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어머님. 안녕하세요!”
늦은 시각에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눈썹을 팔자로 늘어뜨린 나는 핸드폰을 두 손으로 쥔 채 고개를 꾸벅였다. 이 전화를 걸기까지 얼마나 망설였는지 모른다. 민형이가 딱히 말하지 말라고 당부하진 않았지만 모른 척 해야하나 싶으면서도 어머님께 말씀을 안 드리기엔 너무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결국 말씀 드리는 쪽을 택하긴 했는데, 막상 전화를 걸고나니 생각해놨던 말들이 머릿 속에서 싹 증발했다. 선생님이 어쩐 일로…. 수화기 너머로 힘 없는 목소리가 넘어왔다. 많이 우신 것 같았다.
“아, 그게.. 민형이 때문에 연락 드렸습니다.”
-..저희 민형이 선생님이랑 같이 있나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급한 목소리로 물어보신다. 그에 아차 싶었다. 더 일찍 전화드릴 걸, 하고. 정말 많이 걱정하고 계신 것 같았다. 집에서는 항상 바른 아이였으니까. 민형이가 정재현네 집에 있으니 같이 있는 건 아니라고 해야 하나 짧게 고민했지만 곧 네, 라고 대답 했다. 그래야 어머님이 조금이라도 덜 걱정하실 것 같았다. 어차피 코 앞인데 뭐..(코쓱)
-민형이 괜찮나요? 그렇게 나가서 연락도 안되구.. 정말..
어머님의 목소리가 옅게 떨리는게 들렸다. 애써 가라앉혔던 감정이 다시 올라오신 것 같았다. 네, 민형이 괜찮습니다..! 혹여 또 우실까봐 나는 얼른 대답했다. 낮에 연락이 와서 제가 데리고 왔어요. 저녁도 잘 먹었습니다 하하…. 민형이를 바꿔달라고 하시면 어쩌나 살짝 걱정이었는데 다행이도 그러진 않으셨다. 다만 어머님은 계속 녀석을 걱정하셨다. 갈만한 곳은 다 연락했는데도 소식이 없어서 나쁜 일이라도 생겼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고 하셨다. 나는 열심히 그런 어머님을 달랬다.
“민형이가 요즘 조금 힘든가봐요. 제가 최대한 빨리 집으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진짜 감사해요. 아이가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어우 아니에요 어머님. 일찍 전화 못 드려서 너무 죄송합니다. 어머님이 속상해 하시니 나까지 마음이 좋지 않았다. 평소에는 항상 밝고 잘 웃으시던 분이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민형이를 빨리 달래서 보내야 하는데 녀석이 쉽게 오케이 할지가 문제였다. 짐 싸온 가방 크기를 생각하면 적어도 삼일은 밖에서 지내려고 마음 먹고 나온게 분명했다.
-민형이 집에 오면 바로 외가로 갈 거라고 전해주실 수 있으세요?
“아 네. 네! 당연하죠. 그렇게 전달 하겠습니다.”
외가라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아버님이랑 얼마나 크게 싸웠길래 어머님까지 친정으로 가신다고 하시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 없으니 끝인사만 드릴 뿐이었다. 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자마자 책상 위로 철푸덕 엎어졌다. 진짜 짧고 굵은 통화였다. 드라마에서나 봤지 살면서 처음 해보는 주제의 통화라 기가 잔뜩 빨린 기분이었다. 하지만 엎드린 것도 잠시, 나는 다시 핸드폰을 들어 전화번호부로 들어갔다. 기억, 니은, 디귿 쭈우욱 내려서 이응 카테고리까지 오자 이민형 이름 석자가 보였다. 손가락을 무기력하게 움직여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연결음은 커녕 고객님의 전원이 꺼져있다는 기계음이 귓전을 때렸다.
“전화기는 또 왜 꺼놨어..!”
미간 새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밥 먹을 때만 해도 잘 만지고 있더니. 입으로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일 또 복잡하게 돌아가네. 하는 수 없이 전화번호부를 아래로 넘겼다. 이응에서 지읒으로 넘어왔다. 민형이와 얘기를 하려면 정재현에게라도 전화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재현 이름을 눈 앞에 두고도 선뜻 손가락을 뻗지 못했다. 괜히 막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해. 굳이 내일 얘기 해도 될 껄 자기한테 전화까지 하면서 하려고 한다고 이상한 오해라도 하면 어떡해. 물론 나는 정재현을 요만큼도 안 좋아하지만 정재현이 자기 마음대로 오해 하면 어떡해.
“아 짜증나. 내가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있어야 돼?”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몸을 던지다시피 누웠다. 발을 허공에 뻗으며 좌우로 뒹굴거렸다. 며칠 사이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이 계속 머릿속을 침범하니 정말 미칠 지경이였다. 그 대상이 다 정재현이라는 게 제일 환장이고. 왼쪽 볼을 베개에 묻은 채 핸드폰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에 떠있는 이름을 가만히 쳐다보다 끝내 통화 버튼으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오해는 무슨. 얘랑 나랑 오해할게 뭐 있어. 그리고 민형이가 집 나온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그치? 맞아. 나는 언제 망설였나는 듯 전화를 걸었다. 정재현이 노래방만 가면 부르는 18번 노래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네, 여본데요.
“아 뭐야. 무슨 그런 구닥다리 멘트를 쳐.”
노래는 얼마 안 가 끊겼고, 정재현이 전화를 받았다. 구린 멘트로 전화를 받는 정재현에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내가 한 소리 하자 뭐가? 라며 뻔뻔하게 모른 척 한다. 하여튼 능글 거리는 거 참 잘하지. 혀를 쯧 차며 스피커로 설정한 핸드폰을 머리맡에 뒀다.
“됐고. 민형이 뭐해?”
꽤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는데 전화기 너머가 갑자기 잠잠하다.
-무슨 전화를 하자마자 걔부터 찾아?
의아한 마음이 들 때쯤 그런 말을 한다. 말투에 퍽 서운함이 묻어있다. 나는 눈썹 새를 좁혔다.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손을 편하게 놔두려고 스피커로 해놓은 건데 영 쓸모가 없다. 방금 머리맡에 놔둔 걸 다시 손으로 잡아쥐며 소리쳤다. 너가 민형이 데려갔으니까! 큰 소리에 놀란 건지 전화기 너머로 깜짝이야, 따위의 말이 들린다. 애초에 민형이가 우리 집에 있었으면 전화를 걸 이유가 없지. 내가 왜! 이 시간에!
“도대체 애한테 왜 너네 집에서 자자고 한 거야?”
-내가 잠을 못 잘 것 같아서.
“잠은 우리 집에서 자는데 너가 왜 잠을 못 자.”
-신경 쓰이니까.
어느새 뜨겁게 달궈진 핸드폰을 쥔 손이 삐걱였다. 이번에 말을 멈춘 건 나였다. 나는 입술을 벙긋거리며 핸드폰을 다시 얌전히 내려놨다. 속이 또 난리여서 손으로 꾹 눌러야 했다. 야, 그리고 걔가 단번에 좋다고 할 줄도 몰랐어. 정재현은 이런 내 상황도 모르고 계속 말을 한다. 조용한 방을 정재현의 목소리가 왕창 흔든다.
“..뭐래. 민형이나 바꿔..”
나는 힘겹게 말을 뱉었다. 몸을 핸드폰 쪽으로 웅크리며 음성이 나오는 곳에 소심히 눈을 뒀다. 바꿔달라는 내 말에 정재현이 움직이는 건지 곧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도 돼? 아니요. 김여주가 너 전화 바꿔주라는데. 들어오세요. 어렴풋이 말소리도 들렸다. 정재현이 제 방을 내줬나보다.
-여보세요.
드디어 민형이와의 통화다. 나는 애써 떨림을 떨쳐내며 설정해놓은 스피커 모드를 풀었다.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응 민형아. 뭐해? 그렇게 말을 던진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민형이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공부요, 답했다. 이제서야 생각하는 건데, 이민형은 찜질방에 가도 공부 하나는 명당 찾아서 잘 했을 거다.
“아.. 통화 괜찮아?”
-네, 괜찮아요.
무미건조한 말들이 오갔다. 민형이는 오늘 하루 감정 변화도 많았을텐데 아직까지 목소리가 쌩쌩했다. 오늘은 그냥 책 덮고 쉬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괜히 열심히 하는 애 의욕만 꺾을까봐 섣불리 말하기도 뭐했다. 할 말만 하고 얼른 끊어야지. 통화 때문에 공부를 조금이라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가 어머님이랑 방금 통화를 했거든 민형아.”
-싫어요.
...나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안 했는데..? (о゚д゚о) 당황한 나머지 눈만 끔뻑였다. 어려울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다. 어머님이 외가로 갈 거라고 하신 거 말 해야 되는데. 이게 완전 한방인데..! 황급히 민형이의 이름을 불렀지만 녀석이 나보다 빨랐다. 아주 확실히 선을 그어주신다.
-집에 안 가요. 끊을게요.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뚝 소리와 함께 끊겨버린 전화에 결국 멍하니 화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정재현한테 하루만 재운다고 했는데..(먼산) 다시 전화를 걸까 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다시 전화하면 아예 통화 거부를 하고도 충분히 남을 놈이라. 더군다나 정재현 목소리를 또 들어야하니 그것 또한 고역이라면 고역이였다. 아 몰라. 김치볶음밥 레시피나 정독 해야지. 뒷머리를 헝클이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자기 전 일곱시로 맞춰둔 알람이 요란하게 울렸다. 한 쪽 눈을 부시시 뜨며 대충 손을 뻗었다. 손이 엇나갔는지 화면을 몇 번이나 슬라이드 하고나서야 핸드폰이 잠잠해졌다. 내가 진짜 일곱시에 눈을 뜨다니. 스스로도 믿을 수 없어 헛웃음이 작게 터졌다. 민형아 내가 너 밥 해주려고 이 시간에 일어났어.. _(:3 / )_ 눈가를 비비며 거실로 나갔다. 간단히 씻기만 하고 바로 정재현 집으로 직행 할 생각이었다.
거실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마주하자 하품이 나왔다.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후 화장실로 향했다. 원래는 세 개가 있어야 할 칫솔통에 덩그러니 하나 남은 칫솔을 가져와 치약을 쭉 짰다. 그때까지도 눈을 반 쯤만 뜨고있었다. 모든 행동이 무기력 했다. 손목 스냅을 이용해 치아 구석구석을 칫솔로 쓸어내리며 내적 한숨을 내쉬었다. 아, 막상 가려니까 진짜 귀찮다. 밥 하긴 더더 귀찮다. 어젯밤 열심히 읽어놓은 레시피를 머릿 속으로 더듬거렸다. 볶음팬 태워먹으면 어떡하지. 뒷목을 긁적이며 퉤 하고 치약물을 뱉었다.
찬 물로 세수까지 끝내자 정신이 들었다. 드디어 제대로 떠지는 눈을 몇 번 끔뻑 거리며 수건으로 얼굴에 남은 물기를 닦아냈다. 밤새 쌓인 기름기가 사라지자 여간 상쾌한게 아니였다. 탱탱해진 피부를 톡톡 두들기며 거울을 봤다.
“..대박.”
완전 못생겼어. 생기라고는 요오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얼굴이 날 마주하고 있었다. 이 얼굴로 어떻게 정재.., 아니 민형이를 만나? 어? 나는 급히 방으로 들어가 틴트를 찾았다. 입술이라도 조치를 취할 생각이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거. 최대한 티 안 나게 붉어지는 거! 립제품만 모아놓은 통을 뒤적거리다 사놓고 잘 쓰지도 않았던 틴트를 집었다. 이게 쌩얼 메이크업 할 때 쓰면 딱 좋다던 제품이었지. 뚜껑을 열고 입술에 적당량을 발랐다. 음파음파 몇 번 해주자 그제서야 붉은끼가 도는 입술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래, 좀 낫다.
티셔츠만 갈아입은 후 침대 위에 던져놨던 핸드폰을 쥐었다. 민형이가 일곱시 사십오분에 나간다고 했으니 서둘러야했다. 운동화를 구기듯 신는 중에 현관에 있는 거울로 고개를 돌렸다. 잔머리가 이리저리 풀어진 머리가 눈에 들어왔다. 아, 머리도 풀까? 평소엔 신경도 안 쓰이던 머리가 오늘따라 왜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모르겠다.
“아 몰라.”
결국 머리끈을 잡아당기며 현관문을 열었다. 긴 머리카락이 어깨 밑으로 내려오는게 느껴졌다. 손으로 대충 머리를 빗어내리며 앞 동을 향해 달렸다. 바로 코 앞이라 금방이었다. 마침 엘레베이터도 1층에 멈춰있어 후다닥 올라갈 수 있었다. 띵 소리와 함께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왼쪽으로 발을 옮겼다. 우리 집이랑 똑같이 생긴 현관문 앞에 서 익숙하게 비밀번호를 쳤다. 네 자리를 꾹꾹 누르자 문이 열렸다는 소리와 함께 도어락이 풀렸다. 나는 조심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직 둘 다 안 일어난 건지 집 안이 고요했다.
“헐 벌써 십 분이야?”
거실로 들어서자 보이는 큰 벽시계에 나는 히익 소리를 내며 얼른 부엌으로 향했다. 정재현 집이야 뭐 내가 빠삭하게 알지. 채소가 어딨고 볶음팬이 어딨는지 정도는 다 안다 이거다. 나는 즐겨찾기까지 해놨던 블로그 레시피를 핸드폰 화면에 띄운 후 냉장고에서 꺼낸 채소부터 손질했다. 야심차게 소매까지 걷었다. 비록 조금(X 많이O) 서툴지만 열심히 칼질도 했다. ..크기가 좀 듬성듬성 한 것만 빼면 나름 괜찮았다^^!
“오~ 나 좀 하는데~”
햄과 김치까지 준비를 끝낸 후 기름을 두른 볶음 팬에 재료를 하나씩 넣었다. 휴대폰 화면을 새끼손가락으로 넘기며 내가 잘 하고 있나 수시로 확인하는 건 기본이였다. 꽤 맛있는 냄새와 소리가 부엌 근방으로 퍼져나갔다. 생각보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김치볶음밥에 나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이쯤에서 불을 끄고 밥을 넣으면 된다 이거지~! 그래도 정재현은 나와 다르게 밥은 해놓고 사는 놈인 걸 알기 때문에 주걱을 들고 밥통을 열었다. 양은 적지만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싹싹 긁어 볶음팬에 투척했다.
“..선생님?”
“아 깜짝이야.”
“뭐하세요?”
밥만 볶으면 끝나는 시점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음성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교복까지 멀끔하게 차려입은 민형이가 보인다. 쟤는 얼굴도 안 붓나봐. 이른 아침인데도 평소와 똑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있는 민형이에게 씩 웃어보였다. 아침 하고 있어! 그렇게 말하며 쥐고있던 주걱을 좌우로 흔들었다. 금방 끝난다고 뒤이어 말하자 민형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화장실로 들어갔다. 씻으려나 보다. 나는 더 열심히 주걱을 휘저었다. 주걱을 세우는게 좋다길래 거의 일자로 세워서 계속 뒤섞어주자 모양새가 금세 갖춰졌다. 완성된 김치볶음밥을 먼저 한 입 먹었다. 조금 짰지만 그래도 입에 넣자마자 뱉을 정도는 아니였다. 이 정도면 됐어. 이 정도면 성공이야.
김치볶음밥을 담은 그릇을 식탁에 올려놨다. 따로 반찬은 없으니 젓가락은 필요 없겠다 싶어 숟가락만 그 옆에 세팅했다. 요리가 끝난 부엌은 난장판이였다. 한숨을 내쉬며 저걸 언제 다 치우나 속으로 한탄하는데, 화장실에서 민형이가 나왔다. 폼이 꼭 정재현네 집에서 몇 달은 살았던 사람 같았다. 저렇게 자연스러울 수가.
“민형아 밥 먹어.”
“뭐에요?”
“김치볶음밥!”
민형이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숟가락을 드는 민형이의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내 아이를 키우는 게 이런 기분일까? 완전 짜릿. 결혼하고 싶다..ㅇㅅaㅇ..(줏대가 없다) 열심히 만든 걸 한 숟갈 입에 넣는 민형이에게 어떠냐 물었다. 그러자 녀석이 고개를 돌렸는데 내가 너무 뚫어지게 보고있었는지 흠칫 놀란다.
“..맛있어요.”
“진짜?”
끄덕끄덕. 그러더니 한 숟갈 더 푼다. 그 모습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일곱시에 일어나길 참 잘했다. 피곤이고 뭐고 싹 날라가서 저 난장판인 부엌도 룰루랄라 치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동안 음식을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또 잘해요~! 잔뜩 신난 나머지 표정을 좀처럼 숨기질 못했다. 아마 표정으로 말하고 있을걸. 많이 머겅 민형아^^♡ 라고.
그때 안방 문이 열렸다. 정재현이 졸린 눈을 하고 하품을 하며 나왔다. 녀석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걸음을 멈추더니 곧 미간을 좁힌다.
“너가 이 시간에 우리 집에 왜 있어?”
“우리 민형이 아침 해주려고.”
우우리이? 아아치임? 정재현의 시선이 식탁에 앉은 민형이에게로 옮겨졌다. 민형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김치볶음밥을 먹을 뿐이었다. 정재현은 곧 제 큼직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내 쪽으로 마저 걸어왔다. 나는 다가오는 녀석에 눈을 굴렸다. 내 뒤에는 초토화 된 부엌이 있으니까ㅎㅎ 슬쩍 까치발을 들어 정재현의 시야를 가려볼까 했지만 결과는 실패였다.
“부엌을 아주 뒤집어놓으셨네..”
내가 아무리 까치발을 들어도 키가 훨씬 큰 정재현에게 쥐똥만한 건 변함이 없으니. 정재현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 내가 이 구역 백수단이다..(먼산) 한 짓이 있기 때문에 차마 눈을 마주하진 못하겠어서 시선을 아래로 내리는데, 정재현이 으이그 중얼거리며 제 손으로 내 볼을 감싸더니 꾹 눌러 붕어 입으로 만들어버린다.
“으 증즈흔.” (아 정재현.)
“저거 하려고 어제 양파랑 파 있냐고 물어본 거야?”
“흐즈므르.” (하지마라.)
푸핫 웃으며 내 볼을 흔들흔들 하는 정재현을 세모눈으로 바라봤다. 츠을거으 (= 치울거야) 여전히 뭉개진 발음으로 쉬익 거렸다. 정재현의 손을 쳐내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런데 내 손이 녀석의 손에 채 닿기도 전에 먼저 내 볼을 놔준다. 뭔가 싶어 눈을 깜빡이자 가만히 있으라며 얼굴이 점점 다가온다. 갑자기 미간을 좁히면서.
“왜, 왜.”
“눈썹.. 됐다.”
눈 밑에 속눈썹이 떨어져 있었던 건지 조심히 눈 주변을 문지르던 정재현이 한순간에 다시 멀어졌다. 무의식 중에 참았던 숨을 그제서야 깊게 뱉었다. 아, 놀랬네 진짜. 괜히 허공에 있던 손을 눈가로 가져가 벅벅 문지르는데 느닷없이 쨍, 하고 큰 소리가 울렸다.
“잘 먹었습니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빈 그릇을 들고 일어나는 민형이가 보였다. 의문의 소리는 숟가락을 내려놓는 소리였나보다. 정재현 때문에 민형이를 깜빡 하고야 말았다. 나는 정재현을 밀치듯 떼어낸 후 급히 민형이에게 말했다. 민형아, 그릇 그냥 놔둬! 하지만 민형이는 굳이 괜찮다며 숟가락까지 들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
“..”
“죄송해요.”
도중에 정재현과 어깨가 부딫힌 민형이가 고개를 까딱였다. 괜찮아. 그에 정재현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는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보니 벌써 민형이가 나갈 시간이었다. 싱크대에 그릇을 내려놓은 민형이는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더니 칫솔을 물고 나와 방과 화장실을 왔다갔다 했다. 정재현은 그런 민형이를 잠시간 바라보더니 자기 밥은 없냐며 부엌으로 걸어갔다.
“밥 좀 남았어.”
“나 먹을래.”
“그러던가.”
너 알아서 해라..! 가 내포된 말을 뱉으며 부엌 사방에 널려있는 야채 쪼가리들을 쓸어모았다. 아, 설거지도 해야되잖아. 언제 뿌듯했냐는 듯 밀려오는 귀찮음에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정재현은 내 깊은 뜻을 알아들은 건지 정말 알아서 남은 볶음밥을 잘 먹고 있었다. 오 야, 좀 맛있네. 간간이 감탄도 좀 하며 말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양치를 끝낸 민형이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화장실 앞에 미리 놔뒀던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그대로 현관문을 향해 걸어간다. 나는 뒷정리를 하던 걸 황급히 멈춘 후 민형이를 따라 현관 쪽으로 향했다.
“민형아, 몇시에 와?”
“야자 아홉시쯤 끝나요.”
비싼 브랜드 운동화를 반듯하게 신으며 묻는 말에 조곤조곤 답하던 민형이가 시선을 뒤로 보낸다. 뭔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밥을 먹던 정재현이 내 뒤에 서있었다. 놈은 꽤 황당한 목소리로 너 오늘 가는 거 아니야? 물었다. ..(코쓱) 나는 못 들은 척 이마를 긁적였다. 미안 정재현, 이틀로 정정할게. 그런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았다. 대신 어색하게 웃으며 민형이를 바라봤다. 늦겠다 민형아. 얼른 가. 손까지 흔들면서 배웅을 하는데, 안방 쪽에서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나와 정재현, 나가려는 이민형까지 일동 소리가 난 쪽으로 눈을 돌렸다.
“뭐야?”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재현이 성큼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알아서 해결하겠지 싶어 다시 민형이를 바라봤다. 잠시 멈췄던 손짓을 계속 하며 마저 잘 다녀오라고 배웅 했다. 학교까지 배웅 하니까 이거 진짜 좀 기분 이상하네. 문득 내가 지금 화장기 하나 없는 민낯이라는 게 떠올랐지만 민형이는 별 신경 안 쓰는 듯 했다. 어젯밤에 막 못 알아보면 어쩌지 조금 걱정했는데..^^
“제가 저번에 보낸 문자 기억해요?”
“뭐?”
“친구 조심.”
저 형이 제일 위험해요. 민형이는 그렇게 말 하며 정재현이 들어간 쪽으로 턱짓했다. 네 눈에도 보이는 구나? 정재현 요즘 무지 위험한 거. 나는 격하게 고개를 주억 거렸다. 녀석은 그런 나를 짧게 바라보곤 등을 돌렸다. 갈게요. 선생님도 집에 가세요. 메고 있는 가방이 얼마나 무거운 건지 아무런 미동도 없다. 쾅, 하고 현관문이 닫혔다. 나는 머리카락을 뒤로 한 번 쓸어넘긴 후 부엌으로 걸음을 향했다. 고개를 슬쩍 돌려 언뜻 안방을 봤지만 문이 거의 닫혀있어 정재현은 보이지도 않았다. 괜히 목을 긁적였다. 빨리 정리하고 집에나 가야지.
우리 집 고무장갑은 빨간 색인데 정재현네 고무장갑은 노란 색이다. 이게 더 예쁜 것 같아.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며 설거지를 시작했다. 엄청 거대한 밥상을 차린 건 아니라 설거지거리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다. 수세미에 거품을 잔뜩 묻혀 하나씩 닦았다. 달달한 주방세제 냄새가 스멀스멀 코를 건드렸다.
“난 너가 여덟시 전에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살 뻔 했네.”
“..”
“김치볶음밥은 또 무슨 일이야.”
그때, 등 뒤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인기척도 없이 나온 정재현이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거 지금 비꼬는 거지. 입술을 씰룩이며 눈을 잠시간 흘겼다. 정재현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표정이 영 언짢았다. 심술을 부리는 정재현을 무시하고 설거지를 이어갔다. 내가 이민형 아침 해주고 싶어서 일찍 일어난게 저런 말까지 들어야 할 정도로 말이 안 되는 거냐(ノ`Д´)ノ 자기도 (비록 남은 밥이지만) 맛있게 먹어놓고 저런다.
“야 김여주.”
“왜.”
날 부르길래 이번엔 눈길도 주지 않고 대답했다.
“너 내가 더 좋아 이민형이 더 좋아.”
마지막 그릇을 헹구던 손이 순간 멈칫 했다. 원래라면 바로 초딩이냐고 핀잔을 줬을텐데 웬일인지 목구멍이 꾹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세차게 떨어지는 소리만 계속 들렸다. 좋아.., 라는 말이 정재현의 목소리로 다가오자 입안이 바싹 마른다. 안 좋아해. 안 좋아한다. 요 며칠 계속 되새겼는데, 저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듣자마자 생각 한 건, 너가 좋다.
“당연히 민형이가 더.. 좋지. 너가 뭐가 예쁘다고..”
나는 또 다시 부정하려 없는 말을 꺼냈다. 헹군 그릇을 건조대에 놓으며 수도꼭지를 잠갔다. 내 말에 정재현은 아무 대답이 없다. 나는 신경 쓰지 않는 척 고무장갑을 벗겨낸 후 몸을 돌렸다. 그러자 온 시야에 정재현의 회색 티셔츠가 가득 차올랐다. 아까까지만 해도 저만치에 서 있던 정재현이 바로 내 앞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럼.”
“..”
“나는 언제 좋아해 줄 건데?”
녀석이 한 발 더 가까이 왔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꼬리가 가볍게 접힌다. 그에 쇄골께가 저릿했다. 정재현이 또 잘생겼는데, 얘가 지금 그 잘생긴 얼굴로 나한테 장난을 치는 것도 아는데, 눈을 피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한참 마주했다. 어떡해.
“..”
“….”
나 진짜 얘 좋아하나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