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국가대표에게도 봄날이~❀
w.스노우베리
'스치면 인연'
"긴장 하나도 안 되나 보네"
"그렇게 보여요? 저 완전 떨고 있는데"
"과장 조금 섞어서 송장 같아"
평생 일하러 가는 곳도 아니지만, 아니 애초에 얼마나 그곳에서 머무는지는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언니가 팬사인회를 갈 때 이런 느낌이었을까. 속이 매스껍고 뭔가 역류하는 기분. 몸이 안 좋아서가 이유였다면 당장이라도 미간을 좁히고 몸을 구부릴 텐데 오랜만에 설렘에서 느껴지는 기분이라 그저 심호흡만 반복했다. 심호흡이 부족하다 싶어 입술을 잘근 씹으면 하얀 빙판장에 시선을 던진 채 멍하니 앉아있는데 보고 있으니 머리가 백지장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온다, 온다"
머리가 백지장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혼자서 머릿속에 빙판 위를 달릴 선수들을 그렸는데 고개를 돌리자 진짜가 나타났다.
"어, 인사... 인사해야지"
동료와 자리에 일어나 몸을 풀고 있는 선수들에게 살금살금 다가갔다. 빙상장을 다양한 종목의 선수들이 공용으로 사용해서 그런가 낯익지 않은 우리에게 시선 한 번 던져주지 않았다. 그와 대비되게 난 아주 그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속으로 인사말을 준비했다. 아무런 사고 없이 조용히 이곳에서 지내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활짝 웃고 있는 사람이 눈에 밞힌단 말이야...
"아, 왜요"
"좀 형이 부탁하면 그냥 들어주면 안 되는 거냐"
"안녕하세요"
서로 투닥거리며 준비를 하다 갑작스러운 내 인사에 입을 삐죽대던 박지민 선수는 후드집업 지퍼를 그대로 다시 끌어올렸다.
"아, 안녕하세요"
"저, 그러니깐 교수님, 교수님 대타로 잠시 일하게 된, 아니 온 주치의에요. 그래서 인사드리러 왔어요"
"아! 어제 코치님이! 저는"
"박지민입니다"
- -
"교, 교수님, 대, 대타로 온, 아니 일하게 된"
"와, 선배 진짜 짜증 난다."
무슨 말을 그렇게 버벅거리냐, 그냥 딱 나처럼 깔끔하게 잘 부탁드립니다만 하지. 진짜 그럴걸 그랬네. 아까 어제 코치님이라고 말한 거 보니깐 알고 있던 것 같은데 괜히 주책맞게 자기어필한 것 같잖아. 마치, 나 새로 온 인간이다! 그러니깐 기억 좀 해줘라! 벌써부터 흑역사 하나를 만든 것 같아 머리카락 붙들어잡고 책상에 엎드렸다. 그러자 창문 너머에 열심히 계절의 흐름에 맞춰가기 위해 열심히 초록색으로 잎을 채워나가고 있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너 진짜 소나무라서 그동안 소개팅을 마다했구나"
"소개팅은, 내 나이 몇인데 벌써부터"
"난 또 엄청 특이한 취향이신 줄"
소나무처럼 올곧게 그때부터 주위 나무들이 잎에 초록색을 담던, 갈색을 담던, 알록달록한 색을 담던 흔들리지 않고 푸른색을 지켜왔는데 이제는 좀 꽃 정도는 피게 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박지민 선수 팬이 몇 명인데-"
"그렇다고 확률이 완전 0은 아니잖아요"
"0은 아닌데 0에 거의 수렴하지"
그래서 이제는 나무뿌리를 뽑으라 이건가.
- - -
'스며들면 사랑'
이곳에서 잠시 주치의로 지낼 수 있다는 사실에 어쩌면 정말 그 스침은 지금의 큰 그림을 위한 것일지 모른다고 철떡 같이 믿었는데... 그 흔한 스침을 내가 공주라도 된 마냥 착각에 빠져 인연이 될 수 있다고 억지로 우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일주일 동안 방문한 선수들은 꽤나 되나 왜 그중에 박지민 선수는 없을까.
"저 테이핑..."
"아, 죄송해요"
아무 의미 없이 종이만 뒤적거리다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와씨,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박지민선수는 멀찍이 문 옆에 서서 사과를 하는 내게 도리어 열심히 손을 휘저으면 허리를 숙였다. 미쳤어, 테이핑을 하기 위해 긴장하는 바람에 둔해진 손으로 서랍을 열어 테이프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테이핑을 받는 게 익숙한 듯 그는 제자리를 찾아가듯 의료용침대에 올라갔다. 무릎에 할거니깐 이 정도 길이면 적당하겠지. 자른 테이프를 무릎 슬개골 주변에 붙였다.
"저, 무릎이라고 안 했는데"
"아!"
정신이 팔렸구나, 가장 기본적인 질문도 안 하고 제멋대로 테이프나 붙이고. 지난 여름날 빙상장 자판기 앞에서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있었던 게 유일하게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모습이라 당연히 무릎이라고 생각해버렸다. 조마조마한 마음에 이걸 어떻게 떼어내야 하나 싶어 안절부절하자 박지민 선수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죄송해요, 어디 테이핑 하려고 하셨어요?"
"음, 무릎은 아니었는데"
"떼어드릴까요? 예전에도 하고 계시길래"
"예전에요?"
"아니, 그게, 자세가 딱 구부리고 계신 게 무릎인 거 같아서"
"최근에는 테이핑 안 했는데..."
급하게 자세 때문이라고 핑계를 댔지만 그 예전이 언제인지 꼭 알아내고 싶은지 박지민 선수는 허공에 시선을 두고 눈을 깜박였다.
"다 했어요."
"근데 저 어디서 보셨어요? 아님 만났나?"
아직도 그 '때'가 언제인지 추리하는 박지민 선수는 처음에 부끄럽게 문 옆에서 꾸물거리며 서있을 때랑 정반대되게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저는 티비에서 많이 봤죠."
"테이핑 한 걸 봤다는 건 땅에서 봤다는 건데"
땅에서 봤다는 그다운 표현에 웃음이 나 살짝 웃었다.
"아, 모르겠네. 코치님 빼고는 그거 잘 모르는데"
"왜요?"
"약점을 드러내는 거니깐요."
"근데 잘하시잖아요."
"옛날에는 좀 그랬어요."
사색에 잠기는 듯 그를 따라 나 또한 옛날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다. 그를 응원하는 나조차 그 옛날에는 감히 국가대표에 선발될 줄 생각지도 못했었지.
지역에서 3,4등 하는 애가 단거리 대표주자가 될 줄이야. 티비에서 그 얼굴을 보고 얼마나 놀랬는지.
"노력으로 이뤄낸 게 제일 짱이죠."
- -
"저 테이핑 받으러 왔어요!"
"형, 그렇게 아프면 병원을 가라니깐요."
그날 이후로 점심시간이 되면 활기찬 목소리 하나와 투덜거리는 목소리 하나가 섞여 들려온다. 그러면 난 또 못 이기는 척 테이프를 몇 개 집어 다가간다. 아, 교수님, 드디어 교수님이 차려주신 밥상에 밥 한 숟가락씩 떠먹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몇 번 혼자 오더니 그 이후로 꼭 전정국 선수까지 달고 와서 전정국 선수가 테이핑을 받을 때까지 옆에 앉아서 기다리다가 가기 일쑤였다.
"이제는 테이핑 받는 거 아무렇지 않나 봐요."
"이것도 노력의 일부에요."
초반에는 테이핑을 받으면 죄지은 사람 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더니 지금은 싱글벙글 사탕 하나를 물고서는 테이프를 붙이는 걸 고개를 내밀어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진짜 무릎이 안 좋나 싶어 한 걱정은 이미 잊은지 오래고 그저 박지민 선수의 '테이핑대작전'에 같이 참여중이다. 강제로 참여하게 된 전정국선수는 언제부터인가 긴 바지를 입고 와서는 자기는 끌려온 거지 테이핑 따위를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열심히 어필 중이었다.
"약점 동네방네 다 드러내게 생겼네요."
"괜찮아요"
"뭐 이번에는 1등 정도는 가볍게 할 수 있다는 거예요?"
"1등 했으면 좋겠어요?"
"1월생이라서 1 들어간 건 다 좋아해요"
"헐, 1월생이에요? 그럼 생일 지났네"
"지민씨는 한참 남았네요. 설레겠네요."
"생일 되면 훈련해야 해서 별로 안 반가운데. 아, 근데 언제까지 여기 있어요?"
"6월인가, 7월인가"
"그렇구나, 더 혹독하겠네"
- - -
'이라고 누가 말했었는데'
"그냥 선수 생활을 그만두지 그래요"
"몸 관리를 위해 노력하는 거야"
"노력하는 게 짱이라 했어"
- -
"지민씨. 저기요, 지민씨!"
"아, 이걸 진짜"
"왜요, 형이 좋다면서요."
"너는 내가 꾹아~ 하면 좋냐"
"아씨"
'넌 아예 내게 물들어버렸나'
- - -
스노우베리입니다.●'ᴗ'●
공지글에 당당히 지민이의 봄날이 올 거라고 기다려달라고 독자님들에게 한 약속이 맘에 밞혀서...(힝)
비록 완결을 내지 못했지만 조금이라도 독자님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예전에 짧게 써놨던 부분에 살을 붙여 지민이의 봄날이 왔습니다.
정말 이제는 글 속 정국이와 지민이는 안녕이네요●'ᴗ'●
진짜 3월, 봄이 와버렸네요.
이번 봄에는 우리 독자님들 옆구리는 시리지마로라!!
내..내가 다 시릴 테니!
[메일링은 이번주 내에 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