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야!!!!!”
저 멀리서 나를 부르며 와다다 달려오는 사람은 이성경. 당황한 내가 주춤하는 사이 코 앞까지 뛰어오더니 몸을 던지듯 안긴다. 어우 야. 나는 그 힘에 밀려 휘청거렸다. 그에 무섭게 성경이는 내 어깨를 붙들며 큰 키로 나를 내려다봤다. 입술을 퉁 내민 모습이 대형견 같았다. 월요일이라고 격하게 인사하는 건 아닐 거고, 필시 남주혁 때문일 거다. 그 생각을 하던 참에 성경이가 남주혁의 이름을 꺼내며 말 문을 열었다. 아 남주혁 진짜! 내가 반 죽여놨어! 미안해 여주야 진짜.... 주말동안 메세지로도 계속 미안하다고 하더니 아직도 이러네. 난 정말 괜찮은데 계속 사과를 하니 난감한 건 나였다.
“아 진짜 너한테 미안해서 내가..”
“진짜 괜찮아 진짜. 너도 몰랐잖아~ 그리고 나 좋았어, 오랜만에 주혁이 만나서.”
내가 열심히 민형이의 수학 문제를 풀 동안 남주혁이 먼저 성경이에게 연락을 했던 건지 토요일 저녁에 그렇게 카톡이 왔더랬다. 쉴 틈 없이 울리는 알람 소리에 뭔가 하고 봤더니 알림창은 온통 울음바다였다. 여주야ㅠㅠㅠㅠ나 얘기 들었어ㅠㅠㅠ 너네 원래 알던 사이였다며ㅠㅠ 난 그것도 모르구ㅠㅠㅠ남주혁 미친놈ㅠㅠㅠㅠ 자기도 만나고 난 후에야 동창인 걸 알았다고 하면 될텐데 거짓말은 죽어도 못하겠는지 있는 그대로만 술술 말했나보다. 때문에 나는 남주혁이 괘씸해 연락을 끊어야겠다고 펄쩍 뛰는 성경이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었다. 물론 지금도. 어깨를 붙잡고 있는 건 어느새 나였다.
“남주혁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걔 너 좋아해…(먼산) 뒷말은 쓰게 삼켰다. 성경이한테 잔뜩 구박 받았을 (다시 말하지만 나였어도 죽빵) 남주혁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왠지 등짝으로는 안 끝났을 것 같은데. 이따가 연락이나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성경이는 왜 걔를 감싸주냐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나를 바라봤다.
“야, 성경아.”
“어?”
“주혁이 진짜 괜찮은 애야.”
“뭐라고?”
“걔가 초등학교 때부터 인기 많았어. 잘생기고 매너 좋아서.”
툭툭. 나는 어깨에 얹힌 손을 몇 번 두들기곤 그 얼굴을 향해 씩 웃어보였다. 성경이의 얼굴이 더욱 의문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곧 저를 부르는 선배의 목소리에 내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가요! 큰 소리로 대답하더니 가봐야겠다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튼 여주야, 너가 괜찮다니까 다행이긴 하다.. 가볼게. 이따 수업 때 봐. 긴 머리를 날리며 선배를 쫓아가는 모습을 보다 나도 등을 돌렸다. 그 순간 저 멀리서 걸어오는 정재현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 헉 소리를 내며 허겁지겁 걸음을 옮겨 음료수 자판기 옆으로 몸을 숨겼다. 눈만 빼꼼 내밀어 정재현의 동선을 확인했는데, 다행이도 내 쪽은 아니였다. 나를 못 본 건지 빠르게 반댓편으로 사라지는 녀석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판기에 머리를 기댔다.
“죽겠네…”
물 건너 간 소개팅에 마지막 발버둥을 쳐본다. 나는 지금 정재현을 피하는 중이다.
[나 당분간 동기들이랑 점심 먹어야 할 것 같아]
처음은 그렇게 시작했다.
-김여주, 너 어디야?
“아.. 나 학굔데. 왜?”
-뭐야. 오늘 같이 가는 날이잖아. 왜 먼저 갔어?
최대한 정재현을 만나지 않는 쪽으로 행동했다.
“김여주. 집에 가자.”
“아, 먼저 가. 나 약속 있어.”
정재현한텐 당황스러울 거라는 걸 알면서도 이기적으로, 그랬다. 평소 정재현과 하던 모든 걸 하나둘씩 끊어가며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이 정말 걷잡을 수 없이 커질까봐. 내 선에서는 최선이였다. 아주 가끔씩 정재현을 마주할 때면 녀석은 간혹 말없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나는 이제 그 시선조차 버거운 상태였다. 그 정도로 아주아주.. 심각했다.
요즘 제일 당황스러울 때는 무방비 상태로 걸어가다 정재현과 마주칠 때다. 눈이 정통으로 맞아버려서 숨을 수도 없는데 정재현이 내게 말을 걸려는 자세로 걸어올 때. 지금이 바로 그 때였다. 제 동기와 나란히 걸어오다 나를 보자마자 순간 멈칫 하더니 그대로 내 쪽을 향해 걸어온다. 아침부터 정재현에게서 온 전화를 다 씹었는데, 아마 그거에 대해서 불만을 드러낼 거라는 직감이 빡! 왔다. 나는 애써 눈을 굴리다 때마침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태용 선배를 발견했다.
“김여,”
“태용 선배!!!!!”
정재현이 내 이름을 채 다 부르기도 전에 나는 태용 선배를 향해 달렸다. 정재현을 스쳐 지나갈 때 녀석이 나를 따라 고개를 돌리는게 시야 끝에 걸렸지만 못 본 척 지나쳤다. 아 어디 있었어요! 한참 찾았네! 일부러 크게 뻘소리를 내뱉자 선배가 눈을 크게 뜨며 미간을 좁힌다. 나는 그 앞에 멈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하하~! 선배 저희 도서관 가기로 했잖아요. 지금 가요 지금.”
“내가? 내가 언제.”
“아 또 기억 안 나는 척!! 빨리 가요.”
태용 선배는 정말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더니 곧 고개를 돌려 내 등 뒤쪽을 짧게 응시했다. 정재현이 아직 그 자리에 있나보다. 혹여나 녀석이 잡으러 올까봐 억지로 선배를 잡아 끌었다. 다시 내게 시선을 옮긴 선배는 쯧, 하고 혀를 한 번 찬 후 내가 이끄는대로 터덜터덜 따라왔다. 나는 건물 밖으로 나가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선배 미안해요. 진짜 죄송해요. 머지않아 손을 빌며 뱉을 말들이었다.
“너 왜그래?”
밖으로 나온 후 얼마 안 가 선배는 나를 멈춰세웠다. 그에 나는 고개를 푹 숙이다 곧 다시 들어보이며 선배의 팔을 꾹 잡고있던 두 손을 기도하듯 모았다. 손 끝을 턱에 가져간 나는 예상했던 것처럼 폭풍 사죄를 드렸다. 선배 진짜 죄송해요. 진짜! 한 번만요. 모른 척 해주세요.
“정재현.”
“..”
“걔랑 무슨 일 있어?”
히지만 선배는 매정했다. 그 짧은 시간에 다 꿰뚫은 걸 보니 역시는 역시였다. 나는 턱에 걸쳤던 손을 힘 없이 툭 떨어뜨렸다. 그와 함께 시선도 툭. 이러고 있는 내가 너무 바보같고 한심해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선배가 알 정도면 정재현은 당연히 알고 있겠지. 내가 평소와 다른 거. 모르는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였다.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다. 선배는 내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별다른 말을 잇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떨군 채 힘 없이 입을 열었다.
“선배.”
“왜.”
무심한듯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저 혼자 있어요. 무슨 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러곤 입술을 깨물듯 꾹 다물었다. 코 끝이 시큰거렸지만 끝끝내 울지는 않았다. 내 말을 어떻게 이해했는진 모르겠지만, 선배는 제 손으로 내 머리를 짧게 헝클였다. 가자, 도서관. 고개를 들었다. 먼저 등을 돌려 걸어가는 선배를 멍하니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얼른 발을 내딛었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다행이다. 나는 하교를 위해 버스에 올라타는 그 순간부터 생각했다. 버스에서 내린 내가 향한 곳은 집이 아닌 치타폰이였다. 그동안 혼자 간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은 무슨 깡인지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지금 가면 손님은 나뿐일 거다. 딱 좋았다. 생각 정리를 위해선 조용한게 최고였다. 치타폰 앞에 다달아 망설임 없이 문을 열자 칵테일 잔을 닦던 텐 오빠가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말이 끝을 맺지 못하고 멈췄다. 대신 여주? 하고 나를 부르며 배시시 웃는 오빠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오빠~”
“이 시간부터 마시러 온 거야? 다른 애들은?”
“아, 오늘은 혼자에요.”
나는 그 말을 증명하듯 2인용 테이블에 앉은 후 가방을 맞은 편 의자에 걸쳤다. 오빠의 눈썹이 곡선을 그렸지만 왜? 라는 물음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 했다. 속상할 때 오면 자주 마시는 도수 높은 칵테일이였다. 안주는 필요 없냐는 말에 고개를 저었다. 여주, 취하면 어떻게 집에 가려구~ 오빠의 밉지 않은 잔소리가 귓가를 찔렀다. 그에 나는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몰라요. 여기서 자야지 뭐. 그러자 오빠도 웃는다.
주문한 칵테일을 기다리는 동안 핸드폰을 뒤적거렸다. 정수정에게 답장을 하기 위해 들어간 카톡창에는 몇 시간 째 읽지 않은 정재현의 메세지가 화면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김여주. 내 이름이 내용이었다. 그 석자를 조용히 응시하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정수정이 보낸 메세리를 꾹 눌렀다. 주말에 새로 생긴 디저트 카페를 가보자는 메세지였다. 나는 대충 알았다고 답한 후 다시 홀드키를 눌러 화면을 잠갔다. 그때 마침 텐 오빠가 칵테일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파란색 그라데이션은 볼 때마다 예뻤다. 얘가 달게 생겼는데 은근 독하단 말이지.
“오빠 고마워요.”
“맛있게 마셔 여주.”
나는 대답 대신 입꼬리를 올려보이곤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달콤씁쓸한 맛이 혀에 맴돌다 기도를 타고 내려갔다. 목울대에 열이 올랐다. 자연스레 턱을 괴며 생각에 잠겼다. 낮에 봤던 정재현이 생각났다. 나를 보자마자 지체없이 내게로 걸음을 내딛던 모습이 계속 맴돌았다. 또 한 모금 술을 들이켰다. 자초한 건 나인데 지금 이 상황이 전혀 편하지 않았다. 차라리 정재현도 나를 무시하면 좋을텐데. 나도 모르게 깊은 숨이 터졌다.
정수정과 김동영은 꾸준히 내게 눈치를 줬다. 정재현 진짜 괜찮은 놈이라니까? 난 완전 찬성. 고백해! 그 말을 전화로도 하고 문자로도 하고 만나서도 했다. 무조건 끝은 고백이였다. 그때마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단답형으로 대화를 끝냈다. 그게 말처럼 쉬웠으면 이미 열 번은 했겠다. 실상은 도망에 도망인데. 또 한 모금.
그때 정재현이 영화를 보러 가자 했을 때 귀찮은데 무슨 영화냐고 거절을 해야 했던 걸까. 그럼 그 양아치들을 다시 만날 일도 없었을텐데. 그렇게 되면 정재현이 날 구해주는 일도, 내가 그런 정재현에게 설렘을 느낄 일도 없었을 거잖아. 나 할 말 있어, 하고 좋아한다 말하면 정재현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눈에 훤하다. 자기한테 나는 친구라고 거절하면서도 나보다 더 미안해 할 놈이다. 나는 괜찮다고 하겠지만 전처럼 녀석을 대하지 못할 거고, 정재현은 그런 내 눈치를 보며 힘들어 할 거다.
그렇다고 안 보면 그만이지,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였다. 엄마 아빠만 생각해도 그렇잖아. 서로를 인생의 동반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지금도 정재현네 부모님이랑 여행 중이신데. 정재현네와 놀러 가고 밥 먹는게 일상이라 불편해지면 답이 없다. 아, 고백은 진짜 아니야. 그건 진짜 할 수가 없어. 설령 정재현과 연애를 한다고 해도 우리가 평생 간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헤어지면…. 똑같지 뭐. 첫 연애도 그랬다. 평생 지속될 거라 생각했던 관계였지만, 아니였다. 나는 남은 칵테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이 타서 마신 건데 도수가 높아 더 타는 기분이다. 취기가 오르는지 얼굴에도 열이 올랐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우리는 정말 오랜 친구 사이다. 걸음마도 같이 떼고 첫 말문도 아마 같이 터뜨렸을 거다. 집에 가면 정재현과 같이 찍은 사진과 동영상이 산처럼 쌓여있다. 벌써 20년이 넘어버린 내 인생은 아주 예전부터 그렇게, 정재현과 함께 흘러갔다. 때문에 내 감정 조각에, 말 한 마디에, 정재현을 잃는 건 싫었다. 나 혼자 정리하면 모든게 정상으로 돌아가니 내가 정리하는게 맞다. 그런 거다. 그런 거야.
아아, 내가 이런 이유 때문에 혼자 술을 마시는 날이 오네. 헛웃음이 나와 어깨가 들썩였다. 손에 쥔 칵테일 잔을 천천히 흔들었다. 얼마 남지 않은 푸른색 음료가 작게 회오리 친다. 우리 관계도 이렇게 요동칠 줄 누가 알았겠냐. 혀 끝으로 쓴 맛이 느껴졌다.
언제 쯤이면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 벌써 일주일이 다 돼가도록 너를 피해 다니는데.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거 한 번 믿어보려고 했는데. 그래서 죽어라 안 마주치면 분명 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근데, 진짜 짜증나게, 안 보니까 더 보고싶은 거 있지.
토요일. 과외를 끝나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엄마랑 아빠 지금 집에 왔다. 수업 중에 받은 엄마의 메세지를 보고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불렀는지 모른다. 아아, 그동안 같이 밥 먹자는 정재현 떼어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냐 김여주. 이제 안 그래도 된다고. 이제 각자 집에서 부모님과 도란도란 집밥 먹는 거라고~! 룰루랄라 도어락을 풀고 현관문을 열자 짐 정리를 하고 계시던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엄마가 이렇게 반가운 건 또 처음이였다. 나는 활짝 웃으며 신발을 벗고 몇 주인지 기억도 안 날만큼 오랜만에 보는 엄마에게 달려들었다.
“엄마 진짜진짜진짜 보고싶었어!! 아빠도!!!!”
“보고싶었다는 기집애가 연락 한 통 없고.”
“아니~ 괜히 여행 방해 될까봐 그랬지~ 엄마 이제 앞으로 여행 가지마. 알았지?”
갈거면.. 정재현도 데려가! 엄마는 내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콧방귀를 뀌셨다. 하지만 백퍼센트 진심이었다. 나는 방으로 가 가방을 의자 위에 놔둔 후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었다. 손목에 껴놨던 고무줄로 긴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었다. 화장부터 지워야겠다는 생각에 다시 방을 나갔는데 엄마가 짐정리를 멈추고 그런 나를 불렀다.
“우리 나가야 돼.”
“어? 왜? 어디?”
밑도 끝도 없이 나간다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재현이네랑 저녁 먹기로 했어.”
이어 들려오는 말에 더더욱 좁혔다. 아니 무슨.. 아까까지 같이 있었으면서 저녁도 같이 먹어?(황당) 이럼 내가 신나서 집에 온게 굉장히 허무해지는데. 나는 온몸으로 거부했다. 고개도 젓고 손도 저어보였다. 어우, 엄마. 안돼. 내 말에 이번엔 엄마가 눈썹 새를 좁혔다. 왜!
“나 바빠. 할 거 완전 많아. 외식 할 시간 없어.”
“그래?”
“어~! 완전 바빠 나. 갈 거면 엄마랑 아빠만 가. 난 집에서 알아서 먹을게.”
정재현의 지읒도 꺼내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자 엄마는 곧 표정을 풀고 다시 짐정리를 하셨다. 그래, 그럼 뭐 알아서 먹어. 그에 나는 열심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큰일날 뻔 했네. 속으로 안도했다. 아, 오늘 저녁 또 라면 당첨이네. 며칠째 라면인지 모르겠다. 나는 거의 다 한 과제 이참에 오늘 끝내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화장실로 향하던 걸음을 마저 내딛었다. 그런데 그때 등 뒤로 엄마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어, 재현 엄마. 화장실 문고리를 돌리려던 손이 멈칫했다.
“아, 재현이도 과제가 많대? 어어. 여주도 못 간대~ 우리끼리 가야겠네.”
“..”
“어어~ 그럼 애들은 뭐 대충 알아서 시켜 먹으라고 하고, 이따가 여섯시에 그 고깃집에서 보는 걸로. 어어. 이따 봐.”
재현이도 과제가 많대?
재현이도 과제가 많대?
재현이도 과제가 많대?
애들은 뭐 대충 알아서 시켜 먹으라고 하고.
애들은 뭐 대충 알아서 시켜 먹으라고 하고.
애들은 뭐 대충 알아서 시켜 먹으라고 하고.
헉. 나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엄마! 내가 빽, 하고 부르자 전화를 끊던 엄마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신다. 아, 기집애 놀랐잖아! 왜!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곤 화장실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나 갈래.”
“뭐?”
“나 고기 먹으러 갈래. 생각해보니까 과제 다음주까지야.”
“아 그냥 집에서 먹어. 재현이도 못 간대, 둘이 먹어.”
“아아 싫어 싫어. 고기 먹을 거야. 나 간다. 나 가는 거야. 나 가. 오케이, 얘기 끝!”
와 진짜 큰일 날 뻔 했다. 내가 걸음이 조금만 더 빨랐으면 저걸 못 듣고 그대로 정재현이랑 둘이 밥 먹을 뻔 했네. 나는 왜 변덕을 부리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척 하며 도로 방으로 들어갔다. 그래, 얌전히 여섯시나 기다리자. 침대에 걸터 앉는 순간 하아, 하고 숨이 터져나왔다.
제엔장.
“재현아, 고기 먹어.”
“네. 먹고 있어요. 이모도 드세요.”
“어우~ 역시 재현이밖에 없다니까.”
젓가락을 잘근 씹었다. 과제가 많아서 못 온다는 정재현은 지금 내 앞에 떡 하니 앉아 야무지게 고기를 먹고 있다. 나는 입을 쩝 다시며 눈을 힐끔 들었다. 태평한 표정의 정재현이 시야게 들어온다. 짧게 그 모습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내렸다. 한숨이 터져나올 것 같아서 억지로 고기를 입에 넣었다. 씹는게 씹는게 아니였다. 그때, 내 앞접시로 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 몇 점이 얹어졌다. 고개를 들자 정재현이 집게를 들고있다. 눈이 마주쳤다.
“…”
“먹어.”
“과제 있는 거 아니였어..?”
“어.”
“..”
“근데 누구 얼굴 보기가 너무 힘들어서.”
날 바라보는 시선이 올곧았다. 목구멍이 꾹 막혀 애써 고기를 넘겨야했다. 그 누구가 나를 가리킨다는 건 누구보다 스스로가 잘 알아서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런 내게 정재현은 나직한 말을 내뱉었다.
“김여주.”
“..”
“나 좀 봐.”
순간 호흡이 멈추는 기분이었다. 젓가락을 쥔 손이 옅게 떨렸다. 달래듯 다정한 목소리라 꾹꾹 누르던 마음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나는 손에 힘을 주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부모님들은 다음 여행 계획에 대해 얘기하시느라 바쁘셨다. 꼭 정재현과 나, 우리 둘만 한 공간에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잡으며 정재현을 바라봤다. 그 작은 행동이 너무 힘들었다. 시야에 정재현이 가득 담기는게, 무서웠다.
“이따가 얘기 좀 해.”
그런 나를 알리 없는 정재현은 또 한 번 쿡 찔러들어와 온 몸을 흔들었다. 그동안의 행동에 대해 말을 하려는게 분명하다. 나는 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젠가는 올 거라고 생각했던 상황이었다. 나는 정재현에게 하려고 했던 말들을 속으로 정리했다. 어제 혼자 술을 마시며 서툴게 생각하던 말들이었다.
“여주랑 재현이는 얼른 밥 먹고 집 가. 둘 다 할 거 많다며.”
“엄마는?”
“우리는 노래방 가려고.”
오늘이 정말 끝을 보는 날이구나 싶었다. 부추기듯 상황이 만들어졌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한 후 접시에 놓인 고기를 입에 넣었다. 다 식어서 더 맛이 없다. 뭘 씹는지는 더더욱 모르겠다. 그 후로 정재현과 나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둘 다 묵묵히 먹기만 했다. 그 와중에도 정재현은 간간히 내 접시에 고기를 올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반찬도 하나씩 밀어주며.
“먼저 갈게요.”
정말, 정재현과 둘만 나란히 식당을 나왔다. 자동문이 닫히는 순간 우린 정말 둘 뿐이었다. 집이 코앞이라 다행이지, 멀었다면 아마 얘기도 하기 전에 숨이 막혀 죽었을 거다. 나와 정재현은 별다른 말 없이 자연스럽게 아파트 단지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하늘엔 꽤 밝은 달이 떠있었다. 보름달이라기엔 조금 모자란 달. 그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김여주.”
그 즈음 정재현이 날 불렀다. 순간 달이 일렁였다. 어. 나는 짧게 답했다.
“..”
“…”
같이 걷던 녀석이 걸음을 멈췄다. 조금만 더 가면 집인데, 가로등 밑에서 멈춰 선 정재현이 내게로 몸을 돌렸다. 나는 쥐고있던 핸드폰을 더욱 꾹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둡게 그림자가 진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발끝이 저렸다.
“요즘 왜 그래.”
“..뭐가.”
“…”
“..”
“나 왜 피해?”
며칠 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나처럼 너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을까 싶었다.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진짜 이기적이고 못된 방법인 거 너무 잘 아는데, 난 정말 이게 최선이야. 목구멍 끝에 그 말이 차올랐다. 나는 한참을 대답 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정재현이 입술을 짓이기는게 눈에 들어왔다. 그제서야 시선을 떨궜다. 핸드폰을 쥔 손을 의미없이 움직이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정재현, 우리..”
허공에 그렇게 첫 마디를 뱉었다.
“우리 당분간 같이 다니지 말자.”
나는 끝까지 이기적이였다. 하지만 그래야 편했다. 너도, 나도.
“뭐?”
정수리로 정재현의 음성이 떨어졌다. 황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한 마디에 몸 안의 열이 돌고 돌았다. 구구절절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입을 열고 나니 저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왜.”
“..”
“왜 그래야 되는데.”
“…”
“이유라도 알아야 알았다고 할 거 아니야.”
정재현의 목소리가 전보다 딱딱하게 귓가를 때렸다. 화가 난 것 같았다. 당연한 거다. 줄곧 쌩까던 애가 이제와 하는 말이 당분간 같이 다니지 말자, 니 말이다. 목울대가 울렁였다.
“..”
“…”
“그냥 정리가..”
“..”
“정리가 좀 필요해서 그래.”
귀뚜라미 우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정재현의 한숨 소리가 작게 묻어 들렸다. 마른 세수를 하는 건지 손을 드는게 시야에 걸쳤다. 나는 그런 정재현을 놔두고 등을 돌렸다. 먼저 갈게. 미안해. 그러곤 달리듯 발을 옮겼다. 김여주! 등 뒤로 크게 내 이름이 울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끝내는 아예 뛰었다. 악 물었던 이는 동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숨을 터뜨리며 힘을 풀었다. 뜨거워진 침을 삼켰다. 떨리는 손으로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1층에 도착한 엘레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하…”
그제서야 꾹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섞여 나오는 것이었다. 내가 정재현을 좋아해서. 좋아하는 거 숨기지도 못하고 멍청하게 굴어서. 그랬더니 정재현이 속상해해서. 근데 나는 또 도망이나 쳐서. 그게 내 딴에는 최선이여서.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울음 소리가 엉엉 근방을 채웠다. 화장이 번지든 말든 상관 없었다. 핸드폰을 쥔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그런데도 자꾸만 흘러서 무용지물이었다. 나는 가쁘게 호흡하며 애써 멈추려 노력했다. 너가 뭘 잘했다고. 머리로 계속 자책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가 멈췄다. 그 순간 핸드폰이 빛을 내며 울렸다. 정재현이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민형이었다. 나는 급하게 마저 눈물을 훔쳤다. 또 문제를 물어보려나 보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어, 민형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전화를 받았다.
-뭐해요?
“나 그냥 있어.. 왜? 모르는 문제 있어?”
다행이 울었다는 걸 들키지 않았다. 민형이는 의심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수학 푸는데 선생님 생각나서.
“..어?”
-그냥 책 덮고 계속 선생님 생각하고 있었어요.
수화기 너머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당황한 마음에 입술만 벙긋 거리던 내게 녀석은 잘자요, 한 마디 하고는 그것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뻣뻣이 통화 종료 화면이 가득 찬 핸드폰을 바라봤다. 통화 시간 23초. 얘도 공부하느라 제정신이 아니구나 싶었다. 나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곤 손을 내렸다. 얼른 씻고 잠이나 자야겠다. 그런 생각으로 도어락을 누를 뿐이었다.
김여주가 나를 피한다. 고등학교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를 피하는 게. 끝끝내는 당분간 같이 다니지 말자며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 말에 너는 정말, 변한게 없구나 싶었다. 3년 전에도 그 말로 내 속을 후벼파놓고.
정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피하는 거라고. 무슨 정리? 그게 묻고 싶었지만 김여주는 그 전에 눈 앞에서 사라졌다. 답답했지만 김여주가 하자는 대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를 보는 김여주의 눈이 젖어있었다. 그래서 그랬다. 싫다고 하면 울까봐. 그날 집에 가서 생각해봤다. 김여주가 무슨 정리를 한다는 걸까. 이제 문태일도 없는데. 그때와는 상황이 다른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내 마음을, 김여주가 눈치 챈 거. 그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저럴 이유가 없었다. 그 생각을 하자 우리 친구지? 라며 조심스럽게 물어오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에 맴돌았다. 너는 그때 그래서, 나한테 친구라는 답을 듣기 위해서, 그 질문을 했던 걸까. 너한테 나는 친구니까. 한숨이 터져나왔다. 그날 밤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김여주와 연락을 끊은지 나흘 정도가 흘렀다. 학교에서 가끔씩 마주칠 때면, 김여주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발걸음도 돌렸다. 그 모습이 속을 찔렀다. 호흡이 무거워지곤 했다. 며칠간 왜이렇게 기운이 없냐는 소리만 오십 번은 들은 것 같았다. 그때마다 나는 괜찮다며 입꼬리를 끌어올렸지만 사실 속은 말이 아니였다. 기운을 어떻게 내. 너가 그러고 가버렸는데. 그러다 학생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나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화를 듣게 됐다.
“야, 여주 어떻게 됐대?”
“뭐가?”
“아니~ 그때 네 친구 소개 시켜줬잖아. 그거 어떻게 됐냐고.”
“아 그거.. 여주한테 물어봐. 내가 말하기 좀 애매하다.”
여주. 친구. 소개. 반찬을 집던 젓가락질을 멈췄다.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내가 아는 여주가 아닐 수도 있잖아 생각했지만 대화를 하던 사람들은 김여주의 동기들이였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대체 언제. 도대체 남자를 언제 소개 받은 건데. 심장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 끝이 떨렸다. 너가 정리를 해야한다는게 설마 나와의 관계였던 걸까. 이번엔 문태일이 아닌 다른 남자가, 내가 마음에 안 드니 정리를 하라고 한 건가. 내 마음을 들킨게 아니라 너가 다른 마음이 생긴 거였나. 머릿 속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손 끝이라도 닿을 거리에 있어달라고 했는데. 뒤로만 가지 말라고. 근데 너는 진짜…. 끝까지 나는 없구나. 끝까지 나는 아니야. 끝까지. 진짜 끝까지.
현관문이 소리를 내며 닫혔다. 정재현은 그날 후로 연락이 없었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다행이었다. 집은 텅 비어있었다. 엄마. 몇 번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나는 가방부터 내려놓은 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얼마 가지 않아 전화를 받으셨다. 어, 엄마. 어디야? 내 물음에 엄마가 집에 왔냐며 계속 말을 이었다.
-밖에 잠깐 나왔어. 좀 늦을 거야.
“아, 알았어. 끊어.”
-아 맞다. 여주야.
“어?”
-그 거실에 엄마가 박스 하나 꺼내놨는데 그거 장에 좀 넣어. 알았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고개를 돌렸다. 거실 구석에 놓여진 큰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알았다고 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저건 뭐야. 핸드폰을 대충 쇼파 위로 던지곤 상자 쪽으로 걸어갔다. 뚜껑이 없어 내용물이 훤히 보였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아 손을 뻗었다. 앨범이였다. 나의. 원래 다른 상자에 들어있던 건데 엄마가 상자를 바꾼 것 같았다. 나는 조심히 앨범을 열었다.
“…”
그 속에는 아기 시절의 내 모습이 있었다. 진짜 애기 때였다. 머리도 없어. 뭐 때문인지 얼굴을 다 구긴 채 울고있는 모습이 웃겨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그렇게 한 장 넘겼다. 내 옆에 다른 아기가 앉아 나와 같이 웃고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웃던 걸 멈췄다. 지금도 웃으면 보조개 들어가는데. 똑 닮은 보조개를 지니고 있는 아기는 분명 정재현이다. 앨범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거의 모든 사진에 정재현이 있었다.
둘 다 키가 아빠의 반도 안 될 때, 나는 바비 인형을 들고 있고 정재현은 파워레인져 인형을 들고있다. 이 때가 네 살 때였나. 다른 사진 속에선 엄마 립스틱을 바른 건지 둘 다 입술이 서툴게 빨간 빛을 띄고 있었다. 볼에도 묻혀놓고 뭐가 그렇게 즐거웠던 건지 눈이 보이지 않을만큼 웃고 있다. 이 사진은 나 여덟살 생일 때 사진이네. 이때 내가 불기도 전에 정재현이 초를 불어버려서 울었던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장기자랑 사진, 중학교 때 운동회. 하지 말라는데도 어깨동무를 하던 정재현. 꽃다발과 졸업장을 앉은 채 찍은 고등학교 졸업식 사진. 정재현과 나, 둘 다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있다. 저 때는 우리 이제 성인이라고 신나했는데, 이 사진을 보니 교복이 조금 그립기도 했다. 저때 진짜. 나 진짜 행복했었는데.
“..”
앨범이 끝나갔다. 매년 찍었던 사진들도 끝이 보였다. 마지막 장엔 작년 크리스마스날 놀러가서 찍었던 사진이 있었다. 이런 사진도 있었네. 웃느라 찍히는 줄도 몰랐나보다. 사진 속 정재현과 나는 서로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한참 그 사진을 바라봤다. 이때까지 우리, 정말 정직하게 친구였는데. 스물 한 살의 우리는 조금의 틈이 생겼네. 또 먹먹해졌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났다. 나가요! 앨범을 옆에 놓은 채 그대로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문을 열자,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문 열래?”
정재현이 서 있었다.
“..어.. 아니.. 왜 왔어?”
나는 잔뜩 당황해 물었다. 놀라서 뒷걸음질까지 쳤다. 정재현은 그런 나를 무표정으로 바라보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곧 탁,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다. 문을 잠갔다는 도어락의 안내음이 발끝으로 떨어졌다. 시야가 흔들렸다. 정재현은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 순간 밝게 켜졌던 현관등이 빛을 잃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눈을 마주했다.
“김여주.”
정재현이 나를 불렀다.
“너 남자 소개 받았다며.”
무덤덤한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어..?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정재현은 하, 하고 숨을 내쉬더니 곧 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떻게 안 건지 확신에 찬 말투에 당황한 건 나밖에 없었다. 정재현은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그런 정재현을 올려다봐야했다.
“너 그래서 나한테.. 당분간 같이 다니지 말자고 한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남자가 그때처럼 나, 신경 쓰인데?”
“…뭐?”
질투난데? 등이 벽에 닿았다. 정재현은 아랑곳 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내딛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게 왜 이거랑 이어지는 거야. 나는 옅게 떨리는 두 손을 맞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뭔데.”
“정재현.”
“그럼 너 나 왜 피하는데!!!”
멀지 않은 거리에서 정재현은 소리쳤다. 이런 모습이 처음이라 나는 말을 잃을 수 밖에 없었다. 다짜고짜 찾아와서 추궁하는 녀석이 낯설었다. 열이 오른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도, 주먹을 쥔 두 손이 작게 떨리는 것도. 그냥 이 상황 자체가. 파도가 덮친 듯 갑작스럽고 사나웠다.
“못 말해.”
“..김여주.”
“근데 남자 때문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김여주!!”
“그런 거 아니라고!!!”
그 파도에 쓸린 것 처럼 감정이 요동쳤다. 우리는 서로에게 소리 치고 있었다. 호흡이 가빠졌다. 정재현은 끊임 없이 물었다. 그럼 뭔데. 왜 그러는 건데. 나 알아야겠어. 자꾸만 터지려는 감정을 억누르듯 눈을 내리 깐 채로 말하는 그 모습이 눈에 담겼다. 계속 김여주, 여주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나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결국엔 마음이 녹아내렸다. 고개를 저으며 정재현을 바라봤지만 맞잡은 손은 어느새 떨어져 힘 없이 떨궈졌다.
“내가..”
“..”
“내가 너 좋아하니까..”
그 순간 정재현의 눈이 흔들렸다. ..뭐..? 믿기지 않는다는 음성이 귓가를 찔렀다. 나는 코 끝이 찡해지는 걸 참지도 못했다. 굳은 얼굴로 나를 보는 얼굴이 겁 났지만 이미 터져버린 걸 멈추지는 못했다. 난 저 얼굴이 두려워서 꼭꼭 감추려고 했던 건데. 주먹을 쥐었다.
“너 좋아해. 그래서 그랬어.”
“…”
“근데 내가 너 좋아하면 안되는 거잖아.”
“…”
“..내가 너 좋아하면 우리, 친구 못하니까.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너.. 진심이야..?”
“마음 접을 거야. 내가 접을게. 그러니까..,”
틈을 비집고 나온 고백은 차마 끝맺지 못했다. 정재현이 내게 입을 맞췄다. 입술 안으로 나는,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말을 삼켜야만 했다. 벽에 닿은 등이 더욱 묵직하게 쏠렸다. 나는 눈도 감지 못한 채 정재현의 행동을 받았다. 온기가 닿은 입술로 옅은 떨림이 전해졌다. 숨을 멈췄다. 곧 맞댄 입술이 작게 소리 내며 떨어졌고, 정재현은 입술이 닿을 거리에서 내게 속삭였다.
“친구 하지말자.”
“..야.”
“친구 안 해.”
“..”
“난 예전부터 친구 아니였어.”
그리고 다시, 다시. 더 깊게 입을 맞춰왔다. 한 손으로 내 볼을 감싸쥐며 나를 파고들었다. 눈을 감았다. 고였던 눈물이 툭 떨어지는게 느껴졌다. 정재현은 다른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받치며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온기를 나눴고, 숨결을 나눴다. 그에 취해 양 팔로 정재현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 틈이 이렇게 한 순간에 커져 무너질 줄 알았다면 참지도 않았을 텐데. 그동안 했던 바보같은 행동들이 무의미해질 만큼 정재현을 안았다. 걱정하던 것들은 생각도 안 날 만큼 그렇게. 감정에 충실하며. 입술은 야한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현관등이 다시 켜졌다. 스물 한 살의 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