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장난해? 누가 봐도 너잖아. 대놓고 자기 얘기 하는 게 어딨냐."
"자기 소개 잘 들었어."
오늘도 나에게는 채널 선택권이 없다. 저녁 먹고 거실에 늘어져 티비를 보고 있으면, 전정국이 와서 당연하다는 듯이 채널을 돌린다. 사람 멀쩡히 보고 있는데 꼭 와서. 나는 해탈한 얼굴로 소파에 드러눕는다. 가만 눈을 감고 있는데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난다. 그새 저녁이 소화가 됐나. 배를 만지며 냉장고에 먹을 게 있던가 생각하는데, 김태형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벌떡 일어난다. 뒤통수를 탁 치면 눈이 튀어나올 것 같다.
김태형의 말에 전정국도 눈을 크게 뜨며 말한다. 나는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2
"...아직도 비 오네."
창밖에서는 아직도 비가 내린다. 밖에 비온다 주륵주륵. 아침에 우산 안 챙겼는데. 이 빌어먹을 학교는 외진 곳에 있는 것도 아닌데 근처에 편의점이라고는 없다. 멍하니 창문을 보다 전화를 걸기로 마음 먹는다. 가장 먼저 민윤기.
-연결이 되지 않아 삐 소리후...
... 작업 중인가보다. 김남준 오늘 자기가 아이돌도 아니면서 촬영이랬으니까 패스고, 다음은 김태형이다.
-나 바빠! 끊어!
"......."
... 말도 걸기 전에 까였다. 며칠간 나를 달달 볶아 3일만에 검사 결과를 받아간 김태형은 요즘 따라 바쁜 일들이 많다. 그럼 마지막은 전정국이다. 아, 얘는 일할 때 전화하는 거 싫어하는데. 나는 입술을 꼭 물며 핸드폰을 붙잡는다.
-여보세요.
"정국아, 어디야?"
-회사. 왜.
"언제 퇴근해? 나 오늘 우산 안 챙겼는데 퇴근할 때 데리러 와 주면 안 돼?"
-안 돼.
"......."
-한 시간쯤 뒤에 끝나. 그 때까지 기다려.
웅! 나는 신나서 전화를 끊는다. 이제 좀 일할 맛 나네. 교무실에서 가장 어리다는 것 하나 때문에 온갖 귀찮은 일은 다 내 몫이다. 다음주에 있을 제 16회 어린이 독서퀴즈 대회도 학교에 있는 도서관 사서도 아닌 내가 떠맡았다. 최근에 읽은 책이라고는 잡지 밖에 없는 내가 이번주부터 어린이 필독 도서만 정독하게 생겼다. 인생 씨발이다.
컴퓨터와 싸움을 하다 시계를 보니 전정국이 말했던 한 시간이 지났다. 나는 얼른 컴퓨터를 끄고 짐을 챙긴다. 그 와중에 확인한 핸드폰은 배터리가 거의 없다. 그래도 핸드폰이 꺼지기 전에 전정국과 연락이 닿아서 다행이지. 나는 콧노래도 흥얼이며 교무실을 나선다. 불 끄고, 코드 뽑고, 문 잠겼나 확인도 하고.
#3
"...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지."
학교 건물 바로 앞까지 오는 건 애초에 바라지도 않았으니 알아서 정문까지 뛰었다. 비는 생각보다 많이 내렸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는 짧은 거리를 뛰었다고 꽤 젖었다. 전정국에게 어디쯤이냐고 물어보려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학교 정문이라는 문자를 남긴다. '한 시간쯤 뒤'는 벌써 지났는데 전정국은 연락도 안 된다. 설상가상으로 배터리가 없는 핸드폰도 꺼졌다. 연락도 안 되는 판에 혹시나 서로 길이 엇갈릴까 택시도 버스도 타지 못 한다.
결국 전정국이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 건 무서운 기세로 내리던 비가 가늘어졌을 때였다. 몇 시간이나 지났는 지는 모르겠다. 미쳤다고 지금까지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기다린 내가 병신이라는 것만 아주 잘 알겠다. 지칠대로 지친 나는 비를 맞으며 걸어가기로 한다. 횡단보도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멀리서 클락션 소리가 울린다. 비 와서 그런가. 소리도 존나 크네. 때마침 초록불이 켜진 신호등에 걸음을 떼려는데 앞에 익숙한 차가 와서 선다.
"......."
"뭐해. 빨리 타."
민윤기다. 다른 때였으면 좋다고 얻어탔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젓는다.
"나 지금 젖었는데."
"그러니까 타라고. 너 그러고 있는데 차가 중요하냐."
그럼 중요하지... 너 그 차 뽑고 거의 두 달을 차 자랑만 하고 다녔잖아....
안 타겠다고 고집을 피우니 차에서 내린 민윤기는 조수석 문을 열어놓고 내가 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차에 올라탄다. 가는 내내 히터를 빵빵하게 튼 민윤기는 집에 가자마자 따뜻한 물로 씻으라며 잔소리를 한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민윤기의 잔소리는 현관문 앞까지 계속 됐다.
"... 아, 맞다. 미안. 깜빡했다."
"......."
"설마 지금까지 기다린 건 아니지?"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가면 막 샤워를 하고 나온 건지 가운을 걸치고 있는 전정국이 있다. 설마 지금까지 기다렸냐니. 말없이 쳐다보니 전정국은 그제야 미안, 진짜 미안. 하고 개소리를 왕왕 한다. 어이가 없다. 나는 전정국의 말을 다 무시하고 아직도 따뜻한 수증기가 찬 화장실로 들어간다.
#4
책상에는 자몽 워터와 그 위에 '미안' 이라고 써진 포스트잇이 있다. 전정국이다. 나는 자몽 워터를 들고 거실로 나간다. 소파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던 전정국은 나를 보고는 벌떡 일어난다.
"......."
"......."
나는 전정국 손에 자몽워터를 다시 쥐여준다. 전정국은 말없이 나를 쳐다본다. 나는 본 척도 안 하고 내 방으로 돌아온다. 씨발이다, 이 새끼야.
#5
전정국과 다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하숙집에 들어와 가장 많이 싸운 사람은 예민한 민윤기도 집주인 김남준도 아닌 전정국이다. 화장실에 휴지 다 쓰고 안 갖다 놓는 일, 설거지 후에 건조대에 그릇을 놓는 순서, 심지어는 양말을 개는 법까지 모든 사소한 일로 유치하게도 다퉜다. 그 중 전정국의 잘못으로 싸움이 일어났을 때마다 내가 유일하게 바랬던 건 진심을 담은 미안해, 한 마디었다.
전정국은 말로 표현을 안 하는 스타일이다. 대신 밥을 산다거나 선물을 사오는 걸로 보여준다. 그러면 그때마다 내가 굳이 입 밖으로 말을 꺼내도록 했었다. 한 두 번 있던 일도 아니니 전정국도 지금 내가 뭘 바라는지는 알 거다. 미안하다는 한 마디. 하지만 전정국은 내 눈치만 보고 아무 말이 없다. 지금 전정국 머릿속에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있다는 거다.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데 전정국이 눈치를 보며 옆에 앉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에 가 앉는다. 전정국이 빤히 쳐다본다. 나는 전정국을 철저히 무시한다.
전정국과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하는데, 김남준이 분주하게 집을 돌아다닌다. 인상을 팍 쓰고 두리번 대는 게 무언가를 찾는 것 같다.
"뭐, 돈?"
"아니. 손목 시계."
내 말에 정신없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하던 김남준은 갑자기 모든 동작을 멈추고 나를 쳐다본다.
"... 내 돈 가져갔냐?"
나는 말없이 머그컵을 쥐고 방을 등진 후에 문워크를 한다. 김남준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짚는다. 존나 별로니까 그냥 들어가라. 웅.
#6
누가 모기는 예쁜 사람만 문다고 했다. 그리고 옆 반 해찬이는 내 눈이 제일 예쁘다고 했다. 아니고서야 가을이 다 끝나가는 지금 모기가 헌혈도 무섭다고 안 하는 새끼들을 놔두고 내 눈을 물었겠냐고. 씨발... 나는 거울을 보다 깊은 한숨을 쉰다. 눈이 잔뜩 부었다. 출근하는 길에 약국에서 안대나 사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자식들은 내가 이 꼴이 났는데도 헛소리나 하고 있다. 나는 한숨을 쉬며 A4 용지를 챙긴다. 식탁에 앉아 반성문을 써갈긴다. 난 잘못한 게 없다. 모기가 날 너무 좋아하는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나는 그저,
소파에 누워있던 김태형은 박수랍시고 꼬질꼬질한 발바닥을 부딪히고, 김남준은 내 반성문 위로 한 장 더 올려놓는다. 나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다시 반성문에 고개를 박는다. 그리고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면 그 인기척의 주인공이,
사과를 한다. 나한테 사과를 하는 건지, 내 눈한테 사과하는 건지 모르겠다. 씨발.
#7
약국에 가서 눈을 보여주니 약사 언니가 알아서 바르는 모기약과 안대를 내밀었다. 덕분에 눈은 걱정보다 빨리 가라앉았다. 샤워를 마치고 한참 거울을 들여다보다 나오니 전정국이 드라이기를 들고 서 있다. 팔짱을 끼며 뭐냐고 물으면 전정국은 드라이기로 자신의 앞에 놓인 의자를 가리킨다.
나는 팔짱을 풀고 고분고분 앉는다. 바람 뜨거우면 말하라는 전정국은 조심스럽게 내 머리를 말린다. 바람은 적당히 따뜻했다. 미안해. 윙윙 대는 바람 소리 사이로 들리는 전정국의 목소리도 따뜻하다.
#8
"여기가 누나 집이야?"
나는 아이의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하며 현관문을 연다. 아이는 신발을 벗고 가지런히 고쳐놓는다. 이 예쁜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사촌 언니의 아들, 바로 내 조카다. 그러니까 나 닮아서 예쁘지. 부모님이 여행가서 유치원이 끝나고 돌봐줄 사람이 없다길래 내가 데려왔다. 나는 귀여운 아가만 보면 환장하는 병이 있으니까. 게다가 아이는 이모 말고 누나라고 부르라는 내 말도 아주 잘 듣는 게, 나중에 크게 될 놈이다. 미심쩍어하던 우리 엄마는 우리 집에 민윤기가 있다는 말에 허락을 해줬지만, 사실 아기는 민윤기가 제일 싫어한다. 엄마 미안.
"아기 앞인데 말 예쁘게 쓸 생각은 없어? ... 김태형은?"
"몰라. 또 나갔어."
걱정될 정도로 집에만 처박혀있던 김태형은 요즘따라 자주 집에 없다. 걔가 제일 애랑 잘 노는데. 가만 보면 정신 연령도 비슷한 것 같고... 나는 아쉬운 대로 내가 잘해줘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누나... 이 형아들은 누구야?"
아이는 내 뒤로 숨어 내 옷깃을 잡아당긴다. 우리 뱀파이어야. 말 안 듣는 애들 피 뽑아 먹는 뱀파이어. 너도 조심해라. 나는 괜히 아이에게 겁주는 민윤기를 째려보며 아이를 안아든다. 그런 거 아니고 누나 친구들이야. 최대한 다정하게 말한다고 한건데 아이는 말없이 내 목을 꼭 끌어안았다.
"저 형아 무서워."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야. 너도 좋아하게 될 걸?"
"으응... 싫어. 못생겼잖아."
"야, 꼬맹이. 지금 말 다했냐?"
... 벌써 힘이 빠지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9
"누나, 이거 진짜 맛있다! 이렇게 맛있는 건 처음 먹어봐!"
"너 자꾸 거짓말 하면 코 길어진다."
"못생긴 형아 말은 안 들어."
"오늘 그 못생긴 형한테 한번 혼나볼래?"
"누나아!"
아이는 울상을 지으며 내게 안긴다. 민윤기는 아이의 뒤통수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본다. 둘이 티격태격 하느라 저녁 식사는 어느새 뒷전이 됐다. 내가 영혼을 갈고 볶고 존나 지랄 쌈바를 해서 만든 건데. 내 속도 모르는 둘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간다.
"윤기 형은 세상에서 제일 잘생겼다."
"......."
"뭐해, 안 적고."
싸움의 종착지는 받아쓰기였다. 한글이나 제대로 떼고 말하는 거냐는 민윤기의 시비에 아이는 무시하지 말라며 받아쓰기 시험을 자처했다. 꼭 백점을 맞아서 내게 보여주겠노라고 외치면서. 그래서 내게 떨어지는 이득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일단 아이를 응원했다. 연필을 쥐고 눈을 부릅뜨던 아이는 민윤기의 말에 동작을 멈춘다. 민윤기는 뻔뻔한 얼굴로 안 적을 거냐고 묻는다. 씩씩대던 아이는 뭔가 다짐한 얼굴로 종이에 쓱쓱 적어내린다.
융기 형은 새상에서 제일 안 잘생겼따.
'잘생겼다' 앞에 조그만 글씨로 '안'을 써넣었다. 민윤기는 지우개를 들이밀었지만 아이는 끝까지 사수한다. 한숨만 나온다. 나는 다시는 이 집에 아기를 들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10
김남준은 아침부터 소파에 누워 핸드폰만 보며 실실 웃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도 김남준 옆에 앉아 데칼코마니처럼 핸드폰이 뜨거워지도록 붙잡고 살았는데. 김남준을 빤히 쳐다보던 나는 그 옆에 가서 앉는다. 뭔데. 김남준은 여전히 핸드폰만 보며 묻는다.
"그렇게 좋냐?"
"씨발 존나 좋아."
입 험한 거 봐라. 이걸 네 여자친구가 봐야하는데. 나는 혀를 끌끌 찬다. 그래도 많이 좋아하나보다. 얼마 전에는 백일 이벤트 한답시고 고급 인력인 나에게 풍선 불기를 시켰었다. 그것도 벌써 두 달 전이었으니까, 김남준은 지금 거의 반 년째 사귀는 중이다. 이건 일주일마다 여자를 갈아치우던 김남준 인생의 최고 기록이다. 기네스북 대신 남준스북을 하나 만들어 적어놔야한다. 김남준은 묻지도 않았는데 나를 붙잡고 이제 진짜 연애를 하는 것 같다고 했었다.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나는 뭐, 단소라도 불어줘? 했다가 대차게 까였다.
"진짜 좋아하면 어떤 느낌이야?"
김남준은 드디어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본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팔짱을 끼더니 눈을 가늘게 뜬다. 안 그래도 못생겼는데 더 못생겨졌다. 나는 대답을 듣기 위해 그 정도는 감수하기로 한다. 아니다. 그래도 못 참겠다 싶어 쿠션으로 얼굴을 가리려는데, 김남준이 입을 연다. 길 가다가 예쁜 거라도 발견하면 사주고 싶다거나.
'이게 뭐야?'
'인형. 오는 길에 샀어. 너 생각나서.'
'얘 되게 못생겼는데?'
'그러니까.'
아니면 그냥 있다가도 갑자기 보고 싶다거나.
'여보세요. 어, 윤기야. 왜?'
'보고 싶어서.'
'어제 너 화장실에 있을 때 불 끄고 튄 거 나야. 미안. 잘못했어. 진짜 반성하고 있어.'
'.......'
'... 이거 아니야?'
'끊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내 모든 우선 순위가 뒤집힌다거나.
'뭐해. 빨리 타.'
'나 지금 젖었는데.'
'그러니까 타라고. 너 그러고 있는데 차가 중요하냐.'
김남준이 말할 때마다 스쳐가는 기억에 나는 인상을 찌푸린다. 결국 나는 아직 할 말이 많이 남은 듯한 김남준의 말을 가로챈다. 장난치지 말고 좀 진지하게 말해 봐. 김남준은 내 말에 눈을 부릅 뜬다.
"내가 이걸로 장난칠 사람으로 보여? 이게 성심성의껏 말해줘도,"
"웃기지 마. 그럼 민윤기는 나 좋아하게?"
"......."
"......."
"......."
"... 설마."
내 말에 김남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내 자몽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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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 / ㅉ 자몽C / 자몽소다 / 자몽에이드 / 자몽워더 / 자몽자몽 / 자몽청 / 자몽해 / 잘자네아무것도모르고 / 쟈가워 / 저기여 / 전아장 / 정쿠키런 / 정꾸기냥 / 제이 / 준나 / 쥬르주스 / 지민즈미 / 진이진 / 짝짝 / 짱좋음 / 쩌리 / 찌밍지민 종이심장 / 지민이랑 / 지팔 / 짱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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