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sh
[방탄소년단/민윤기] 반장, 불 꺼
11월의 아침 바람은 어지간히도 찼다. 손끝이 죄다 얼어버려서 양 손을 동그랗게 말아쥐고 걸음을 느그적 거리며 옮겼다. 진짜 존나 춥다. 욕나오게 춥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였는데 두 다리 멀쩡하고 아침에도 빨리 나와서 시간은 차고 넘쳤지만 추위에 유독 약해 겨울에는 항상 곤혹이었다. 만원 버스를 타기는 더 싫으니 하는 수 없이 걷는다지마는. 하얀 컨버스화 밑창으로 은행이 밟히는 느낌이 찝찝했다. 학교 근처 버스 정류장을 지날 즈음, 살짝 까치발을 들어 엿보니 역시나 민윤기.
내린다, 내린다. 버스에서 내리는 단정한 뒷통수와 다섯 발짝 거리를 두었다. 오늘은 가죽자켓에 워커. 춥지도 않은가. 멋부리다 얼어죽지. 오는 길에 산건지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잔. 손끝 빨갛네. 추운가 보다. 오늘 체감온도 영하 십칠돈데. 저거 커핀가. 지난번에 보니까 쓴 거 잘 못 마시던데. 안 어울리게 핫초코 같은거면 웃기겠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다보면 학교는 금방이었다. 가는 길 중에 민윤기랑 같이 걷는 길은 5분 밖에 되지 않는데 이게 뭐라고 나는 2학년 때보다 등교 시간을 30분이나 당겼다. 민윤기는 학교에 가장 먼저 오는 선생님들 중 하나였고, 그래서 그 시간에 학교에 가는 사람은 나랑 민윤기밖에 없었다. 나는 민윤기를 존나게 잘 알지만 민윤기가 나를 모를까봐 인사도 제대로 못했다. 민윤기가 내리는 버스정류장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딱 다섯 발짝 걸음을 남겨두고 함께 걸었다. 오늘 가죽 자켓 잘 어울려요! 이런 시덥잖은 얘기도 속으로만 곱씹는다. 진짜 잘 어울리네. 이런 생활이 근 1년은 지속되었는데 발전없는 나도 나지만 민윤기도 대단했다. 매일 같이 등교하면서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 조심."
내 앞으로 차가 쌩하니 지나갔다. 미쳤다. 정신도 없지. 바닥만 보고 걷는 습관도 있는데 거기다 딴 생각까지 하니 진짜 교통사고 날 뻔 했다. 내 팔뚝을 잡고 있는 민윤기의 손을 물끄럼 바라봤다. 시선을 올려 민윤기의 얼굴을 쭈볏쭈볏 바라봤다. 아, 감사하다고 말해야 되나?
" 앞에 보고 다녀야지."
야속하게도 초록불로 바뀐 신호등에 민윤기는 지 할말만 하고 쏙 먼저 지나갔다. 감사해요, 뿌옇게 입술 새로 샌 인사는 바람에 잘게 잘려 금세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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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동아리 가자. 빨리."
" 아오, 진짜 이 기집애. 아주 민윤기에 환장을 해가지구."
" 야. 그렇게 크게 말하면 어떡해!"
" 아, 그거 나름 비밀이었냐?"
애둘 다 아눈뒝, 약올리는 친구 손을 붙들고 동아리실을 향해 갔다. 수업도 못 듣는 판에 얼굴을 익힐 수 있는 기회라곤 동아리뿐이었다. 민윤기는 세상 불만인 썩은 표정을 하고, 라이더 자켓에 피어싱도 뚫었으면서 과목이 문학이었다. 아니, 프레임을 씌우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존나 안 어울리는 건 부정 못 할 사실이었다. 여하간 문학은 2학년 과정이고 민윤기는 올해 우리학교에 와서 나는 민윤기를 수업에서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잔상이라도 남기고자 택한 차선책이 동아리였다. 치열한 경쟁 끝에 당당히 민윤기의 문학 바로 알기 (민윤기의 동아리 이름. 솔직히 노잼이다.) 동아리에 입성할 수 있었다. 애들한테 샤바샤바로 반장 자리도 따냈고 인사하는 것도 내 몫이었다. 우리는 문학에 대한 치열한 고민과 열띤 토론을 함께 공유, 하긴 개뿔. 고 3에게 동아리는 그냥 자습시간의 연장선일 뿐이었다. 민윤기는 의례식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산문이나 시같은걸 가져와서 읽어주곤 했다. 민윤기 취향의 뉴에이지곡을 틀어놓고 미친 듯이 자습하는 게 우리 동아리의 설립 취지였다. 어쨌든 나는 일주일 중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민윤기는 진짜 문학 하려고 태어난 사람일까. 평소 말할 때도 물론 좋기야 하지만 목소리 착 깔려서 시 읽으면 진짜 그렇게 섹시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 발전이라면 그림자처럼 함께 하는 등굣길 보다야 나누는 대화의 양이 현저히 많았다는 것. 사실 그 중 8할은.
" 반장. 인사."
" 차렷. 경례."
옆에 앉은 친구가 옆구리를 콕콕 찔렀다. 좋냐? 너한테 말 걸어서? 이마를 짚고 고개를 살짝 틀어 입모양으로 말했다. '학우야, 폭력을 행사하기 전에 입을 싸물어주련?' 충격받은 척 하는 친구를 방치하고 풀다 만 영어 독해 책을 폈다. 노트북으로 잔잔한 뉴에이지를 틀어둔 민윤기가 창가에 걸터 앉아 둘러보더니 곧 책 한권을 가지고 왔다.
" 오늘은 먼저 읽어줄테니까 흐름 끊지 말고 자습 계속 해."
귀에 쑤셔넣었던 조그만 귀마개를 뺐다. 아무리 고 3이고 수능이 코앞에 닥쳤다지만 애들도 민윤기 목소리는 듣고 싶었는지 경청하려는 자세다. 짙은 빨간색 책. 민윤기가 좋아하는 산문집이다. 얼마나 좋아하면 수도 없이 페이지를 접었을까. 나도 용돈을 털어서 샀다. 같은 책. 민윤기가 무슨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해서. 같이 해보고 싶어서. 민윤기는 수업할때만 쓰는 뿔테안경을 쓰고 페이지를 폈다.
나는 너의
나는 너의 무엇이 될까
빛이 될까
꿈이 될까
비밀이 될까
요새가 될까
피가 되어 너를 목마르게 할까
독이 되어 너의 숨을 막을까
사람이 되어 너의 가지를 간섭할까
사랑이 되어 너의 뿌리를 뒤흔들까
혹은 너의 실핏줄 사이를 바람으로 촘촘히 묶어
그 고난한 생의 숲을 포획할까
혹은 깊고 낮은 바닥의 차가운 물로 흘러
그저 무해한 풍경으로 사라질까
무엇이 될까
나는 너의
발끝이 오므라들게 좋은 목소리다. 말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하여간 그랬다. 이제 자습할까, 민윤기는 애들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거기 서 시를 읽어주는 민윤기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평소답지 않게 대뜸 부탁한건 그래서였다. 밖은 칼바람이면서 햇빛은 포근했고, 그 햇빛을 받는 민윤기는 반짝반짝했고, 그 날 아침엔 나를 알든 모르든 민윤기가 나한테 말 걸어줬으니까.
" 선생님, 하나 더 읽어 주시면 안 돼요?"
민윤기는 곤란한 듯 볼께를 긁적거리다 그러지 뭐. 하고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꼼짝도 없이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은
쓸쓸한 일이라는 것을
사로잡히면 잡힌 대로
밀어내면 밀려 나는 대로
온통 고스란히 겪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숨도 쉬지 못하고
꼼짝도 없이
바라만 보다가
" 이제 진짜 자습하자."
낮은 물결이 치는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 왔다. 어쨌거나 숨도 못쉬고 꼼짝도 없이 바라보는 건 민윤기를 만나고 지난 1년 간 내가 제일 잘 하는 일이었다. 시 진짜 잘 고르네. 어떻게 이렇게 마음 후벼파는 걸로만 골라오지. 사람 속쓰리게. 하여간 민윤기의 목소리 덕택에 그 자습시간은 날렸다. 민윤기의 목소리는 그 날 왼종일 나를 따라붙어서 마음을 간지럽혔다. 사로잡히면 잡힌대로 밀어나면 밀려나는 대로 온통 고스란히 겪을 수 밖에 없는 밤이었다.
" 오늘 민윤기가 입은 라이더 자켓 봤어? 진짜 잘 어울리지 않냐?"
" 응. 마른 줄만 알았는데 어깨 있어서 그런가 잘 어울리더라. 근데 너는 왜 말끝마다 민윤기 민윤기냐?"
" 어?"
" 그렇게 좋아하면 선생님 대우는 해야되는거 아니냐?"
종종 그런 논리를 펴는 애들이 있었다. 못해도 여섯살 차이는 날텐데 젊은 편이라지만 왜 민윤기냐고. 애들한텐 뭔가 오글거려서라고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 진짜 이유는 아니었다. 선생님이라고 불러버리면 진짜 선생님과 학생으로만 묶여버리는 것 같아서 그랬다. 민윤기라고 부르면 그 뒤에 어떤 말이 올지 아직 안 정해진 건데 선생님이라고 하면 이제 그냥 영원히 선생님, 낯이 익은 제자 이 정도가 되어버릴 까봐. 사소한 호칭으로라도 범위를 넓히고 싶었다. 우리가 될 수 있는 관계의 범위.
새벽녘에 자기 전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한다. 큰일이다. 진짜 깊어져버렸다. 처음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상황이 문제긴 했다. 여고라는 특성 상 만날 남자는 거의 없었고, 근처 지나다니는 남학교 학생들은 무슨 절에 들어갈건지 머리를 밤톨마냥 깎아놨다. 너무 어리기도 했고. 그러니까 이성적으로 대할 남자가 없었고 그러다가 민윤기가 온거다.
겨울 방학이 끝나는 개학식 날, 온 학교가 들썩였다. 여학교에 첫 부임한 남교사의 존재감이란 그런거였다. 우리 학년 수업에 안 들어온단 사실을 아주 통탄해 했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냥 호기심 정도였다. 일단 강당에서는 존나 멀었기때문에 민윤기는 기껏해야 내가 먹고 있던 포스틱만 해보였고 히멀건 한데다 삐쩍 말라서 히마리도 없어보였다. 그리고 어딘가 싸해보이는 표정. 화나면 무섭겠다. 그게 짧은 탐색 결과였다.
민윤기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며칠 후, 도서관에서였다. 도서부 친구가 대타를 부탁해서 마지못해 도서관으로 향했다. 속이 좋지 않아 밥도 거르고 갔기에 당연히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있었다, 민윤기. 테이블에 앉아 괜히 트럭에 놓인 책이나 끼적거리며 곁눈질로 민윤기를 살폈다. 주로 왔다갔다 하는 서가는 800번대였다. 문학 선생이란게 영 구라는 아니었던 모양. 한참을 시집 코너에 머물렀다. 그때는 몰랐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니까 되게 책냄새랑 잘 어울린다. 하얀 옆모습이 자꾸만 잔상으로 남았다. 자꾸 시선으로 행적을 좇게 되었다. 헐, 눈 마주쳤다. 잽싸게 소설을 펴고 읽는 척 했다. 설마 봤나. 그냥 고개 돌린 건데 내가 혼자 찔린 거 아닐까. 아니, 근데 보면 좀 어때. 그냥 신기해서 볼 수도 있지.
" 대출이요."
발자국 소리도 못 들었다. 티나게 화들짝 놀라버린 나는 허겁지겁 책을 받아들었다.
" 성함이요..."
" 민윤기."
ㅁㅣ 뉴ㅇ 기... 손도 바들거려서 오타를 몇번이나 냈다. 도톰한 시집과 우주가 그려진 소설책이었다. 바코드를 찍는데 이 멍청한 놈의 기계가 인식이 되질 않았다. 한 삼십번 쯤 누르고 있자 뭔가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챘다. 뭔가 시선이 따가와서 고개를 살짝 들자,
" 그거 가격 바코든데."
" ...아."
뵹신같은 나새끼의 손은 어느새 책을 반대로 뒤집고 가격 바코드를 연신 찍어대고 있던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지 손으로 살짝 얼굴을 가려 몇 분이나 웃어 재끼던 민윤기였다. 근데. 음. 웃는 거 본 사람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음. 좀.
" 수고해. 다음부턴 바코드 잘 찍고."
민윤기의 찬 손이 머리 위에 얹어지더니 가볍게 쓸어주었다. 민윤기는 도서관 미닫이문을 열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나는 점심시간 내내 양 뺨에 손을 얹어두고 열기를 식히려고 노력했다. 미친 거 아닐까. 왜 저렇게, 왜 사람 졸라 설레게 왜 저렇게 웃지? 왜 쓰다듬어!! 침대를 데굴데굴 거리며 생각해봐도 뾰족한 답은 없었다.
남들이 듣기에는 존나 사소하겠지만, 처음 보는 민윤기의 웃음, 차고 커다란 손. 그 우스울 정도로 작은 불씨는 바싹 말랐던 내 마음에 자꾸만 옮겨 붙었다. 아무리 입김을 불어도 꺼지긴 커녕 불길은 더욱 세지기만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수능을 친지도 벌써 세 달이 넘었다. 학교는 나갔는데 무슨 이상한 강연같은거나 듣고 거의 졸업에 가까워졌으니 별 의미없는 방학도 빠르게 흘렀다. 괜히 학교에 짐 놓고 왔단 구실로 몇 번 들어갔다왔는데 괜히 학생부장이나 만나고 그렇게 찾아헤매던 민윤기는 볼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아는 동생에게 들으니 겨울방학 내내 어디 연수를 갔댔다. 학교에 없으려니까 정보력도 이렇게 없다.
짧지 않은 방학에는 그동안 못 했던걸 해치우듯 해봤다. 쨍한 빨간색, 탈색, 애쉬, 무슨 이름도 생소한 색으로 마구 염색해보다가 졸업식 시즌이 다가와서 검은색으로 다시 덮었다. 두어달 되는 시간동안 머리를 못 살게 했던 것치곤 머릿결이 많이 상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수험생때는 머리 감는 것도 문제고 말리는 것도 문제고 여러모로 귀찮아 중단발을 유지했던 머리도 꽤많이 길렀다. 살도 저절로 빠졌다. 딱히 다이어트를 했다기보다 그냥 밥 먹기 귀찮아서 몇 끼씩 굶었더니 저절로 빠지더라. 친구한테 붙들려서 반강제로 다녔던 요가학원 덕도 좀 봤다. 차는 없지만 운전면허도 따고, 열심히 꾸며도 보고. 다들 그럴 나이라니까.
순식간에 졸업 날이 찾아왔다. 애증의 학교였지만 그래도 12년 세월이 무섭긴 하더라. 시원섭섭한 기분에 슬쩍 우울해지기도 했다. 하기야 대학교도 여기서 많이 멀진 않으니 종종 찾아올 수 있지만.
괜히 아침에 일찍 눈이 떠져선 씻고 화장도 하고 오랜만에 교복도 입었는데 그래도 일렀다. 그냥 학교나 둘러보잔 심정으로 그대로 출발했다. 계절이 계절이다보니 해가 채 뜨지도 못했다. 이렇게 어슴푸레한 거. 오랜만이네. 방학에는 규칙적으로 11시 기상이었으니 당연했다. 학기중엔 민윤기랑 같이 학교 간다고 이때쯤 가곤 했지. 어스름이 천천히 걷혔다. 학교에 도착해서 교실쪽을 지나고 있자니 아침 햇살이 비스듬이 침투했다. 괜히 센치해져선 복도 벽에 살짝 기대 창밖을 내다 봤다. 여기서는 목련이 잘 보였다. 치열했던 여름방학을 문득 떠올리고 있는데,
" 누구야?"
익숙한 음성. 홱 뒤를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민윤기였다.
" ... 뭐라도 마실래?"
그렇게 그대로 국어과 교무실에 입성했다. 편하게 앉으라고 의자를 빼줬는데 어쨌거나 좌불안석이었다. 이렇게 오래, 개인적으로, 말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교무실은 난방 안 돌려서 추운데 괜히 손에 땀 나는 것 같고.
"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졸업식 시작하려면 아직도 40분은 남았는데."
" 괜히 싱숭생숭 해서... 선생님은 왜 혼자 학교에 계세요?"
" 아, 연수 갔다 와서 서류 정리할 게 좀 있어서."
아, 맞아. 그 썩을 놈의 연수. 어쩐지 좀 쾡해진 것 같기도 하고.
" 그래, 이제 해방이네. 어때?"
" 그냥 그래요. 뭔가 허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지만."
민윤기는 한참을 고민하더니 밀크티를 타서 왔다. 나는 좋아하는데 안 좋아해? 다 탔으면서 치사하게 물어봤다. 애초에 나한테 좋고 싫음이 어딨지? 민윤기가 좋다면 나는 싫은것도 좋아할 건데.
" 올 한해동안 동아리반장 하느라 수고많았다. 이건 내가 주는 선물."
한참을 책꽂이 앞에서 서성이더니 건넨 게 시집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데 특별히 주는거야. 나는 한 거 인사밖에 없는데 이런 걸 덥석 받아도 되나, 약간 고민됐지만 어차피 준거고 그것도 민윤기 손때가 묻은건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따뜻한 햇볕이 창을 투과해 쏟아졌고 교무실은 아까 우렸던 홍차향으로 가득 찼다. 민윤기가 문서정리 하느라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고, 그 위로 내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겹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딘지 익숙하고 포근했다.
그렇게 20분여가 지나니 슬슬 애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짐 놓고 갔나. 내 휴대폰으로도 전화가 오기에 슬슬 일어날 준비를 했다. 내 몫의 물건을 챙겨서 민윤기 앞에 엉거주춤 섰다. 민윤기가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슬쩍 올려다보았다. 숨이 막혔다가도 차라리 마음 편했다. 이젠 다신 못 볼 내 첫 사랑.
" 선생님, 저도 일년동안 감사했어요. 선생님 덕분에 좋은 글도 많이 알게 되고 동아리 시간에 선생님이 시 읽어주시는 것도 좋았고..."
어째 말이 좀 길어진다. 민윤기의 표정은 그대로다. 동공은 갈 길을 잃고, 고개를 급히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 그리구... 말 못했었는데,"
좋아했어요. 많이.
작은 목소리로 빠르게 중얼거리고는 당장에 교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오, 미친. 내가 무슨 객기를 부린거지? 일년동안 꾹꾹 참아왔는데. 아니 이제 못 보긴 하겠지만. 민윤기가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었다. 내가 입 밖으로 낸 것과 내지 않은 것에도. 속시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민윤기 눈엔 그냥 난 동아리원 16 정도일텐데 미쳤지, 내가. 아니, 그걸 어쩌자고 말했지? 민윤기가 그런다고 나한테 관심 갖지도 않을 거잖아. 슈벌.
강당으로 가는 통로 내내 겨울 바람은 에일듯이 차게 불었다. 고여서 썩어버릴 마음이었는지, 예쁘게 맺힐 마음이었는진 몰라도 이젠 행방을 알 수도 없이 흘러가버렸다. 잘 도착했는지. 내가 지샌 수많은 밤과 목적지가 명확했던 눈길, 삼켰던 수많은 숨과 망설이던 발걸음. 잘 도착했는지. 알았는지. 알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다. 주인을 떠난 마음은 황망히 교정을 떠돌았고, 들고다니기에도 버겁게 불어나버린 마음을 내려놓으니 발걸음이 가벼웠다.
바야흐로 내 첫사랑의 졸업식이었다.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 응? 아...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생각 좀."
민윤기가 내 코끝을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오늘 어땠어? 안 피곤해? 도닥이며 잠긴 목소리로 묻는데 본인이 제일 피곤해보인다. 안그래도 테라스에 있는 스파로 몸을 녹이고 왔더니 노곤노곤 해지던 차였다. 나란히 커플 잠옷을 입고 폭신한 침대에 누워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 나는 완전 재밌었는데? 일본 진짜 타코야끼 먹은것도 좋았고 우리 밤에 편의점 간것도 재밌었구."
" 저녁에 비싼 거 사줬더니. 편의점이 더 좋았어?"
" 응. 근데 오빠 우리 앞으로 겨울에 삿포로는 오지 말자. 결혼식때도 눈 많이 와서 하객분들 엄청 고생했는데 신혼여행도 이렇게 고생하고."
" 방학 때문에. 더운 것 보단 낫잖아."
기어코. 4년의 연애끝에 우리는 결혼했다. 남들은 너무 이르다고 그랬지만, 어차피 종착지가 민윤기일텐데 돌아갈 필요 뭐 있나 싶었다. 나는 그냥 빨리 내꺼라고 도장찍는 게 더 중요했다. 유부남이랑 싱글은 다르니까. 우리 좋자고 하는 결혼이라지만 그래도 남 눈치는 좀 봐야했다. 둘 다 성인이 되고나서야 연애를 시작했지만 사제지간이었고, 나이차도 어느 정도 났으니까. 나는 덥석덥석 결혼을 하자고 졸랐는데 민윤기가 그어놓은 마지노선이 올해였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난 스물 다섯은 넘기자고. 그래서 덥석 1월에 결혼 날짜를 잡았다. 하필이면 눈이 펑펑 내려서 하객들은 힘들었지만 분위기는 좋았다. 거의 동창회가 되어버린 탓도 있고.
" 하여간 학교가 문제야. ... 학교에 요새 오빠 좋다는 애들 없어?"
" 질투나?"
" ... 나도 열아홉이었잖아."
" 난 열아홉 여자애 신경쓰인 게 아니라 니가 신경쓰인건데."
" 어렵게 말하지 마."
" 너 아니면 아무도 안 들어온다고."
" ..."
" 어, 얼굴 빨개졌다."
민윤기 개새끼.
" ... 그런건 원래 모른척 하는거야."
" 보이는데 어떡해."
" 아 몰라, 불 끌래. 빨리 자."
" 그냥?"
" 어?"
" 그냥 자자고? 우리 첫날 밤인데?"
" ..."
" 반장, 불 꺼."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 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 처음 짧은 축복에 몸둘 바를 모르리.
동그란 뒷통수가 갈피를 못잡고 흔들렸다. 공부하느라 많이 피곤한가. 좀 있으면 상모돌리기라도 할 것 같아서 지나가는 척 등을 두드려 깨웠다.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빨개지는데 삼초. 발그스름해진 얼굴을 책상에 푹 묻고 풀던 문제집에 집중하는 모습. 아, 아닌가. 같은 부분에 계속 밑줄이 쳐졌다. 찬 손등을 얼굴에 번갈아 대면서 열을 낮추려는 모양이었다. 스탠딩 책상 근처까지 가서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귀엽네. 순간 온전히 나와버린 본심에 당황했다.
신경쓰였다. 언제부터인지도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그 아이가 걷는 모습, 조는 모습, 얘기하는 모습, 해사하게 웃는 모습 하나하나 눈길이 갔다. 처음은 도서관, 그 다음은 동아리 반장. 접점이 많아질수록 떠오르는 빈도도 잦아졌다. 저와 등굣길을 함께 하는 걸 알았다. 우연치않게 숨어있는 뒷통수를 봤다. 부러 발걸음을 맞춰 주었다. 내가 걸어온 발자국대로 그 애가 걸어왔다.
사랑에 있어서는 승부사 기질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방황이 길었다. 아무 여자나 성취감에 도취되어 만나고 다녔다. 그렇게 알게 된 애인관계가 제 발로 설 수 있을리 만무했다. 절름발이 애정은 대학교에 가선 더 비뚤어졌다. 배신당한 적도 숱했고, 자신이 실수했던 연애도 수두룩했다. 그래서 더 그 속도에 맞춰주고 싶었다. 그 나잇대만의 그 첫사랑을 지켜주고 싶었다. 동아리 시간 전에는 식후땡 담배 냄새를 지우기 위해 섬유유연제를 뿌리고, 3학년 동을 지날 땐 향수를 뿌렸다. 진심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어느새 농도가 짙어졌다. 그걸 깨달은 게 너무 늦었다. 발을 뺄 수도 없게 깊숙이 빠져버린 후였다.
그 아이의 뒷통수를 보면서 생각했다. 내가 너의 무엇이 될까. 빛이 될까 , 꿈이 될까, 비밀이 될까, 요새가 될까, 피가 될까, 독이 될까, 너의 가지를 간섭할까, 너의 뿌리를 뒤흔들까, 고민으로 지새우는 밤이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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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에 올렸던 리퀘글 재업 박제! 내일 학교가는 여러분 모두 힘냅시다... 'ㅁ'! 생각해보니 내일 아니라 오늘이네요? ㅋ... 져는 보충에도 열시야자 뛰는 수험생 현역 ^ㅁ^!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향후 계획을 얘기하자면! 일단 제가 쓰는 사극빙의글을 하나의 큰 제목으로 묶어서 옴니버스 시리즈로 만들까 고민중이에오! 텍파로 만들기 용이하도록.. 그리구 고양이 얘기도 차차 마무리지을거구, 제가 핵 대박 보고싶은 라디오 피디 윤기와 슈스 지민이와의 삼각관계도 보고싶구요! 일단 확언할 수 있는건 아마 다음 사극물은 호석이로 오게 될 거시란 것.... 모두 좋은 밤 되세용 ^ㅁ^! +++ 혹시 참고로 윤기가 읽은 시집이 뭔지 궁금하시다면! 황경신 작가님의 산문집 '밤 열한시'에서 발췌한 시 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산문집이구 다른 책들도 모으는 중이에오 ;ㅅ; 새벽감성 터지시는 분들은 이 책 추천드릴게요! 같은 작가님의 '생각이 나서', '초콜릿 우체국'도 좋아하는 책이랍니다 ^ㅁ^ 암호닉 신청은 언제든지 환영이랍니다! 이번주 내로 암호닉 싹 정리해서 공지 띄울테니 그때 확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