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OST- 대화
경성 비밀결사대 09
written by 스페스
호석이 잠시 카페를 비우자, 태형은 맞은편에 앉은 지민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너 나 알지?"
"응. 김태형이라며."
"근데 왜 아까는 나 모른척했어?"
서운한 얼굴로 묻는 태형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지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구석으로 걸어가며 흘리듯 말했다.
"어... 그게. 내가 몰래 놀러 간 거라서 사장님은 모르셔."
지민은 손걸레를 집어 들고 테이블을 마저 닦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지민의 모습을 응시하던 태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지민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물었다.
"그럼 땡땡이친 거야?"
"사정이 있어."
"무슨 사정인데?"
"비밀이야."
"치. 나는 너 구해줬는데."
"나도 일행 있었다니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지민이었다. 자꾸 거짓말하게 되는 상황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지민이 자신을 피하는 것을 느끼자, 태형은 입술을 삐죽이며 창가에 놓인 소파로 향했다. 소파 옆으로 월간 모던뽀이 과월 호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태형은 페이지를 건성건성 넘기며 다시금 말을 걸었다.
"근데 그 사람 어떻게 됐을까?"
테이블 닦던 지민이 손을 멈추고 태형을 보았다. 태형이 덧붙였다.
"총 맞은 사람. 살았을까? 근데 왜 쐈을까?"
지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걸 몰라서 묻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지민은 달싹이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갑작스레 석진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만큼 절친한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임무. 처음 만난 이후로 태형은 줄곧 먼저 다가와서 자신을 당황스럽게 했다. 그 때문에 임무는 까맣게 잊고 있던 지민이었다. 고민 끝에 지민이 입을 열었다.
"살았겠지."
고작 한마디를 뱉고 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덧붙이려 해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조선방직공장 아들이라면 일가가 친일파인데, 평소 생각대로 말했다가는 태형이 자신을 경계할 것이라 판단한 지민이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핏대를 올리기엔 제 양심이 허락지 않았다. 지민은 그제야 차 안에서 석진이 했던 말의 의미를 실감했다. 믿을 만한 친구가 되는 것이 총 한 발 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던 말. 거짓으로 친구가 되려 들자니 복잡한 게 한둘이 아니었다.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부자연스러운 것 투성이었다.
"와 스페스 사장님이다. 지민아 일로와 봐."
태형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제 이름을 부르는 통에 지민은 또다시 움찔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태형에게로 가까이 갔다. 태형의 손이 모던 잡지 속 호석의 얼굴을 가리켰다. 순간 지민은 허탈함을 느꼈다. 제물포항에서 있던 일을 묻기에 숱한 고민 끝에 대답했건만, 자신이 한 질문은 완전히 잊은건지 고작 잡지 속 사진을 가리키며 웃는 태형 때문이었다.
"너는 여기 없어?"
태형이 지민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응. 근데 너 집에 언제 갈 거야?"
"나? 나 여기서 우리 집 가는 방법 모르는데."
태형이 순진하게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네가 나 길 알려주라. 아니다. 같이 가면 되겠네."
달뜬 태형의 목소리와는 달리, 지민은 당혹감을 숨길 수 없었다.
"내가 너네 집을 어떻게 알아."
"사장님이 우리 형이랑 친하니까 주소 알겠지."
"너 되게 무사태평하다."
"내가 안 가면 이제 형이 찾으러 올 텐데. 뭐."
태형은 말을 마치고는 양손으로 턱을 받친 채 지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박지민. 너 내 첫번째 경성 친구다."
"경성 친구가 뭐냐?"
"동경 친구도 많아. 너는 경성에서 만났으니까 이제 경성 친구지."
* * *
석진은 진료실 책상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어쩐지 기운 빠지는 하루였다. 제물포항에서 돌아오자마자 비보를 접했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의 끈질긴 감시 끝에 단원 한 명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석진은 손에 쥔 만년필로 문진표를 툭툭 치며 방금 전 상황을 곱씹었다.
지민과 국밥 한 그릇을 해치우고 병원으로 복귀한 지 삼십여 분쯤 지났을까. 소식을 전하러 온 남자는 이번엔 지나치게 큰 소리로 기침을 하며 병실에 들어섰다. 진료실 문을 닫은 그는 곧 마스크를 내리고 석진을 향해 씽긋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밖에 들릴 만큼 큰 소리로 가짜 기침을 뱉었다. 웃음을 참아내느라 석진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몸을 들썩거리던 석진이 남자를 향해 물었다.
"깁스 한 팔은 다 나았나 보네. 이번엔 기침인거 보니 이 친구 아주 종합병동이구먼. 아직 해도 안 떨어졌는데 무슨 일이야?"
남자가 곧 낮은 목소리로 석진에게 말했다.
"사람 하나 더 찾아줘."
"사람? 여기가 무슨 인력시장이야?"
"단원 한 명이 체포됐어. 곧 있을 거사에 머리 하나가 비어."
"체포?"
"응."
남자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변했다. 늘 감정을 잘 숨기는 석진이었으나 그의 말을 듣고는 금세 표정이 굳어버렸다. 동료의 체포만큼이나 마음이 어려운 일도 없었다. 한두 번 겪어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체포된 동료를 떠올릴 수록 석진의 마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오랜 생각 끝에 석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사를 미룰 수는 없어? 감시망을 좁혀올 수도 있는 거잖아."
"그 단원의 경우 단독 임무를 수행하다 잡혔어. 당연히 우리 조직에 대해서는 침묵할 거고. 이번만큼 좋은 기회도 없어. 만주 쪽에서도 결과가 어떻든 진행하자는 눈치고."
"그래?"
석진이 책상 위에 놓인 시계를 보았다. 남자가 방에 들어선지 삼분이 지났다. 그런 석진의 행동을 읽은 남자가 밖에 들릴 만큼 크게 기침을 했다.
"알겠어. 역할은?"
"도주로 확보.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냥 조용히 있다가 돌아오면 돼. 도주로는 우리가 미리 몇 군데 정할 거고, 당일 놈들이 얼마나 모여있는지 확인하고 사인을 주는 임무야."
석진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았다. 혹시나 현장에서 체포될 경우를 말했다. 생포되어 수감되거나, 그 자리에서 자결하거나. 경험상 거사를 끝내고 안전하게 도주할 수 있는 확률은 채 삼 할도 되지 않았다. 석진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이 임무 맡은 친구가 부상 당활 확률은."
"백에 이십? 아니 이 일에 확률이 어딨어. 운에 따라 영이 되었다 백이 되기도 하는데."
"일단 알겠어."
"그럼 형만 믿는다."
남자가 병실을 빠져나간 이후로 석진은 꽤 오랜 시간 고민했다. 그리고는 책상 구석에 놓인 매일신보를 집어 들었다. 신문을 찬찬히 살피던 석진이 얼굴을 구겼다. 곧 있을 거사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큰 규모로 이뤄질 것이 분명했다. 다음 주 월요일, 새롭게 발령받은 총독부 고위 인사들의 취임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석진의 머릿속에 두 사람이 떠올랐다. 첫 번째로 박지민.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지민은 적격자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발각되었다가는 어깨 부상까지 밝혀져 일이 커질 수도 있다. 게다가 지금 하고 있는 임무에도 차질이 생길 게 분명했다. 석진은 지민의 얼굴을 빠르게 지워내고 다음 사람을 떠올렸다. 다음 타자는 도의라는 문제가 걸렸다. 그러나 시간이 촉박했다. 그 이상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자, 석진이 가운을 벗고 진료실을 빠져나오며 간호사에게 말했다.
"곧 수술 끝나면 최 선생님 나오실 거예요. 진료실 좀 맡아달라고 전해주세요."
* * *
정국은 벌컥 제 방문을 열고 들어온 얼굴에 깜짝 놀랐다. 석진이었다. 보통 석진은 가장 먼저 남매의 어머니에게 인사를 드린 후 마루에서 담소를 나누다가 정국의 방에 들어오곤 했다. 그런데 이렇게 곧장 제 방에 온다는 것은 무언가 다른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정국은 그 사실을 잘 알았다.
"형."
정국이 고개를 들어 방문을 걸어 잠그는 석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분명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일 테다. 정국은 마른침을 삼키고 석진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윽고 석진이 입을 열었다.
"싱글이는?"
"부엌에 있을걸요."
"그럼 빨리 말해야겠네. 네가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던 일."
이전과는 다른 석진의 목소리에 정국은 긴장감을 느꼈다. 평소 투닥투닥 장난을 치던 두 사람이었으나, 오늘은 방안 공기부터 달랐다. 팽팽한 긴장감을 뚫고 석진이 말했다.
"다음 주 월요일. 총독부 신임 인사 취임식. 연회장에 직원으로 잠입해서 도주로를 확보해 주는 임무. 할 수 있겠어?"
정국이 결연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넌 절대 털끝하나 다쳐서도 안 돼. 상황 봐서 가능성이 없다 싶으면 네 임무는 그 자리에서 종료되는 거야. 넌 끝까지 직원처럼 행동하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행사장을 빠져나오면 돼."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석진은 그에게 따라나오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방에서 나온 석진이 마당과 이어진 마루를 흘끗 바라보았다. 오래된 바닥은 세월의 흔적을 반영하듯 반질반질 했다. 석진은 품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마루에 조심스럽게 올려 놓았다. 정갈한 글씨로 '전정국 월사금'이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 봉투였다. 몰래 대문을 열고 나가려던 석진이 부엌에서 튀어나온 얼굴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랐다.
"아, 깜짝이야."
"오빠 목소리에 내가 더 깜짝 놀라겠네."
"싱글이 있었구나."
"오빠. 지금 엄청 수상해요."
* * *
윤기는 길눈이 밝은 편이었다. 한번 오고 간 길은 웬만해서는 잊어버리지 않았다. 분명 어두운 밤, 경황없는 중에 쌈닭을 데려다주었건만 윤기는 한 번도 헤매지 않고 그녀의 집을 찾아냈다. 심지어 골목마다 죄다 비슷한 집 투성이었음에도. 그런 자신의 능력이 오늘만큼은 무척이나 원망스러운 윤기였다. 헤매기라도 했으면 좋았을걸. 너무 단번에 길을 찾는 바람에 벌써 세 번째 같은 골목을 빙빙 돌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쌈닭의 집에 걸어들어가자니 그건 너무 무모하고, 그렇다고 마냥 골목에 서있자니 하염없는 기다림이 될 것 같았다. 윤기는 같은 길을 배회하며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다. 다시 한 바퀴 돌까 생각하던 차였다. 갑작스레 들린 여자의 목소리에 윤기는 담벼락에 바짝 몸을 붙였다.
"오빠 이거 못 받아요."
"싱글이 너 준 거 아니고 정국이 건데, 네가 왜 못 받아."
쌈닭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반가운 마음이 들려는 찰나 남자의 목소리가 뒤이었다. 윤기는 고개를 내빼고 슬쩍 골목의 상황을 살폈다. 쌈닭. 그리고 그녀와 실랑이를 벌이는 어떤 남자. 순간 윤기의 눈이 가늘어졌다. 남자 또한 익숙한 얼굴이었다. 얼마 전 경감 문안을 갔을 때 마주쳤던 종로 의원 의사. 두 사람의 목소리에 윤기가 온 신경을 집중했다.
"오빠 지금껏 우리 가족 돌봐줬으면 됐어요. 저도 이제 일하기로 했어요."
"일?"
"네. 그니까 정국이 월사금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무슨 일? 매일 해?"
"단성사에서 일주일에 세 번."
"단성사? 극장? 그럼 혹시 한다는 일이 변사?"
"진짜 맞을래요?"
쌈닭이 남자의 팔을 때리려 하자, 그가 웃으며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몰래 지켜보던 윤기의 표정이 점차 굳어졌다. 담벼락에 기대서 몰래 두 사람을 훔쳐보는 제 모습이 무척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덕에 앞으로는 숨어서 기다리지 않아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방법을 알게 됐다는 것. 윤기는 두 사람의 관계가 자못 궁금해졌다.
"그럼 이번만 받아. 정국이도 곧 졸업이잖아."
"안 돼요."
"그럼 오빠 서운해.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너네 집에 와."
"이거 아니라도 맨날 말도 안 되는 얘기하러 오잖아요."
긴 실랑이 끝에 남자는 기어코 그녀의 손에 봉투를 쥐여주고 떠났다. 뒷걸음질 치며 손을 흔드는 의사와, 그런 그를 바라보는 쌈닭의 모습을 윤기는 번갈아보았다.
* * *
남준은 모처럼 일찍 사무실을 나섰다. 아쉽게도 일의 연장선이었다. 책방에서의 만남 이후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일찍 귀가하려던 참이었다. 외투를 들고나가려는 순간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이 남준을 멈춰 세웠다. 부경감의 호출이었다. 지난번에 진행했던 인터뷰는 퇴고를 마치고 다음 호에 게재될 예정이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경감이 자신을 부를 이유는 없었다. 남준은 호출의 목적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며 총독부로 걸음 했다.
"자네 왔구먼. 앉게나."
항상 그렇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집무실에 들어선 남준이었다. 부경감은 그 점이 늘 흥미로웠다. 부하직원은 물론 꽤 높은 직급에 있는 관료들도 제 방에 들어올 때면 하나같이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허나 남준에게서는 알 수 없는 여유가 흘렀다. 남준이 부경감 옆에 착석하자 비서가 차를 내왔다. 차를 음미하던 부경감이 남준을 향해 말했다.
"난 자네의 그 표정과 태도가 좋네."
"감사합니다."
남준이 씩 웃고는 손에 깍지를 낀 채 부경감을 바라보았다.
"요즘 들어 총격 사건이 잦은 건 알고 있나?"
남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영 부끄러운 얘기 네만, 그 사건들이 하나같이 오리무중이야."
남준은 부경감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듯 시의 적절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나 머릿속은 그의 속내를 꿰뚫기 위해 바쁘게 돌아갔다.
"며칠 새 일어난 소요만 다섯 건이야. 모두 동일 집단의 소행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어느 것 하나 명확하게 잡히지 않는 탓에 총독부 분위기가 엉망이네."
"다섯 건 중 우선순위는 당연히 마작관 사건이겠죠."
정확하게는 경감 살해 미수 사건. 남준의 대답에 부경감의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내가 제대로 임자를 찾은 것 같군."
남준이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며 부경감을 향해 미소 지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는 제스처였다. 곧 소파에 기댄 앉았던 부경감이 몸을 일으키고는 사건에 대해 부연 설명을 했다. 남준의 손이 바삐 움직였다. 곧 사건을 정리한 남준이 입을 열었다.
"부경감님 말씀에 의하면 용의자는 두 명, 사라진 용의자 중 한 명이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는 거죠? 그리고 근처 지하창고에서 혈흔이 발견되었고요. 그 외에는 별다른 증거는 없다는 말씀인데... 이거 쉽지 않겠는데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사건의 실마리를 찾을 마땅한 단서가 없었다. 남준이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덧붙였다.
"글쎄.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그러게 말일세. 나도 속 답답해서 꺼낸 얘기지만 이 사건만큼은 범인을 찾는 게 쉽지 않을 걸세. 그럼에도 찾아내야 하는 게 우리, 아니 내 임무고."
"만일 못 찾게 되면요."
"누군가 그 범인이 되어 줘야겠지."
총독부를 빠져나온 남준은 가장 먼저 경성제대에서 운영하는 병원으로 향했다. 아무리 사건을 떠올려 보아도 2층에서 그것도 경감에게 총을 쏜 범인이 살아서 현장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말인즉슨 1층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직원들이 졸고 있었거나, 자리를 이탈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한 발 늦은 대응이 용의자들에게 도망갈 기회를 제공한 걸 테다. 그러니 지금 총독부에서는 없는 범인을 만들어서라도 잡아 들여야 할 테고. 안 그랬다간 줄줄이 목이 날아갈 테니. 남준은 헛웃음이 났다.
"이렇게 허술해서야 원."
* * *
"쌈닭!"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날 쌈닭이라 부를 사람이라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뿐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 시간에 이 동네에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다시금 그 특유의 껄렁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여기."
실로 민윤기였다. 골목 한구석에 어색하게 서있는 그 남자. 그가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냉면을 먹은 날을 마지막으로 꽤나 오랜만이었다. 미쓰코시 이후로 이상하게 얽혀 연달아 며칠을 만나다 소식이 뚝 끊기니 조금 궁금하기도 했고.
"어? 무슨 일이에요?"
"쌈닭 목소리가 너무 커서 종로 바닥을 울리던데. 모른 척을 할 수가 있어야지."
"또 그 쌈닭 소리. 근데 지금 회사에 있을 시간 아니에요?"
"동생이 입국하는 바람에 오늘은 휴가."
"근데 왜 여기 있어요? 동생이랑 같이 안 있고."
"동생 물건 좀 사러 나온 거야. 아, 이거."
그가 한 눈에도 비싸 보이는 종이 박스를 내밀었다. 손에 들린 박스와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내가 머뭇거리자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이게 뭔데요?"
"사은품."
"사은품?"
"쌈닭이 아니라 촌닭이었네. 백화점에서 사은행사한다고 주길래 받긴 했는데, 처치 곤란이라서."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뭔지 모르지만 촌닭 취급까지 당하면서 물건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요. 그쪽한테 처치 곤란인 물건 나도 받기 싫어요."
"이거 여성용 원피스라서 어디 줄 데도 없어."
"애인 없어요?"
"없어."
"자유 연애시대에?"
"그럼 쌈닭은 있나 보네. 애인."
"누가 있대요?"
"자유 연애시대라며."
"그러게 자유연애시대에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
나도 모르게 신발로 바닥을 툭툭 차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나를 흘끔 보더니 다시 물었다.
"진짜 안 받을 거야?"
"네. 저 들어가 볼게요."
"쌈닭."
민윤기 특유의 낮은 목소리가 대문을 열어젖히는 내 발걸음을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자 그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상자를 건넸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그가, 한숨을 내쉬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은품 아니야. 돈 주고 산 거니까 그냥 좀 입어. 내가 빚 갚는 셈 치고."
얼떨떨했다. 목소리에서 묻어나는 진심이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괜스레 당황스러웠다. 왜? 굳이.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을 뒤덮었다.
"저기요."
"빚 갚는 거라고 했다."
"그니까 나한테 빚진 적 없는데..."
"그만 좀 물어봐. 춥다. 간다."
그는 결국 떠넘기듯 내 손에 상자를 건네고,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응시하는 내내 기분이 이상했다. 무슨 빚인지 밤이 맞도록 생각해 보려 해도 답은 없었다.
From. 스페스(모티에서 사담이 안 떠서 직접 밖으로 가져왔어요 :)
독자님들, 반가워요. 오늘도 꾹돈톡 덕에 어찌나 행복해지던지요!
경비대 9화는 나름 애써서 아주 아주 조금 일찍 들고 왔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시면 저도 너무 기쁠 것 같아요.
아, 그리고 독방에서 낫투데이 제복 남준이를 보고 경비대를 떠올리셨다는 글을 몇 개 봤어요ㅠㅠㅠㅠㅠㅠ
정작 저는 그 날 밤이 되어서 인터넷으로 낫투데이를 봤는데 말이죠. 제복소년단이 너무 멋있어서 몇 번을 돌려봤는지 모르겠네요.
그런 김에 제복 남준이 움짤 하나 투척하고 사라집니다. 총총.
사랑스런 암호닉들!
* 암호닉 쭉 받아요, 신청은 최신화에서!, 혹시 누락되셨다면 댓글 달아주세요. :)
ㄱ
감자 / 강아지똥 / 개나리 / 갤3 / 경화수월
구리부리 / 국산비누 / 김남준컬렉션
김데일리 / 금붕 / 깡태콩 / 꽃소녀
꾸꾸뀨 / 꾹끄다스 / 꾹이 / 뀩 / 뀰
ㄴ
나니쓰 / 나비 / 네몽데몽 / 노모노
녹차맛콜라 / 늉글레
ㄷ
달래 / 달력 / 달리 / 달콤한마음 / 됼됼
두유망개 / 두두둠치칫 / 땅위 / 뚝섬에서
ㄹ, ㅁ
란 / 룰루랄라 / 마리몬드 / 모찌한찌민
민슈가천재짱짱맨뿡뿡
민이 / 민트 / 밍 / 밍밍
ㅂ
박스 / 박지민 / 밤툰 / 베네핏
베이지 / 봄날 / 봄날의꽃/ 뷔티뷔티
봉이 / 븅딩 /빅닉태 / 뽐 / 뿡뿡이
쁄 / 삐리
ㅅ
사랑해 / 사월의달 / 삼월 / 샷건 / 서영
석지니 / 셀럽 / 소금에 토마토 / 솜사탕
슈비 / 슉아슉아 / 스카트
ㅇ
아보카도맛 / 아조트 / 아침햇살 / 어른꾹꾹
여우별 / 여지 / 영덕대게 / 예삐침뀽 / 오름
오츠카레 / 오호라 / 와리가리 / 요로하 / 우와탄
월드콘 / 유월의꿈 / 윤기야 / 윤치명 / 입틀막
ㅈ
자도 / 전아장 / 정꾸꾸까까 / 정원 /정쿠웈
제니 / 제제 / 주황자몽 / 짐니누누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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찡긋 / 찡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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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산수 / 태침@@ / 탱구 / 탱탱 / 탱탱볼 / 토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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