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가지 없는 대학 후배 전정국 X 시각장애 너탄 15
엄마, 오늘은 엄마생각이 정말 많이 나는 밤이다?
어릴때, 왜 내가 잠도 못자고 찡얼거릴 때마다, 별이 어떻게 생겼는지, 달이 얼마나 밝은지 이야기 해줬잖아.
내 머리도 가만가만 쓸어주면서, 우리 버리고 도망간 아부지. 내가 밉다고 울때마다.
아부지가 얼마나 잘생겼는지 아느냐고. 내손 잡고 허공에 아부지 얼굴 그려 줬었잖아.
오늘따라 자꾸 손길이 생각나서, 그래서 엄마가 너무 그리워.
왜 그렇게 빨리 가버린거야.. 엄마 돌아가시자 마자 우리 같이 살던집 주인할머니가 그러더라.
엄마가 하나뿐인 딸내미를 까막눈으로 낳아서 벌받은 거라고,
엄마, 정말이야? 진짜 벌받고 있는거야?
처음엔 정말 엄마 원망 많이 했었어.
내가 시각 장애인으로 태어나서, 엄마가 일찍 가버려서, 세상 나쁜일이 다 나한테만 일어나는줄 알았거든.
근데 사실은, 엄마 덕분에.
여름이 얼마나 더운줄도 알고, 장마가 얼마나 찝찝한 줄도 알고, 습한데서 말린 빨래가 얼마나 냄새가 고약한줄도 알고...
미안해, 엄마생각 하면 할 수록 엄마가 걱정할거 아는데,
제발, 하루만이라도. 한시간만이라도 엄마 다시 느껴보고 싶어서 내가 어리광 떨었어요.
엄마....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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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5일 PM 2:40
"이 보래요~ 누나 또 붕어눈이다ㅋㅋㅋㅋㅋ 왜이래 이거이거 오징어야 뭐야."
오늘따라 전공강의가 몇십분이나 늦게 마친 탓에 다들 축축 처지는 발걸음으로 강의실을 나서는데, 또 그중에서도 튀는 태형인지라 정국의 시선이 홀리듯 그쪽으로 향한다.
거짓말이 아닌듯 눈가가 발갛게 퉁퉁 부은 김탄소가 저를 놀려대는 김태형의 태도에 바짝 약이올라 팔을 이리저리 저어 댄다.
정작 오징어가 어떻게 생긴줄도 모르면서 그저 저를 놀리는게 약이 오르는지 열심히도 반항한다.
여간 시끄러운게 아니었다, 정국은 또 그 상황에 인상을 쓴다.
정국은 인정하기로 했다. 이 치졸하고 유치한 감정이 질투라는 사실을.
김탄소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그 마음이 자꾸만 커져 정국의 마음을 몽실몽실 괜시리 설레게 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김태형과 붙어있는 꼴을 보아하니 배알이 꼴리는게 당연했다.
좋아하니까, 제가 김탄소를 좋아한다고 인정했으니까.
제가 천천히 다가가자고 다짐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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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형은 그날 이후, 그때의 상황에 대한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확실한건. 김탄소는 예전의 김태형을 몰랐고, 김태형은 예전의 김탄소를 알았다는 것.
정국은 괜시리 찝찝한 감정에 몇일밤을 뒤척였지만,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될문제가 아니다 싶어, 잠시 접어두자 생각한다.
정국은 안일한 이 태도가, 어둠의 그림자를 점점 부풀려 끌어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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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는 무서웠다. 점점 제 안에서 커지는 정국의 존재가. 처음엔 가슴이 터질듯하다가,
잠시 제 마음에 담아두고 싶다 그리 여기다가. 그 감정은 회오리 치듯 탄소의 마음을 잠식시키고 더한 욕심을 부리라 명령하고 있었다.
도망가기엔 지금 이곳은 벼랑 끝이였고. 제 바로 등뒤에서 제 어깨를 잡고 서 있는듯한 정국과의 거리감을 체감하면서, 잠시 그 욕심에 잠식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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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형은 점점 고해성사의 시간이 다가옴을 느꼈다. 절대 용서 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모든 죄를 묵묵히 들어주고 보듬어주는 신부님 처럼, 탄소가 제 죄를 사해주진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너무 이기적인 생각이다, 그걸 김태형 자신이 너무 잘 알기에 더욱 가슴이 아팠다.
김탄소가 살아온 그 시궁창같은 삶의 반의 반만이라도 제가 치유할 수 있길 바랐다. 그래서 묵묵히 그 옆을 지켰고, 웃게 만들고 싶었고.... 그렇게 좋아하게 되었다.
운명의 장난같은 이 상황에 그저 머리를 무릎에 묻는다, 하느님. 다음생엔 제가 김태형으로 태어나지 않고 전정국으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평소 믿지도 않는 하느님에게 괜한 기도를 몇번하다가. 눈가가 시큰해져 까슬한 옷 소매로 큰눈을 벅벅 쓸어내린다.
옷 소매에만 스쳐도 이렇게나 아픈데, 김탄소는 그 날카롭고 뜨거운 시간들속에서 어떻게 견뎌온걸까. 방구석에 웅크리고 잠에든 아버지의 뒷모습을 죽어라 노려보면서
생각한다. 가끔은 억울했다. 제 아비는 왜 10년전 성욕에 눈이멀어 씻어내지 못할 죄를 지었을까
제 아비는 왜 하필 그 어리고 불쌍했던,김탄소를 겁탈했나.
왜 김탄소는 눈을 보지 못해 제대로된 증언을 내뱉지 못했나.
왜.. 자신은 어린날의 아버지를 감싸주려, 범죄를 목격했음에도... 고발하지 못했나.
어느날 아버지가 태형의 고개를 양손으로 거세게 쥐곤 속삭였었다.
입가에서 씨근덕 거리며 뿜어져 나오는 알코올 냄새와 니코틴 냄새가 역했다. 구역질이 올라오는듯 했지만 아버지의 눈을 직시하며 올려봤다.
"니가 날 고발하지 않은 그때부터, 우리는 공범이야, 그치? 이 어린노무 새끼.. 낄낄."
그날이 처음이었다. 제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개새끼고, 괴물이고.... 씨발 정말 좆같은 존재라고.
그리고 그 본색은.. 숨기질 못했다.
바로 오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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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5일 PM 3:10
왜 사람들은 우리에게 잠시의 평화도 허락치 못할까요.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건 김태형이었다.
"니...니가 탄소니? 많이...컷구나 "
"씨발 지금 뭐하는거야!!! 내가 찾아오지 말랬잖아!!! 응? 아부지 제발 좀!!! 아악!!!!!!"
김태형이 무너져 내렸다.
그 벌레같은 몰골로, 자신을 탄소에게서 떼어내려는 태형의 억척같은 손길을 끊임없이 뿌리치면서 탄소에게 다가간다.
그 낮지도 높지도 않던 허스키한 목소리, 제 팔뚝을 거세게 그러쥐는 단단하고 거친 손가락. 그 모든게 그날과 들어맞았다.
김탄소의 어깨가 하염없이 떨려온다, 그 광경을 보고있던 정국이 빠르게 탄소를 제 등 뒤로 숨긴다.
"태...태형이 아빠야, 응.. 탄소야 기억나니? 10년전 일은....."
"씨발!!! 닥치라고...!!!!"
김태형이, 과대선배의 손에 양 팔을 결박 당한 채로 금방이라도 달려 들 것 같은 태도를 취한다.
캠퍼스 안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단숨에 탄소에게로 향했고.. 정국만이 그 시선을 막아주듯 주저앉은 탄소를 숨기기에 급급했다.
"듣자 하니.. 우리 태형이랑 잘 지내는것 같은데... 태형이 봐서라도... 나좀 용서해줘.. 10년이나 두려워했으면 된거잖아!!!! 응?? 아냐? 아니냐고!!!! 뭐라고 말좀해봐!!!! 이 X년아!!!!!"
정국이 점점 심각해 지는 상황을 깨닫고, 태형의 아버지를 밀쳐낸후 탄소를 낚아채듯 일으켜 캠퍼스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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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는 탄소의 어깨를 단단히 쥐어잡곤 어떻게든 안심시켜보려 노력하는 정국이었다.
"으으.... 정국아.... 흐으...."
결국, 작게 웅크린 탄소의 몸을 끌어안아 뒷통수를 쓸어내리며 '괜찮아... 다 괜찮아요 누나...'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정국이, 그렇게 상처받고 멸시받던 지난날의 탄소를 함께 끌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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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월 15일 PM 11:20
정국이 탄소의 집앞에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한참을, 차갑게 식은 손만 잡고 서 있다.
"정국아... 나 정말 괜찮아... 가봐.."
"걱정 되니까 그러죠..."
결국, 보이지도 않는 시야로 정국을 골목쪽으로 밀어내고 나서야 손을 흔들어 주는 탄소였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천천히 떼어내 가며, 집으로 돌아가는 정국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느리고, 더 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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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어둠 속, 언제부터 기다렸는지 가늠도 못할. 그 난파된 뱃조각을 마주하는순간.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에 절로 제자리에 주저앉게 되는건, 탄소였다.
그렇게 어둠속에, 몇시간을 주저앉아 돌아오길, 아니 돌아오지 않길 빌고 빌던 탄소가 눈앞에 나타나자, 태형의 심정이 뜨겁게, 묵직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누나... 숨기려던거 아냐... 그냥.....으...흐으... 그냥.."
탄소가 어느새 눈물이 줄줄 흐르는 얼굴로 천천히 바닥을 짚어 태형의 앞으로 다가선다.
흙이 묻어 더러운 손바닥을 제 바지춤에 슥슥 닦아내리더니.. 조용히 그 작은 손을 태형의 눈가에 가져다 댄다.
"태형아... 누나는, 누나는 괜찮아..."
제 어깨를 토닥이는 그 작은손이 눈에 띄게 떨려와서, 태형은 가슴이 미어진다.
죽도록 무서웠을텐데.
제 못난 아버지 덕에 그 긴시간을 혼자서 숨어살던 너인데,
이렇게나 쉽게 저를 용서한다.
"태형아... 나는 정말 괜찮아... 미안해... 어른들이... 어른들이 다 미안해..."
김탄소 너도 결국은, 그 어른들의 피해자면서,
끝까지 저렇게 미련하다 김탄소가,
급기야, 두려움에 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어대면서, 그렇게 태형의 차게 식은 몸을 끌어 안는다.
"누나가...미안"
"으으....누나야..."
그렇게 눈물과 콧물에 범벅된 김태형의 말을 마지막으로, 김탄소가 밀려오는 감정을 버티지 못하고 태형의 품에 쓰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