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를
주웠습니다.
w.muscle king
아무래도 내 생각이 짧았던 듯 싶다. 아니, 짧았던 게 맞았다.
'정국..씨라고 했나?'
'.....'
'따로따로 가는 게 좋겠죠? 탄소씨는 제가 태우고 갈게요.'
'아, 저, 남준씨..'
'설마 이번에도 거절하는 건 아니죠? 그럼 나 진짜 서운해요 탄소씨.'
김남준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거절하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그게 아니라 정국이가 차가 없어서..'
'예? 차가.. 없어요?'
'..면허를 안 따서 차가 없어요. 아직 19살이거든요.'
'..허, 미성년자에요?'
'.....'
'진짜 어린친구였네요. 아, 나는 또.. 별것도 아니었는데..'
'남준씨.'
'아, 오해하지 말아요! 내 말은 그러니까 괜히 불안해했다, 이 말이었어요. 진짜 웃기죠. 탄소씨가 어린애랑 그럴 사람도 아닌데.. 미안해요.'
김남준은 전정국을 가만 두지 않았다.
애초에 전정국을 가만히 둘 사람이 아니었을 뿐더러,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사람에게 그것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이긴 했다.
그리고 예상 외로 전정국은 그 불같은 성격을 잘 눌러참고 있었다. 아마 내가 아까 아침에 했던 말 때문이겠지. 내 말을 잘 듣는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었지만 전정국이 신랄하게 무시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자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기분이 상당히 나빴다는 말이 더 적절할 것이었다.
김남준이 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전정국이 아닌 내가 다 민망해져 횡포를 부리는 김남준을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막 제지를 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내 선에서는 말려야 했다.
"여기 저번에 탄소씨가 맛있다고 한 곳이어서 다시 왔는데, 괜찮아요?"
"네. 전 괜찮,"
"김탄소 저 남자랑 밥 먹었었어?
저 남자랑 밥 먹는다고, 나한테 말한 적 없었잖아."
전정국이 내 손목을 잡아 세우며 내게 말했다.
아는 동생이라고 말한 게 무색해질 정도로 전정국은 필요 이상으로 간섭하고 있었다. 물론 전정국의 입장에서가 아닌, 아는 동생의 입장으로 봤을 때 말이다.
만약 전정국 그 자체로 본다면 내게 이렇게 따지듯 말해도 웃으며 넘어가 줄 수 있었지만, 아는 동생이 이렇게 참견을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상한 상황일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얼굴을 찌푸리고서 전정국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처신을 잘 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해뒀는데.. 이렇게 귓등으로도 안 쳐 듣다니 참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김남준은 나와 전정국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전정국에게 잡히지 않은 내 반대 쪽 손을 마주 잡았다.
"아는 동생이라고 들었는데.. 굉장히 관심이 많아요, 정국씨?"
"......"
"다른 데에서는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자칫하면 오해를 받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곤란해지니까요."
"오해 받아보라지. 난 신경 안써."
"정국씨를 말한 게 아니에요. 탄소씨를 말한 거지. 탄소씨가 곤란해지는 건 나도 싫어서."
"저 새끼가.."
"알았으니까 우리 좀 들어가는 게 좋겠어요. 홀에서 이렇게 셋이서 나란히 손 잡고 계속.. 둘 다 좀 놔봐요."
정국이가 이를 앙다무는 것이 보였다. 저러면 이빨이 상할 텐데.. 정국이의 손등을 엄지로 쓸어내리자, 정국이가 매서운 눈초리를 단번에 사그리고서 날 쳐다봤다.
김남준에게 대들어 봤자 득될 것은 없었다. 우스운 꼴을 보이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서서 전정국을 말려야 했다.
억지로 그 둘을 떠밀어 예약되어 있는 자리로 향하자, 애석하게도 그 자리는 네모난 모양의 테이블이 아닌 동그라미 모양을 가진 테이블이었다. 동그란 모양의 테이블은 익히 사람들이 말을 주고 받기에 가장 편하고 상호작용이 가장 잘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말은 즉슨,
"미성년자?"
"....."
"말 놔도 돼요?"
"아니."
"뭐, 그래요. 처음부터 말 놓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으니까요."
"....."
"딱 그 나이 대 남자아이 같네요. 자기가 뭐라도 됐다고 생각하는 거 말이에요. 그리고 예의가 없어도 귀엽게 넘어가주기 딱 좋은 나이죠."
"예. 그래서 마음껏 그렇게 해 보려고요."
"패기 좋네요."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만큼 기싸움이 끊이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그 사이에서 죽어나가는 것은 나일 테고. 덕분에 정말 지옥같은 저녁이 될 것 같지만 말이다.
코스가 먹기 편할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코스요리를 시킨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요리가 나오길 기다릴 뿐이었다.
남준씨와 나 둘만 있는 자리였다면 꽤 어색하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갔을 것이 분명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전정국도 함께였다. 속 좋은 전정국은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어앉아 내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는 등 야살스러운 스킨쉽을 해대고 있었고 나는 그런 정국이의 손을 잡아 내리기에 바빴다.
반대로 남준씨는 정국이를 빤히 쳐다보며 마치 육식동물이 자신의 먹잇감을 감시하듯 천천히, 그렇게 정국이를 뜯어보고 있었다.
아마 관찰이 끝나면 김남준은 여유를 되찾고서 전정국의 밑바닥을 내비추기 위해 온갖 짓을 다 할 것이 분명했다. 전정국이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까처럼 계속 당하고만 있을 성격은 아니었기에 어떻게 받아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남준이 서서히 여유를 찾고서 자세를 고쳐잡을 때 즈음, 다행인 건지 뭔지 음식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진정한 전쟁의 서막이었다.
"그나저나, 19살이면 학교 다니겠네요?"
"정국이는 학교 안 다녀요."
"아, 어디로 유학 가나 봐요?"
"유학은 아니고.. 아직 어리잖아요."
"전 12살 때 갔는데요, 뭘. 그럼 학교도 안 다니는 거고?"
"네. 홈스쿨링이 더 좋을 것 같아서요."
"정국씨는 학교를 좀 가야 할 것 같은데.. 뭐, 사교성이나 예의범절 같은 것들은 학교에서 쉽게 배울 수 있으니까요."
"....."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처음 보는 얼굴인데.. 정국씨는 어디 계열이에요? IT? 패션? 아니면 같은 그룹이에요?"
김남준은 분명 전정국이 이 쪽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저렇게 아랫 것들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쳐다볼 리가 없으니까. 분명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대놓고 물어보는 이유는, 아마 '이 곳은 네가 낄자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리라.
민망함을 주고 할 말이 없게 만들고 싶은 거겠지.
전정국 또한 그것을 눈치 챘는지 젓갈질을 하다 말고 눈을 치켜 떠 김남준을 쳐다봤다. 전정국이 젓가락을 던지듯 내려놓았고, 김남준의 얼굴에는 뜻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 계열이면?"
"뭐 다른 게 있나요. 그냥 물어보는 거죠. 하하, 이 바닥에서도 위, 아래가 있으니까요."
"그럼 내가 그냥 위 할게요."
"그럴래요? 그래요, 그럼. 지금 아니면 언제 윗공기 마셔 보겠어요. 사회생활 하게 되면 평생 아래만 해야 될 텐데."
"아래, 많이 해봤나 봐요? 말하는 거 보니 평생 아래만 했나 보네."
"오, 그래도 국어는 좀 하나 봐요?"
"네. 윗자리 하게 해줘서 고마워요. 이제껏 땅에만 있었는데 지하에 있는 사람 때문에 하늘에 가보게 생겼네."
"....."
"안 드세요? 아, 윗 사람이 명령해야 먹어요? 참 본성 안 변하네요. 그럼 먹도록 하세요, 이제."
전정국의 마지막 한 방에 순간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김남준에게 한 방을 먹인 전정국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다시 젓가락을 들어 밥을 먹기 시작했다.
김남준은 과연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당황한 표정? 기분 나쁜 표정? 단언컨대 좋은 표정은 아닐 게 분명했다.
누가 들어도 정국이가 한 말은 비꼼성이 다분했으니 말이다. 호기심을 참지 못 하고 시선만 돌려 김남준을 쳐다봤을 땐, 대체 무엇 때문인지 김남준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은 듯 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연기인 건가 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아랫 것들을 보는 듯한 눈으로 정국이를 쳐다보며 느긋하게 행동을 하고 있었다. 정말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큽, 크흠.. 남준 씨, 좀 드세요. 아까부터 잘 안 드셔서.."
"아, 네. 탄소씨도 많이 드세요. 하루종일 힘들었을 것 같은데.."
"..조금만 이해해줘요. 정국이는 이런 거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어릴 때니까요. 저도 그랬는데요, 뭘."
"되게 얌전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저 나이 대에 얌전하면 그것도 이상한 거죠. 어린애잖아요."
김남준은 철저하게 정국이를 어린애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까 전의 일도 그냥 어린아이의 치기로만 생각해서 그런 그런 거였겠지.
그래. 다시 말해 김남준은 정말 정국이에게 모든 것을 양보해주고 있는 것이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약자에겐 약한 사람' 이라든가, '아래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같은 그런 말들. 김남준은 지금 전정국을 자신보다 약한, 아래 사람으로 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전정국은 눈치를 못 챈 것 같지만 차라리 다행이었다.
전정국이 조금만 더 눈치가 빨라 김남준의 속내를 알았다면 당장 이 테이블을 엎고 일어났을 테니 말이다.
전정국이 한 방 먹임으로써 조금 잔잔해질 줄 알았는데.. 웬걸 김남준에게는 전혀 먹히지를 않으니 전혀 진전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입을 처닫고 밥만 먹는 것이었다.
물론 전정국이 잔망스러운 장난을 친다면 못 이기는 척 기꺼이 받아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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