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트트랙 국가대표 연하남과 연애중
32 :오늘의 날씨
w.스노우베리
결국 참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다 와가면 전화를 한다고 했지만 분명 집 앞에 다 도착해서야 전화를 할 것 같아 횡단보도 앞에서 서성거렸다. 초여름이 어느새 한여름으로 접어들어 밤에만 느낄 수 있던 선선한 바람마저 불지 않았다. 덕분에 기분 나쁜 끈적거림이 느껴졌지만 오늘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누가 오는 날인데, 습기가 많던 날씨가 덥던 무슨 상관이겠어. 버스가 도착하면 그렇게 기다리던 사람이 내릴 거고 몇 발자국 걸어 내 맞은편에 서 있을 거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상상이 현실이 되는 시간.
버스에서 내린 정국이는 날 발견하고서는 잠시 멈춰 눈을 찡그리더니 이내 발걸음의 보폭을 넓혔다. 신호등은 내게 어서 달려가라며 정국이가 횡단보도 앞에 서기도 전에 초록불로 바뀌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가까워질수록 속력을 늦추기는커녕 그대로 뛰어가 안겨버렸다, 웃고 있는 게 어서 더 빨리 달려오라고 날 재촉하는 것만 같아서.
"야,이... 전정국..."
"누나다-"
얼굴을 열심히 눈에 담자 자꾸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이 우르르 떠올랐다. 이번에는 무슨 말을 먼저 해줘야 할까 고민을 하는데 성급한 입은 수고했어가 아니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너 없는 한 달동안 내가 얼마나 또 혼자서 끙끙 앓았는데 방실방실 웃고 있는 정국이를 보자 힘이 빠졌다가 곧 그리웠던 시선에서 느껴지는 따듯함에 볼을 감싸잡아 몇 번 짧게 입을 맞췄다. 그러다 이내 우리 둘 다 평소보다 넘치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서 웃음이 터져버렸다.
"어째 가면 갈수록 살이 더 빠지는 거 같아"
"빠진 게 더 보기 좋지 않아?"
위에서 내려다봐서 그런가. 정국이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땅에 발을 붙이고서 조금 떨어져서 보다가 다시 쪼르르 걸어갔다. 본인이 원해서 한 다이어트로 빠진 살도 아니고 하계훈련 기간 동안 개고생해서 빠진 거니 반가울 터가 있겠나. 하지만 정국이는 꽤 만족스러운지 두드러진 턱뼈를 한 번 만지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게 만져볼 것을 권유하며 얼굴을 들이미는 정국이의 정수리 부근의 머리를 헝클였다.
"엄청 고생했네-"
"아무 일 없었지? 학교는, 아, 방학했겠네"
"방학해서 집에서 뒹굴뒹굴했더니 너무 건강해졌어"
"누나는 볼이... 귀여워지셨네여"
얘가 하계훈련은 갔다 오더니 연애세포를 다 죽여서 왔나. 딱히 부정을 하지 않고 웃기만 하는 정국이의 반응에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그동안 뭐 했어? 또 알바?"
"알바하고 공부 찔끔하고 애들 만나고 자고, 왜 그렇게 봐?"
"말하는데 막 눈앞에 그려진다, 어떻게 지냈을지"
계획 따위 없는 방학생활 동안 내가 뭘 하고 살았는지 나도 기억이 안 나서 손가락을 접으면 뭘 했는지를 나열하자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더니 끝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다 알기는 무슨, 이번에는 좀 나쁜 생각도 했는데 아마 이건 내 입으로 꺼내기 전까지 절대 모를 거다.
"너도 훈련 가서 뭐 했을지 눈에 선하다"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아침 먹고-"
"또 훈련하다가 점심 먹고 지민이 오빠랑 놀다가 또 훈련하고- 쌩지옥이야, 완전"
"이번에 새벽에 눈이 안 떠져가지고"
"그래서 누가 깨워줬어?"
"처음에는. 근데 또 적응되더라"
그렇게 잠이 많은 애가 새벽훈련에는 꼬박꼬박 눈을 잘 뜨는 걸 보면 운동선수는 맞구나 싶었다. 체력과 정신력, 둘 다 받쳐주니깐 또 이렇게 하계훈련을 잘 끝내고 돌아왔겠지.
"누나, 술 마실까?"
"갑자기 웬 술?"
정국이가 맞잡은 손이 아닌 자유로운 손으로 편의점을 가리키더니 내게 먼저 술을 마시자고 제안을 해왔다. 아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연애하다가 정국이가 먼저 술을 마시자고 하는 날도 있구나. 아마 작년이었나, 허언증 발언을 한 친구와 인연을 끊는 날에 술은 정국이랑만 마실 거라는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다가 몇 번 술 마신 걸 들키고 나면 정국이는 그 날의 약속을 언급하곤 했었다. 그래서 드디어 합법적으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스무 살에 한 번 술을 마시려 했는데, 겨울에는 바쁘시고 봄에 시간이 나나 했더니 한 번 스쳐 지나가듯 운동선수가 술을 마셔서 좋을 것 없다는 소리를 듣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안속으로 넣어버렸다.
"별로야?"
"아니, 그, 너 마셔도 괜찮아?"
"왜? 나 미자 아닌데. 옛날에 나랑만 술 마신다고 빨리 커달라면서"
"그거야, 기억나지."
"다 컸잖아. 더 커야 해?"
뭐지, 원래 술 마시지 말라고 하는 사람이 술을 먹자고 꼬드기는 이 낯선 공기 흐름에 오히려 내가 당황해버렸다. 다, 다 컸지. 여기서 더 크면 얼마나 더 크려고. 얼떨떨한 난 편의점의 문에 달려있는 종소리가 난 후에서야 정말, 드디어, 고대하던 순간이 다가온 것을 실감했다. 얼마나 사야 할까, 뭘 마셔야 할까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내 결정장애를 돕기 위해 정국이는 눈앞에 딱 정직하게 두 캔을 보여주더니 내게 쥐여주고서 계산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너 하나, 나 하나? 이게 끝?"
"길거리에서 취하려고?"
"아니, 이건 마셨다고 할 수가 없잖아"
"모자라면 내꺼 마셔"
내게 계산대로 향하는 길 말고는 틈을 주지 않겠다는 정국이의 의지에 맥주 두 캔을 들고서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뒤에서 놓이는 딸기우유.
"이건 또 왜?"
"마시고 싶어서"
술 사이에 어린이 같은 우유의 등장에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계산은 정국이가 하니깐 조용히 알바생이 내미는 봉지를 받아들었다. 문을 다시 열고 나가 테이블에 잠시 봉지를 내려놓고 캔을 까 정국이에게 내밀었다. 꽤나 자연스럽게 받아드는 게 능숙해 보여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바라보자 김빠지듯 웃더니 내 손에 들린 캔에 자신의 캔을 살짝 쳤다.
"건배"
"아, 뭐야. 다시, 다시"
결국 제대로 된 건배를 하고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걸었다. 어제만 해도 혼자서 걸었던 길을 오늘은 둘이 걷고 있구나. 어제는 혼자서 꿍얼거렸는데 오늘은 대답해주는 사람도 있구나. 어제는, 아니 이틀 전에도 일주일 전에도 했던 나쁜 생각은 제대로 된 큰비를 맞은 건지 생각이 안 나네. 그래서 이렇게 한여름인데도 시원하게 느껴져 자꾸 웃음이 새어 나오나.
"딴 생각 중이야?"
"어? 아니, 이거 마셨더니 말이 느려진다."
오늘도 적절한 핑계를 찾아 웃으며 맥주캔을 정국이 앞에 흔들었다. 아직 남아있는 맥주가 출렁거리는 탓에 찬기가 손으로부터 느껴져 과거의 나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다시 눈앞의 정국이를 멀뚱멀뚱 바라봤다. 그래, 너 때문에 속앓이를 해도 현재의 나는 항상 너로 인해 행복할 테니. 찬 맥주를 다 털어마시면 완전히 다 잊지 않을까 싶어 입을 대려다 정국이에게 제지당했다. 그리고서는 갑자기 본인이 들고 있던 캔을 열심히 비우기 시작했다.
"지금 뭐, 원샷 내기하는 거야?"
"아, 더 마시고 싶다"
도대체 내 캔은 왜 바라보고 계시는 건데요. 급하게 캔을 뒤로 숨겨버렸다.
"가위바위보 하자"
"왜? 이거 내꺼야"
"안 내면 진 거, 가위 바위 보"
본능적으로 정국이의 구호에 보자기를 내버렸다. 아, 보자기, 그때 절대로 안 낸다고 했는데. 가위를 낸 정국이는 요란하게 제게 빨리 캔을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내껀대 왜 가위 바위 보를 해"
"알겠어, 반반"
말도 안 되는 내기에 어이가 없다가 또 얼마나 술이 마시고 싶으면 그랬을까 측은해져 그냥 못 이기는 척 캔을 넘겨줬다. 그런데 정국이의 목젖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뒤늦게 그걸 발견한 내가 손을 뻗었을 때는 너무 늦어버렸다.
"야!"
"목이 너무 말라서"
"나도 목 말라!!"
"진짜? 내가 또 그럴 줄 알았지"
그러면서 뻔뻔하게 봉지에 들은 딸기우유를 내미는 것 아니겠나. 심지어 빨대는 언제 챙겨왔는지 친절하게 빨대 껍질을 벗겨 꼽더니 내 손에 꼭 쥐여줬다. 이제야 마음에 드는지 웃고서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손을 붙잡고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빨대를 잘근잘근 씹으며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하니 그때부터 정국이도 슬슬 눈치가 보이는지 힐끗힐끗 날 내려보는 게 느껴졌다.
"그네 탈까?"
"... 태워주면 생각해보고"
항상 이게 문제였다. 삐지는 척은 쉬운데 시간이 지나 나 또한 이제 슬슬 삐진 척하기 힘들때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근데 참 정국이는 그걸 잘 알고 치고 들어온다. 그래서 오늘도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놀이터로 걸어갔다.
"그네 좀 밀어봐라-"
"춘향이야?"
어색한 사극톤에 정국이는 뒤에서 웃으며 밀어주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더 세게 밀어달라는 내 주문에 어느 정도 밀어주고는 정국이는 힘들다며 옆에 있는 그네에 앉았다. 근데 어린이용 그네라서 그런가 또 그네는 쉽게 멈추기 시작했다.
"또 타게? 그렇게 재밌어?"
"아, 완전. 너도 밀어줄까?"
나는 정국이의 대답도 듣지 않고 일어나 정국이 뒤로 걸어갔다. 아, 이 모습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내게는 첫 헤어질 뻔한 날, 정국이에게는 헤어질 뻔도 안 했다는 날.
그날 하교 후 마주친 뒷모습과 지금 내가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은 똑같았다. 그때는 정국이가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 할까 봐 그렇게 무서워서 도망갔었는데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난 조금 이기적이게 변한듯싶었다. 예전처럼 한결같이 눈앞에 있는 너를 난 더욱더 나에게 끼워 맞추려 했다. 내가 조금 더 편하게, 행복할 수 있도록.
"왜 그래?"
정국이의 뒷모습만 보다가 다시 그네로 돌아와 털썩 앉아버렸다.
"정국아"
"어?"
"사실 너 훈련 갔을 때"
"... 안 좋은 생각 좀 했어"
가라앉는 내 목소리에 당황한 듯 정국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핑곗거리를 찾아 헤매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들어내려 하니 용기가 조금 필요해 심호흡을 하고 뜸을 들이자 정국이는 내 말의 뜻을 종잡을 수 없는지 섣불리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기다리는 게, 이번에는 좀 힘들었는데"
"그래서 좀 안 좋은 생각도 하고"
속으로만 하던 생각을 밖으로 꺼내려니 정리가 안돼서 말들이 깔끔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애꿎은 모래를 신발 앞코로 파다가 들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기도 전에 정국이가 쭈그려 앉더니 날 올려다봤다.
"몇 번 못 참아서 전화도 할 뻔 했ㄱ"
"참지 말고 전화해"
"방해되잖아, 신경 쓰이고"
"방해 아니야, 전화보다, 아니 이러고 있는 게 더 신경 쓰여"
"참지 않아도 돼"
정국이는 머리를 한 번 헝클였다.
"쭈그려 앉지마, 무릎 안 좋아"
다시 한 번 날 빤히 올려다보더니 일어나서 그네 옆에 있는 기둥에 걸터앉았다. 꽤나 심란해 보이는 표정에 괜히 말을 꺼낸 건가 싶었다. 지금은 그런 못된 생각을 떠올릴 시간조차 아까울 뿐인데.
"너가 좋아하는 일인데 어떻게 안 참아. 그리고 그냥 답답해서 한 번 말한 거야"
"좋아서 하는 일 맞는데"
"누나가 경기 갔다 오면 메달 보고 좋아해서 열심히 하는 거야"
"또 맛있는 거 많이 사주고 싶고 같이 놀러도 가고 싶어서 상금 따려고 열심히 하는 거고"
"그러니깐... 운동이 먼저 아니야"
"처음부터 그랬어, 첫 국가대표 선발될 때부터"
고개를 숙인 채 횡설수설하는 정국이의 말을 듣다가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런 애를 두고 난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미안해, 자꾸 기다리게 해서"
"전...정...구욱...아, 진짜... 내가 다 잘못했어-"
또 입을 열려 하는 정국이에게 그네에서 일어나 달려가 안기자 그대로 날 꽉 안아줬다. 추하게 애처럼 안겨서 울다가 울음이 잦아들어 품에서 빠져나왔다. 근데 정국이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여있었다. 나에 비해서는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지만.
"정국아, 울어?"
"안 울어-"
"에- 운 거 같은데"
"누나는 오열을 하던데"
"그만큼 내가 힘들었다는 거야- 아시겠어요?"
"알지. 고마워, 이번에도 기다려줘서"
천만의 말씀을. 내가 장난스럽게 뒷짐을 지자 정국이는 코웃음치고서는 제 옆에 있는 딸기우유는 내게 내밀었다. 아, 울고 나니 수분이 필요해. 이제는 놀이터에서 나설 생각인지 정국이는 빈 맥주 두캔이 든 봉지까지 들고서 내 손을 잡아왔다. 훨씬 홀가분해져 발걸음이 가벼워지는 기분에 괜히 손깍지를 꼈다.
"정국아, 그러면 쇼트트랙보다 내가 더 좋아?"
"무슨 그런 1차원적인 질문을"
"너 대답해라. 안 그러면 지금 이 손을 놓는 수가 있어"
"알겠어. 누나"
"응?"
"누나가 더 좋다고"
한 여름밤, 오늘 날씨는 아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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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베리입니다.٩( ᐛ )و
32화는 31화의 연장선이 맞습니다.
큰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고 했잖아요? 정국이가 큰 비를 내려준 덕분에 오늘의 날씨는 맑음입니다!
또 3화인가...(가물가물) 에서 '한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넌 함께였다'(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일단 쓴다)를 독백으로 쓴 적이 있는데
아, 진짜 꼭 독백이 아닌 "" 안에 꼭 넣고 싶었습니다.
뭐... 그렇다구요^ㅁ^ (작가는 소원성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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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호닉은 받지 않습니다.
(저번 1월 1일 기념으로 받았던 암호닉중 비회원분들의 암호닉 또한 다 추가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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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돼여!!! 용서 YES YES 해주세여... (;ω;)
분명 저번에 두부 먹고 절대 다시는 또 두부 먹을 일 없겠다고 했는데... (먼산)
하지만 오늘 또 다짐을 해볼게요.
연재하는 동안 정말 조용히 살겠습니다^ㅁ^
오늘도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๑❛ڡ❛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