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그랬다. 어쩐지 목소리가 익숙하더라니. 이름을 들어본 것 같더라니. 그 자식은 내 핸드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그 또라이 아메바였다.
“야, 너 잘 만났다. 너 그 뒤로 내 번호 스팸등록 해놨냐?”
그렇게 수다스럽게 생긴 얼굴은 아니던데, 하는 짓은 영. 녀석은 쉬는 시간 내내 내 귓전에 대고 그 큰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안 그래도 잠을 못자 신경이 날카로운데, 얜 뭔데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나타나서 내 신경을 긁어대나. 엎드려있던 상체를 휙 하고 단번에 일으켜 쫑알대던 녀석을 째려보았더니, 얼씨구. 지지 않고 나를 노려보신다.
“아, 진짜. 그 지갑 나 아니라고! 훔쳐간거 나 아니라고! 내가 주워서 경찰서 갖다준 건 맞는데, 훔친 건 내가 아니라고!”
내가 이렇게 소리치는 것을 처음 보는 반 애들은 어느새 다들 이쪽을 향해 시선을 집중하고 있다. 아, 쪽팔리게.
“그걸 어떻게 믿냐.”
“얼씨구? 너 코난이냐? 아님 김전일? 대체 그 잘난 지갑에 얼마가 들어있었는데?”
이거 확 자꾸 귀찮게 하면 몇 푼 쥐어주고 말 생각이었다. 홧김에 입 밖으로 나간 저 말에 녀석은 잘 걸렸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러면서 얼굴에 사악한 미소를 띄는 게 꼭 고리대금업자 같은 얼굴이다.
“왜, 얼만지 알면 갚으려고?”
“에이씨, 나 아니라니까! 얼만데, 뭐 그렇게 많아?”
“현금으로 오...”
“그래, 오천 원? 오만 원? 뭐?”
“오십만 원. 현금 오십만 원.”
액수를 들은 순간, 내 얼굴은 분명 바보 같았을 거라 생각한다.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서는. 웬만해선 잘 보여주지 않는 얼굴인데 이거. 녀석은 내 얼굴을 보고 웃은 게 틀림없다. 기분 나쁘게 한쪽 입 꼬리만 올리면서 씨익 웃는 거다. 이 새끼는 대체 정체가 뭐야.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 뒤엔 내가 왜 액수를 물어봤을까. 그리고 나선 아놔, 내 표정 쪽팔리게. 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갚을래?’
“에이씨, 나 아니라니까!”
한번 더 소리를 빽 질러버렸다.
-
표지훈은 날 끈질기게도 귀찮게 굴었다. 수업 시작했다고 볼을 꾹꾹 찔러 깨우질 않나, 그러고선 지는 곧 잠들었다. 이런 미친. 속으로는 연신 욕을 해대며 입으론 한숨만 뱉었다. 아무래도 자리를 바꿔달라고 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가는 줄도 몰랐나보다. 어느새 점심시간이 된 교실이 시끌벅적해졌다. 내리 쳐 자던 이 새끼는 그제야 기지개를 펴면서 일어난다. 하품하는 것 좀 봐라. 어이구, 그래, 편하게 쳐 주무셨나요.
“야, 깨우지 그랬어.”
난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내 점심밥이나 다름없는 빵이랑 우유를 사러 매점으로 향하려는데 뒤에서 귀찮은 게 자꾸 따라붙는다. 휙 뒤를 돌아 날이 선 눈으로 쏘아보니 뒤따라오던 표지훈은 능글맞게 웃으며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한다.
“나도 내 갈 길 가는 거야.”
“그럼 좀 떨어져서 걸어.”
뒤에 바짝 따라붙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니, 내 이야기는 아예 씹어버리는 건지 자꾸 말을 걸어온다. ‘넌 어디 가는데? 매점? 와, 나도 빵 사줘.’ 이런, 또라이를 봤나. 우리가 친한 사이도 아닌데 넌 나한테 왜 자꾸 이러는 거니. ‘내가 니 빵셔틀이냐?’ 참다 참다 한마디를 했더니 완전 웃는 얼굴로 하는 말이 참 가관이다.
‘빵으로 오십만 원 갚으면 되겠네!’
씨발, 오십만 원어치 처먹고 배 터져 뒤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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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표지훈은 끝내 나한테서 빵을 얻어먹었다. 땅콩크림빵. 기분 좋은지 그 목소리로 콧노래까지 부르더라. 헐. 난 그냥 착한일 한 셈 치기로 했다. 재효형한테는 지갑을 주웠단 말도, 그 주인이 또라이란것도, 근데 그게 내 짝꿍이 되었단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게 오늘 멍 때리고 있다 고데기에 데인 이후로 형이 워낙 걱정하는 얼굴로 묻기에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일의 전말을 다 듣고 난 후로 형은 미간을 좁히며 이렇게 말했다.
“너, 조심해야겠다.”
“그쵸, 그쵸? 형이 봐도 또라이같죠. 진짜 이상하다니까?”
“진짜 빵으로 오십만 원어치 뜯어 가면 어떻게 해.”
이럴 때 보면 형도 참 순진하다니까.
진짜 이상한 건 그 뒤였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 표지훈은 나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처음엔 뒤에서 졸졸 따라오길래,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더니 자기도 갈 길 가는 거라고 둘러대더니. 요즘은 아예 같이 가자며 옆에 붙어 걷는다. 그럼 나는 또 발걸음을 빠르게 하는데, 이게 눈치가 없는 건지. 다리길이도 엇비슷해서 영 따라잡는 속도까지 장난이 아닌 거다.
수업시간엔 자지도 못하게 괴롭혀, 성질내면 또 은근슬쩍 웃는 얼굴로 넘어가려는 게 보통이 아니고, 그리고 진짜 빵으로 오십만 원을 채울 작정인지 그 뒤로 몇 번 더 나한테서 빵을 뜯어먹었다. 아, 지갑에 현금 오십만 원 빵빵하게 넣고 다닐만한 스펙이면 지 돈 내고 사먹지 왜 가난한 내 주머니를 뜯나. 웃는 얼굴로 하는 강도짓이 따로 없다.
“자냐.”
“.......”
“공주야, 자냐.”
“이 미친!”
귓가에 대고 그 낮은 목소리로 공주라고 부르는데, 순간 정말로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서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눈에선 레이저 쏠 기세로 째려보았는데 이 새끼는 마조히스트인가. 뭐가 좋아서 웃는 거지. 어쩌면 정말 또라이가 아닐까, 매 순간순간 생각하게 만드는 놈이다.
“니 별명, 백설공주라며?”
드디어 녀석도 알아버렸다. 어쩐지. 전학을 온 그 날, 녀석의 주변에 몇 명이 몰려들어 이것저것 묻는 것 같긴 했다. 그 인파속에 끼어있기 싫어 잠깐 나갔다 온 사이에, 반 녀석들이 내 별명 같지도 않은 별명을 불어 버렸나보다. ‘그렇게 부르면 입을 박음질해버릴 거니까 닥쳐.’ 내가 이렇게 싸가지 없게 굴어도 표지훈은 넉살좋게 웃어넘긴다. 어쩌면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닐까?
“잘 어울리는데, 뭘.”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건 아닌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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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은 체육. 뛰어다니며 땀 냄새 풍기는 게 싫은 나는 체육을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그래도 기합을 받기는 싫으니까 체육복을 갈아입기는 한다. 참 색깔 촌스럽다. 팥죽색 체육복을 가방에서 꺼내며 생각했다. 남고는 가리고 옷을 벗는 다랄지, 탈의실의 개념이 없다. 다들 여기서 훌렁 저기서 훌렁 체육복을 갈아입는다. 그렇지만 남의 살을 보는 것도 취미 없고 내 속 살을 보여주기 싫은 나는 화장실에서 갈아입고는 한다. 그럴 때마다 뒤에서 오가는 지랄 맞은 농담들도 사실 난 다 알고 있다. ‘백설공주 또 화장실에서 체육복 갈아입나?’ ‘씨발, 기집애냐.’ ‘가서 함 보고 올까?’ 미친. 보긴 뭘 봐. 키도 쪼끄만 것들이. 그런 놈들은 무시가 답이라 생각하고 그저 모른 체하며 지내왔다.
“야, 너 어디가?”
“체육복 입으러.”
“귀찮게 뭐 하러? 여기서 갈아입어.”
꼭 제 일도 아닌데 오지랖 넓게 나서는 건 체육복 갈아입을 때라도 예외는 아니구나. 늘 무심한 듯 시크하게 유아독존으로 생활하던 나였던지라 뭐, 별로 친한 애들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매번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말을 거는 사람은 표지훈 뿐이다. 전학 온 지 며칠 지나지도 않았건만, 이제 반 애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듯 했다. 저것 봐, 또 쳐다본다. 에이씨.
“내 맘이야. 놔.”
의자에 다리를 꼬고 기대앉은 표지훈은 교실을 쭈욱 둘러본다. 어째 녀석의 시선이 닿자 우리를 향해있던 시선들은 다들 어색하게 제자리로 향했다. 뭐야, 나 없을 때 또 뭔 일이라도 있었나. 왜 꼭 잘못한 강아지 새끼들 마냥 시선을 돌려? 표지훈도 분명 봤을 거다, 다들 쳐다보는 거. 이쯤 되면 쪽팔린 줄은 알겠지. 나는 녀석에게 잡힌 교복 소매를 신경질적으로 털어냈다. 그러자 순순히 녀석의 손이 떨어진다.
"나도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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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이 추워서 손이 시려요ㅜㅜ
키보두 뚜둥기는데 손이 시려서 자꾸 손이 엉덩이로 간다는....☆★ (부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