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오늘은 피구할거야."
"헐?"
말 그대로 일동 '헐-' 남고에서 피구가 뭐예요 피구가! 피구는 여고생들의 상징 아니냐며 남자는 뭐니 뭐니 해도 축구란다. 지들이 무슨 국가대표 급이라도 되는 줄 아나. 난 이것도 저것도 크게 관심은 없어서 조용히 줄 맞춰 서있던 찰나, 옆에 서있던 애가 갑자기 뒤로 빠지더니 키가 큰 놈이 그 자리로 밀고 들어온다. 고갤 돌려 오른쪽을 슬쩍 보니까 나를 향해 웃고 있는 표지훈이 보인다. 나는 그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아, 또 왜!
표지훈은 기어이 화장실까지 따라왔다. 칸막이를 두고 나란히 체육복을 갈아입으며 이것저것 말도 참 많더라. 갈아입고 나와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팥죽색 체육복을 '고급스런 버건디'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영 생긴 거랑 목소리랑 하는 짓이랑 삼박자가 따로 논다.
체육선생이 피구용으로 쓰일 배구공을 가져올 때까지 애들은 투덜투덜 불만이 많았지만, 또 공 하나 던져주면 미친 듯이 잘 뛰어노는 게 이 나이대의 사내새끼들이다. 표지훈이 전학 오기 전 우리 반은 홀수였기 때문에 딱히 아픈 녀석이 없었음 짝을 지어 뭔가를 할 때 나는 주로 빠지는 편이었는데, 얘가 오고나선 서른 둘. 숫자까지 짝수로 딱 맞아 떨어지니 어디 빼도 박도 못하게 생겼다.
"그럼 이쪽 줄 여덟 명은 수비, 나머지 여덟 명이 공격하면 되겠네."
짝수 홀수로 나눠 반반씩 편을 가르고 공격 수비를 나눈 뒤 라인 안에 자리를 잡았다. 내 번호는 홀 수번이기 때문에 32번으로 끝번인 표지훈과는 다른 팀이 되었는데 다른 팀으로 갈렸다고 인상을 쓰길래 좀 놀랐다. 뭘 그렇게까지 험악한 표정을 할 필요가 있나. 난 귀찮은 짐 덜어낸 기분으로 표지훈에게서 멀어졌다. 오랜만에 운동하게 생겼네.
"야, 공 돌려. 돌리라고!"
"아오- 씨바! 저거! 저거 맞춰!"
역시나 남학교에선 찰진 욕설은 빠지지 않는구만. 처음엔 피구가 뭐냐며 떼를 쓰던 애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피구에 심취해있었다. 피구왕 통키가 될 기세로 공을 주고받는 녀석들 하며, 그 공에 죽자 사자 달라붙는 녀석하며. 라인 안에 들어와 있는 인원들 사이에 뒤섞여 나는 슬쩍슬쩍 몸을 움직이며 공만 피하고 있다. 그때였다. 상대편의 현란한 수비플레이에 미처 내 등뒤로 향한 공을 보지 못한 나는, 뒤를 돌아보는 순간 머리에 직격한 충격에 쓰러지고 말았다. 얼마나 강했느냐면, 내 몸이 휘청하더니 뒤로 넘어갈 정도....?
"야!!!"
머리에 공을 맞아 아픈 것도 있었지만, 내가 뒤로 넘어가는 순간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리는 우렁찬 목소리에 골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표지훈이었다. 바닥에 손을 짚고 주저앉아 있는데,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앉은 표지훈은 내 어깨 사이로 손을 넣어 나를 일으키며 양호실을 가잔다. '됐어. 무슨 양호실.' 머리는 멍한데 얘는 또 양호실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내가 좀 호리호리해도 남잔데, 공 조금 맞았다고 드러눕거나 눈물 짤 놈은 아니라 이거다.
역시나 표지훈의 우렁찬 목소리를 못 들었을 리가 없는 체육선생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공을 맞아서.' 그렇게 말하곤 바닥을 짚었던 손을 툭툭 털며 일어나려는 순간, 코에서 뭔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손을 들어 인중을 쓰윽 훔쳐보자 손에 묻어 나오는 건,
피?
피!!!!
"아이씨! 양호실 가야된다니까!"
"아!"
내가 주춤하며 멍 때리는 사이, 표지훈은 이미 내 손목을 잡고 체육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손목을 꽉 잡았는지, 녀석에게 잡힌 체육복 소매가 보기싫은 모양새로 구겨졌다. 당황한 얼굴을 해선 엉성하게 손으로 코피를 틀어막고 뒤를 돌아보니, 체육선생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다녀와라' 라고 말했다. 내가 체육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어도 이런 식으로 쉬고 싶진 않았는데. 그것도 이 자식과 함께 라니. 뭔가 찝찝하다.
"야."
"왜?"
자신 있게 내 손목을 잡아 끌고 양호실로 향하던 표지훈은 2층과 3층 사이의 계단에서 잠깐 멈추어서더니 나를 불렀다. 덩달아 멈춰선 나는 녀석의 행동이 의아해 물었다. '왜?' 그러자 내 눈치를 보는 듯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녀석. 뭐지. 얘 왜 이러지.
"나, 양호실 어딘지 몰라."
"아오- 됐다."
그냥 화장실에 들러서 대충 씻고 휴지로 막으면 돼. 그러니까, 그냥 이거 놓고 난 교실로 갈 테니까 넌 체육관으로 가.
녀석이 벙찐 얼굴을 하고 있는 틈을 타 잡힌 손목을 털어냈더니 생각보다 쉽게 손이 떨어져 나간다. 화장실에 들러 세수를 하고 얼굴을 보니 뺨이 좀 부은것 같기도 하다. 아깐 경황이 없어서 몰랐는데, 뒤로 넘어갈 정도였으니 좀 세게 맞았구나 싶다. 물기가 남아있는 손을 탁탁 털어내고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따라온 표지훈은 내게 휴지를 내밀었다. ‘막아. 코피.’ 이제 거의 멎은 것 같은데.
“그냥 둬도 괜찮겠는데.”
“안 돼.”
“뭐가.”
코에 뭐 쑤셔 박기도 답답하고, 이제 피가 많이 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표지훈이 내민 휴지를 받지 않았다. 힐끔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고 화장실을 나서려는 순간, 강하게 내 손목을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나는 그만 뒤로 끌려가고 말았다. 얼떨결에 끌어당겨진 내 몸은 표지훈의 어깨에 닿았고 그만큼 녀석의 얼굴과의 거리도 가까워졌다. 잠시 당황해 표지훈의 얼굴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자니 그 틈을 타 녀석은 내 코에 휴지를 쑤셔 넣는다.
“야!”
내 손이 아닌 남이 내 코에 휴지를 밀어 넣는 느낌은 또 이상해서 고개를 도리질 치며 녀석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고 하니, 무슨 아귀힘은 이렇게 좋은지. 내 오른쪽 뺨을 잡은 녀석의 손바닥에서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조금 정신이 돌아온 나는 손을 들어 녀석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그러자 순순히 뒤로 밀려나며 씨익 웃는다. 꼭, 아이처럼.
“잘 어울리네.”
-
화장실에서 교실로 돌아와 수업이 끝나기까지 남은 15분 동안 표지훈과 단둘이 앉아있었다. 딱히 할 이야기도 없는데 표지훈은 제 자리도 아닌 남의 자리에 나를 마주하고 앉아서 빤히 쳐다본다. 그 시선이 괜히 민망해 고개를 돌려 창문 밖에 비친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데, 역시나 그 수다스런 입을 가만히 둘 리 없는 녀석이 말을 붙여온다. ‘너 이제 보니 얼굴이 부었다? 아까 보니까 완전 뒤로 넘어가던데. 어떤 새끼야? 내가 변호사 붙여줘? 고소해야 돼 이건. 봐봐, 여기 부었네! 완전!’ 그러면서 은근슬쩍 내 얼굴에 손대려는 표지훈의 손가락을 조금은 차갑게 툭 쳐냈다. 그러자 멋쩍게 웃으며 손을 거둔다.
왜 내가 다쳤는데 지가 변호사를 붙여. 웃기는 놈이네. 속으론 나보다 열 내는 녀석이 웃겨 피식 웃었다. 물론 겉으로 티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말에 아무런 대꾸가 없어 민망했는지 녀석은 입을 다물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이 궁금했는지 이젠 화제를 바꿔 말을 걸어왔다.
“거기 뭐 있냐?”
있긴 뭐가 있냐. 그냥 하늘이지.
“아니, 별 거 없어.”
내 짧은 대답에 녀석의 시선도 창가로 향한다. 창밖엔 파란 하늘. 이제 낙엽이 져가는 마른 가지들. 그것뿐인데. 아무것도 재미있을 거 없어.
“예쁘네.”
“하늘?”
나와 같은 창밖을 보는데, 이 녀석의 눈에는 뭐가 예뻐 보이는 걸까. 평범한 하늘이? 아니면, 낙엽이 떨어지는 풍경이? 가을 풍경은 내겐 좀 쓸쓸할 뿐인데. 의아해진 나는 평소 같았으면 전혀 하지 않았을 질문이란 것을 던졌다. 나는 창가로 향해있던 시선을 잠시 돌려 녀석을 바라보았다. 표지훈은 지금 내 말은 들리지 않는 듯 열심히 뭔가를 바라보고 있다. 여전히 녀석으로부턴 대답이 없다.
뭔가를 열심히 바라보던 표지훈은 창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다란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엔 역시 구름 한 점 없이 텅 빈 하늘인데. 왜, 너한텐 저 너머에 뭐가 보이길래. 다시 한 번 입을 열어 묻기 전에, 녀석이 먼저 말했다.
“너.”
“창문에 말야. 창문에 비친 니 얼굴 보고 있잖아.”
어떡하지.
표지훈은 조금 이상한 놈이 아니라, 많이 이상한 놈인 것 같다.
수업시간이 끝남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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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써둔 분량은 이제 여기서 끝....^.^
앞으로 조금 느려져도 이해부탁드려요....☆★
또 열심히 써 오겠슴다(데헷)
항상 댓글 달아주시는 독자분들 사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