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대학 후배 전정국 X 시각장애 너탄 16完
"나도 엄청 어릴때 였는데, 다른건 아무것도 기억 안나는데. 딱 그장면만 선명해."
"....."
"우리 아부지가 누나 겁탈하던거."
태형이 떨리는 목소리로 천천히 뱉어내는 소리를 귀에 담기가 힘들었다.
귀로 흘러들어온 믿지 못할 내용들이, 정국의 가슴께로 내려앉아 아프게 마음을 할퀸다. 이미 붉어진 눈가로 뜨거운 눈물이 맺혀왔다.
"누나는, 누나는 계속 저항했는데,"
"..."
"난 그거 보고만 있었어. 하지말라고 한마디도 못했어 우리 아부지 한테."
"됐어 그만말해."
"아니 끝까지 들어."
"그만하라고."
"연화대에 김탄소 있는거 알고 찾아왔어."
꾸역꾸역, 내뱉을 수록 상처만 쌓여가는말들을. 떨리는 목소리로 뱉어내는게 아파보여서, 그 시선을 애써 돌리려 노력한다.
"내가.. 누나를 속였어, 몇번이나 말 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김탄소가 뭐라고 했는데."
"다 괜찮데, 미안하데..."
"그럼 됐네."
"씨발 근데, 그말 듣고 내가 왜 안심을 했지."
더이상 들을 필요 없다는듯 짐을 챙겨 일어나는 정국의 소매를 잠시 잡았다가, 그저 피식 웃고는 손에 힘을 빼낸다.
테이블 위에 비어버린 소주병들과, 타들어간 안주들만이 태형의 심정을 대변하는듯 그 자릴 지킨다.
"내가 씨발... 왜 김탄소 말을 듣고 안심을 했냐고."
태형의 눈물젖은 얼굴이 테이블로 떨궈지고, 이미 엉망이 되어버린 얼굴로는 끊임없이 제 자신을 책망하듯, 그리 중얼거린다.
"김태형 이 나쁜새끼야.. 니가 왜 안심을 했냐고....응?"
"니가뭔데... 이 쓰레기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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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 하러 왔는데요."
'니가 날 고발하지 않은 그때부터, 우리는 공범이야, 그치? 이 어린노무새끼.. 낄낄'
아버지, 제가 공범이라고 하셨죠. 저는 아버지처럼 겁쟁이가 아니어서, 벌받으러, 제발로 찾아왔어요.
대견하죠, 그 쓰레기같은 아버지 밑에서 이렇게 멋있는 아들이 태어난걸 자랑스럽게 여기세요.
"당시에 본인 나이가 너무 어려서, 방관죄는 해당이 될 수가 없으시고.... 아버지는 성범죄, 폭행 혐의로 재판이 열릴겁니다...."
예상 외의 상황에 태형이 당황스럽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나 그랬을 거에요, 더군다나 아버지인데. 그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고발해낼 생각을 하는게 이상하죠. 그냥, 재판에서 증인 자격으로 참석만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이렇게라도, 죗값을 치르고 싶었는데... 그러고싶었는데.
경찰서를 빠져나오는 김태형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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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가 왜!!!!! 내가 괜찮다고 했잖아!!!! 니가 뭔데!!!태형아 제발..... 응? 아니라고 말해, 가서 착각한거라고 말해... 제발..."
그 작은 손으로, 제 가슴팍을 쳐 내리는 탄소의 얼굴을 바라본다.
"누나, 우리 아부지. 감옥가서 벌 다 받고 나오면. 그때가서 진짜 괜찮다고 말해주면 안될까..."
지금 그냥, 날 위해서 말하는 그런 용서 말고. 우리가 죗값 치르고 누나 앞에 떳떳히 서서, 잘못했다고 빌 수 있을때.
그때가 되면.
"그렇게 해주면 안될까... 누나"
점점 태형의 가슴을 내리치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그대로 등을 돌려 집으로 들어서는 탄소의 뒷모습을 보면서, 태형이 미소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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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공들여 세운 모든게, 잔잔한 파도에 야금야금 집어삼켜지는 느낌을 여실히 느끼면서.
어둠속에 혼자 울부짖게 되는건 탄소였다.
제가 원했던건, 이렇게 아니었는데. 감정의 파도가 휘몰아치다 못해, 제 새끼발가락 옆까지 다가와 저를 집어삼키게 될까. 두려움에 귀를 틀어막는다.
저 하나때문에, 세상엔 뒤틀려 진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눈이 보였더라면.
아니, 그 어렸던 그날에. 그 골목을 거닐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냥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모든게 제 탓 이건만, 그런 저에게 용서를 빌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법정에 세운 심정이, 그런 태형의 심정이 자꾸만 저를 벼랑 끝으로 내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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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야, 내일 생일이지? 이거, 집에 친구들 데려와서 같이 먹어 케잌이야."
집 주인 할머니가 현관쪽에 무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려오면, 퉁퉁 부어버린 눈으로 바닥을 짚어가며 간신히 케잌 박스를 들어 냉장고 한켠에 집어 넣는다,
"생일.. 생일이네."
냉장고 앞에 쭈그려 앉은 탄소의 입가에 미소가 살살 펴 오르고. 이내 얼마 남지 않은 학교 수업이 생각 났는지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는 탄소였다.
예상은 했지만 , 역시나 태형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누나, 또 울었어요?"
정국이 따듯한 손을 들어 탄소의 부은 눈가를 꾸욱 꾸욱 눌러준다. 덕분에 볼살이 눌려 입술이 톡 하고 튀어나온 꼴이 퍽이나 귀엽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며 볼을 어루만지다가, 작은 입술에 -쪽 하고 제 빨간 입술을 부딪힌다.
그 돌발적 행동에, 오히려 당사자가 더 당황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기 까지.
"누나, 누나가 귀여워서 그런거니까. 내잘못 아니에요."
탄소는 그런 정국의 얼굴을 더듬어 대면서, 보드랍고 촉촉한 입술을 몇번 검지로 두드리다가.
까치발을 들어 올려 정국의 입술에 제 입술을 다시 포갠다.
정국이 벙벙한 표정으로 탄소의 초점없는 눈빛을 내려다 보다가,
못참겠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곤. 작은 탄소의 입술을 삼킬듯 키스한다.
이상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늘이 분명 마지막인데, 이렇게까지 욕심내면 분명 탈이 날텐데, 불안한 감정에 잠식당한 탄소의 손끝이 파르르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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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포트는 얼추 완성이 되었고, 이제 탄소의 녹음기에 녹음되있던 내용들만 조금 수정해 추가하면. 길었던 과제가 끝이났다.
괜히 조금더, 몇번이라도 더 탄소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에 자꾸만,
"누나, 녹음기에 있는건 다음에 해요 우리, "
그렇게 말하면서 대답을 종용하는 정국의 볼을 더듬어 천천히 쓰담는다.
"정국아, 나내일 생일인데.. 여기, 녹음기에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주면 안돼?"
작은 손으로 여전히 눈치를 보면서 녹음기를 제 쪽으로 내민다.
괜시리 부끄러워지는 마음에, 그 손에서 녹음기를 받아들곤
"누나 그럼 꼭 혼자 있을때 들어요..! 나 녹음해서 가지고 올게."
상기된 표정으로 정국이 녹음기를 들고 뛰어와선, 혹시나 들을까 싶어 탄소의 가방안으로 쏙 집어 넣는다.
"하아..하아... 약속해요! 진짜 혼자 있을때만 듣기!"
응. 약속
새끼 손가락까지 걸고, 손바닥에 싸인, 복사까지 마친 정국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헤헤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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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탄소가 오늘따라 분주히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인스턴트 미역국까지 사들고 와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도 만든다.
정량에 맞지도 않는 물을 열심히 받다가 냄비를 놓쳐 거실이 물바다가 되어 버리기도 하고, 젖은 바닥을 밟으며 겨우겨우 만든 미역국은, 몹시도 싱거웠다.
그래도 제 생일, 처음으로 끓여본 미역국에 만족하면서 웃는다, 요리를 해본게 얼마만 이었던지, 불을 키는 방법에서부터 열까지, 여러번의 시행착오끝에 만들어낸 미역국이라 그런지 더욱 만족스러웠다.
미리 부탁해, 편의점 전자레인지에서 돌려온 인스턴트 밥까지 작은 상위에 올려두곤.
냉장고 구석에 넣어둔 케잌까지 꺼내어 들었다.
"원래 초까지 꽂아 넣어야 하는데...."
혼자 중얼거리며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대던 탄소가, 결국 초를 찾는걸 포기하곤 케잌을 상위에 올려둔다.
몇번이고 엉뚱한 위치에 케잌을 올리려는 탄소의 행위에 케잌이 이리저리 쏠려 모양이 흐트려졌지만, 보이지않는 탄소에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사랑하는 탄소의 생일축하 합니다."
홀로 부르는 생일축하노래.
불도 켜지지 않은 거실.
초를 켜지 못한 케잌.
두려운 적막속의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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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밤, 20대 초반의 여성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어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현장에서는 홀로 생일을 맞이한 듯한 고인의 생일 상이 차려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담당 형사들은 타살의 가능성을 염두해 두었지만, 배터리가 닳은 채 발견된 녹음기 하나와, 10여년전 발생한 성폭행 범죄자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가 발견되어, 계획된 자살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수사의 방향을 변경하였다고 전했습니다, 시각장애인 이었지만, 장애를 딛고 꽃을 피워보려던 여린 꽃씨가 허망하게 져버린 것에 대해, 지인들의 안타까운 시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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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누나! 음, 이거 녹음 되는건가? 아 갑자기 녹음하라니까, 막 부끄럽고 그렇네, 근데 그거 알아요? 누나가 나한테 뭐 부탁한거 처음이잖아.
용기 내줘서 고마워요. 아, 딱 생일축하한단 말만 바란건가? 에이 설마, 누나 답정너잖아요~ 내가 이제부터 무슨말 할지 알겠죠?
음... 아, 누나 진짜 좋아해요. 그래서 누나한테 못해준게 후회되는날이 정말 많아요. 미안하니까 하나하나 이야기해가면서 사과는 못하겠다.
가끔 이런생각을 해요, 누나가 우리 동아리 들어오고 싶다고 한날. 그날로 돌아가면 누나 꼭 안아주면서, 아 아니 안아주는건 좀 오바다! 어쨌든 환영한다고 말해줄래,
그리고, 누나랑 처음 술먹던날! 그래 그때 딱 안아주면 되겠다, 아니 뭐 기회 봐서 뽀뽀도 해주고..
나 뭐래니. 생일축하한단말 해달랬는데, 아으 참 말이 많네, 이거 다시 녹음은 못하나? 아니 됐어요 그냥 이대로 들어요,
생일 진짜 축하해요. 이제와서 생각한건데. 누나처럼 빛나는 사람이 없는거같아, 내가 그걸 이제서야 느껴서 진짜 미안해요.
누나 어머니한테, 낳아줘서 감사하다고 내가 인사하고 싶다니까? 누나는 누나가 얼마나 반짝반짝거리는 사람인지 모르죠? 씁- 아쉽네 이제 내가 옆에서 하나하나 다 알게 해줄게요. 그러게 해주면 안되려나? 응?
이거 들으면. 대답 꼭 해줘요. 그리고, 알겠다고 대답하면, 그러면 우리 내일 데이트해요. 그래, 맛있는것도 먹고, 누나 먹을거 좋아하니까.
내가, 누나 많이 사랑해 줄게. 으으 오글거린다 진짜. 이제 끝!"
-
그날밤, 끊임없이 반복되던 녹음기속의 정국의 음성.
눈물로 범벅된채 그 음성을 들으며 몇번이고 고민하던 그 여린 영혼.
"정국아, 나도 많이 좋아해.. 진짜 많이 좋아해.
근데, 나는 평생 대답 못할꺼야 아마."
공중에 나비처럼 띄워지던 탄소의 두 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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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의 손에 쥐인 녹음기가, 천천히 뒤로 감아져 가다. 툭 하고 멈춰선다.
마지막, 그 레포트를 정리하려 재생한 녹음기.
무엇이 그리도 겁났던지, 레포트 제출기간이 한참이 넘어서야 그 녹음기를 재생한다.
잔잔히 흘러가던 김탄소의 목소리가 끝이나고.
"큼큼, 아 김태형 듣고있나! 아니 정국이가 가지고 있으려나? 이거 들으면 김태형한테 꼭 전해주도록."
답지 않게 강경한 말투를 써대며 녹음한 듯한 목소리에 큭큭 정국이 소리를 죽여 웃는다,
"태형아, 나 사실 다 알고 있었어, 니가 누나 속인게 아니라. 내가 김태형 너 속인거야 임마,"
그 말을 끝으로 , 생일 축하한다는 말을 녹음해 달라던날, 부끄러움을 숨기며 녹음했던 제 목소리가 새어나오자, 정국의 눈가가 단숨에 붉어진다.
"아..아 누나! 음, 이거 녹음 되는건가? 아 갑자기 녹음하라니까, 막 부끄럽고 그렇네...."
"대답이라도 좀 해주고 가지,"
"근데 그거 알아요? 누나가 나한테 뭐 부탁한거 처음이잖아...."
"혼자 이야기 하니까 막 더 부끄럽네"
정국이 , 혼자 열심히도 떠들어대는 녹음기를 끄곤, 제품에 꼬옥 안는다.
"치사하게 , 김태형한테만 비밀이야기하고."
눈가가 시큰해져 큰 손을 제 얼굴위로 덮어내린다.
간신히 제 마음에 내려 앉은봄.
그 꽃샘추위가 오늘따라 강해, 정국은 몸을 움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