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05
도영이와 내 사이에 달라진 게 있다면 인사를 받아주는 정도? 딱 그 정도까지. 그래도 그게 어디야. 초반에는 몽땅 다 씹혔잖아. 김시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거야. 넌 이제 도영이랑 인사도 하는 사이라고. 무려 인사야. 인사라고.
친구라는 건가 그럼? 친구라는 단어가 이렇게 듣기만 해도 행복한 단어일 줄이야. 간질간질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옆에 앉아 나를 가만히 쳐다보던 정재현이 광대 내리라고 할 정도면. 그런데 어떡해. 광대가 안 내려가는 걸?
"다른 여자들은 웃으면 예쁘다던데."
"던데?"
"아니… 너도 예쁘다고. 웃으니까 보기 좋네."
구라치고 있네. 입꼬리 파들파들 떨리는 거 다 보이거든? 내 말에 티 났냐며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는 정재현의 등을 팡팡 쳤다. 뭐 상관없다. 지금은 기분 최고거든. 사실 어제 약을 챙겨준 답례라고나 할까. 집 가는 길에 토끼 모양 초콜릿이 있길래 도영이 생각이 나길래 바로 집어버렸다. 그리고 아까 쉬는 시간에 전해줬는데. 글쎄 받더라니까? 내 말은 칼같이 무시하고 다니던 그 김도영이? 고맙다며 초콜릿을 받는 도영이의 모습에 순간 진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올 뻔했다.
"넌 체육복 안 입어?"
"어? 입어야지…… 뭐야 어디 갔지?"
"가방에 없어?"
"분명 아침에 챙겼는데 뭐지?"
오늘은 목요일 체육이 들어있는 날이다. 체육을 좋아하는 나는 한 번도 체육복을 안 챙긴다거나 깜빡한 적이 없었다. 아침에 분명 챙겼는데 근데 어디 간 거지?
"야 설마 해서 말하는 건데. 누가 훔치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에이~ 설마 누가 훔쳤겠어?"
설마다. 정재현의 말에 정말 설마 하는 마음에 교실을 대충 살펴봤다. 근데 정말 이상한 점이 있다면 김지호네 무리가 이쪽을 보며 저들끼리 웃고 있었다. 김지호는 예쁘장한 외모와 달리 약간 나쁘게 말하자면 싸가지가 없다고 교내에서 소문이 자자했다. 설명을 또 덧붙이자면 공개적 짝사랑 1년째. 상대는 정재현이었다. 아니… 뭐 설마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정재현과 친해 보이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체육복을 일부러 숨겼다던가, 뭐 더 심각한 상황이라면 버렸다던가 그런 유치한 짓을 했겠어 설마?
"시민아 체육복 없어졌어? 체육복 안 입으면 운동장 12바퀴인데."
"응?"
"뭐 어떡해. 없으면 뛰어야지."
말 그대로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사물함을 뒤지던 행동을 멈추게 만든 건 다름 아닌 김지호의 목소리였다.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얄밉다. 얄미워. 곧이어 들리는 종소리에 김지호는 열심히 찾으라며 저들끼리 킥킥거리며 교실 밖을 나섰다. 정재현은 체육복을 다 갈아입자마자 남자애들끼리 농구를 하러 간다며 먼저 나갔고 수영이는 결석이었다. 아 오늘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지. 기운이 쫙 빠진다. 아침까지만 해도 기분 최고였는데. 운동장 12바퀴라니 벌써부터 다리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운동장으로 나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김시민."
"… 도영이?"
교실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복도에서 체육복 차림의 도영이와 딱 마주쳤다. 위아래로 나를 살펴보던 도영이는 체육복 없냐며 내게 먼저 말을 걸었다. 말을 걸었다? 말을 걸어? 아까까지 안 좋았던 기분이 도영이의 질문 한 마디에 몽땅 사라지는 것 같다.
"이거 입어."
"어? 아니야 나 괜찮… 은데."
말없이 제 체육복 상의를 벗어 내 어깨에 걸쳐준 도영이는 괜찮다는 내 말에도 체육복을 가져가지 않았다. 3월의 끝자락 아직 쌀쌀한 날씨였다. 흰 반팔 티만 입은 채 내 옆에서 걷고 있는 도영이의 옆선을 가만히 쳐다봤다. 추울 텐데… 운동장에 도착하자 훅 끼쳐오는 봄바람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옆을 쳐다보니 도영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표정을 일관했다. 스탠드 앞에서 줄을 맞춰 서 있는 아이들 틈으로 파고들었다. 최대한 선생님에게 들키지 않게. 내 뒤에 있어. 도영이는 짧게 입을 열었다. 체육 선생님은 인사만 끝내면 곧바로 교무실로 들어가셨다. 오늘도 역시. 어쩌다 보니 체육 부장이 된 이동혁의 목소리가 운동장에 울렸다. 차렷 경례. 안녕하세요. 체육 선생님은 알아서들 자유 시간 갖으라는 말을 끝으로 교무실로 들어가셨다. 살았다. 오늘은 걸린 애들이 한 명도 없더라. 만약 내가 걸렸어 봐. 혼자서 운동장 12바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도영아 체육복……"
"너 입고 있어."
"너 추울 거 같은데."
"어차피 농구하면 더워질 텐데 뭘."
코가 빨갛다는 내 말에도 끝까지 괜찮다며 체육복을 결국 입지 않은 채로 농구하는 남자애들 사이로 쏙 들어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도영이랑 인사하는 그런 친구도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체육복을 빌려주다니 나에게 웃어주다니?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꿈만 같은 현실에 혹시나 싶어서 팔뚝을 꼬집어댔다. 꼬집은 팔뚝이 따끔거린다. 아프다는 건 꿈이 아니라는 거네…… 대박. 내 옆에 앉은 이민형의 팔을 잡고 흔들어댔다. 뭐 내 옆에 앉은 이유만으로 이민형은 팔도 흔들고 어깨도 흔들어야 했다. 물론 이민형의 팔과 어깨를 잡고 흔든 건 나지만.
"미쳤어?"
"야… 민형아 나 진짜 미쳤나 봐."
"원래도 약간 미쳤…… 읍!"
나 지금 기분 좋으니까 굳이 나서서 망치지 말아줄래? 언더스탠드? 오케이? 이민형은 얼굴이 작다. 부러운 자식…… (약간 짜증) 그래서 한 손으로도 입이 잘 가려졌다. 이민형 입을 막던 손을 떼자마자 이민형은 그 큰 손으로 내 이마에 딱콩을 때렸다. 평소 같았으면 왜 때리냐며 소리를 꽥 질렀을 난데. 이민형 나 진짜 미쳤나 봐. 아파도 웃음이 자꾸 난다. 농구 하는 게 꼭 토끼가 풀밭을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것 같다 그치? 농구공을 열심히 땅에 튀기는 도영이를 멍하니 바라보며 하는 내 말에 이민형은 옆에서 한숨을 내뱉었다. 미칠 거면 곱게 미칠 것이지. 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말이다.
도영이의 체육복은 정말 컸다. 손을 다 덮고도 허벅지 반을 가릴 정도로 내겐 많이 컸다. 도영이를 보면서 말랐다고만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보니까 남자긴 남자구나 싶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대단하더라."
"뭐가?"
"정재현에 이민형에 아까 보니까 김도영까지 재미있어?"
솔직히 김지호가 체육복을 가져갔다는 것쯤은 눈치가 없는 나도 알고 있었다. 너무 티 나잖아. 방과후까지 끝나고 아이들이 다 빠져나갔을 때 김지호가 내 자리로 걸어오더니 책상에 체육복을 던졌다. 내 체육복이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뭐? 재미있냐니… 요즘? 재미있지. 재미있다 못해 아주 행복한데? 재미있다는 내 대답에 허 - 하고 짧게 웃더니 팔짱을 끼고 있던 그 가느다란 손으로 내 뺨을 내리친다. 뺨을 내리친다? 뺨을 쳐? 볼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느낌에 순간 멍했다. 그러니까 나는 김지호에게 뺨을 맞았다. 근데 내가 왜?
"뭐 하는 거야?"
"내가 왜 이러는 거 같은데?"
"난모르겠는데?"
"재현이 옆에 있는 게 짜증 나서 한 대 쳤어. 그게 나빠?"
"뭐?"
"나 정재현 좋아해. 그래서 니가 짜증나는 걸 어떡해?"
아니. 뭐 이런 삼류 드라마 같은 전개가 다 있어? 뭐 내가 정재현을 꼬시기라도 했디? 그리고 뭐? 짜증 나면 붙잡고 뺨 때려도 되는 건가? 나 참 기가 막혀서…….
"너가 뭘 오해하나 본데. 나 정재현 안 좋아해."
"그걸 내가 어떻게 믿어?"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노려보는 김지호의 당당한 자태에 어이가 없었다. 유아인이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어이가 없네? 지금 내 기분이 그래. 어이가 없어. 지호야 네 눈에는 정재현이랑 서로 못 죽어서 안 달난 내 모습이 짝사랑을 하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그렇게 생각한다면 정말 큰 오해를 하고 있나 본데. 아니. 어떻게 봐야 내가 정재현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내가 이걸 왜 말하고 있는 거지. 굳이 이래야 되나 싶었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말하는 편이 더 좋을 거 같았다. 안 그러면 체육복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나 김도영 좋아해. 너가 어떻게 봤길래 그런 오해를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나름 진지하게 말한 건데 돌아오는 대답은 내가 그걸 믿을 것 같아? 였다. 아니 그럼 어떻게 말해야 믿을 건데! 속이 꽉 막히는 느낌에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난 할 말을 끝냈고, 믿지 않은 건 김지호였다. 더 이상 말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가방을 챙겼다. 그런 내 행동을 미간을 찌푸린 채 가만히 쳐다보던 김지호가 교실을 나가려던 내 어깨를 확 하고 잡아돌렸다. 아니 이 자식이? 팔뚝도 툭하면 부러질 것 같이 생겼구만 기집애가 힘은 무지막지하네. 또 다시 뺨을 때리려는지 김지호는 손을 번쩍 들었고 나는 두 눈을 꽉 감았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느낌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들어올렸고 곧바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김지호의 손이 스르륵 내려왔다.
"그만하지. 말로 해도 될 거 같은데."
뒷문에 등장한 낯익은 얼굴에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태용이다. 갑작스러운 이태용의 등장에 김지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다음에 보자며 너 어깨를 툭 치고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뭐 이런 미친……? 하마터면 오리처럼 소리를 꽥 하고 지를 뻔했다. 참자. 나는 참는데 익숙하니까.
"괜찮냐?"
"엉… 근데 뭐야? 집에 안 갔어?"
"오늘 지각해서 반성문 좀 쓰느라."
"날라리네."
날라리는 너지. 아, 아니. 쟤인가? 사람을 막 때리고 말이야. 입꼬리를 작게 올린 채 나를 쳐다보는 이태용의 시선이 민망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볼 조금 부었다. 집 가자마자 치료해야겠다."
"응. 그래야지."
그나저나 혹시 들었을까? 하는 마음에 언제부터 거기 서 있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본 내 말에 글쎄… 체육복 던졌을 때부터? 라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럼 혹시 들었… 어?"
"뭐 너가 김도영 좋아한다는 거?"
"목소리 좀 줄여…."
"어차피 아무도 없어. 다들 석식 먹으러 갔을걸?"
그래도 그렇지 그걸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어떡해? 걱정스러운 나와 달리 푸하하 배까지 잡으며 크게 웃는 이태용이었다. 이놈이?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다 이태용한테는 말하지 말라던 정재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근데 뭐 이건 내가 말한 거긴 하지만…… 말한 게 아니고 들킨 거니까 또 다른 건가? 에라 모르겠다. 집에나 가자. 이태용에겐 도영이한테 절대 말하면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태용은 내가 뭐 하러 그걸 말하냐며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다. 그럼 됐고 집에 가자. 비밀을 나눈 것 같아 이태용과 조금 더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뭐 내 비밀만 들켰지만. 그리고 다음 날 정재현은 정말 한심하다는 듯이 내게 묻더라. 들켰냐? 조금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주 공개적 짝사랑을 하지 그러냐?"
"뭐 어때. 이태용도 친군데."
"이태용은 그렇게 생각 안 할텐데."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누구세요? 저 아세요? 전 멍청한 사람이랑 친구 안 하는데."
너야말로 아침부터 맞고 싶다고 대놓고 말하지 그러냐? 아침부터 깝죽거리는 정재현의 멱살을 잡고 짤짤거렸다. 멍청한 사람이라는 부분에서 화난 거 아니다? 아니라니까? 내 말에 아이고 어련하시겠습니까~ 하고 정재현은 입은 여전히 나불거렸다. 이 자식 한 대만 치고 싶다. 어제 내가 뺨 맞은 게 누구 때문인데? 갑자기 몰려오는 울컥한 마음에 정재현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냥 책상에 엎드렸다. 내가 엎드리자 정재현도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쿡쿡 찌르지도 않았다. 내 눈치를 보는 걸까. 차라리 잘 됐다. 잘 생각은 없었는데 언제 잠이 든 건지. 일어나 보니까 항상 옆에 앉아 있던 정재현은 보이지 않고 내 책상 위에 놓인 얼음팩이 눈에 띄었다.
'오빠가 이렇게 인기가 많다.'
'아무튼 미안. 나 때문에 맞은 것 같아서.'
정재현이 잘못한 건 아닌데. 잘못한 건 뺨을 때린 김지호가 잘못한 건데. 이태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정재현에게 말한 건지 얼음팩과 같이 조그마한 포스트잇이 있었다. 포스트잇에 쓰인 반듯한 글씨체에 정재현 답다고 생각했다. 글씨가 정재현 같네. 마치 이런 느낌이랄까… 그날 이후로 김지호한테 무슨 말이라도 따로 한 건지 직접적인 괴롭힘은 없었다. 그냥 볼 때마다 째려보기만 하는 거 빼고는 뭐……. 같이 짝사랑하는 입장은 똑같지만 방법이 조금 틀렸다고 생각했다. 동영이에게 친한 여자 사람 친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난 아무렇지 않을 것 같은데. 정말로? 정말인데…… 나는 마음이 넓… 넓으니까? (뻔뻔) 그래도 혹시 현실로 그런 상황이 닥치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코끝이 찡해진다.
어니언's
안녕하세요. 이번 편은 진짜 뒤죽박죽 아주 난리 난리... 사실 저런 로망 다들 하나씩 갖고 있지 않나요? 체육복을 빌려준다던가, 뭐 그런 로망 없으신가요? 글 속에서 사심이란 것이 폭발해버렸다. 잠깐 초록글에 또 올라갔는데 전보다 늦었음에도 불구하고 댓글 달아주시고 추천 눌러주시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에게 정말 항상 감사하단 말 드리고 싶어요.
뭔가 이번편은 조금 유치하게 써진 것 같아요. 그래도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수줍)
암호닉
암호닉 [일등이당] [도랑] [하늘] [동동] [현현] [영] [나스] [토끼] [아윤] [유타유타] [유타야 쟈니] [달탤] [쿠크다스] [도릉도릉] [저기여] [꿀돼지] [뎡이랑]
[돈까스] [무한씨티] [곰곰] [세블리] [초록] [우주] [도룽] [또롱] [바나나] [127127] [미뇽] [태요미]
글 간격이 많이 들쭉날쭉하네요. 수정이 안 되서 책상을 쾅쾅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