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틴-표정관리
그녀석에게 중증의 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된건, 그와의 의도치 않은 첫만남에서였다. 난 여느때와 같이 당번일을 하기 위해 교실의 쓰레기봉투란 봉투는 다 끌어안고 뒤뚱뒤뚱 소각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렇게 앞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위태롭게 아래쪽만 응시한 채로 걷던 와중,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의 신발코 탓에 앞을 응시하면, 그곳엔 표정을 구긴 채, 내가 엉겁결에 밟아버린 제 신발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애가 있었다. 그에 미안해져 재빨리 상대의 이름표를 확인하면, 그곳엔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이름 석자가 박혀있었다. 전 원우. 문득 작년에 권순영이 한 말이 기억났다. 야, 김여주 너 나한테 깝치는 거처럼 딴 사람한테 깝치지 마라. 나여서 봐주는거지, 전원우같은애였어봐. 그렇게 제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하며 내게 일침을 놓는 권순영에게 네가 만약 전원우였으면 쳐다도 안봤을거라며 웃으며 넘겼었는데. 하필 지금 이런 때에 그 전원우의 신발을 밟다니, 눈 앞이 온통 새까맣게 타들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 내 고등생활이여, 안녕. 막막한 마음에 무릎이라도 꿇을까, 하는 비극적인 생각까지 해보였지만, 내 암울한 생각들은 이내 전원우의 충격적인 행동에 싸그리 사라져버렸다.
"아, 난 또 누군가 했네."
그 말 한마디와 함께 재빨리 내 손에 들린 쓰레기봉투 하나를 제손에 옮겨 들은 전원우는, 가만히 서있기만 하는 내 등을 떠밀며 쓰레기 버리러 안가냐며 내 걸음을 재촉해왔다. 머릿속이 윙윙 울리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 뭐지. 신종 따돌림인가? 그런 생각도 잠시, 내 옆에서 갑작스레 들리는 쿡쿡 소리에 옆을 돌아보면, 전원우는 쓰레기 봉투를 제 왼손에 꽉 쥔채, 땅을 보며 연신 웃음을 터트리고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내 경악스런 표정을 본건지, 갑자기 전원우는 웃음을 멈추더니 내게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앞을 가리키며 말을 했다.
"쓰레기 안버려? 빨리 가라."
다시금 무서워진 전원우의 표정을 보곤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 새끼 또라인가.
그렇게 기묘한 전원우와의 기억을 잊고 산지 얼마나 되었을까, 나는 새학기 징크스인지, 첫날부터 감기가 걸려버린 탓에 결국 처음 일주일을 꼬박 결석해야 했다. 한차례의 감기와 싸움을 한 뒤 등교한 새로운 반에는, 내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주 넌 저기 가서 앉으면 돼, 하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뒤돌아본 내 옆자리엔 한동안 내 모든 걱정과 근심의 원인이었던 전원우가 앉아있었다. 전원우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세상이 두어번 빙빙 도는게 느껴졌다. 아, 하필 전원우라니. 문득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아니야. 아니야 김여주. 이럴수록 마음을 더 강하게 먹어야돼. 무슨 큰일이라도 치르러 가는 사람마냥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전원우 옆 내자리로 향했다. 비장한 마음으로 앉아서 내가 첫마디로 꺼낸 말이라곤 고작, 어...안녕! 이 한마디였다. 생각보다 너무 발랄하게 내뱉은 내 첫마디에 대한 전원우의 반응은, 더욱 가관이었다. 그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두손으로 제 입을 가리며 대답했다.
"아,,,안녕."
뭐지...? 갑작스레 나를 보고선 웃음을 터트리는 전원우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 방금 웃겼던걸까. 가만히 생각해봐도 그냥 인사한건데. 말도 안된다는 듯 입을 헤 벌리고 있는 날 본 전원우는 헤실헤실 웃고있던 제 표정을 급히 굳히더니 다시 평소의 그 무심한 듯 싸가지 없는 말투로 물었다.
"니 자리 여기라니까, 안 앉고 뭐해."
갑작스레 바뀐 전원우의 태도에 미친놈인게 분명하다는 생각을 잠시 접고 부랴부랴 자리로 가 앉았다. 넋을 놓고 앞만 바라본 채 가만히 앉아있으면, 전원우는 그제서야 다시금 자세를 앞쪽으로 고쳐앉으며 한손으론 턱을 괸 채 다른손으로는 제 손가락만큼 길쭉하니 잘빠진 펜을 빙글빙글 돌려댔다. 전원우의 손에서 펜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있자니 나까지 빙빙 돌아가는 느낌이 들어 나도 그를 따라 앞쪽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가만히 앉아있었을까, 아까 전부터 자꾸만 느껴지는 전원우의 기척에 조심스레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계속 마른세수를 하고있는 전원우가 보였다. 그에 어디 아픈가, 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저기, 어디 아파? 하고 작은 목소리로 물으면, 전원우는 책상까지 탕, 소리가 나게 치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행동에 나까지 놀라 거의 기절할뻔 했지만, 이내 전원우는 아무일도 없었다는 양 태연하게 다시 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아니, 안아픈데. 앞좀 보지그래?"
돌아오는 재수없는 대답에 나는 입술을 댓발 내민 채 다시 앞을 응시했다. 다신 걱정해주나봐라, 진짜. 그렇게 불만가득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앞을 쳐다보면, 전원우의 인기척이 다시금 느껴졌다. 이젠 진짜 돌아보지 않으리라, 하고 자꾸만 돌아가는 고개를 애써 진정시키면, 갑작스레 웃음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리고 끝내 돌아본 옆에선, 전원우가 그 큼지막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작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조회시간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교실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무래도 계속 웃는 전원우를 보다가는 병이 날것만 같았다. 막상 교실 밖으로 나오니 할게 없어져, 터덜터덜 복도를 거닐다, 차라리 학교 뒷편 화단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며 마음을 식히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좋은 생각을 해낸 내자신을 속으로 칭찬하며 화단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결정이 정말 바보같은 결정이었다는걸 알아채는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화단의 옆쪽엔 소각장이 자리해 있었고, 그곳은 전원우와 그 친구들의 아지트와도 같은 곳이었다. 화단 안으로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아 형형색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학생 무리들이 소각장을 얼추 채우기 시작했고, 이윽고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보고 있으면, 갑작스레 내이름을 불러오는 소리가 들렸다. 제발, 제발 전원우만 아니어라 하는 내 생각을 읽은건지, 내 눈앞에는 전원우가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표정을 지은채로 서있었다. 어떻게 이 상황을 모면할까, 하고 고민하던 찰나에 전원우의 어깨너머로 그 특유의 개구진 미소를 짓고있는 권순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사람은 권순영뿐이라는 생각에 난 그대로 내 앞에 버티고 서있는 전원우를 못본척 제치고, 권순영의 앞으로 걸음을 재촉해 섰다. 오랜만이라는 말과 함께 손을 흔들려던 찰나, 내손은 다른 누군가의 손에 잡혀 허공에 떠있는 꼴이 되버렸다. 그리고 그 다른 누군가는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애써 돌리면, 그곳엔 아까 내 이름을 불렀을 때보다 더 경직된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있는 전원우가 있었다.
"너, 얘랑 아는사이야?"
전원우는 물음과 동시에 권순영쪽으로 손짓했다. 그에 간절한 시선으로 권순영을 쳐다보면, 권순영은 저도 당황한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어깨를 으쓱할뿐, 도와줄 생각을 않았다. 그런 내 행동을 답답하다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쳐다만 보던 전원우는, 이내 잡고있던 내 팔목을 조금 더 세게 고쳐잡고 교실로 걸음을 향했다. 엉거주춤 전원우를 따라 옆에 앉자마자, 전원우는 내 손을 놓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곤, 이내 입을 열었다.
"야, 권순영이랑 친하게 지내지마. 걘 말도 많고, 나처럼 착하지도 않고. 별로야 걔."
뜬금없이 내뱉은 그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전원우는 의리라곤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가 잠시 창가쪽에 시선을 돌렸을때 몰래 눈을 흘겨보였다.
이유없이 얄밉다, 전원우는
7교시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어질 야자생각에 한숨부터 나왔다. 집이 학교에서 꽤 먼 탓에 같이갈 친구도 없어서 가뜩이나 무서워 죽겠는데, 야자까지 겹치다니 벌써부터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전원우 쟨 야자도 안하겠지, 문득 든 괘씸한 생각에 전원우를 살짝 흘겨봤다. 그와 동시에 마주쳐버린 눈에 깜짝 놀라 다시 고개를 돌리면, 전원우는 내 정수리쪽에 제 손바닥을 대고 다시 제쪽으로 고개를 돌리게 만들었다. 아무말 않고 그저 약간의 인상을 쓴 채 나를 그저 바라보고만 있는 전원우에게 얼버무리듯 중얼거렸다. 넌 좋겠다. 야자도 안하구... 밤길 무서운데. 내말이 끝나자마자 전원우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더니, 처음 봤을 때의 그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그래, 나 야자 안한다고."
그의 말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날 가만히 쳐다보다 전원우는 이내 내 이마를 톡 건드렸다.
"야자 할껀데, 김여주 너도 하잖아."
한마디를 툭 던지고 다시 제자리에 엎드려 자는 전원우의 넓은 등판을 보며, 고민했다. 어떻게 받아들이지, 저말을? 얼굴이 뜨거워지는게 느껴졌다.
야자시간 내내 전원우와 아무말 없이 앉아만 있는게 어색해, 전원우한테 뭐라 말을 걸까 고민하다 문득 아침의 충격적인 사건이 생각났다. 이어폰을 꼽고 있는 전원우의 팔을 툭툭치며, 너 권순영 머리 바뀐거 봤어? 하고 조금은 상기된 목소리로 말하자, 전원우는 무심히 이어폰을 제 귀에서 빼곤 대답했다. 그래서, 뭐. 그에 괜히 민망해져 아냐 그냥 신기해서, 하고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하면 전원우는 표정을 무심한 표정 그대로 대답했다. 그거, 좋아하는 애가 날티나는거 싫어해서 염색한거래. 그런 전원우의 대답에 멋있다, 하고 턱을 괴면 전원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게 멋있어? 난 너 때문에 밤늦게까지 학교에 앉아있는데?"
그 말과 함께 다시 제 귀에 이어폰을 꼽는 전원우를 보며 경악한 표정 그대로 앞을 바라봤다. 정말 어떻게 받아들일까, 저말을!
전원우가 한 말이 계속 신경쓰이는 탓에 자습은 커녕 아무생각도 않은 채 멍때리느라 야자시간이 다 가버린것만 같았다. 가방을 챙길때까지도 계속 맴도는 전원우의 목소리에 멍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가방을 메자, 전원우는 내 어깨쪽을 제 손으로 감싸더니 이내 가방을 고쳐메주었다. 그의 손이 닿은 어깨가 후끈 달아오르는것 같은 착각에 얼굴이 확, 하니 달아올랐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전원우는 또 그 특유의 언제봐도 당황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곤 내게 제 손을 내밀었다.
"거기 서있지만 말고. 안갈꺼야?"
연달아 날 당황시키는 그의 행동에 걸음을 서둘러 전원우 옆에 섰다. 그렇게 제 옆에 멀뚱하니 서있는 날 보던 전원우는, 이내 제 손을 다시 내게 들이밀었다.
"손. 잡아. 밤길 무섭다며."
그런 전원우의 말에 재빨리 그의 손을 잡았다. 꼭 잡은 두손에, 마치 손바닥마저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걸어서 우리집 주변 가로등 아래에 섰을 무렵, 갑자기 전원우의 집도 같은 방향인지가 궁금해져 전원우에게 물었다. 집이 어디냐는 내 물음에 전원우는 무심히 대답했다.
"반대쪽인데"
그의 말에 놀라 그럼 왜 여기까지 온거냐며 목소리를 높이자, 전원우는 상관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밤길 무섭다며, 같이 가줘야지."
그 대답에 아까 전의 야자시간이 겹쳐 생각나며 얼굴이 온통 붉어지는게 느껴졌다.
"가로등 불빛 때문이야? 아니면 수줍어서?"
전원우가 내 얼굴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소리에, 볼이 더더욱 상기되는 것만 같았다. 당황스런 마음에 아니, 니가 자꾸만 그렇게 웃으니까..! 하고 얼버무리면, 전원우는 다시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가로등 아래에 마주선 채, 전원우는 제 두손을 내 양볼에 갖다대었다.
"이렇게 뜨거운거 보면, 성공했네."
"너 맨처음 소각장에서 본 후부터 이번에 짝되기까지,내가 얼마나 너랑 마주치게 해달라고 기도했는지 모르지?"
"내가 왜 맨날 너만 보면 그렇게 헤프게 웃는지도 모를테고."
"왜 굳이 몇시간동안 야자 끝날때까지 너 기다리면서 학교에 있었는지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여주 넌 모르지?"
"이제 좀 알아주려나, 우리 여주가?"
꽃봉오리 |
알바 갔다오자마자! 업로드한 만개!!! 칭찬해주쎄요! 양아치 순영이의 뒤를 잇는 원우의 이야기임니당. 곧 개인의 연애사로 뵈요 우리꽃님들! 꽃님들~~!! 너 예!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