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 OST - Waltz in sorrow
경성 비밀결사대 06
written by 스페스
"어...어. 다행이다. 정말. 정말로 다행이에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상상치도 못한 전개였다. 카페 스페스의 소년이 창고 안 그 남자였다니. 현기증이 날 만큼 어지러웠다. 눈앞에 선 소년이 날 보며 미소 지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소년의 웃는 얼굴이 한없이 느리게 보였다. 자꾸만 울컥하는 감정에 주책맞게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았다. 덥석 소년의 팔을 잡으니, 그의 표정이 금세 일그러졌다. 갑작스레 총알에 스친 상처가 떠올랐다.
"괜찮은 거예요? 치료는 했어요?"
"괜찮을 거예요."
"얼굴이 전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그쪽 자꾸 식은땀도 흘리고."
"진짜 괜찮아요. 그러니까 오늘 일하러 나왔죠. 그리고 제 이름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박지민이에요."
소년이 팔을 떼어내고는 피에 물든 천을 내 손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 봐도 하얗게 질린 낯으로 애써 웃는 그가 걱정되었다. 정말 치료는 한 건지. 찢어진 부위는 꿰맨 건지. 차마 묻지 못했지만 함께 있었다는 그 친구는 괜찮은 건지. 그리고 내게 이렇게 정체를 밝혀도 되는 건지. 여전히 넋이 나간 채 손바닥 위에 놓인 치맛단을 내려다보자, 지민이 내 주먹을 말아 쥐여주고는 제 걸음을 옮겼다.
"저기요."
"네?"
인파 속으로 걸어들어가던 지민이 뒤를 돌아보았다.
"나한테 이렇게 알려줘도 돼요?"
"걱정했을 것 같아서요. 아무래도 내가 살아있다고 하면 좀 안심이 될까 해서."
"만약에 내가 이 비밀 지키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럴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그날 숨겨주지도 않으셨을 거예요"
그가 씩 웃고는 인사하려는 듯 손을 올리다가 얼굴을 구겼다. 상처 부위 때문인 듯했다. 금세 반대편 팔을 흔들며 애써 괜찮은 척 하는 얼굴이 눈에 밟혔다.
"병원 가봐요. 꼭."
"아, 같이 있던 남자분께는 비밀이에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지민은 북적이는 사람들을 뚫고 길가로 뛰었다. 이제 막 도착한 전차에 올라탄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전차에 난 창문 사이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여전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전차가 조금씩 속도를 내자, 그의 모습이 멀어졌다. 그제야 온몸에 힘이 풀렸다.
* * *
석진은 병원 가장 안쪽에 위치한 특실 문을 두드렸다. 노크 소리에 병실 안에서 호흡이 가쁜 남자가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오하이리(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석진의 눈에 얼핏 세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와 그 곁에 선 두 남자. 분명 병문안을 온 이들일 테다. 오늘 오전만 해도 네댓 명이 병원을 다녀갔다. 특실 앞은 방문객으로 북적였으나 출입이 허용된 이들은 몇몇 뿐이었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병실에 들어온 두 사람을, 석진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조선방직공장 사장과 그의 아들. 둘은 보기에도 고급스럽게 차려입은 모양새였다.
찰나의 순간 두 사람을 훑어본 석진이 곧장 환자에게로 다가갔다. 혈관에 연결된 링거액이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석진은 익숙하게 청진기를 귀에 꽂고 환자의 심박수를 확인했다. 문진표를 작성하고 있는 사이 침대 맡에 선 중년 남성이 다가와 물었다.
"경과가 어떻습니까?"
일본 경감의 입원 소식에 득달같이 달려온 조선인이라. 석진은 순간 불쾌함을 느꼈으나 능숙하게 얼굴에 남은 감정을 지워냈다. 평소 석진은 감정 조절에 능한 편이었다. 오랜 시간 단련된 탓이다. 석진을 찾아오는 환자 중에는 늦은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찾아오는 독립운동가도 있었지만, 오늘처럼 총독부 고위 관료도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동안 석진은 어떠한 상황에도 일말의 진심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웠다.
"경과가 좋네요. 다행입니다. 빗맞았어요."
"유능한 의사선생님 덕분인가 봅니다. 우리 경감님 잘 좀 부탁드립니다."
남자의 말에 석진이 가볍게 목례를 했다. 이윽고 고개를 드는 순간 중년 남성 옆에 선 제 또래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민윤기. 조선방직공장 사장의 아들, 아니 정확하게는 조카. 한눈에 보기에도 병실 안 상황이 지루한 듯한 윤기가 간신히 하품을 참아냈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윤기는 비스듬하게 고개를 꺾은 채 석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석진 또한 굳이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왠지 모르게 피하고 싶지 않았다.
「경감님. 윤기가 먼저 인사드리자고 해서 왔습니다.」
경감의 침대 곁으로 다가간 중년 남성이 어설픈 일본어로 말했다. 석진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누가 봐도 윤기는 목줄에 묶여 끌려온 듯, 병문안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윤기야, 인사드려야지."
남자가 그의 팔을 잡아당기자, 그제야 윤기가 삐딱한 시선을 거두고 침대로 다가갔다.
"제 아들 녀석입니다."
남자가 경감에게 자신의 아들을 소개했다. 이미 문진은 끝났음에도 석진은 병실 안에서 미적거렸다. 그리고는 병실 밖으로 나가 직접 링거액을 들고 돌아왔다. 보통 링거액 교체는 간호사의 몫이었지만 병원 안 누구도 석진의 행동을 별스럽다 여기지 않았다. 병실 안을 드나들 수 있는 의료진은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었다. 경감은 한창 방직공장 사장과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사장이 말을 하다가 버벅거리면 그의 조카가 능숙한 일본어로 대신 전달했다. 석진은 경감 팔에 놓인 주삿바늘에 새 링거액을 연결하며 그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주제는 곧 입국하는 방직공장 친 아들에 관한 얘기였다.
"그 녀석이 사고뭉치라 걱정입니다."
"동경에서 유학을 했으면 많이 배워 오겠군."
"그러게요. 아들녀석이 제 가업을 물려받을 그릇은 아닌 것 같고, 경성에 오면 무얼 할지 걱정입니다."
석진은 침대 위 철제 고리에 링거액을 걸으며 부자의 방문 의도를 간파했다. 분명 제 아들의 인사청탁을 위해 병문안을 온 것이리라. 이윽고 긴 튜브를 타고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는 액체를 확인한 석진이 병실 문을 닫고 나왔다. 머릿속엔 온통 곧 경성에 발을 디딜, 방직공장 친아들 생각뿐이었다. 사진 속 소년의 해사한 얼굴이 다시금 석진의 눈앞을 스쳤다. 속으로 태형의 입국까지 남은 날짜를 세며, 석진은 진료실로 향했다.
* * *
남준은 시계를 보며 총독부에 들어섰다. 다음 호 특집 기사에 실을 부경감과의 인터뷰를 위해서였다. 빠른 걸음으로 2층 계단을 올라선 남준이 부경감의 방앞에 멈춰 섰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다. 데스크에 선 비서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남준은 문 앞에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곧 문이 열리고 남준이 실내로 들어서자 소파 위에 앉은 부경감이 반색하며 앉으라고 고갯짓을 했다. 남준이 착석하고 곧이어 자매지인 일본신문 기자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남준은 꽤 높은 천고와 원목으로 마감을 한 벽면을 훑어보았다. 실내 곳곳을 살피는 남준을 보고, 부경감이 말했다.
"괜찮나?"
"네. 안목이 좋으시네요."
"자네 일본어가 더 훌륭하네."
두 사람이 웃었다. 남준이 자세를 고쳐앉고 가방에 든 수첩을 꺼내들었다. 시작하실까요. 경감이 일제 담배를 비벼 끄고는 턱을 괸 채로 남준을 응시했다.
"자네 생각부터 말해보게."
"무조건 찬양하는 기사는 조선 사람들의 반감을 일으킬 뿐입니다. 총독부의 역할이 조선에게 어떤 의미인지 논리적으로 서술해야죠. 그 부분을 부각시켜 인터뷰를 진행하겠습니다."
"내가 왜 자네를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아나?"
"글쎄요."
"꼿꼿한 자세가 좋아. 다른 녀석들처럼 살살거리지 않는단 말이지. 주인을 배신한 개는 수세에 몰리면 쉽게 새로운 주인을 물어버린다네. 근데 자넨 배신이 아니잖나. 자신의 믿음을 따르는 거지."
부경감의 말을 들은 남준이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꽤 당당한 태도였다.
"믿음이 아니라 논리입니다. 믿음은 맹목적일 수 있지만 논리는 흔들림이 없죠."
"하하하. 자네 배짱이 참 마음에 드네."
경감이 남준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다들 동경 유학을 다녀와야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인터뷰는 순탄하게 이어졌다. 한창 열띤 대화가 진행될 무렵 문 밖으로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경감님 전화입니다.」
"연결해."
부경감이 잠시 기다리라는 듯 두 사람에게 손짓하고는 소파 옆에 놓인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몇 마디의 일본어가 오갔다. 남준은 수첩을 보며 인터뷰를 정리하는 척했으나 신경은 온통 부경감의 말에 집중되었다.
이윽고 통화를 마친 부경감이 남준을 보며 말했다.
"또 인사청탁이네. 자네같이 유능한 인재라면 백 명이라도 쓸 텐데 말이지. 이참에 기자 생활 접고 총독부로 들어오는 건 어떤가."
"제안은 감사하지만, 가진 거라고는 글재주뿐이라서요."
남준이 보조개가 패일 정도로 웃으며 장단을 맞추었다. 인터뷰 내내 웃은 탓에 입가가 뻐근했다. 경감이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남준을 향해 물었다.
"슌케이라고 아나?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친구, 조선 이름으로는 김태형이라 했던가. 조선방직공장 김사장 아들이라더군. 이번에 경성에 들어온다고 자리를 하나 부탁했나 본데 마땅한 자리가..."
경감의 말을 듣던 남준이 조선방직공장이라는 단어에 멈칫했다. 조선방직공장. 그리고 이내 떠오른 이름. 민윤기. 민윤기의 동생이 입국하는 건가. 죽 이어진 생각들이 하나둘 정리되기 시작했다. 조각난 이야기의 파편들이 남준의 머릿속에서 차곡차곡 맞춰지자, 남준이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는 부경감에게 말했다.
"저희 신문사에 사람이 하나 필요한데, 동경에서 이제 막 들어온 사람이면 더 좋고요."
* * *
종로 의원 앞 정류장은 몰려든 사람들로 혼잡했다. 옷 보따리를 든 채 간신히 정류장을 빠져나왔다. 몇몇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이 병원에서 나와 인력거를 잡아탔다. 인력거를 끄는 사내의 무거운 발걸음이 눈에 밟혔다. 그리고 목발을 짚은 채, 어떻게든 전차를 타려고 안간힘을 쓰던 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서글퍼졌다.
종로 의원이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몰려왔다. 하필 민윤기가 병문안을 간 곳이 종로 의원이라니. 석진오빠와 마주쳤다가는 옷 보따리부터 시작해 민윤기와의 관계까지 줄줄이 설명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정국이에게는 또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싶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차마 병원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하고 출입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앞마당을 서성였다. 오분 즘 지났을까, 철문을 밀고 나온 남자의 얼굴에 눈길이 멈췄다. 민윤기. 병원 앞에서 중년 남성과 대화를 나누던 그가 꾸벅 남자에게 인사를 하고는 마당과 이어진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이윽고 그가 마당 한켠에 주차된 검은 자동차로 향했다.
"저기요."
차 문에 열쇠를 꽂아 넣던 남자가 놀란 듯 움찔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어? 쌈닭?"
"저기, 이거 돌려주려고."
남자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보자기로 향했다. 가만히 자신의 외투가 싸인 보자기를 응시하던 그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때문에 나 따라다닌 거야?"
"따라 다닌 건 아니고요."
"그럼 내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호석씨가 말해줬어요. 병원 갔을 거라고. 근데 누가 들으면 내가 뭐 민윤기씨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는 줄 알겠네."
"맞네. 졸졸 쫓아다닌 거. 나 있을 줄 알고 스페스 갔다가, 병원 있다는 소리 듣고 여기 온 거면."
"아 진짜, 그냥 이거 돌려주러 온 거거든요."
"그니까 쫓아온 거네."
민윤기가 뻔뻔하게 말을 이으며 미소를 지었다. 눈을 흘겨 보아도 소용없었다.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그가 갑작스레 조수석 문을 열고는 내게 말했다.
"타. 배고프다."
"내가 왜요?"
"나 쫓아다니느라 고생한 값."
그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황금정에 위치한 남포면옥이었다. 뭐가 먹고 싶냐고 재차 묻던 그에게 딱히 답을 못하자 민윤기는 냉면이 어떻겠냐고 묻고는 1정목으로 차를 몰았다. 가게 안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다닥다닥 붙어앉은 모습이 꽤나 정겨웠다. 가게 이모가 차가운 평양냉면 두 그릇과 깍두기를 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냉면 국물을 들이킨 민윤기가 머리가 찡한 듯 표정을 구겼다.
"원래는 차가운 음식 별론데, 가끔 땡기는 날이 있어."
"어떤 날이요?"
"속 답답한 날."
"왜 답답한데요."
"세상 사람들이 다 쌈닭처럼 지르고 살지는 않거든."
"나도 엄청 참으면서 살거든요!"
"지금도 봐."
남자가 입꼬리를 올리더니 다시 냉면 그릇에 고개를 묻었다. 그릇을 비우는 동안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와 마주 앉아 냉면을 비우며 별별 생각을 다했다. 어쩌다 내가 여길 따라와서 냉면을 먹고 있는 건지. 혹시 너무 우왁스럽게 먹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지. 행동이 부자연스럽지는 않은지.
몇 번을 생각해도 지금 여기 앉은 내가 미쳤다 싶어 냉면 그릇째 육수를 들이켰다. 살얼음이 동동 뜬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복잡한 생각들을 지워냈다.
가게 밖으로 나오자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해질녘이었다. 차를 타러 가다 말고 윤기가 남포면옥 앞에 선 빙과 장수에게로 향했다. 먹을 거냐고 묻는 통에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나무 막대에 꽂힌 빙과를 두 개 사서 그중에 하나를 건넸다.
우리는 자연스레 주차된 그의 차를 지나 1정목을 쭉 가로질러 걸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높이 솟은 석조건물 옆, 대로를 거닐고 있었다.
빙과에서 단물이 쭉 빨려 나왔다. 민윤기가 빙과를 한 입 베어 먹고는 마음에 안 든다는 투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게 뭐가 맛있다고 그렇게 먹고 싶어 했나 몰라."
"왜요, 지금도 맛있는데."
"너무 달아."
"그래도 일단 다 먹어요. 돈 주고 산 건데."
내 타박을 듣고는 민윤기가 싫은 티를 내며 다시 한 입을 베어 먹었다. 해가 산 뒤로 넘어가면서, 붉던 하늘이 점점 검게 변했다. 민윤기가 앞을 보고 걸으며 말했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 줄 알아?"
"글쎄요. 총? 죽음?"
"아니. 이거."
그가 손에 든 빙과를 흔들었다. 어릴 적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노라며.
"그건 좋아하는 거지, 무서운 건 아니죠."
"이게 너무 먹고 싶어서 외숙부를 따라갔어. 사촌동생이 빙과를 들고 차에서 내리는 모습이 부러웠거든. 열 살 주제에 엄청 치열하게 고민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 이 맛이 뭐라고."
그가 막대에 남은 얼음조각을 먹고는 다시 차로 돌아가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타고 가. 또 저번처럼 휘말리면 이번에는 버리고 간다."
* * *
석진이 진료실을 정리할 무렵 고개를 숙인 남자가 쭈뼛거리며 방으로 들어섰다. 이 시간에 올 사람이면 누군지 뻔했다. 또 골려줄 작정으로 시계를 보던 석진이 무언가 이상한 듯 고개를 들었다. 임무를 전달하던 녀석이 아니었다. 등으로 진료실 문을 밀어 닫은 낯선 남자가 어찌할 바를 모르는 듯 서성였다.
"저..."
목소리도, 모자 밑으로 보이는 얼굴도 꽤 어린 티가 났다. 쭈뼛거리는 소년을 보던 석진이 선수를 쳤다.
"치료 받으러 오셨구나. 앉아요."
그제야 남자가 진료실 보조의자에 앉았다. 순간 두 사람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석진은 직감했다. 이 야밤에 쭈뼛거리며 진료실에 들어온 남자가, 어떤 부류의 환자인지.
"환부는."
의자에 앉은 소년이 외투를 벗고 목부터 셔츠 단추를 푸는 순간, 석진은 적잖이 놀랐다. 남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깨. 만일 어깨에 탄환이 스친 흔적이 있다면, 분명 특실에 누워있는 경감에게 총을 겨눈 당사자일 것이리라.
경감의 병문안을 온 이들은 하나같이 범인이 누구인지 추정하는 데 열을 올렸다. 경감의 상태를 확인하려 병실을 드나드는 동안 석진은 의도치 않게도 용의자에 관한 이야기를 신물이 나도록 들었다. 복면을 쓴 사내라 했는데, 유일한 증거라고는 어깨에 총상을 입은 흔적뿐이랬다.
석진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보조의자에 앉은 소년이 어깨를 내보였다. 찢진 상처 주위가 퉁퉁 부어 올랐다. 석진이 소독용 거즈를 꺼내다 말고 남자에게 물었다.
"왜 다친 거예요?"
"그런 거 안 물어본다고 해서 왔는데요."
의자에 앉은 남자가 입술을 물었다. 진료실 내에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이름은?"
석진은 일부러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셔츠 단추를 채우며 일어나더니 말했다. "제가 잘못 왔나 보네요." 그런 소년의 어깨를 누르며 석진이 슬쩍 웃었다.
"소문에는 어둡나 보네. 그쪽이 쏜 총에 죽어나갈 뻔한 경감, 지금 이 병원에 있는데."
석진의 말에 소년의 눈이 커졌다. 찰나의 순간 얼굴 가득 드리우는 긴장감을 잡아채고는 석진이 다시금 소년을 향해 물었다.
"그런데 난 그 쪽 치료할 거고, 이 사실 또한 비밀로 할 거야."
그가 물끄러미 석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왜요?"
"그건 치료하고 얘기하자."
상처는 완전히 곪아 있었다. 석진이 매스로 부어오른 상처를 째자 누런 고름이 터져 나왔다. 고름을 닦아내고 그 위로 소독약을 부었다. 소년이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찢어진 부위를 꿰매는 동안 소년은 힘겹게 고통을 참아냈다. 소리 내지 않으려고 악문 이가 덜덜 떨리는 것을, 석진은 느꼈다. 그리고 알았다. 자신을 도와줄 이를 찾았음을.
"이름."
석진의 질문에, 소년은 묵묵부답이었다. 난 김석진. 석진이 먼저 제 이름을 말했다. 그제야 소년이 입을 뗐다.
"... 박지민이요."
"네 도움이 좀 필요해. 물론 네가 목숨 걸고 했던 일과 같은 목적으로."
석진이 꿰맨 부위를 붕대로 감았다. 지민이 다시 옷을 갖춰 입으며 석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걱정 마. 방법은 좀 다르니까. 총 쏠 일은 없어."
지민이 의구심 가득한 얼굴로 석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긴 했다. 애국 청년들 사이에, 종로 의원에 가면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암암리에 돌았다. 지민은 생각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을 비밀리에 치료해준다면, 다른 제안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지민이 외투를 입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석진이 덧붙였다.
"응한다면, 20일에 경성 체육관 앞으로 와. 차를 타고 이동할 거야. 자세한 얘기는 그때 해줄게."
From. 스페스 |
안녕하세요. 스페스입니다. 늘 일찍 돌아오고 싶다고 말은 하면서, 이렇게 독자님들 기다리게 하네요. 핑계 같지만, 정말 현생이 바쁩니다ㅠㅠ 이해해주세요.
일단 정말 정말 제가 독자님들께 감사할 일이 있어요.
여러분들이 정말 많이 사랑해주셔서, 잠깐이었지만 초록글에도 올랐답니다. 쪽지 받고 놀라서 심장이 쿵 떨어질 뻔 했네요. 읽어주시고, 따뜻한 댓글 남겨주신 모든 분들께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고마운 댓글 받고 가만히 있기가 그래서, 이번편에는 저도 댓글을 달아보려 합니다.
앗, 그리고 태태는 저도 어서 빨리 보고 싶어요. 다음화에는 반드시 태태를 동경에서 데려오겠습니다!
+ 암호닉은 꼭 최신화에 댓글로 신청해주세요. 혹시 누락되신 분들 있으시면 댓글 남겨주세요.
사랑스런 우리 암호닉들
감자 / 강아지똥 / 개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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