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벽에 기대 앉아 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겨우 숨을 쉬고 있다. 머리에서 꾸역꾸역 새어 나오는 피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얼마 안 있어 내 코 끝에 도달하여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검붉은 꽃이 피는 것 같다. 피가 검붉다. 역시 난 본체가 시커먼 사람인가 보다. 난 피로 가득찬 통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온 사람 같았다. 온 몸에 성한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 미안한데, 잘 안 들린다. 어디서 부르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더 크게 불러줬음 좋겠네. 목소리 높여, 인마. 이젠 이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날 부르나 보다. 잘 안 들려. 아니 날 부르지 않고 있는 건가. 나도 이제 끝인가 보다. 코 끝에서 하염없이 피가 떨어진다. 검붉은 꽃은 뭉개졌다.
쉬지 않고 달려왔는데, 그랬는데 넘어져 버렸다. 죽을 만큼 뛰고, 넘어지고 나서 느낀 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거였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목구멍에 피맛이 돌 만큼 뛰었는데, 목표가 보이긴 커녕 내 한계가 어딘 지 알게 되었다. 난 넘어진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를 너무 높게 샀다. 이젠 확실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난 여기서 넘어진 채로 누워 있을게. 대자로 뻗어서 잘생긴 하늘이나 감상할게. 난 괜찮아. 그러니까 먼저가 주라. 날 쭉 앞질러서 결승선에 멋지게 골인 해 주라. 참내 원, 목소리가 나오질 않는다. 저 말을 하며 웃으려고 했다. 마지막인 만큼. 아무도 봐 주지 않아도 끝자락에선 볼만한 표정을 짓고 싶었다. 몸이 주인 말을 들으려고 하질 않는다. 그래서 속으로나마 말하는데 들리지 않겠지. 홍빈이 속으로 하는 말까지 상대방에게 전할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 이 곳에 발을 들였을 때가 생각난다. 오지 말았어야 했다. 오기 싫다며 칼이든 뭐든 손에 쥐고 휘둘렀어야 했다. 그럼 경찰서에 갔으려나. 아니, 그 쪽이 오히려 좋다. 하지만, 그렇지만, 이 깜깜한 늪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랬어도 너희를 만날 수 있었을까. 생각난다, 그때가. 아직도. 가물가물하지 않을 만큼 기억이 난다. 난 아직까진 살아있나 보다. 처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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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자식아... 도대체 이게 몇 번째야? 선생님 말이 말 같지도 않냐 이제? 선생님이 만만하지 응? 원래 부모 없는 애들은 다 이러니? 네가 중 2도 아니고 선생님 속 좀 그만 썩히렴, 제발. 응? 좋게 말하잖... 너 어디가니? 쌤이 말씀하시는데!"
그녀는 담임에게 뒤를 보이곤 교무실의 문을 세게 닫았다. 복도에 쾅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렇다, 난 고아다. 싫다. 인간들은 다 똑같다. 모두 이기적이며 남의 행복을 가만히 지켜보지 않는다. 행복은 이기적인 자들이 요란스레 지켜보다 그 소음 때문에 깨지고 만다. 이보다 더한 바닥이 있을까. 눈물도 감정도 전부 흔적 없이 메말라갔다. 그녀의 어깨가 힘 없이 내려갔다. 항상 이런식이다. 엄마 아빠와 아저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부질없는 희망을 보고 싶어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교실로 향했다.
교실 앞에 도착하니 상혁이 있었다. 우리반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같이 가자. 상혁이 말을 걸어온다. 난 네 얼굴 못 봐. 내가 말했다. 기운이 없어보이던 상혁을 내버려두곤 홀로 교실로 들어왔다. 상혁은 한숨을 쉬곤 자기 교실로 돌아갔다.
언제와도 소란스러운 교실이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는 행복해 보인다. 난 아무리 웃어도 행복하지도 행복해지지도 않던데. 그때 한 쪽 얼굴이 퉁퉁 부은 한지현과 그의 친구들이 나에게 온다. 한숨이 나온다. 지겹다, 저것들도. 우유를 들고 온다. 우유를 딴다. 흔한 클리셰다. 쟤는 지 처 먹으라고 우유당번이 갖다준 우유를 항상 나에게 준다. 곱게 주면 반갑다만, 항상 머리 위로 쏟는다. 처음엔 실수라며 상황을 무마했다. 뒤에서 우유를 부어서 그런가보다 했다. 실수인 줄만 알았다. 두 번째도 뒤에서 부었다. 실수라고 하였다. 실수가 아니었다. 실수라고 변명한 것이 실수라고 말해 준 뒤 나도 우유를 가져왔다. 지현이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리곤 얼굴에 우유가 든 우유팩을 뭉갰다, 세게. 지현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터진 우유 때문에 하얗게 보이는 건가. 지현이는 숨이 막혔던 지 옆에 있는 벽을 퍽퍽 쳤다. 그리고 난 지현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때렸다. 나는 당하고는 못 산다. 당하면 두 배로 갚아주어야 맘이 풀렸다. 지현인 힘 없이 쓰러졌다. 지현이가 울었다. 반 아이들은 멍하니 보고 있었다. 이 일은 무려 어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교무실에 불려 갔던 이유이다. 그 이후로 난 투명 인간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은 날 무서운 괴물을 보듯 보았다. 물론 그 전에도 투명 인간이긴 했다. 지현이 때문에 말이다. 지현이는 내게 관심을 주는 사람들을 온갖 방법으로 차단했다. 그 편이 차라리 편했다. 누군가가 나를 걸고 넘어지는 게 싫었다. 누군가가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일은 질색이다. 죄책감과 후회감으로 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어제 그렇게 처 맞았는데 안 아파? 내가 볼 땐 꽤 아파 보이는데 손 잡고 담임한테 가서 조퇴증이라도 끊어주리?"
지현이는 내 말을 무시하고 개봉한 우유를 들고 나에게 던지려고 했다. 어딜 감히. 난 내 필통을 들고 지현이 얼굴을 향해 내던졌다. 쇠필통이라 좀 아플 거다. 지현이가 코를 잡고 쓰러졌다. 역시나 꽤 아파한다. 만족했다. 들고있던 우유는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순간 지현이의 친구 두 명이서 우유 두 개를 뒤에서 내 머리 위에 부었다. 지현이 코피를 흘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씨발 가지가지 한다. 팀 플레이다 이건가. 가상하다. 내 머리에 우유를 붓기 위해 여자 애 3명이 이렇게 까지 노력을 한다. 뒤를 돌아보았다. 지현의 친구들은 누군가에 의해 밀쳐진 듯 외마디 비명을 지르곤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리고 내 시야는 어떤 사람에 의해 확연히 좁혀졌다. 시선을 위로 올렸다. 같은 교복을 입고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 애가 큰 양동이를 들고 있었다. 머리가 아리도록 소란스러웠던 교실은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지현이와 그의 친구들도 의문을 담은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았다. 나는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지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파악할 틈도 없이 양동이가 기울여졌고 내 머리 위론 많은 양의 물이 쏟아졌다. 양동이가 큰 만큼 물의 양도 엄청났다. 물에 빠진 생쥐 꼬라지가 되었다. 아직도 나는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치우고 고개를 들어 같은 반으로 추정되는 남자 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자 애는 누군가에게 물을 뒤집어쓰게 한 장본인이 아닌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안할 얼굴을 해야 될 타이밍인데, 그래도 모자란데 전혀 미안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 애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아까보다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오만상을 짓곤 그 놈을 올려다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그 놈은 아까보다 더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조용하던 교실에 잡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재환 갑자기 왜 저래?' ' 나도 몰라 지켜보자' 이 자식의 이름이 이재환인가 보다. 이름도 뭣 같았다.
"너 미쳤냐? 약 거하게 빨고 오셨어요? 아님 새디스트 그 쪽인가?"
나는 화를 내며 말을 하였다.
"얼라, 딩동댕 내가 새디스트끼가 좀 있어서."
날 힘들게 하는 집단에 한 명이 추가된 것 같다.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입만 움직여 말을 하였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상기할 수록 열이 뻗쳤다. 역시 이 세상은 날 싫어한다. 싫어해도 너무 싫어하나 보다. 아침이라 환기한답시고 겨울에 문을 활짝 열어놓은 교실은 매우 싸늘했다. 내 몸도 그에 비례하게 차가워져갔다. 따뜻했던 물이 식으면서 더욱 내 몸은 차가워졌다. 찬 바람이 지나가면서 날 치고 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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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그래, 이재환을 만났었다. 그때가 아마 시작이었을 거다. 물에 빠진 생쥐가 아니라 피에 젖은 쥐새끼가 돼서 기억을 되돌아보니 커다란 양동이에 있었던 물은 따뜻한 물이었다. 올라가지 않았던 입꼬리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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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
쟈니, 몽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