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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김태형]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23 | 인스티즈 

 

 

 

 

 

 

상처를 치료해줄 사람 어디 없나 23

 

 

 

 

 

 

 

 

 

 

 

그날은 여자친구와 싸운 것도 모자라 자꾸 그 여자가 떠올라 술을 마구 퍼마셨다. 늘과 같이 다른 남자와 있던 것에 대해 화를 내는 내게 함께 화를 내며 시작된 싸움이었다. 그때까지는 별거 없었다. 한두번도 아니고, 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거나 여자친구가 먼저 굽히고 들어오면 언제든 다시 풀어질 그런 자잘한 싸움 중 하나였다. 그런데 그날은 금방 힘이 풀려 씩씩대는 여자친구를 두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데려다주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 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엔 잔뜩 취하고 싶어 결국 근처 포장마차로 발길을 돌렸다. 

한 잔 두 잔 걸칠수록 흐려지기는커녕 더욱 짙어지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여자친구에게 화를 낼 자격이나 있나. 나도 여자친구와 있으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다른 여자를 생각하지 않았는가. 하필 술을 퍼마시며 앉아있는 이곳마저도 그 여자와 마주했던 곳이었다. 참 웃긴 게 그때와 지금의 내 감정이 다르다는 것. 자꾸만 놓쳐버린 그 여자가 생각이 나서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신경이 쓰였다. 그날 그 남자랑 결국 만났을까. 지금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을까. 혹시 지금도 하하호호 웃어대며 데이트를 하고 있을까. 별생각을 다하며 정작 중요한 여자친구와의 싸움에 대해서는 밀어버리고 그 여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놓친 게 분명한데, 그 여자는 내가 잡을 수 없는 여자인 게 분명한데. 자꾸만 생각나는 게 짜증이 났다. 왜 내 머릿속인데 내가 통제를 못 하냐고. 퍽퍽- 때려댔다. 

그만 마시고 집으로 가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성화에 겨우 술잔을 내려놓고 포장마차를 빠져나왔다. 휘청휘청 힘을 내지 못 하는 다리를 어렵게 옮겨가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자취방이 있는 건물이 보이자마자 시선을 돌렸던 곳은 우리 집이 아닌 나란히 옆에 위치한 그 여자의 집이었다. 불이 꺼져있네. 아직도 안 들어왔어.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직도 안 들어와. 시계를 한번 보았다가, 그 집을 다시 한번 보았다가. 

결국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 기대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다, 이런 건 없었지만 오랜만에 보고 싶었다. 그동안 못 봤다고. 어디 숨어있는지, 그동안 보질 못 해서 보고 싶어 죽겠다고. 아니, 물어볼 것이 많았다. 술기운을 빌려 자존심이고 쪽팔림이고 다 무시하며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래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그녀를 기다리며 문에 기대서서 억지로 다리에 힘을 주고 있었다. 잠이 들랑 말랑 자꾸만 눈이 감기려 하는데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다. 그녀가 왔다. 

 

 


"그날. 어떻게 했냐고." 

 

 


가지 말라고, 안 가면 안 되냐고 너를 붙잡았던 그날. 결국 너는 어떻게 했는지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내내 신경이 쓰였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녀는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날과 같이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 난 너 때문에 술까지 이렇게 마시면서 언제 올지도 모르는 너를 기다렸는데 말이야. 대답이라도 해주지. 내 손은 그렇게 쳐냈으면서 다른 남자나 만나러 다니고. 잔뜩 괘씸하고 미워져서 마구 던져댔다. 그러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쿵- 하고 엉덩이를 박아버렸다. 술을 먹어서 그런지 아픈지도 몰랐다. 나중에 보니까 엉덩이에 멍이 있던데. 술은 그렇게 마시는 게 아닌가 보다. 

괜히 울컥했다. 밥 하나 먹어주는 게 뭐 그렇게 힘든 건데. 그냥 마주 앉아서 몇 번 숟가락만 들어주면 되는 것을. 내가 손을 잡아달라고 했어, 뽀뽀를 해달라고 했어. 그냥 같이 밥이나 먹어달라고. 나한테 같이 밥 먹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 건지 니가 알기나 해, 이 나쁜 여자야. 

더 투정을 부려야 하는데, 꺼낸 김에 서운한 것을 다 털어놓아야 하는데 자꾸만 눈이 감겼다. 이대로 자면 안 되는데. 깜빡깜빡. 그 사이 잠이 들었나 더 자고 싶었는데 누가 자꾸 내 몸을 흔들어 대길래 정신이 조금씩 깬 것 같다. 게다가 아파. 송곳으로 찌르는 듯했다. 대체 뭘로 날 찌르는 거야. 몸이 흔들거리는 건 참을 수 있었지만 쿡쿡 아프게 날 찌르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 눈을 번쩍 떴다. 뭐야, 나 몇 시간은 잔 것 같은데 아직도 여기네. 그 여자도 그대로다. 그리고 날 찌르던 '그것'은 그녀의 손가락이었어. 이젠 날 만지기도 더러운 거야? 

어디 더러운 것 좀 더 만져보라지. 오기가 생겨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나도 참 못됐지. 그녀가 미운 행동을 보일 때면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손을 가져왔다. 그럼 어떡해, 나는 잡고 싶은데. 그런 핑계로라도 잡고 싶었다. 그녀의 손은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아니, 뜨겁다고 해야 하나. 빨갛게 달아오르는 그녀의 얼굴은 굳이 온도를 재지 않아도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겁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잡고 있는 손 또한 그러했으니까. 만약 계속 잡고 있다가 정말 화상을 입는다고 해도 난 괜찮았다. 이렇게 달다면 화상 같은 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나는 그냥. 사람 손길이 닿는 걸 싫어해요." 

 

 


그렇게 다정하게 말해주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긴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눠본 적이 없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그 말이 내겐 꼭 그렇게 들렸다. 널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날 놓친 게 아니라고. 다시 잡아달라고. 절대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데, 전혀 그런 뜻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았는데. 그렇게 착각하고 싶었다. 달콤하게 들어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더 잡고 싶었는데. 그녀는 제 손을 빼내더니 들어가라며 다시금 달콤한 말을 건네주고 집으로 홀랑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들어가 버린 문을 몇 분 보았다가, 그녀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손을 몇 분 보았다가. 미친 사람처럼 실실거리며 그 자리에 몇 분이고 앉아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냐고. 그저 손 한번 잡은 게 뭐가 그렇게 좋아. 전과 같이 나보다 먼저 손을 치워버렸지만 마지막까지 흘리는 그녀의 목소리엔 차가움이란 전혀 남아있지가 않아서 난 괜찮았다. 더 잡고 싶어 아쉬울 뿐이었지 기분이 나쁘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다. 날 보며 붉게 물들였던 볼을 내 마음대로 착각해도 되겠지. 나와 맞잡은 손으로 느껴지는 떨림이 나 때문이라고 착각해도 되겠지.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기분이 시궁창이었는데, 곧이라도 날아갈 듯 좋아졌다. 어떻게는, 너 때문에. 

 

 

난 니가 좋아진 걸까. 

 

 

 

 

 

 

 

 

 

옘병. 아침에 눈을 뜨고 이불을 죄다 물어뜯었다. 대체 뭔 병신 같은 짓을 한 거지. 그렇게 술을 마셨으면 기억 어디 한쪽은 날아갈 법도 한데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죄다 기억이 났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안 났으면 뻔뻔하게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 앞에 나타났을 텐데. 하긴, 내가 어젯밤 더한 짓을 했더라도 그럴 생각이긴 했다. 내가 뭐 억지로 키스를 한 것도 아니고, 그 여자 앞에서 옷을 홀딱 벗은 것도 아니고. 그냥 난, 그 여자의 손을 몇 번 조물딱거렸을 뿐이었다. 그게 뭐. 으아, 아냐 병신 같아. 애새끼처럼 징징거리질 않나. 머리를 쥐어뜯었다. 앞으론 술을 먹지 말아야지. 그래 먹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대판 싸워놓고 어젯밤 여자친구에게 연락 한번 안 하고 잠수를 타서 그런지 아침이 되어서야 뒤늦은 문자와 전화를 했는데 받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말았지, 뭐. 저녁쯤에 여자친구의 집에 찾아가 화해와 사랑의 그것을 한번 나누면 될 것이다. 그때까지는 혼자 고픈 배를 채워야 했다. 냉장고를 뒤져보아도 역시 나오는 것은 없었고 별다를 것 없이 편의점으로 향했다. 시간을 굳이 맞춘 것은 아니었다. 그냥 나는 배가 고팠고, 마침 그때가 그 여자의 퇴근시간이었을 뿐이었다. 봉다리에 달랑달랑 삼각김밥과 아이스크림, 소세지 몇 개를 사들고 편의점을 나섰고 익숙한 뒷모습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얼른 이름을 불렀다. 어젯밤 내가 뭔 짓을 했는지는 조금 늦게서야 기억이 났다. 

막상 불러 세우긴 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괜히 내 입으로 또 한 번 꺼내기도 쪽팔리고. 그냥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겨버리는 것이 나한테도 그 여자한테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렇게 제 손을 만져댔는데 그녀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개를 사길 잘했지. 나름 어제의 일은 잊어달라는 의미로 내민 것도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는 것이니, 어제의 병신 같은 내 모습은 깔끔하게 잊어달라고. 

 

 


"그래서 결국 만났어요?" 

 

 


그렇게 잔뜩 취한 채 여자 앞에서 꼬장을 부렸음에도 내 궁금증은 풀지 못 했다. 그래서 결국 만났는지, 아직도 좋은 만남을 유지하고 있는지. 가장 궁금한 것이 그거였는데 아직도 대답을 듣지 못 했다. 어젯밤 똑같이 물었을 때, 침묵의 의미를 긍정이라고 생각해서 더한 꼬장을 부린 것 같다. 그러니까 이젠 확실히 말해줘. 나 아직도 애가 조금 타거든. 결국 그녀의 입에선 부정의 단어가 나왔고, 순간 환호라도 지를 뻔했다. 아니었어. 만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어제의 상황이 더욱 민망해지기는 하지만 내겐 이미 어젯밤의 꼬장에 대해서는 잊어버린지 오래였고 아니라는 그 여자의 말만 뱅뱅 맴돌았다. 설마 내가 가지 말라고 해서, 그래서 가지 않은 건가. 왜 안 갔지. 그럼 아예 만나지 않은 건가. 앞으로도 안 만나겠지. 꼬리를 물고 여러 개의 질문들이 이어졌다. 나 지금 엄청 기쁜 거 알아? 원래도 맛있는 딸기 아이스크림이었지만 왠지 더 달게만 느껴져서 입속으로 쏙쏙 들어갔다. 그녀와 같은 것을 먹고 있다는 사실도 괜히 좋았다. 갑자기 일이 생겨서 그랬다는데 이유가 어찌 되었든 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유가 뭐든 뭐가 중요해. 결국 만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쓰윽-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이다. 

냠냠 즐겁게 아이스크림을 빨고 있는데 갑자기 멈춰 선 그녀 때문에 나도 같이 멈춰 내려다보았더니 정신을 놓고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지,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데 제 턱에 아이스크림이 흐르는데도 모르고 있더라. 사람 손길을 싫어한다고 말해주었음에도 나도 모르게 손이 먼저 나갔다. 게다가 그걸 깔끔하게 내 입에 넣기까지 했으니 그녀는 꽤나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그저 웃으면서 슬쩍 넘기려고 했더니 그녀는 씩씩거리며 제 얼굴을 마구 흔들었다. 

괜찮냐 물어보는 내 말에도 대답을 안 한 채 결국 그녀는 나를 두고 멀리 내달렸다. 아, 조금만 생각하고 움직일걸. 가뜩이나 어젯밤 일로 기분이 나빴을 텐데 아이스크림을 양보한 것도 소용없게 또 그녀의 기분을 망쳐버린 것이다. 난 분명 스킨십을 무척이나 좋아하지만 그녀는 싫어한다고 했다. 내가 참았어야 했는데. 내가 조금 잘못했다. 앞으론 자제해야지. 그녀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다. 예쁨받고 싶은데. 그래서 조금 힘들다. 다른 여자들이었으면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 미소를 지어주며 부끄러워했을 텐데. 그녀는 다르다. 그래서 조금 힘들지만 내가 노력하면 되겠지. 

그녀를 놓쳤다고 생각했다. 이 여자는 내가 잡을 수 없는 여자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며칠을 조금 아팠다. 하지만 어젯밤 일은, 내게 용기를 준 것이다. 내가 싫었으면, 내게 잡히고 싶지 않았으면 그냥 날 두고 집안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내가 그 찬 바닥에서 곯아떨어져 입이 돌아가건 너무한다며 꼬장을 부리건 날 무시하고 집으로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녀는 내 옆에 있어주었다. 잠이 들어버린 날 깨워주고, 잠시 동안이었지만 내게 잡혀주었다. 그럼 괜찮은 거지. 조금은 욕심내도 되는 거지. 

방금 또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지만, 다음부터 내가 노력하고 자제한다면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나를 예뻐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니가 좋아진 것 같으니까, 조금 많이 좋아진 것 같으니까. 

 

 

 

 

 

 

 

 

 

비가 주륵주륵. 아침부터 온 땅을 촉촉하게 적셨다. 이런 날은 얌전히 집에서 내리는 비를 감상해야 하는데, 여자친구와의 약속이 잡혀있었다. 다른 날은 괜찮았다. 해가 쨍쨍한 날이든, 눈이 오는 날이든. 하지만 비가 오는 날엔 나 혼자 내리는 비에 집중하는 것이 좋았다. 그 사이에 뛰어들어 몸이 젖는 것도 상관하지 않고 내달리는 것을 가장 좋아하지만 그런다면 정신병자라고 하얀 집에 잡혀갈 테니, 그럴 수는 없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비 오는 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물론 난 혼자 있는 것을 죽도록 싫어하지만 비 오는 날이면, 그러고 싶었다. 아마 그날 때문일 것이다. 짐 하나 달랑 들고 큰아버지 집을 나왔던 그날. 그날도 비가 왔다. 우산도 들지 않은 채 갈 곳도 없으면서 그저 거리를 걸었다.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면서. 그때 기분이란, 시원했다. 차라리 이 세상에 나 혼자였으면, 아무도 없이 나 혼자였으면. 내게 윽박을 지르는 큰어머니도, 날 제 장난감처럼 여기던 석호도, 잡아주길 바랬지만 여전히 말이 없으셨던 큰아버지도 안 계시는 나 혼자만의 세계로 가고 싶었다. 내리는 비와 함께 땅으로 스며들어 사라지고 싶었다. 애초에 아무도 없었다면, 몰랐다면 그립지도 않겠지. 그러고 싶었다. 

이미 약속은 잡혀있었고, 갑자기 취소할 이유도 없었으니 일단 여자친구와 만나기는 했다. 하지만 함께 거리를 걷는 내내 평소와 다른 내가 느껴졌는지 여자친구는 무슨 일 있냐고 물어왔고 이때다 싶어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그곳에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혼자 느끼며 손바닥으로 빗방울을 받아냈다. 역시 이런 날은 혼자가 좋아. 자취방이 있는 건물이 보이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어찌 되었든, 저곳으로 들어가면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나만의 공간이 되리라. 

꼭 보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우리 집을 올려다보다 옆집마저 눈에 들어왔다. 닫는 것을 잊고 나갔는지 비가 죄다 들이닥치는데도 창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저러면 집안이 물바다가 될 텐데. 집에 돌어와 물바다가 된 것을 발견했을 때 그녀가 지을 놀란 얼굴이 떠올라 슬쩍 웃음이 터졌다. 그대로 발걸음은 우리 집이 아닌 옆집으로 향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초인종을 눌렀다. 아직 자고 있거나, 다른 곳에 집중을 하느라 모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집에 있길 바랬다. 분명 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일찍 집으로 온 것인데 말이야. 보고 싶었다. 알려줘서 고맙다며 웃는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래서 초인종을 눌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역시나 반가웠다. 날 보며 살짝 벌어진 입이 너무 예뻤다. 평소 답지 않게 수수한 그녀의 얼굴 너무 예뻤다. 빗소리와 함께 어울리는 그녀의 목소리가 너무 예뻤다. 

비 오는 날이 좋다고 했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도 그렇다고 말해주었다. 어쨌든 나도 비를 보고 있는 걸 좋아하니까. 비슷한 거 아닌가. 어딘지 모르게 그녀는 나와 많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설탕 뿌린 수박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비 오는 날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항상 예쁜 그녀의 얼굴에 무엇인지 모르게 얹혀있는 어둠이 나와 닮았다. 겉으로만 실실 웃어대며 애써 숨기는 내 속처럼, 잘 웃지 않는 그녀의 속도 까맣게 칠해져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멋대로 판단할 권리는 없지만. 그녀는 부족한 것, 아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낀 바로는 그랬다. 나와 많이 닮았다고. 

꼭 함께 걷고 싶었다. 너와 함께라면 혼자가 아니라도 너무 좋을 것 같았다. 너라면. 비 오는 날 나와 함께 있을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왜 굳이 우산을 들고 오냐고. 저럴 때 보면 그녀의 겉을 싸고 있는 철벽을 죄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같이 우산 좀 써주면 어디가 덧나냐. 그래도 딱 잘라 거절할 줄 알았더니 흔쾌히 나와 걷는다 해준 것을 생각하며 참아 준 것이다.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으로 걸었다. 아무도 없고 우리 둘만 걸을 수 있는 곳이 있었으면 좋겠지만 그런 곳은 없으니 그래도 나름 고른 것이었다. 같이 좀 걷고 싶은데 그녀는 자꾸 몇 발자국 떨어져서 걸었다. 사람 손길이 닿는 걸 싫어한다고 했으면서 옆에 나란히 서는 것도 싫은 걸까. 앞으로 오라고 해도 거절하려나 싶었지만 그래도 난 옆에서 걷는 게 좋은 걸. 오늘 무슨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님 비가 와서 기분이 좋은 건가. 무시당한 줄 알았는데 앞으로 와달라는 내 말에 그녀는 슬쩍 옆으로 와주었다. 더 가까워진 그녀의 온기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그렇게 인심을 써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너무 좋아. 실은 어깨에 팔이라도 두르려 했지만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에 얼마나 눌렀는지 모른다. 게다가 둘 사이를 더욱 떨어뜨려놓는 각자의 우산 때문에. 

다시 몇 분을 그렇게 나란히 걸었다. 서로 오가는 말이 없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냥 좋았다. 그녀도 지금 나와 같은 기분이길. 그렇게 생각하며 함께 조용히 걷고 있었다. 

 

 


"저... 김태형씨."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건네준 적이 있었던가. 순간 깜짝 놀라기는 했다. 날 불러주었다고. 투둑투둑 떨어지는 빗소리와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예뻐서 날 편안하게 만들었다. 내게 뭔가 할 말이, 물어볼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그녀는 망설였다. 뭐든 상관없었다. 뭐든 얼마든지 대답해줄 수 있으니까 물어보라고. 어쩌면 좋은 쪽으로 기대를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날 먼저 불러주었다는 것에 마냥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더 안심을 했는데. 

여자친구가 있냐고. 그렇게 물어왔다. 뭐든 대답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뭐든 다정하게 답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만은. 입이 딱딱하게 굳어서 대답해줄 수가 없었다. 전부터 자꾸 걸리고 미안했다. 내 여자친구한테나 이 여자한테나. 마음을 한 곳에 두지 못 하고 있었다. 내 여자친구를 좋아하는 것인지, 아님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인지. 난 분명 여자친구를 좋아한다. 여자친구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눌 때는 세상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함께 있을 때도, 나를 보며 웃어줄 때도 너무 좋았다. 하지만, 그녀도 좋다. 아직 이 여자는 나와 온기를 섞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좋았다. 게다가 그녀와는 그러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뭔가 아껴주고 싶고 지켜주고 싶고. 그런 그녀는 확실히 여자친구와 다른 느낌이었다. 뭐라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그런 감정. 이 여자를 볼 때면 너무 좋았지만 또 한쪽은 아팠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한 번도 다른 여자에게서 느껴본 적이 없는. 그래서 더욱 헷갈리는 것이다. 내가 이 여자를 정말 좋아하는 것이 맞는지. 

그래서 그녀의 마음도 쉽게 결론지을 수 없었다. 내게 여자친구의 유무에 대해 물어본 것도, 있다는 나의 말에 금세 울적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도. 날 좋아해서라고 쉽게 판단해버릴 수가 없었다. 나도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까.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점점 더 아리송해질수록 그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확신도 떨어지고 있었다. 

비 오는 날을 왜 좋아하냐고 물었다. 정말 뜬금없지. 그저 상황을 외면하고 싶었다. 나도 너무 혼란스러워서 내리는 비에 관심을 돌려보면 좀 가라앉지 않을까. 그래서 던진 말이었다. 별 특별하지 않은 대답이었다. 그런 내게 또한 이유를 물어보았고 순간 내가 한 행동은 백 번을 생각해도 잘못한 행동이었다. 자제하자고 노력하자고 했으면서 나는 또 몸이 먼저 나가버리는 것이다. 그에 그녀는 화가 난 듯했고 비를 맞아 축축하게 젖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우산을 씌워주려 해도 자꾸만 내게서 멀어졌다. 결국 그녀는 내가 아닌 빗속으로 향했고 잠시 정신이 멍했지만 그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금방 들었다.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내가 잘못했다고 나 좀 봐달라고. 그래도 그녀는 나를 봐주지 않았다. 그때처럼. 너를 놓쳐버렸다고 느꼈을 때처럼. 이미 늦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처럼. 내게서 멀어지는 그녀를 붙잡으러 금방 정신을 차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시 놓치게 될까 봐, 잡지 못 하게 될까 봐. 하지만 자신에게 관심이 있냐고, 좋아하냐고 그렇게 물어왔음에도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좀 봐달라는 내 부탁을 마지막으로 들어주려는 것인지 처음으로 나와 똑바로 눈을 맞춰주며 그녀는 나를 더욱 아프게 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그게 아니면 앞에 나타나지도 말고, 밥 먹자고 하지도 말고, 아는 척도 하지 말라는데. 꽤나 진심으로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마음이 더 아팠다. 내가 자꾸 말을 안 들어서 싫어진 걸까, 미워진 걸까. 다신 날 보기 싫은 걸까. 그녀를 좋아하는지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난 계속 니 앞에 나타날 거고, 계속 밥 먹자고 조를 거고, 끈질기게 아는 척할 거야.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나 미워하지 마. 내가 잘 할게. 노력할게. 

비 오는 날을 왜 좋아하느냐, 내게 물었을 때. 약간은 확인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행동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그녀와 서로의 숨결이 섞이고 있을 때. 난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싶었고 끌어안고 싶었다. 그럼 난. 

 

 

너를 좋아하는 걸까. 

 

 

 

 

 

 

 

 

 

결국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말았다. 분명 내가 이상해진 게 맞다. 더는 여자친구와의 잠자리에도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를 채워준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분명 사랑을 나누고 있는데, 사랑을 받고 있는데. 꼭 잠자리뿐만이 아니래도, 여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면 분명 내 여자친구가 맞는데 눈을 비벼대도 자꾸만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런 내게 여자친구는 변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내가, 내가 변했다니. 아니라며 여자친구를 더욱 품에 안아주었다. 그리고 요 며칠은 그런 레파토리가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었다. 

그날 역시 하루 종일 여자친구와 함께 있었다. 같이 저녁을 먹고 영화도 보고. 끝은 항상 그 아이의 자취방이었다. 평소와 같다고,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나 자신을 다스려봐도 자꾸만 어긋났다. 분명 사랑을 하고 있는데 아닌 것 같았다. 날 보며 사랑을 넘치게 주고 있는 여자친구가 더 이상 예뻐 보이지도 사랑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난 그녀가 보고 싶다고. 처음이었다. 내가 먼저 멈춰버린 것. 그런 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여자친구는 한참을 말이 없다가 결국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주었다. 미안한 마음에 차마 꺼내지 못 하고 있던 말이었다. 자신이 힘들었던 건지, 아님 날 알아주었던 건지. 더욱 미안한 짓인 것을 알지만 금방 고개를 끄덕이며 쉽게 그녀를 놓아주었다. 전에 생각했다. 만약 내게 헤어지자고 하면 그녀도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버리자고.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단지 자꾸 떠오르는 그 여자가. 

머릿속이 복잡했다. 만약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이 맞고 운 좋게 그녀 또한 나를 좋아해 준다고 해도 그녀는 내게 사랑을 줄 수 없을 것이다. 잠깐 그녀의 손을 잡았을 뿐인데도 기겁을 하며 쳐냈던 것이 벌써 몇 번인데. 그런 그녀는 내게 사랑을 줄 수도 없을뿐더러 좋아해 줄 수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운 좋게, 라는 것은 없다. 그녀는 날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힘든 쪽을 선택할 필요는 없지 않나. 물론 자꾸만 떠오르는 그녀의 생각들로 여자친구와 헤어졌지만 그녀를 잊기 위해 또 다른 여자를 찾겠다고, 나를 사랑해줄 여자를 찾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어려운지 몰랐다. 그녀를 지워보려 해도 자꾸만 떠올랐고, 자꾸만 보고 싶었다. 그저 보고 싶기만, 눈에 담고만 싶었다. 그런 나 역시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닐 텐데. 그럼에도 왜 자꾸 나타나서 날 괴롭히는지. 꼭 무슨 병이라도 걸린 줄 알았다. 이건 내가 아닌데. 하루에 몇 번이고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놔서 머리를 쿵쿵 쥐어박는 것도 일이 되었다. 다른 여자들은 물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어떤 여자를 보아도 사랑해주고 싶지 않았고 예뻐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나는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심장이 답답하고 먹먹해서 곧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기분에 정면승부라도 해보자, 그녀를 기다렸다. 늘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길에 오르던 그녀를 생각하며 몇 분 더 앞서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30분, 길이 막히는 건가. 1시간, 버스가 오다 펑크라도 난 건가. 2시간, 더 이상 떠오르는 이유도 없었고 슬슬 애가 타기 시작했다. 3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머리카락조차 보여주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연락할 길이 없었고 어디든 당장 달려나가고 싶어도 어디 있는지도 모를 그녀를 찾다가 혹시 길이라도 엇갈릴까 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렇게 다시 몇 분을 굳은 망부석처럼 자리에 다리를 꽂고 그녀를 기다렸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는 거지. 엇갈려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엇갈리는 게 낫다고. 슬슬 걱정의 꽃이 피어오르니 다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오다가 사고를 당했나, 나쁜 사람이라도 만났나. 그녀를 찾아 나서기로 했고, 그녀의 회사가 있는 근처까지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어디 빠진 곳이 있나 꼼꼼히 눈을 돌려가면서. 하지만 그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점점 더 밀려드는 걱정에 이제쯤 집으로 돌아왔겠지 속으로 백 번을 빌었다. 내가 이 먼 곳까지 그녀를 찾아 헤매다 길이 엇갈렸어도 상관이 없으니 집에 얌전히, 안전하게 도착해 있길. 그렇게 바라며 집으로 다시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도 그녀를 찾는 내 레이더는 항시 켜두고 있었다. 그래도 보이지 않았고 괜한 손톱을 괴롭히며 한숨만 쉬어대고 있었다. 자취방에 다다를 쯤, 처음 보는 낯선 형체가 현관에 버티고 있는 것이 보였고 고개를 쭈욱 들고선, 설마 아니겠지 했지만 기분이 나쁘게도 그녀의 집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야, 그 밑이나 위에 있는 집이겠지 생각을 하며 점점 가까워졌고 내 바램은 결국 날카로운 칼날에 잘리고 말았다.  

그녀의 집에 불이 환하게 켜짐과 동시에 그 남자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내게 등이 아닌 제 얼굴을 보여주었다. 처음 보는 놈이다. 실은 그때도 약간 터지려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닐 거라고. 일단 안전히 돌아온 것 같은 그녀가 더 중요하다고. 그 남자가 날 지나쳐 멀어지는 것을 그대로 놔두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곧장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아, 박지민씨?" 

 

 


펑. 다시 한번 날카로운 것에 잘린 내 바램과 동시에 억지로 누르고 있던 내 속의 어떤 것도 찢겨버린 그 틈으로 마구 텨져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널 걱정하며 온 동네를 다 뒤지고 다녔을 동안 저 새끼와 함께 있었던 건가 속 깊은 곳이 끓어올랐다. 내겐 결국 만나지 않았다고 했으면서 그건 거짓말이고 실은 만난 건가, 부터 시작해 아님 그 남자는 벌써 지나갔으니 다른 남자를 소개받은 건가, 저 남자를 좋아하는 건가, 어디까지 나갔지, 갈 때까지 갔나, 까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럴수록 부글부글 끓고 있는 화는 아무리 누르려 해도 낮아질 줄 모르고 자꾸만 기어올라왔다. 

스멀스멀 아까부터 들어오던 냄새에 다시금 아닐 거라 생각하며 그녀에게 더욱 다가갔고 안타깝게도 술 냄새가 맞았다. 더 화가 나는 거지. 순종적인 개새끼처럼 자리를 지키고 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것도 모르고 이 여자는 처음 보는 그 남자 새끼와 히히덕거리며 술잔을 기울였을 거란 생각에 피가 거꾸로 쏫았다. 꽉 쥐고 있는 주먹은 어찌나 세게 누르고 있는 것인지 바들바들 떨리기도 했다. 꽤나 내 속을 많이 누르고 있던 것이다. 화가 나는 마당에 무슨 짓이라도 나가지 않게 꾹꾹. 미움받고 싶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그녀가 더욱 미웠지만. 전엔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난 후의 일을 벌써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난 항상 지금 이 순간이 중요했고 후에 어떻게 되건 그때 가서 어떻게든 되겠지, 항상 그랬다. 하지만 그녀는 조금 다르니까. 다른 여자들과 다르니까. 다시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잡고 싶으니까. 꾹꾹, 억지로 밟고 있었다고. 

 

 


"지금 엄청 주제넘는 거 알아요? 내가 왜 그쪽한테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하는데." 

 

 


그럼 그 새끼는 괜찮다는 거야 뭐야. 더욱 화가 치밀었다. 애써 누르고 있다는 걸 그녀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녀는 내 화를 누를 어떤 말도 행동도 해주지 않은 채 날 더 부축이기만 했다. 분명 그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다. 내가 주제넘는 행동을 하는 거라고, 내게 왜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하냐고.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난 널 좋아하지 않고, 넌 날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런 사실에도 화가 났다. 그러게 왜 난 널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렇게 화가 나는 건지 나도 잘 모르겠으니까. 

그와 모순되게 또 한가지 자꾸만 내 신경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확실히 모순이지만. 넌 나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그건 다른 남자에게도 해당되어야 했다. 나만, 나한테만 그러면 안 된다고. 왜인지 모를 배신감도 들었다. 애초에 이곳까지 끌고 오면 안 됐잖아. 나한테 늘 그랬던 것처럼 안 된다고 싫다고 그랬어야 했잖아. 그 새끼는 뭔데, 나랑 뭐가 다른데. 왜 그 새끼는 되고 난 안 되는 건데. 

자꾸만 덮쳐오는 더럽고 짜증 나는 장면에 딱 1프로를 남기고 화가 올라왔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완벽하게 채워줄 그녀 입에서 나온 자격이란 소리에 꼭지가 돌아버리는 것이다. 내게 자격이 없다고. 그럼 그 새끼는 자격이 있다는 거야? 어디까지, 어디까지 자격이 있는 건데. 어떻게 하면 생기는 건데. 제정신이 아니었지. 그녀가 제 몸을 방어할 시간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그녀를 삼켜버렸다. 뒤늦게야 나를 밀쳐내며 발악을 해대는 그녀의 행동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더 깊이. 술 냄새와 함께 들어오는 희미한 그녀의 살 냄새 같은 것은 날 더 미치게 만들었다. 마치 늪이라던가. 빠져나오려 할수록 오히려 더 깊게 빨려 들어가는 것. 정신을 차리려 할수록 더 아찔해졌고 빠져나오려 할수록 더 깊어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이럴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난 그녀를 눈에 담고 싶고, 보고 싶었을 뿐이었지 키스를 하고 싶다거나 함께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어쩌다 한번, 나도 모르게 그녀의 입술을 보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를 때도 금방 지워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난 그녀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단지 신기하고 신경이 쓰여서 그러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한번 스타트를 끊어버린 나는 통 자제를 할 수가 없었다. 단단하게 더 막아버리는 그녀의 입속을 더욱 탐하고 싶었다. 더 깊어지고 싶었다. 아무도 못 보게 삼켜버리고 싶었다. 빠져나가지 못 하게 널 내 안에 가두고 싶었다. 


숨을 잠시 모으기 위해 질척하게 닿아있던 입술이 살짝 떨어졌고 그제야 그녀의 뺨에 흐르는 투명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아차 싶었다. 내가 지금 뭘 한 거지, 무슨 짓을 한 거지. 사람 손길을 싫어한다는 그녀의 다정했던 말과 날 몇 번 쳐냈던 장면들이 문득 스쳤고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를 모두 내 품에 담자, 자제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나를 끊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 품에서 떨어지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쓰러지듯 자리에 주져앉았고, 똑똑 천천히 흘리던 눈물을 잠시 멈추었다 이내 미친 사람처럼 울어대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리 그녀의 이름을 불러도 그녀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나와 입을 맞춘 게 그렇게 더럽고 지옥 같았냐고. 순간 화를 낼 수도 있었지만 그러자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의 반응이 너무 과했으니까. 몸을 벌벌 떨며 제 머리를 꽉 쥐었다. 귀신들린 사람처럼 중얼중얼 거리기도 했고 내가 건들지도 않았는데 발버둥을 치기도 했다. 잔뜩 웅크리며 몸을 떨고 있는 그녀는 나 좀 안아달라고, 잡아달라고 열심히도 소리를 치고 있었지만 그건 오직 내가 그러고 싶어 만들어낸 말일뿐이라고. 그녀가 절대 나에게 그런 것을 바랄 리가 없었다. 오히려 꺼졌으면, 사라졌으면 하고 있겠지. 그래서 안아줄 수가 없었다. 달래줄 수가 없었다. 내가 저렇게 만든 걸까. 그녀가 저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것이 나 때문인 걸까. 실은 맞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되뇌었다. 아니길 바라면서. 내가 너무 싫어서, 나란 새끼가 너무 병신 같아서 다시금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내가 정말 괴물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면 정말 기분이 더러웠는데, 어느샌가 그 말에 동의를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또한 난 괴물이라고. 괴물 같은 짓을 했다고. 그녀가 눈물을 멈추고 아직도 남아있는 나를 보았을 때, 날 향해 건네줄 그 표정이 두려웠다. 정말 괴물이라도 되는 듯, 다른 여자들처럼 쳐다볼 그 표정을 감당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를 위해, 그녀를 위해 잔뜩 걱정이 되는 마음을 남겨둔 채 그 집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나 같은 새낀, 널 좋아할 자격이 없어. 

 

 

 

 

 

 

 

 

 

나 같은 병신 새끼는 나가 뒤져야 한다며 벽에 머리를 대고 콩콩 찧었다. 어쩌고 있는지, 이제 눈물은 다 그쳤는지, 너무 울어서 탈수증으로 쓰러지지는 않았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와 우리 집 사이의 벽에 고개를 대고 되지도 않는 투시력을 발휘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도 안 보이는 건 안 보이는 거야. 배고픈 강아지 새끼마냥 벽을 긁어대도 애타는 속을 가라앉힐 수 없었다. 미안해, 미안해. 몇 번이고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도 넌 들리지 않겠지. 

그 짓을 몇 시까지 하다 잠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일어나보니 여전히 벽과 마주하고 있던데 그대로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꽤 늦은 시간이었고 바깥이 환해지는 것도 본 것 같다. 그러니 눈을 뜬 시간은 오후 2시. 결국 그녀가 멀쩡히 출근을 하는 모습도 보질 못 했다. 어젯밤 그렇게 어떻게 되었는지 내내 궁금해하며 편히 잠도 자질 못 했으면서 결국은 엉뚱하게 놓쳐버린 것이다. 너 왜 자꾸 병신 같은 짓을 하는데. 요즘 들어 참 내가 미웠다. 

나갔겠지, 안 나갔으려나 그녀의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차마 누르지 못 하고 발만 동동 구르다 다시 집에 들어오는 것을 한 5번 정도는 한 것 같다. 집에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 그녀가 퇴근을 하고 집에 올 때까지는 내내 불안하고 초조해하며 시계바늘을 억지로 돌리고 있어야 했다. 참 거지 같은 게, 그렇게 불안하고 슬프고 초조한데도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참 재수 없어. 짜증 나고. 아침도 점심도 먹질 않았으니 배가 고플 만도 했지만 그럼에도 꼬르륵 요란한 소리를 내는 내 뱃속이 얄미웠다. 주인이 지금 마음이 아파죽겠다는데 상황 파악 못 하고 배가 고프냐고 지금. 

역시나 집안엔 먹을 것이 있을 리가 없었고 요즘 들어 자주 가는 듯한 편의점으로 출근도장을 찍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알바생이랑 안면 트일 것 같아. 혼자 밥을 먹는 것도 꽤나 익숙해지는 것 같았다. 진짜 웃겨. 그래도 편의점 음식을 먹다 보면 삼분 만에 모든 식사를 끝낼 수 있었고, 따지고 보면 그건 식사도 아닌 그저 배를 채우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나름 괜찮다고. 현관에 나와있는 슬리퍼를 신었는데 어찌나 오래 신었는지 벌써 다 달아 밑창이 너덜너덜하더라. 내가 또 한 패션 하는 이 구역 대표 패셔니스타인데 이딴 걸 신을 수는 없다, 그 와중에도 다른 걸 신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신발장을 열었고 그 옆 우산꽂이엔 내 우산이 아닌 낯선 우산 하나가 꽂혀있었다. 그녀의 것이었다. 비가 주륵주륵 내리던 그날, 자신이 놓친 우산을 다시 줍지도 않고 빗속으로 뛰어들었지. 그때 내 우산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대신 집어온 우산이었다. 그때, 그녀는 내 마음을 무척이나 아프게 했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나 지금도 너무 아픈데. 다시 심장이 욱신했다. 

그대로 그 우산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혹시 맑은 하늘에 갑자기 소나기라도 내릴지 어떻게 아냐고. 그래서 들고 나온 것이었다. 보고 싶었다. 사과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너무 염치가 없어서, 겁이 나고 무서워서. 쉽게 그녀와 마주할 수 없었다. 비라도 오면 우산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당당히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내 맘도 모르는 하늘은 너무나 파랬고 햇살은 빛났다.  

역시나 삼각김밥과 소세지 몇 개. 아이스크림도 사려고 했지만 그녀와의 일이 떠올라서 또 심장이 한번 욱신하는 바람에 놓고 나왔다. 덜렁덜렁 흔들며 집으로 향하려는데 웬 커다란 개가 보였다. 털이 복실복실한 게 꼭 쓰다듬어 달라고 내게 추파를 던지며 꼬리를 잔뜩 흔들고 있었다. 아, 남자인가. 어쨌든, 동물을 좋아하는 나로선 차마 지나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꼭 쓸어보고 싶다, 저 털. 

내가 아끼는 소세지도 양보해주고 이 이쁜이는 말도 못 할 텐데 속에 있는 말을 죄다 털어놓았다. 실은 이것저것 할 말이 더 많았다. 그 여자는 대체 뭘까, 내가 왜 이러는 걸까 부터 시작해서 어젯밤 있었던 일까지. 하지만 당장 급한 어젯밤 일에 대해서만 털어놓았다. 그게 지금 내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으니까. 한마디만 해주지. 이럴 때 보면 친구라도 하나 만들어둘걸 싶기도 했다. 내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털어놓아도 그랬구나 하며 작은 대답과 함께 고개를 끄덕여줄 친구. 그런 게 내겐 없네. 조금 서러웠다. 

다시 한번 밥 좀 달라며 뱃속에서 난리부르스를 추기 시작했고 슬슬 몸을 일으켰다. 마냥 이곳에 앉아 털을 쓰다듬어주고 싶지만 난 배가 고프다고. 개에게 고해성사를 하며 시간을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비가 내리지 않았다. 날씨 한번 더럽게 좋네. 빗방울 하나만 떨어뜨려주지. 그래도 들고 나와주었는데 제 역할은 하고 들어가야지 우산을 펴들었다. 그녀의 취향은 이런 거구나. 뽀얗게 깨끗한 그녀의 우산마저 그녀를 꼭 닮아있었다. 

그래도 속에 있는 말을 꺼내서 그런지 한층 가벼워진 마음에 봉다리를 달랑달랑 흔들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다 내가 준 소세지가 부족했는지, 아님 내가 더 쓸어주길 원했는지 내내 조용했던 개가 드디어 소리를 내며 날 불렀고 얼른 몸을 돌렸다. 

 

 


"우아." 

 

 


그녀였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그녀. 다시 한번 심장이 욱신했지만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아니, 기분이 좋았다. 이런 아픔이라면 얼마든지 느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내가 소세지 줬다고 보답해주는 거지? 인심 썼다. 이거 하나 더 먹어. 지금도 쌈바를 추고 있는 내 뱃속에 넣어줄 일용할 양식이지만 착한 짓을 했으니 소세지를 하나 더 양보해주고 털도 더 쓸어주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그 이쁜이를 몇 번 째려주었다가 머리를 조금 긁적였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여전히 내 눈을 피하고 있지만 날 향해 아직도 붉히고 있는 그 볼이 너무 좋았다. 어디로 도망가지 않고 내 앞에 얌전히 서있는 그녀가 너무 좋았다. 너무 보고 싶어서 그대로 몇 분간 아무 말도 안 하고 내 눈치를 보고 있는 그녀를 눈에 가득 담았다. 내가 싫어졌을 줄 알았다. 날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앞에 다시 서준 그녀는 평소와 같았다. 아니, 더 좋았다. 

나 때문에 잠도 자지 못 하고 밤새 울었구나, 마음이 아팠지만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 보여서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자꾸만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보고 싶었는데 굳이 핑계를 만들지 않아도 이렇게 금방 볼 수 있어. 아직 쓰지 않은 우산 찬스는 다음에 또 보고 싶을 때 쓰기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우리 밥 먹어요." 

 

 


우아. 또 한번 입이 벌어지다 이내 그 어느 때보다 쭉쭉 위로 찢어졌다. 같이 밥 먹자고 했어. 나한테 같이 밥 먹자고. 내가 항상 함께 먹자고 해도 거절하고 그랬는데. 처음으로 나와 함께 먹자고 했어. 눈을 한번 질끈 감고 내게 토하듯 뱉어대는 그녀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예뻐 보였다. 그 말 하나 하는 것이 참 쑥스럽고 떨려서. 그래서 그랬던 거라고. 잔뜩 빨개진 볼은 나 때문이라고. 

내가 그랬잖아. 나한테 함께 밥을 먹는 건 참 소중하고 중요한 거라고. 

 

 

근데 이제 너도,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날 밤은 잠을 이루지 못 했다. 너무 떨리고 설레서. 그 전날 늦게 자는 바람에 침대에 머리만 붙이면 바로 잠이 들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반짝반짝했다. 내가 이랬던 적이 있었던가. 누군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볼을 꼬집어보고 쿵쿵 쉬지 않고 심장에 펌프질했던 적이 있었던가. 뭔가 달라진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괜찮겠지. 일단 지금은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사실만 둥둥 떠다니며 마냥 좋았으니까. 뭐든 상관없었다. 내가 변하고 있든, 전과 다른 행동을 하고 있든. 

내겐 마치 기적처럼 날아온 기회를 막 써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리저리, 언제가 가장 좋을까 며칠을 고민했다. 하루, 이틀. 며칠이 더 지났다. 물론 내게 함께 밥을 먹자 권해준 그날 당장 어디든 가자며 발을 쿵쿵 구르고 싶었지만 꽉 참았다. 그녀는 그때 나 때문에 잠도 자질 못 한 것 같았고, 꽤 피곤해 보였으니까. 우리 둘의 컨디션이 최상일 때, 날씨마저 딱 좋을 때. 그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더는 참지 못 하고 그녀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목 끝까지 올라왔을 때, 약속을 잡았다. 그 작은 포스트잇에 글씨를 하나하나 눌러 적으면서 어찌나 실실거렸는지 모른다. 누가 보면 정신 나간 새끼라고 했을 것이다. 아직 퇴근하지 않은 그녀의 집 문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꾸욱 눌러 붙여두고 그걸 보며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어줄까 잔뜩 기대를 품은 채 얼른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른 자야 하는데 그래야 내일 제일 멋있어 보일 텐데, 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어디를 가지, 뭐 하지, 무슨 말을 하지. 밥만 먹고 헤어질 생각은 전혀 없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 뭐가 뭔지 구체적으로 떠오르진 않았지만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는데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고민을 하다 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나도 모르게 잠이 든 것 같다. 

늦게 잠이 들어 혹시 피곤하진 않을까, 얼굴이 늘어져있진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그래도 꽤 나쁘지 않았다. 하긴, 난 어떤 상태든 언제나 멋있긴 하다. 보통 나갈 준비를 하는 시간보다 조금 더 앞당겨 준비를 시작했다. 뭘 그렇게 긴장을 했는지 셔츠 단추를 잘못 끼우질 않나, 테이블 다리에 걸려 넘어지질 않나. 별쇼를 다했다. 일찍 일어나길 잘했지 거의 1시가 되어서야 준비를 다 끝마쳤고 거울을 통해 오늘 상태에 대해 마지막으로 점검을 해준 뒤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손을 올려 반갑게 인사하는 내게 그 귀여운 핑크빛 볼을 보여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뭐, 평소에도 예쁘긴 했지만 뭔가 더 사랑스러운 느낌. 좋았다. 다 좋았다. 부끄러운 것인지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의 치마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살짝 찡그리는 그녀도 좋았다. 왜 그런 날 있잖아. 느낌이 좋은 날. 내내 참고 기다리다 결국 잡은 날이 오늘인 것도 잘 한 것 같고, 뭔가 잘 풀릴 것 같고, 내내 기분이 좋을 것 같고. 

예쁘다는 나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었다. 귀까지 따뜻해 보이던데. 꽉 껴안아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아냐며 빈 공간 하나 남겨놓지 않고 뽀뽀 자국을 새기고 싶었다. 오늘 정말 예뻐, 너. 

 

 


함께 식당으로 걸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날, 미안했다고. 실은 꺼내기 두려웠다. 지금 너무 좋은데,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고 너와 나란히 걷는 게 너무 좋은데 괜한 말을 꺼내 그런 분위기를 검은색으로 물들여버릴까 봐. 그래도 한 번은 꺼내야 할 말이었다. 내가 그날은 정말 잘못했으니까. 처음 그녀가 내게 밥을 먹자고 했을 때, 혹시 그날 일 때문에 잔뜩 기분이 나빠 얼굴에 물이라도 뿌리려는 줄 알았다. 뭐, 자진납세하는 거지. 물을 맞지 않기 위해서. 농담이고. 물을 맞아도 싸니까 그건 상관이 없지만 꼭 사과를 하고 싶었다. 

이미 약속 장소를 잡아놓긴 했지만, 만약 그녀가 싫어하는 것이 있다면 바꾸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다른 말이 없었고 원래 가려고 했던 곳으로 그녀를 데려가다 그곳에 다다를 쯤, 조금 답답했다. 앞뒤로 서로 왔다 갔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손을 꽉 잡고 싶었다. 따뜻한 그녀의 손을 다시 한번 잡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는 걸 싫어하니까. 왜, 왜 싫어하는데. 그녀는 내가 예약해놓은 장소를 몰랐을 것이고 내 옆에서 발을 맞춰걸었다. 그런 그녀의 손을 잡고 내가 데려오고 싶었던 곳이 이곳이라며 붙잡고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도록 주먹만 쥐게 만들었다. 만지는 걸 싫어하니까. 

 

 


분위기가 좋았는데. 내게 끝내 오빠라고 해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나름 꽤 많은 대화가 오고 갔다고 생각했다. 전보다 조금 더 가까워진 것 같기도 했고. 작은 입으로 조물조물 음식을 씹고 있는 그녀도 너무 귀여웠고. 분명 그녀의 집 앞에서 마주했을 때, 느낌이 좋았는데. 다 잘 풀리고 내내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그저 내 바램이었나 보다. 그녀는 조심조심 내게 여자친구에 대해 물어보았다. 난 망설임 없이 헤어졌다고 대답했고, 왜냐 묻는 그녀에게 또한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너 때문이라고. 사실이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니 생각 때문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으니까. 더는 다른 여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 

내 말을 듣고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할까, 이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난 그냥 묻는 말에 사실대로 고했을 뿐. 그게 잘못이었을까.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또 한번 내게 자신을 좋아하냐 물어왔다. 이번 역시 대답을 하지 못 했다. 혼란스럽고 답답하고, 그때보다 더 했으면 더 했지 절대 덜하진 않았다. 난 아직도 내가 널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 내가 널 좋아해서 그러는 건지, 뭐 때문에 그러는 건지 잘 모르겠어. 

그러는 넌. 넌 날 좋아하냐고. 내게만 자꾸 묻지 말고. 너는 어떤데. 내게 자꾸 대답을 요구하는 그녀 또한 약간의 감정은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못 한 나와 달리 그녀의 입은 끝내 열리고 말았다. 차라리 나처럼 대답이라도 하지 말지. 아니라는 그녀의 말이 내 가슴을 더욱 후벼팠다.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참 쓰리고 아팠다. 혹시 난 널 좋아할지도 모르는데. 단지 확정을 못 하는 것뿐이니 가능성은 있는데. 그런 그녀는 조금의 가능성도 허락해주지 않았다. 

 

 


나온 김에, 시간이 생긴 김에 다른 더 좋은 것을 하며 함께 있고 싶었지만 우리 둘은 결국 정말로 '밥'만 먹고 집으로 향했다. 서로의 기분이 상한 듯했다. 일단 다른 하고 싶은 것이 있냐 묻긴 했지만 역시 그녀는 없다고 했고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지 않았다. 그럴만한 분위기가 아닌 것을 나도 알고 있었기에.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이리저리 그녀를 내 마음대로 끌고 다닐 수가 없었다. 

내가 만약 그녀를 좋아한다 대답해주었으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아니, 오히려 미쳤나며 기겁을 할지도 모르고. 적어도 오늘은 좋게 넘어가더라도 나중에 내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더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니 잘한 거겠지. 하지만 아까와 달리 칙칙한 분위기는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말 있어요." 

 

 


그렇게 집까지 가려나, 내가 먼저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지 싶을 때 그녀가 먼저 입을 열어주었다. 나지막히 날 부르면서 할 말이 있다고. 그때 그녀의 목소리는 기분이 나쁘다거나, 짜증이 난다거나 하지 않은 차분한 목소리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약간의 걱정을 내려놓은 채 그다음으로 나올 그녀의 말을 기다렸는데 얼마나 어려운 말이길래 그녀는 쉽게 꺼내지 못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내 이야기를 꺼냈다. 언젠가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분명 아직도 부모님을 생각하면 어느 한쪽이 잘려나간 듯 쓰리고 아팠지만 꽤나 오래전 일이라 금방 그 아픔은 사라졌다. 너무 많이 쓸렸던 곳이라 웬만한 아픔은 이제 느껴지지도 않는 건지도 모르고. 하도 괜찮은 척, 참아내고 있는 부분이라 이젠 정말 괜찮은 그런 부분. 그랬다. 내가 왜 몇 번이고 너에게 밥을 먹자고 했는지. 내게 함께 밥을 먹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고 소중한 일인지. 알려주고 싶었다. 오늘 나와 함께 식사를 해준 것에 대해 고맙다며 돌려 말한 것이기도 했다. 

나 아무렇지 않은데, 이제 괜찮은데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오히려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내가 불쌍할까, 안쓰러울까.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내가 같이 먹어줄게요. 여전히 촉촉한 눈을 반짝이며 내게 해준 말이었다. 정말 예쁘지 않아? 넌 뭘 해도 그렇게 사랑스럽게 말하고 행동해. 내가 널 정말 좋아하는 거였으면 좋겠는데.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늘 피하기만 했던 눈을 나와 함께 맞춰주었다. 너무 예뻐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수가 없었다.
오직 나만 제 눈동자에 가득 담아주는 것이 너무 예쁘고 고마워서. 

그러니 너도 걱정하지 말고 말해달라고. 그럼 그녀는 결심을 한 듯 고개를 한번 끄덕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뒤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정확히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럼 너," 

 

 


사랑이란 걸 절대 할 수 없는 거잖아.
남자를 무서워한다고 말했다. 실은 처음 나를 보았을 때도 내가 정말 무서웠다고. 스킨십 같은 것은 꿈에도 못 꾼다고. 그런 그녀는 나를 절대 사랑할 수 없다. 순간 그녀에게 묻고 싶었다. 그럼 너, 한 번도 해본 적 없냐고. 만약 다른 남자와 그녀가 그것을 했다고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그놈의 온몸을 다 찢어놓고 싶지만 한 번도 안 했다는 것은 나랑도 못 한다는 거니까. 꽤나 혼란스러웠다. 난 어쩌면 니가 좋아질지도 모르는데, 혹시나 너를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녀는 날 절대 사랑할 수 없다니. 그럼 난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함께 드는 생각은 미안함이었다. 그런 이유였다면 그동안 내게 보였던 그녀의 이상한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조금 과하다 싶은 반응들이. 그래서 내가 그녀에게 멋대로 키스를 했을 때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몸을 떨었던 거였구나. 내가 싫거나 나와 했던 키스가 싫었던 것은 다행히 아니었구나. 그저 보통 사람들보다 약간 더 심하게 스킨십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무섭다고, 심지어 남성 공포증이라는 정확한 명칭까지 알려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거지. 그녀가 날 쳐냈다는 이유로 속상해하고 마음 아파했던 것도 실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녀가 지금까지 내 행동으로 인해 뺨을 날리지 않은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멋대로 손잡고 얼굴을 만지고 게다가 키스까지. 나 같은 병신이 세상에 또 있을까. 그때마다 얼마나 내가 무섭고 싫었을까. 

하지만 그렇게 미안한데도 난 그녀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싶었다. 정말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더 다가가고 싶다고. 난 니가 좋아지려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날 자제할 수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저번만 해도 통제를 못 하고 멋대로 그녀를 삼켜버렸는데. 그리고 그땐 어떻게든 눌렀지만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이 커질수록 날 누르기는 점점 더 힘들어질 것이다. 난 아직 그녀와 손만 잡고 싶을 뿐이지만 그 후에 얼마나 더한 것을 하고 싶어 할지 나도 모른다고. 게다가 난 그렇게 사람 온기를 느끼는데. 그녀가 싫어하니 노력은 하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장담은 못 해. 

 

 

만약 내가 널 사랑하게 된다면, 난 많이 아프겠지? 

 

 

 

 

 

 

 

 

 

 

 

 

 

 

 


 

암호닉

암호닉은 재업이 끝난 후 다시 받겠습니다.

 

통통 / 눈부신 / 태태 / 인사이드아웃 / 령아 / 초딩입맛 / 슙디 / 태형오빠 / 군주님 / 민트 / 태태이즈뭔들 / 이현☆ / 똥맛카레 / #RealV / 소녀 / 침을태태 / 김석진 / 거창왕자태태 / 개학전날밤 / 코코팜 / 슙숨 / 공감 / 태태야 / 슈탕 / 두부 / 딸기빙수 / 요정 / 카라멜 / 태형이안에♡ / 미니언 / 피카피카 / 침침 / 알라 / SAY / 이부 / 깨알 / 다람이덕 / 민피디 / 김치만두 / 태정태세 / 갈매빛 / 쌀떡 / 현지짱짱 / D.시걸O. / 방치킨 / 천재짱짱맨뿡뿡 / 드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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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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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전에는 태형이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고 여주 입장에서 바라보니까 왜 이러나 답답헀는데 이제서야 궁금증이나 답답한 것들이 사라졌네요! 오늘도 잘 읽고 가요!
7년 전
비회원126.162
진짜 갈수록 태형이 너무 맴찢이에요 ㅜㅜㅜㅜㅜㅜㅜ 얼른 행복해졌으면.. ㅠㅠ 오늘도 잘 읽고 갑니다! ♥
7년 전
독자2
작가님 인사이드아웃이에용ㅋㅋㅋㅋㅋㅋㅋㅋ빨리 시즌투 복고싶어옹
7년 전
독자3
처음부터 정주행했어요! 여주의 상처를 잘 보듬어줄 수 있는 태형이가 되길 바라요 ㅜㅜ 여주도 태형이에게 한 발짝씩 다가가는 모습을 보면 제가 다 뿌듯합니다 ㅎㅎ
7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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