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틴/홍지수] 선생님, 의사 선생님
w. 뿌존뿌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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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봉씨, 약 다 먹으면 내가 나 보러 오랬죠."
"................."
119 대원들의 놀란 표정, 의사선생님의 더 놀랐다는 표정.
의사선생님이 톡톡, 링거액을 치면서 내게 잔소리를 하고 나면,
온 몸에 나른함이 퍼지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의사선생님.
"푹, 자고 일어나면 나 찾아요, 알겠죠?"
그리고 다시 깜깜해지는 눈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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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을 보니 벌써 새벽 3시,
선생님 오늘 당직서시는 날 아닐텐데,
어차피 불러도 오지 않을 걸 알기에 그냥 눈만 끔뻑 거리며 천장을 바라봤다.
"거식증이에요. 음....전 남자친구랑 헤어질때 그 분이 뭔가 안 좋은 말을 했죠..?
그게, 큰 충격이었던거 같아요."
거식증
그래, 그게 내가 가진 병이라고했다.
작년 여름, 내 첫사랑이자, 마지막 사랑인줄 알았던 남자에게 버려졌다.
사실 버려졌다기 보단 서로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는게 더 맞고,
사랑에 있어서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꽤나 큰 충격이었던게 틀림없다.
내 자신을 학대한다고 해서 그 애가 돌아오는게 아닌데.
눈만 꿈뻑이고 천장을 바라보며 공상에 빠진지 얼마나 지났을까,
"깼어요? 깨면 나 부르라니까"
"어? 오늘 당직 아니잖아요.."
"세봉씨 주치의는 나예요. 그러니까, 세봉씨가 입원하는 날은 당직."
내 옆에 조용히 걸터앉아 나른히 말하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괜히 간질거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치, 괜히 어린애 다루 듯 한단 말야, 기분 이상하게.
"깬지 좀 됬나보네요? 눈이 안 감겨.
그죠? 저번에는 내가 얘기하던 도중에 잠들었잖아요"
"기억 안나요"
괜히 툴툴거리자 선생님이 의자를 더 바싹 끌어당겨 앉고는 링거가 꽂힌 내 손등을 가만히 만지작 거린다.
손등에 모기가 앉은 것만 같다. 찰싹, 하고 때리고 싶은데 선생님은 모기가 아닌걸,
사실 선생님 같은 모기라면 내 몸의 피를 다 내어주어도 좋을 것만 같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져 손을 가만히 빼자
나보다 한참 더 큰 반대편 손으로 내 손을 꽉 붙잡곤 다시 내 손등을 가만히 만지작 거린다.
물론 내가 움찔거릴때마다 자기 몸에 링거가 수백개는 꽂힌것 마냥 제 얼굴을 찌푸린다.
치, 그렇게 고통스러워 보이면 만지지나 말지.
"아프죠?"
"예?"
"링거 바늘요. 꽤 크잖아"
"안 아파요"
"안 아프긴, 손등에 링거를 얼마나 많이 맞았으면 여기 손등이 다 퍼래요.
응? 그러니까 왜 자꾸 속상하게 병원에 실려와요."
순식간에 지수 선생님의 눈이 울렁거린다.
선생님의 큰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후두둑, 하고 떨어질 것 같다.
".....그냥 병이잖아요"
"그냥 병인데 내가 고쳐줄 수가 없잖아요"
".........."
"나는 의산데, 세봉씨 주치읜데 고쳐주지를 못하잖아요"
선생님이 내 손을 가만히, 가만히 쓰다듬는다.
병실이 어둡다. 선생님 얼굴에 눈물이 흐르는 것 같다.
병실이 어둡다. 난 못 본거다, 선생님 우는 거 못 본거다.
"..............."
"그러니까.. 응? 아프지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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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 밤 선생님의 눈물을 보고 난 후엔 잠을 한숨도 못 잤다.
푹 자라면서, 그렇게 사람 마음 흔들어도 되는거야?
"세봉씨 굿모닝~"
"....예"
"잠 못잤어요? 피곤해 보이네.."
선생님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천진하게 묻는다.
왜 피곤하겠어요, 선생님 때문이지.
"세봉씨, 어젯 밤에 내가 세봉씨 잘 때 링거 빼놨는데. 괜찮았죠?"
오, 그러고 보니 내 몸에 끈질기게 달라붙어있던 링거가 없다.
한숨도 못 잔줄 알았는데, 또 잠깐 잠들었나보다. 바보같이.
그리고, 지수선생님은 또 내가 잠들었을때 들어와서 날 걱정했나보다. 바보같이.
난 아직 누군가에게 마음을 줄 만큼 성숙하지 못한데. 바보같이.
"선생님은 안 주무셨어요?"
"아까 아침에 조금 잤어요. 아, 그리고 나 오늘 저녁에 컨퍼런스 있어서
저녁 회진때는 나 말고 인턴하나 들어올거예요. 불편하지 않죠?"
"인턴요? 싫은데..."
"....불편해요? 다른 사람은?"
"......예"
"알겠어요, 그럼 그 컨퍼런스를 인턴 보낼게요."
"그래도 되요?"
"되겠죠?"
지수쌤이 어깨를 으쓱해보이곤 팔을 휘적이며 병실 바깥으로 걸어나가버린다.
괜히 나때문에 시간 뺏는거 같아서 뭔가 미안해지는데,
근데, 그러기엔 바깥으로 걸어나가는 지수쌤의 어깨가 많이 들썩거렸던것 같기도하고.
아, 이것도 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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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회진 시간, 정말 지수쌤이 내 옆에 다시 앉아있다.
내 옆에서 웽웽거린다. 모기같이.
".....진짜 컨퍼런스 안가셨어요?"
"응! 인턴이 가도 되는거라고 교수님이 그러셔서,
그리고, 내 담당 환자가 주치의가 필요하다는데 어떤 의사가 컨퍼런스에 가요!"
괜히 얼굴이 달아오르는게 느껴진다.
푸스스,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선생님이 웃는다.
치, 창피하게 사람 얼굴 보고 웃는게 어딨어.
"인턴 말고 나 보니까 좋죠? 응?"
"좋은게 아니라 편한거예요"
"편한게 좋은거지 뭐-"
선생님이 또 가만히 손등을 어루만진다.
잦은 병원 방문으로 퍼렇게 멍들어있는 내 손등.
선생님의 손길이 한번 닿을때 마다 어깨까지 찌릿함이 타고 올라온다.
치, 애 다루듯이 안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막 실려올때보단 상태 괜찮아졌네요? 막 받아치기도 하고"
"어제는 그냥 피곤해서 그런거예요"
"그러니까 몸 피곤하고,
(선생님은 이 말을 끝내곤 내 손등을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손등 아프고, 나 속상하고, 세봉씨 힘들고. 응?"
"........."
"이제 내 얼굴 그만 봤으면 좋겠어요 나는"
"................"
"세봉씨, 세봉씨 정말 소중한 사람이에요. 알죠?
근데 왜 자꾸 스스로를 학대해요, 응?
세봉씨를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 분 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선생님의 눈빛이 오늘따라 이상하다.
괜히 눈빛을 피해본다.
아니야, 착각이다, 병이다.
그 애가 없는 자리가 너무 커서 괜히 매워지는 거다.
"세봉씨. 잘 먹어요. 알겠죠?"
"예"
"퇴원한 다음에는 환자 대 의사로 보지 말기로 해요."
지수쌤의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또 푸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는 선생님.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으며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는다.
"오? 왜 안 물어보지? 원래 세봉씨 되게 궁금증 많은 사람이었잖아요"
"예?"
"세봉씨가 난 당연히 나한테,
음? 그럼 퇴원한 다음에는 뭐로 봐요?
하면서 물어볼 줄 알았는데?"
지수쌤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손톱을 만지작 거린다.
무언가가 차오른다.
아니다, 착각이야. 병이야
"..........예?"
"우리 퇴원한 다음에는,"
"그땐 여자 대 남자로 보기로 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