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의 밤 ;
옛날, 아주 먼 옛날에 소녀가 살았어요.
그 소녀는 마음씨가 아주 따뜻하고, 예뻤어요.
소녀는 늘 자기 전마다 할머니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었어요.
쥐가 밤에 손톱을 먹고 사람이 되었다는 이야기,
남편을 기다리다가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
여러 이야기들 중에서 소녀가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는
바로 호랑이 이야기 였어요.
'할머니, 이제 그 호랑이 이야기 해 주세요.'
'또 듣고 싶니?'
'헤헤. 해 주세요- 할머니.'
그럼 해 줄 수 밖에 없지, 할머니는 웃으며 소녀에게 몇 십번이고 더 했었던
그 호랑이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에. 호랑이가 살았단다.'
'.......'
'그 호랑이는 사람을 해치는 나쁜 호랑이도, 힘 없는 동물들을 잡아먹는 호랑이도 아니었지.'
'그럼 어떻게 살았어요?'
'그 호랑이는 산기슭에 살았는데, 낮에는 보이지 않았어.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
'그 호랑인, 밤마다 산에서 내려와, 마을을 돌아다닌단다. 호랑이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언제나 행복하고 아무 일 없이 지내지.'
'우리 집에두 그 호랑이가 지나갔을까요?'
'그렇겠지. 그렇지만 아무도 그 호랑이를 본 적이 없었어.'
'.......'
'그리고, 그 해의 열 번째 보름달이 뜨는 날에 마지막으로 호랑이를 본 사람은, 호랑이의 ...가 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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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늘 밤이 되기를 기다렸어요. 그를 만나기 위해서였죠.
밤 열 두 시가 되면, 그는 소녀에게 찾아왔어요. 신기루처럼.
"호시야!"
어김없이 그가 소녀의 품에 달려와 안겼어요. 그는 바로 아기 호랑이였어요.
밤마다, 소녀를 찾아와 소녀의 말동무가 되어 주었죠. 소녀는 숨 쉴 틈도 없이 호시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으며, 오늘 있었던 이야기들을 늘어놓아요.
"나 오늘 속상해. 엄마가 마지막으로 나한테 준 손수건을 잃어버렸거든."
"......."
"분명히 그 애 짓이야. 그치만 아무도 안 믿겠지. 그리고 아무도 그게 소중한 물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
"넌 내 맘 알 수 있지?"
"......끄응."
"호시는 알 거야. 호시는 남들과 다르니까!"
소녀에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호시였지만, 소녀는 호시가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 누구보다도 자기의 마음을 잘 알 거라고. 호시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그럴 수 밖에요. 호시는 다른 호랑이들처럼 사납지도, 사람을 물지도 않고,
늘 맑은 눈빛으로 소녀의 말에 눈을 깜빡거렸으니까요.
"호시야, 호시는 어디에서 온 거야?"
"......."
"달...나라?"
호시에게 소녀가 묻자, 호시는 고개를 달로 돌렸어요. 호시는 정말 달나라에서 온 걸까요?
호시의 목에 있는 목걸이가 달빛을 받아 반짝 빛났어요. 그 목걸이도 소녀가 준 거였죠.
오늘이 벌써 열번째 보름달이 뜨는 밤이에요.
"근데 왜 매일 내 방에 나타나는 거야, 호시야?"
"......."
"난 너가 오는 게 좋아."
"......."
"그러니까 갑자기 불쑥 없어지지 말아.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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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지금 심장이 그 누구보다 빨리 뛰고 있어요.
옷매무새도 다듬지 않은 채, 소녀는 산으로 뛰어갔어요.
숲 안에는, 목장갑을 낀 채 밧줄을 들고 있는 남자 두 명과, 구경꾼들이 보였어요.
그리고 그 가운데엔, 상처 입은 호시가 보였어요.
"아저씨, 아저씨. 왜 잡아가는 거에요?"
"이 놈이 갑자기 집 안에 들어와서 이걸 물어갔다지 뭐냐."
"......네?"
"그래서 그 집 애가 다쳤어. 손등을 할퀴었대."
아저씨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호시가 물고 갔다는 건 바로 소녀의 손수건이었어요.
울고 있는 그 아이도 보였어요. 소녀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왜, 호시야. 왜 그런 거야. 너가 다치잖아. 소녀는 아무런 말도 이어나가지 못하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호시야, 호시야."
"......."
"얘 좀 끌어내 봐. 위험해. 가까이 가면 너도 다쳐, 얘."
"아니에요, 호시는 나쁜 아이가 아니란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하는 거니, 너. 정신 차려. 이 자식은, 짐승ㅅ...."
"잡아가지 마세요, 호시는, 호시는...."
소녀가 호시에게 다가가자 사람들은 모두 소녀를 말렸어요.
호시는 위험한 호랑이가 아닌데, 모두 호시를 포악한 동물마냥 밧줄로 꽁꽁 묶어 놓았어요.
피를 뚝뚝 훌리고 있는 호시가 보여요. 소녀가 호시의 털을 쓰다듬자, 한 아저씨가 우악스럽게 소녀를 끌어냈어요.
호시의 눈이 번뜩 빛났어요.
"호시야, 다치면 안 돼.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라는 목소리가 어디서 들리는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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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많이 자랐어요. 키도 무럭무럭 자랐고, 더 예뻐졌죠.
많이 변한 소녀였지만, 호시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에요.
오늘도 소녀는 호시에게 마음속으로 편지를 쓰며 집으로 걸어갔어요.
발걸음이 오늘따라 더 더뎌지는 건 기분 탓일까요? 소녀는 오늘따라 호시를 더 그리워 했어요.
가로등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어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소녀는 누군가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점점 발걸음이 빨라져 와요. 그림자로 보이는 그 '누군가'는 손에 무언가 기다린 것을 들고 있었어요.
아마 소녀를 기절시키려는 것 같아요. 소녀는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어요.
'호시가, 보고 싶어.'
그 날따라 호시가 더 간절했어요. 소녀는 아직도 호시를 기억하고 있고, 호시를 그리워하고 있어요.
호시가 죽은 게 자기 때문인 것만 같아 매일 눈물을 흘리기도 했어요.
이제 손 대면 닿을 거리까지 누군가가 온 것 같아요.
"미친 새끼."
욕지거리와 함께, 그 누군가는 도망가고 한 남자만이 서 있었어요.
그 남자는 너무 놀라 주저앉아 버린 소녀의 등을 쓸어 주며 방긋 웃었어요.
"괜찮아."
"........"
"무서웠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 앞에 보이는 건 호시였어요. 소녀는 혼란스러웠어요.
눈물을 다시 닦고 앞을 보니, 호시는 온데간데 없고 그 남자만이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답니다.
"아직도 날 기억해?"
".......네?"
그 남자가 피식 웃으며 주머니에서 꺼낸 건 그 때의 그 손수건이었어요.
분명히 그 손수건이 맞았죠. 소녀가 잃어버렸던 손수건. 이게 왜 이 남자한테 있는 걸까요.
"호시는, 한번 주인님은 절대 잊지 않아."
"........"
"계속 자책하고 있었지? 내가 주인 때문에 죽은 줄 알고."
".......진짜 호시야?"
"응, 나 호시야."
영락없이 호시였어요. 소녀를 바라보는 맑은 눈망울도, 소녀를 어루만지는 것 같은 그 말들도.
소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어요. 왜 이제 나타났어, 보고 싶었는데.
"엄청 힘들게 왔어, 주인 보려고."
"........"
"앞으로 없어지지 않을 거야. 그 날처럼."
"........"
호시가 소녀를 꽉 안았어요. 소녀는 다시 옛날 이야기를 떠올려요.
'그 해의 열 번째 보름달이 뜨는 밤, 마지막으로 호랑이를 보는 소녀는,'
'.......'
'그 호랑이의 신부가 된단다.'
'......할머니, 호랑이랑 사람이랑 어떻게 결혼해요!'
'10년 동안 호랑이로 살아야 하는 저주에 걸린 소년일지 어떻게 아니?'
'.......할머니는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그렇게 잘 알아요?'
'글쎄.'
소녀도 호시를 꽉 안았어요. 그래, 나도 널 이제 그냥 놓치지는 않을 거야.
그 날, 그 해의 첫번째 보름달이 떴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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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연작물로 쓰려고 했던 겁니다 호호호...
사실 원래 제목은 호랑이와 소녀의 상관관계라든가, 소녀와 호랑이라든가... 이렇게 지으려고 했는데
그냥 이게 제일 나은 것 같아서 정했어요 !
말 그대로 10년 간 밤에만 나타날 수 있는 저주에 걸린 호랑이 소년...(호랑이 소년은 뭔가 어감이 이상한가요?)과
티없이 맑고 깨끗하고 순수한 소녀의 이야기입니다 ><
자세한 비하인드는... 나중에 찾아올 호시 버전의 번외에서 푸는 것으로,
늘 사랑해요 ! 전 시험공부를 마저 하러 총총총=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