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W.여우
밤이 깊었다. 눈이 감기고 점점 시야가 흐릿해졌다. 내가 지금 자고 있는 것인지, 잠들려고 하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천천히 이렇게 잠들고 잠들다가 그렇게 널 만날 수 있으면 참으로 좋으련만. 뿌옇게 흐려진 눈을 두어번 깜빡였지만 느리게 움직이는 눈꺼풀은 그저 점점 아래로 아래로 향할 뿐이었다. 이렇게 죽는 건가 싶었다. 가슴께에 구멍이 난 것 같았다. 들숨과 날숨이 어떻게 교차하고 있는지 느낄 수 없었다. 정신이 없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상체를 일으켜 벽에 기대보았다.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올리니 뛰고있는 심장이 머릿속을 타고 전율을 흘려보냈다. 그래, 난 아직 살아있었다. 손을 뻗어 남으로 낸 창을 슬쩍 밀어보았다. 싸한 공기가 방으로 흘러들어오는가 싶더니 따스히 녹인 손을 하얗게 감고 들어왔다. 노랗게 핀 달꽃위로 빛이 서려있었다. 손을 들어올렸다. 천천히 그리고 더 깊게. 손끝이 하늘로 향하고 향할때면 노란 꽃망울은 흰 구름사이로 고개를 숨겼다가 드러내었다. 시린 공기가 팔을 휘감고 목을 타고 올라왔다. 냉기마저 아름다운 밤은 하늘마저 희게 수놓았다.
"게 누구 없느냐."
아무 말 없이 들려오는 조용한 문소리가 나를 옥죄었다. 조심스레 들어오겠다는 말을 옮긴 이는 내 앞으로 와 고개를 숙였다. 정적이 흘렀지만 내게 조아린 고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 묻고 있었다. 방 안이 차갑게 울렸다.
"밤공기가 차구나. 이런 날은 한 번 쯤 발을 옮겨 걸으면 좋을 것 같으련만."
"전하, 소인. 이슬에 옥체가 상하실까 염려되옵니다. 금일은 이미 밤이 늦었사오니 후에 다시 나가심을 생각해보시는 것이 어떨런지요."
잠시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가 창밖에 비친 공기가 나를 유혹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락거리는 옷이 방에 울렸다. 그는 한참이나 고개를 들지 못하자 문 밖을 나서는 내 뒤를 따라 발을 옮겼다. 천천히 옮기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내 뒤로 따라오는 그 모든 이들이 거짓같았다. 이 넓은 공간에 펼쳐진 모든 것들은 내 것이었고, 내 것이 아니었다. 나무 아래로 진 그늘은 노란 빛에 반짝이는 나뭇잎들을 품고 있었다. 저 한낱 나무에 불과한 것도 그림자를 안고, 푸른 잎을 피워내는데.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얀 입김은 보란듯이 시야를 가렸다가 사라져버렸다. 땅을 향해 꽂혀있던 시선이 천천히 하늘을 향했다. 아직도 어슴푸레한 밤이었다. 까만 듯 푸른 하늘은 반짝이는 별들에게 입을 맞추었고, 그 끝에 닿을 듯한 산은 너의 존재를 되살려냈다.
"전하, 고뿔에 걸리겠사옵니다."
높고 가른 너의 목소리가 내 귀를 의심케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네가 나에게 말을 건 것은 얼마나 오래된 일이던가. 떠지지 않는 두 눈을 비비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나를 감시하듯 감아오던 그 많은 거짓들은 어디로 간 것이냐. 흔들리는 바람 사이로, 그리고 춤을 추는 버드가지 사이로 네가 걸어왔다. 대체 무엇이 이리도 오래 걸린 것이냐고,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이 천가지 만가지였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살풋 웃음을 흘리는 너는 여우더냐, 사람이더냐.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죽은 혼이라더냐. 타박타박-. 땅을 짚는 소리가 네 것인지 내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데도 나는 너를 볼 수가 없었다. 나에게 맞추지 않는 너의 눈동자가 혹여나 나를 속이는 거짓된 진실이라 할 지라도 나는 너를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얀 얼굴, 작고 긴 손. 핏줄이 툭 불거진 내 손등이 보였다. 이 손을 들어 너의 얼굴을 쓸어올린다면 그것이 진실이리라.
"너더냐, 진정 너더냐."
이것이 아니었다. 너를 만나면 제일 먼저 하고 싶던 말이 이것이 아니었단 말이다. 더 멋진 말을 준비하고, 기쁨에 젖은 말을 외워왔다. 이 음성보다도 더 낮고 널 감싸안을 그런 음성을 연습해왔단 말이다. 천천히 너의 얼굴을 쓸어올리려던 내 손은 결국 그 끝자락에도 가지 못했다. 혹여나 네가 거짓이거든, 이 모든 것이 거짓이란 걸 알게 되거든. 그 자리에 서서 또 다시 너를 그리워 할 내가 너무나 가여워서. 그저 아련하게 젖은 너의 눈동자가 기어코 내 눈을 찾아내었을 때, 생긋이 웃어주는 것. 그것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발간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싱긋 올라가는 너의 입꼬리가 내 입술에 맞닿았으면 했다. 이렇게 나는 너를 원하고, 너 또한 나를 원하는데 이루어질 수 없는 이 운명을 어찌한단 말이더냐.
"전하, 왜 저를 안지 않으십니까."
아니다, 이것은 거짓이다. 너의 그 요망한 입술이 달싹이지 않았는데 어찌 내 귓가에 너의 음성이 들려온단 말이냐. 믿지 않으리라 눈을 감았거늘, 천천히 소복 끝자락을 적셔오는 너의 손을 어찌해야하는게냐. 도무지 너의 속을 알 수 없었다.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내 품에 폭 안기는 너는 나를 얼게 만들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옷을 녹이는 너의 눈물이 점점 파고들어 내 가슴까지 맺혀온다는 것을. 그제서야 나는 너를 내 품에 가둘 수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밖에 있었던 것인지, 시리게 언 너의 몸은 내 가슴에 얼굴을 부비었다. 토닥토닥. 너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흐느끼는 너의 음성이 내 가슴을 천갈래 만갈래로 찢어내는 것 같아서 너무나 무서웠다. 이 갈라진 길 사이로 너가 흘러들어온다면 나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하지만 너는 또 다시 사라질 테니까.
"얼마나 기다렸더냐."
"수일을, 수년을. 그리고 몇십년을. 바로 이 자리에서 전하를 기다렸사옵니다."
"나 또한 마찬가지니라. 이 늙은 몸이 어딜 가겠느냐. 그저 이 곳에서 너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느니라. 널 다시 보고, 이리 안고. 이리도 맑은 너의 눈을 바라보며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을 때까지."
"춥고 외롭고 길었습니다. 전하의 용안이 기억속에서 흐려질까 두려웠습니다. 그리하여 떠날 수 없었습니다. 저에게 죄가 있다면 전하를 연모하여 그 끝을 달리한 죄, 어찌 그 뿐이겠습니까."
"아직도,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
입가를 맴돌던 그 말이 잇새로 새어나왔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너의 눈동자가 한방울 똑하니 고통을 떨어뜨렸다. 너는 그저 나를 안은 팔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래, 난 이미 네 마음을 알고 있는데. 나는 너의 팔을 풀어 내 손과 맞잡았다. 깍지를 낀 네 손이 주름이 깊게 배인 내 손 때문에 더욱이 고와보이는구나. 천천히 내 손이 부드러워졌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때로 돌아가고 있었다. 들어올리는 너의 속눈썹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던 바로 그 때로. 나는 오랜시간 보지 못했던 너의 얼굴이 닳지 않으리라 믿고 있었다. 애틋한 이 마음이 너에게 전달되기를 빌고 빌었다.
"전하, 이제 가시지요."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노란 달빛을 이불삼아 누운 내 늙은 육신이 저 뒤로 보였지만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늦은 밤, 너와 함께 담소를 나누던 그 모습처럼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는 저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누가 알아줄까 싶다만.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더 이상 저 곳에 발을 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놓아둘 때 임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너의 그 손을 잡고 천천히 길을 노니는 것. 새하얀 빛이 가득한 그곳에 도착할 때 까지 그저 그 전처럼 담소를 나누면 되는 것이다. 몇 십년을 괴롭히던 두통이 깨끗이 낫고, 무겁던 마음 한 쪽이 날개를 단 듯 날아다녔다. 나는 다시 너를 바라보았다. 천천히 아지랑이가 피어오른 듯 흩어지는 너의 형체가 나를 더욱이 안았다. 그래, 가자. 하늘로 가자꾸나, 네가 나를 데리러 온 것이구나.
"전하와 저의 죄가 무엇이었습니까."
"너와 내게 무슨 죄가 있었겠느냐."
"푸흐, 아마- 아마 연모의 정을 숨기지 못한 죄가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어찌 제가 되겠느냐. 네가 네 숨을 내던진 것도, 내가 한 평생 자식을 두지 못한 것도. 그저 우리가 잘못된 성(姓)을 가진 것 뿐이지 않겠느냐."
부스스 떨어지는 이슬비처럼 너의 웃음이 허공에 흩어졌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오랜 시간 떨어져있는 동안 너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어야할지 참 많은 것을 생각해두었다만 이리도 앞에 서니 텅 빈 화선지보다도 못한 머리가 되어버렸다. 얘야, 얘야. 내가 애타게 부르는 네가 이제서라도 내 품을 찾아와서 나는 그저 너무나 행복하구나. 전할 수 없는 이내 마음이 너무나도 애달파서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 너와 나의 잘못이 무엇이 있겠느냐. 너도 그저 그래서 웃는 것이라 믿고 있다. 나는 그저 참빗마냥 쪼개진 저 반달이 우리일까 두려웠다. 혹시나, 반백년을 기다려온 너와 내가 다시 저렇게 될까.
"앞으로 저 달이 기울까 두렵구나."
"다 하늘의 뜻이지요."
"만약 다시 차오르지 않는다면 이내 몸은 그저 너와 평생을 약조할 수 있는 그곳에서 숨을 다하겠느니라."
"전하,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저 달은 상현이 아니옵니까."
여우의 말말말 |
안녕하세요, 여우입니다. 늦은 밤 잠들기 전에 글 하나를 두고 갑니다. 기다려주시는 독자여러분들, 모두 너무나 감사합니다. 열봄으로 조만간 한 편 찾아오겠습니다. 이 글로 노여움을 풀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