나를 끌어안고만 있던 김종인은, 점심시간이라기엔 너무도 늦은 시간인 세 시가 되어서야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었다. 밥을 먹는 와중에도 쉬고 있는 왼쪽 손으론 내 손을 꼬옥 잡고 있던 녀석은, 양치와 면도를 할 때도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은 채 나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하던 녀석은 뭐가 그리도 즐거운 건지 내내 옅은 미소를 지어보이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수줍음을 타는 건 오로지 내 자신이었다. 녀석의 얼굴을 보면 자꾸만 어제의 기억이 떠올라 절로 볼을 붉히게 되었고,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자꾸만 심호흡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
잠을 자고 일어나 별로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하루의 절반이 훌쩍 지나 버렸다는 사실이 놀라웠지만, 아무렴 상관은 없었다. 그냥 이렇게 소파에 가만히 앉아, 내 무릎에 누워 잠이 든 김종인의 모습을 내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벅찼으니 말이다. 아직 꿈만 같이 느껴지는 어젯밤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러했다. 관계가 끝남과 동시에 연신 사랑한다는 말을 건네오며 이곳저곳 입을 맞춰오던 녀석의 모습에 눈물샘은 한시도 마를 틈이 없었다. 많은 대화가 오고갔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괜찮아. 예뻐. 고마워. 사랑해. 라는 짧디 짧은 네 개의 문장만으로도 녀석의 진심이 가득 느껴졌다. 전희의 순간 만큼이나 후희의 순간마저 달콤하고 짜릿했다.
그러나, 마음이 벅찬 동시에 한편으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너무 쉽게 관계를 허락해 버렸나. 어젯밤으로 인해 날 쉬운 여자로 보면 어쩌지. 약간의 망설임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단지 널 너무 좋아해서 그저 나를 맡겼던 던데. 내가 가장 믿고 따르는 사람이 너니까 그냥 받아들였던 건데…. 더이상 나에 대한 신비감이라든가, 새로움이 사라져 버렸음 어쩌지. 날 우습게 보진 않을까-. 자꾸만 마음이 부정적인 쪽으로 치우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여자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듯했다.
"… 후우."
작게 한숨을 내쉬곤 김종인의 뺨을 어루만졌다. 김종인이 그런 생각을 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물론 알지만, 왠지 모르게 생겨나는 불안감은 스스로 떨쳐낼 수가 없을 듯했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내 손길에 살짝 몸을 뒤척이는 듯싶던 녀석이 제 볼에 놓인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쳐왔다.
"깼어?"
조심스레 묻는 내 목소리에, 눈꺼풀에 가려져 있던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느리게 눈을 꿈뻑이는 듯싶던 김종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간밤의 섹시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귀여운 아기가 되어버린 건지, 정말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탓에 뚱하기만 한 표정이 정말이지 귀엽게 느껴졌다.
"미안, 무거웠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앉던 김종인이, 제가 한참이나 기대 누워있던 내 허벅지를 살살 어루만지며 말했다. 목소리는 많이 잠겨 있었다. 어떻게 넌 잠긴 목소리마저 이렇게 간지러울까.
"역시 잠꾸러기야. 어떻게 눕자마자 바로 잠이 들어?"
"바로는 아니야. 3분은 버텼어."
"대단하네."
반어적인 내 대답에 푸스스 웃음을 짓던 김종인이 내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대왔다. 또 자려고? 한쪽 손을 들어 녀석의 뺨을 쓰다듬으며 묻자,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너랑 놀아야지."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살풋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곤 큼지막한 손을 마주잡으며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말 꺼내도 되려나. 꺼냈다가 괜히 분위기가 다운되진 않을까. 하지만 그냥 넘어가자니 찝찝하고 불안한데. 내 물음으로 인해 네 기분이 상하면 어쩌지.
"저, 종인아…."
"응."
복잡하게 자라나기 시작하는 걱정들을 일체 무시하곤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내 부름에 낮게 답을 하던 김종인의 시선이 이내 내게 꽂혀왔다. 그리곤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제 이름을 불렀음에도 불구하고 한참을 말을 않는 내 모습이 그저 의아하게만 느껴지는 건지, 녀석이 살짝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그런 녀석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천천히 입술을 떼,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어투로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나 쉬운 여자로 보지 않을 거지?"
"……."
"그…, 뭐라 해야 하지…. 말로 표현을 잘 못하겠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가 않았다. 분명 떠오르는 생각은 많은데, 쉽게 문장으로 연결되지가 않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고만 있던 김종인의 표정이 미세하게 찡그려졌다.
"… 더이상 예전 그 느낌이 아닐까 봐."
"……."
"난 널 보면 항상 설레고 새로운데, 어제를 기점으로 더이상 넌 안 그러게 될까 봐."
"……."
"그게 좀 불안해서… 그냥…."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괜히 말을 꺼낸 것만 같다는 후회감이 물밀듯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주 잠시 감정이 예민해졌을 뿐인데. 며칠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아무렇지 않아질 게 분명한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쉬운 여자?"
"……."
"내가 무슨. 안 그래."
"……."
"관계를 갖는 게 무슨 커다란 미션 같은 것도 아니고, 그거 하나 했다 해서 사람 마음이 바뀌는 건 도대체 무슨…."
"……."
"관계를 가졌다 해서 너에 대한 신비감 같은 게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니야."
"……."
"애초에 난 그걸 바라고 사귀는 게 아닌데, 그게 그리 중요한 건가 싶어."
"……."
"너에 대해 알고 있는 게 많은 만큼, 앞으로 새롭게 알아야 할 것도 많아."
"……."
"내가 그랬지. 난 아직 모르는 것 투성이라고."
"……."
"쉬운 여자라 생각 안 해."
"……."
"나도 널 보면 항상 설레고 새로워."
"……."
"오히려 어제를 기점으로 네가 더 좋아졌어."
"……."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
"쉬운 여자 아니야. 대신 쉬운 남자 할게, 내가 너한테."
맞잡고 있던 손을 풀어 부드럽게 깍지를 껴오는 김종인을 흘끗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역시 괜한 걱정을 한 건가 싶었다. 아닐 거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확인을 하고 싶은 마음에 건넸던 말이, 녀석에게 상처로만 남지 않았음 좋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널 못 믿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응, 알아."
"… 미안해."
"뭐가 미안해."
"……."
"미안할 거 없어. 괜찮아."
괜찮다며 오히려 나를 다독여오기 시작하는 김종인의 모습에, 괜히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너 원래 이렇게 눈물이 많았나. 내 눈가를 어루만지며 웃음 섞인 어투로 건네오는 녀석의 말에 애써 고개를 저어 보였다. 너도 어제 울었잖아…. 하품했던 거라니까. 발끈하듯 답하는 내 모습에 아무렇지 않게 시치미를 뚝 떼는 목소리가 꽤나 귀엽게 느껴졌다.
"그거 아냐."
"몰라."
"… 아직 말 안 했잖아."
"뭔데?"
"뽀뽀 한 번도 안 했어, 오늘."
"… 아…."
"할까."
"… 부끄럽게 그런 걸 굳이 물어볼 필요는…."
애써 다른 쪽으로 시선을 둔 채 웅얼거리듯 답을 하자, 김종인이 피식 웃음을 지어보인다. 그러더니, 잡고 있던 손을 놓곤 제 큼지막한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온다. 벌써부터 얼굴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것만 같았다. 입맞춤을 한두 번 해보는 것도 아닌데, 매번 떨렸다.
"귀여워."
감싸고 있던 내 양쪽 볼을 꾸욱 눌러 붕어 입술이 되게 만들던 김종인이 푸스스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살짝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뭐가 그리 재밌는 건지,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다. 예쁜 곡선으로 휘어진 눈매를 바라보며 덩달아 웃음을 지어보이자, 이내 내 입술에 짧게 도장을 찍어온다.
"진짜 뽀뽀 귀ㅅ…"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입술 도장을 찍어오는 김종인 탓에, 뒷말이 목구멍 속으로 먹혀 들어가고 말았다. 연신 내 입술에 뽀뽀세례를 퍼붓기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에 절로 웃음이 터졌다. 이렇게 스킨쉽을 좋아하는 타입이었을 줄이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전혀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인데-.
"… 야, 간지러워…."
"야?"
"……."
"야라고 하지 마. 종인아, 라고 해."
"… 종인아, 간지러워."
그런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을 짓던 김종인이 살며시 내 아랫입술을 머금었다. 살짝 깨물어오는 듯한 느낌이 너무도 간지러워 녀석의 팔을 툭툭 건드리자, 이내 입술을 떼며 개구진 웃음을 지어보인다. 간지러우라고 하는 거야-. 얄밉게만 들려오는 말에 작게 인상을 찡그려 보였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다시금 내 입술 위로 녀석의 도톰한 입술이 겹쳐졌다. 뽀뽀로 끝날 줄 알았지만 이내 키스를 이어오는 녀석의 모습에, 지그시 눈을 감아야 했다. 혀끝으로 전해져오는 짜릿한 감각이 온몸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갑작스레 울려오는 초인종 소리에 급히 입술을 떼어내야 했다. 타액으로 번진 입술을 대충 손등으로 닦아내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터폰을 확인했다.
"… 오세훈… 인데…."
"… 아, 왜 또."
"… 어쩌지?"
"열어주지 마."
내 입에서 나온 이름에 인상을 잔뜩 찡그려 보이던 김종인이 내 손을 잡아 끌며 말했다. 그러나 오세훈은 계속해서 초인종을 눌러왔다. 마치 초인종 벨이 제 악기라도 되는 듯 연신 꾹꾹 눌러대며 현란한 연주를 하던 녀석은, 이내 김종인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듯한 김종인은, 이내 제 휴대폰에서 배터리를 분리해내기 시작했다.
"기다려 봐."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던 녀석이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해 신경질적으로 잠금장치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아, 안에 있으면서 문은 더럽게 늦게 열고 지랄이야."
문을 엶과 동시에 들려오는 오세훈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괜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곤 얼마 안 있어 녀석이 안으로 발을 들였다. 까만 스냅백을 푸욱 눌러쓴 녀석은 오늘도 역시나 딸기맛 요맘때를 들고 있었다.
"뭐야, 너도 있었냐?"
"… 안녕."
어색히 인사를 건네자, 오세훈은 아무렇지 않게 내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반쯤 남은 요맘때를 크게 베어먹던 녀석의 시선이 이내 내게 향해왔다.
"충격…. 어제 여기서 잤냐? 왜 김종인 옷을 입고 있어."
"아, 그…."
"뭐냐, 이건. 모기한테 뜯기기라도 했냐."
"어?"
"하나, 둘, 셋…. 너 세 방이나 물렸음. 모기가 네 피를 좋아하나 봐."
목 부근에 군데군데 남아있는 키스마크를 가리키며 아무 의심없이 말을 내뱉는 오세훈의 모습에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이다, 슬쩍 김종인을 바라보았다. 사실 모기한테 물린 게 아니라 김종인한테 물린 건데…. 애꿎은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오세훈."
"왜, 인마."
"왜 왔어."
"놀러."
"PC방이나 가."
"갔다 왔음."
"……."
"밥 줘. 배고파."
쓰고 있던 스냅백을 벗어 대충 바닥에 던져두던 오세훈이 작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런 녀석이 못마땅하다는 듯 미세히 미간을 좁히고 있던 김종인은 연신 한숨을 내뱉기만 할 뿐이었다.
"비켜. 내 자리야."
"……."
"미쳤어?"
"네 자리 내 자리가 어딨어. 그냥 앉는 거지."
"… 열받아."
비키라는 김종인의 말에도 청개구리마냥 내게 더 가까이 붙어 앉던 오세훈이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인상을 잔뜩 굳혀 보이던 김종인이 이내 내 손을 잡아 끌며 제 방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충격…. 어딜 데리고 가? 존나 응큼한 새끼…."
"밥은 네가 알아서 차려 먹든지."
"뭘 알아ㅅ… 야, 문 닫지 마. 닫지 말라고! 둘이 안에서 뭘 할 건데!"
다급하게 들려오는 오세훈의 목소리를 일체 무시하며 방문을 쾅- 닫던 김종인이 침대에 걸터 앉았다. 그러더니, 답답한 듯 제 머리칼을 잔뜩 흩뜨려 놓기 시작한다. 그런 녀석을 바라보며 멋쩍은 웃음을 지어보이다, 슬쩍 손을 들어 헝클어진 머리칼을 바르게 정돈해 주었다.
"… 금방 가겠지 뭐."
잔뜩 좁혀진 김종인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말했다. 그런 내 손을 잡아 끌며 제 옆자리에 살포시 앉히던 녀석이 이내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짜증나. 투덜대는 듯한 목소리에 배싯 웃어보이며 불퉁 튀어나온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오세훈 나빠. 바보, 멍청이."
내 앞에선 아무리 수위가 낮은 욕이라도 일체 삼가는 김종인이, 최대한 안 좋은 말을 선택해 오세훈을 낮춰 말했다.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웃겨 작게 웃음을 터뜨리자, 웃지 말라며 제법 인상을 굳혀 보인다.
평화롭기 그지없는 이곳과는 달리, 밖에선 TV 소리와 휴대폰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아마 복수를 다짐한 듯한 오세훈의 짓일 게 분명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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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너무 늦게 왔죠.. 개강하니까 역시 바쁘군요.. 학교에서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맨날 빵만 먹고.. 큽..
다음 편은 경수 번외입니다. 다들 저녁 맛있게 드시고, 남은 주말 잘 마무리하세요!
* 암호닉 *
[ㄱ/ㄲ] 가글 /가락 /가지 / 거꾸로해도정수정 / 거뉴경 / 건망고 / 검은콩두유 / 고기만두 / 구글조닌 / 구사일생 / 규규 / 귤껍질 / 귬귬 / 근댕 / 글잡캡틴미녀 / 기적 / 김종이ㄴ / 까까 / 까리까리 / 깜종인 /꺄 / 꽃이된다 / 꿀꿀 / 꿀잼 / 꿍야슈슈 / 뀨룽
[ㄴ] 나노 / 나니꺼 / 나무 / 냠냠 / 냥냥 / 네네스노윙 / 녹차라떼 / 니나노
[ㄷ/ㄸ] 다래 / 다예 / 다원 / 다이아 / 단이 / 단팥 / 달달이 / 도도토 / 도비 / 도어엉 / 도토도 / 됴깡 / 독자17 / 듀바 / 듀퐁 / 디보 / 따따 / 또해 / 똥잠 / 뚜더지 / 뚜뚜 / 뚱바 / 뚱이
[ㄹ] 라온이솔 / 라인 / 라코 / 랑우 / 런웨이 / 럽미베베/ 레몬사탕 / 로리나 / 로운 / 로이 / 롯데월드 / 루피뚜 / 리리 / 리찌 / 릴리
[ㅁ] 마시멜롱 / 만떼 / 말랑 / 망고 / 망고빙수 / 맥듀 / 맴매맹 / 메론빵 / 메리미 / 멜리멜랑 / 멜팅 / 모별 / 모서리 / 모찌 / 몽글몽글 / 몽디 / 몽이 / 뭉이 / 미리별 / 민럽 / 민석쀼쀼 / 민소쿠쨩 / 민툽 / 밍뿌 / 밍쏘쿠
[ㅂ/ㅃ] 바나나 / 바나나킥 / 바자다가 / 바카 / 바퀴 /박보 / 밤비 / 밥 / 배리 / 배큥아리 / 백현모양처 / 벚꽃너굴이 / 별다방커피 / 보노보노보 / 보스 / 복숭아 / 봄봄 / 봄비 / 분무기 / 불가 / 불꺼진방 / 비비빅 / 빵 / 뽀뽀뽀 / 뿅아리 / 뿌꾸빰 / 쁌쁌
[ㅅ/ㅆ] 삼디다스 / 샤니빵 / 서쥬니 / 설레미 / 설렘사 / 셜록 / 숑숑이맘 / 수박마루 / 슈둥슈둥 / 슈팅스타 / 스누 / 스무살의봄 / 스윗펌킨 / 스파게티 / 스폰지밥 / 슨니야 / 시동 / 시매니저 / 시카고걸 / 썬다운 / 쑤우쑤우 / 쓔쓔
[ㅇ] 아가야 / 아야어여 / 아이스크림 / 안녕내게다가와 / 알콩/ 애를도라도 / 얍스 / 어린왕자 / 어화둥둥 / 여니 / 열럽 / 영쓰 / 예헷 / 오빠설렘사 / 오세훈의각시 / 올봉 / 왕 / 요거트 / 요맘때 / 용이 / 우유퐁당 / 우주최강 / 윋드유 / 윌리웡카 / 윤슬 / 윤천사 / 은하수 / 이과생 / 이레네 / 이야핫 / 일루와
[ㅈ/ㅉ] 자몽이제일조아 / 젤라 / 종달샘 / 종대마님 / 종스팸 / 종이니니 / 종이인형 / 종종걸음 / 지블리 / 짝짝 / 짱구여친 / 쫑니 / 쮸쀼쮸쀼 / 찌개 / 찐빵
[ㅊ] 찬샤 / 찰떡 / 체리 / 초코 / 초코붕 / 초코파이 / 쵸파/ 치드봉봉 / 치즈돈가스 / 츤데레
[ㅋ] 카프 / 콩부인 / 쾌지나첸첸나네 / 큥쓰큥쓰 / 큥큥 / 키엘 / 킴벌리
[ㅌ] 타니 / 털ㄴ업 / 테라피 / 툭툭
[ㅍ] 퓨어 /핑구
[ㅎ] 핫초코 / 해피 / 햄버거 / 행쇼 / 허니잼 / 형광등 / 호이호잇 / 훈훈 / 희망 / 히밤
[영어] DB /dprth8391 / HaMo / YUNE
[숫자] 0408 / 0616 / 0618 / 0622 / 1226 / 3관왕센 / 500원 / 84니니
[특수문자] #두근
분명 암호닉을 신청한 것 같은데 목록에 내가 없다, 하시는 분들 몇몇 계실 거예요. 그런 분들은 아마 암호닉 정리할 때 자기 암호닉 언급을 안 해주신 분들이거나, 제 실수로 누락되신 분들입니다.
난 분명 15화에 암호닉생존신고or신청을 했는데 누락됐다, 하시는 분들 계시다면 꼭 말해주세요 :)
당분간 암호닉 신청은 받지 않을 생각이에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