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ACH CRUSH !
02
태일/재현/민형
“김여주~!”
“네..?”
“잘 했어?”
“..뭘여?”
“뭘 것 같은데?”
난 태용 선배가 저렇게 예쁘게 웃을 때가 제일 무섭더라. 저렇게 웃으면서 뼈 있는 말을 날리는게 선배의 주특기였다. 일명 빙썅이라고. 빙그레 썅넘…. 아하하, 당연히 과외죠. 선배를 따라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려보였다. 줸장. 이럴 줄 알고 수업 끝나자마자 쏜살같이 강의실을 빠져나가려 했던건데! 수업 전부터 날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이렇게 잡히고야 말았다.
“아니, 아무 말도 없는게 이상하잖아.”
“할라고 했어옇..”
“너 사고 쳤냐?”
선배는 눈치도 빨랐다. 저를 피해 달아나려 했던 내 동선을 눈치챈게 분명하다. 딱히 내가 사고를 친 것도 아닌데 사고를 쳤냐는 물음에 제 발이 저려 선배의 발끝만 보고있던 고개를 벌떡 들었다. 아니요?! 그리고 이렇게 외쳤다지. 누가 봐도 수상한 반응이였다. 김여주 등신 진짜.. 속으로는 한숨을 백번도 더 쉬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태용 선배는 호탕하게 어깨를 들썩였다. 제 큼직한 손으로 박수까지 쳐가며 (비)웃는 것이였다. 왜 웃어요? 묻자, 웃겨서 란다.
..반박할 수 없었다.
“처음이라 어렵겠지. 그래도 민형이 착하잖아?”
“넼..?”
“몇번 같이 밥 먹은 적 있어서 아는데, 걔 애 싹싹하고 괜찮아.”
...맷돌 손잡이 알아요? 맷돌 손잡이를 어이라 그래요 어이.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네…?^^ 아니 이민형 그자식은 도대체 얼마나 가식을 떨고 다닌거야. 이쯤되면 나한테만 싸가지가 없는건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얼버무렸다. 절대 그렇다고는 말을 못하겠더라. 걔가 나한테 한 말이 있는데. 난 아직까지 토요일에 들었던 말만 생각하면 밥을 먹다가도 주먹을 쥔다. 그래도 거듭 말하지만 난 슈퍼을이기 때문에 절대 싫다는 말은 입밖으로도 꺼내지 못했다. 너무 웃어서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지경이였다.
“너가 부탁한 거 난 다 해준거다. 알지? 열심히 해. 이게 다 경험 쌓는거야.”
“당연하죠~ 진짜 감사해요 선배. 제가 진짜 첫 과외비 받으면 크게 쏘겠습니다!”
내 당찬 포부에 한번 더 크게 웃던 태용 선배는 새내기가 언제 이렇게 커서~ 라며 잠시 추억을 파더니 내 어깨를 두어번 두드려주곤 다음 강의를 들으러 갔다. 선배 어머님과 민형이네 어머님이 엄청 친한 친구시란다. 저 멀리 걸어가는 선배의 뒷모습을 보며 코를 한번 훌쩍였다. 그래. 선배가 할 수도 있었던 대박 과외를 나한테 넘겨주신건데, 마음에 안 들어도 할 수 있을 때까진 해보자. 그런 정의 넘치는 다짐을 하며 가방을 고쳐맬 참이었다.
“야. 뭐하냐?”
“아 깜짝이야 진짜!!”
뒤에서 정재현 특유의 향이 물씬 풍기더니 곧 익숙한 팔뚝이 어깨동무를 해온거다. 인기척도 없어서 화들짝 놀라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예상대로 정재현이 얄밉게 웃으며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덕분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됐다. 민망한 마음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되는 정재현의 팔뚝을 주먹으로 때리자, 정재현은 쪽팔려하는 내가 웃긴건지 호탕하게 웃으며 제 엄지와 검지로 내 볼을 꾹 잡았다. 그러더니 이 미친놈이 내 볼을 그대로 들어올려 저와 눈을 마주치게 하는거다.
“드릈느? 은느?” (돌았냐? 안놔?)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녀석의 손목을 쳐냈다. 공들여서 한 화장에 손을 대? 내가 세모눈으로 정재현을 쳐다보자, 놈은 아직도 내 어깨 위에 얹혀놓은 제 팔을 내리더니 밥 먹으러 가자는 말만 다시 할 뿐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나 카페 갈거야. 오늘 강의는 다 끝났으니 태용 선배를 생각해서라도 말끔하게 첫 수업 준비를 할 생각이였다. 한번 풀어보는게 좋을 것 같아 민형이가 푼다는 문제집도 어제 미리 사뒀다. 슬쩍 훑어봤는데도 고난이도의 문제들이 빽빽하던게 생각이 난다.
“웬 카페?”
“과외 준비하려고. 와플 그런거로 대충 점심 때우게.”
“어디 갈건데?”
“우리 집 앞에 거기.”
발걸음을 옮긴 나를 따라 설렁설렁 걸어가던 정재현이 걸음을 멈췄다. 덩달아 걸음을 세워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표정으로 입술만 벙긋거리는 정재현이 보였다.
“야. 거기 말고 다른 데 가.”
“뭐야. 왜.”
“..거기..요즘 좀 별로라더라. 맛도 없고.”
눈을 꿈뻑였다. 정재현은 곧 본래의 능글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와 어깨를 으쓱였다. 말도 안돼. 거기 와플 진짜 맛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입술을 툭 내밀며 그럼 어디를 가야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교 앞은 너무 비싸고, 저 골목 안까지 가기는 귀찮고. 명료한 답이 안 나와 뒷머리를 헤집는데, 그런 나를 아무말 없이 바라보던 정재현이 잠시 미간을 좁혔다.
“야 나 지금 주먹 쥐었어.”
“..왜..”
“너 그 입술 좀 넣어주려고.”
..진심인 듯 했다.
피치 크러쉬 !
02
“…”
“..”
시간은 이럴때만 빨랐다. 금방 토요일이 와버렸다. 난 또 뛰었고, 이민형의 집은 여전히 넓고 깨끗하고 인테리어까지 완벽했다. 어머님께 인사를 드린 후 민형이와 방에 들어온지 벌써 한시간째. 나란히 앉아 수학만 풀고 있는 중이다. 정재현은 내가 고3때 썼던 공부 방식과 스킬을 하나씩 알려주면서 거지같은 사이를 살살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며 조언해줬다. 말이야 쉽지..(울컥) 이제 한시간 같이 있었는데, 이민형이 어떤 류의 학생인지 알아버렸다. 일단 한번 문제를 풀기 시작하면 절대 입을 여는 일이 없었다. 손이 저려 연필을 고쳐잡는 일도 없었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냥 계속 자기가 풀려는 문제만 보며 풀이과정을 적어나가는 학생이였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굉장한 놈이란 말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말 한번 걸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어줍잖은 말로 문제풀이를 방해 했다가는 금방이라도 조용히 하라는 날 선 소리가 들려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 풀었어요.”
“잘 했는데, 두 문제 틀렸다.”
이민형은 틀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학생이기도 했다. 보통 열심히 푼 문제가 틀리면 한숨이라도 내뱉기 마련인데 민형이는 그런게 없었다. 요지부동으로 보고있다가 왜요, 한마디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바로 오답노트를 펼치는게 포인트였다. 공부를 못할 수가 없겠네. 사실 알려줄 공부 스킬도 없었다. 이미 너무 완벽한 공부 습관을 갖고 있는 놈이었다. 그래서 더 재수없기도 했다.
“두개가 같은 유형인데, 너가 이런 문제에 조금 약한 것 같아.”
“네.”
“일단 여길 봐봐.”
내가 펜을 들자, 그 진득한 시선이 내 손을 따라왔다. 풀이과정 옆 빈 공간에 민형이가 실수한 부분을 정정하며 설명했다. 20분 만에 자유롭게 입을 열 수 있는 시간이였다. 이민형은 내 설명에 옅게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했다. 그래도 가르칠 땐 선생님 취급은 해주는 것 같아서 고마웠다. 자존감이 밑바닥까지 떨어진 것 같다. 당연한거에 고마워하고 앉았다니..^^
“이해됐어?”
열심히 설명을 끝낸 후 펜을 내려놓았다. 쉽고 똑 부러지게 설명하려고 엄청 애썼는데 좀 알아주련? 고개를 돌려 민형이를 바라봤다.
“잘하시긴 진짜 잘하시네요.”
“..”
“수학.”
근데 이민형은 정작 쌩뚱맞은 소리나 내놓았다. 날 보지도 않고 내뱉은 말이었다. 아니 이해 됐냐 물었는데 왜 갑자기 칭찬을 해 사람 민망하게.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어색하게 웃으며 도로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가 아니고 잠깐만. 칭찬??????
“민형아..!”
“..네?”
“너 방금 나 칭찬해 준거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민형이 나한테 칭찬을 했다고. 이건 다이어리에 적어놔야 하는 일이였다. 저번주처럼 구박만 듣고 수업 끝낼 줄 알았는데 칭찬이라니. 내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다시 민형이에게 시선을 두자, 녀석은 안그래도 없던 표정을 더욱 딱딱하게 굳혔다. 아무렴 어때, 너가 날 칭찬했는데~!
“좋아하시는 거예요..?”
“당연하지이! 너한테 잘한다고 칭찬을 들었는데!”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한 말 아닌데요."
분명 무의식 중에 나온 진심일거다. 아니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말한 진심이던지. 그래, 선생님이 설명을 너무 잘했지? 핳핳 웃었다. 이 집에 온 후로 처음 나온 진실된 웃음이였다. 그러던 도중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곁눈질로 날 보는 이민형과 눈이 마주쳤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현타가 왔다는 말이 적절할 것 같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한심으로 가득 차있는게 느껴졌다. 급히 웃는 걸 멈추곤 다시 펜을 들었다.
“미안, 수업하자.”
역시 난 슈퍼을이였다…☆
피치 크러쉬 !
02
잠이 오지 않았다.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아무리 누워있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정재현에게 톡을 해봤지만 자는건지 돌아오는 답장은 없었다. 김동영과 정수정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새벽 4시가 다 되가는데 다 자겠지. 내일 아침 일찍부터 강의가 있다며 칭얼거리던 정재현이 떠올랐다. 새삼 내일 강의가 오후 수업인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침부터 수업이 있었다면 내일 일어나는게 무척 힘들었을텐데.
“아 진짜 왜 잠이 안오냐.”
혼자 눕기엔 넓은 침대 한 가운데 정면을 보고 누워있다 몸을 돌렸다. 잠에 들려는 나름의 노력이였다. 나 빼고 모두가 잠에 든 새벽, 고요한 기류 속에서 눈을 감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있자니 이민형이 생각났다. 꽤나 성공적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첫 수업을 마친 후 작은 쪽지에 내 전화번호를 적어 건내준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자식 그거, 내 번호 저장은 했을라나. 모르는 문제 있으면 연락하라고 하긴 했는데 분명 안했을게 뻔했다. 쪽지를 버리지만 않아도 땡큐를 외쳐야 할 판인데 저장은 무슨.
그런데 그때 머리맡에 놔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누군가가 내 카톡에 답장을 한건가 하고 황급히 핸드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
지금 제가 보는게 이민형이 보낸 카톡 맞나여..?ㅎㅎ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젠 독심술까지 부려서 반항하는건가. 소름이 돋아 괜히 팔을 비비며 민형이가 보낸 카톡을 찬찬히 읽었다. 이 시간까지 공부하나보다. 급히 일어나 스탠드 불을 켰다. 마침 책상위에 놔두었던 문제집을 펴 이민형이 말한 문제를 찾았다. 오늘 내가 한참을 설명해준, 다른 유형에 비해 약한 것 같다고 한 유형의 문제였다.
“뭐야 이시끼..완전 열심히네..”
기특한 마음이 물씬 들었다. 귀찮다는 생각은 잠시도 하지 않고 펜과 종이를 꺼내 풀이과정을 적었다. 민형이가 잘 틀리던 부분에 체크도 해놓고 주의 별표까지 달아줬다. 그리고 사진을 찍어 전송하자, 기다린건지 바로 1 표시가 사라지더라.
곧 답장이 왔다. 이민형다운 답장이였다. 응 그래 공부 열심히 해! 하고 톡을 끝낼까 생각하다 일부러 물음표가 달린 질문을 보냈다. 혹시나 새벽감성에 조금이라도 살가운 답을 받을 수 있을까 라는 기대 때문이였다.
하지만 역시 이민형은 프로기대파괴러였다. 보내자마자 1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답장은 없었다. …씹혔군!
그럼 그렇지. 심드렁하게 넘겼다. 칭찬 한번 들었다고 너무 들떴다. 새벽이든 아니든 이민형은 원래 쟈가운 놈인데. 그러려니 생각하며 할 짓없이 친구목록을 구경했다. 이렇게 잉여로운 것도 오랜만이였다. 셀카 잘 나왔네. 와 이거 맛있겠다. 어디야 여기, 예쁘네.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들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던 도중 열심히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춰 세웠다. 내 의지라기 보다는 그냥, 본능적인 행동이였다.
문태일.
정갈하게 적힌 이름 석자를 눈에 담았다. 프로필 사진도, 상태메세지도 없었다. 이렇게 공허를 알린지 일년정도 됐나. 나름 잊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딱히 아닌 것 같다. 두어번 눈을 깜빡이다 느릿하게 채팅창을 열었다. 정말 오랜만에 열어보는 공간이였다. 나의 설렘이 온전히 담긴 작은 공간.
아, 내가 오빠랑 이런 대화를 했었구나.
글자가 너울졌다. 고인 눈물이 그 이유였다. 주책이야 진짜. 눈가를 대충 비비며 홀더키를 눌러 화면을 꺼버렸다. 이걸 왜 봤을까 후회가 밀려왔다. 핸드폰 불빛이 사라지자 방 안은 완전히 어둠에 잠겼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야지. 자야 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머릿속을 까맣게 물들였다.
암호닉 |
맠둥이는망고 / 모찌 / 오렌지 / 우재야 / 백도 / 뽀로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