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같이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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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까지 이석민은 거실을 떠나지 못했다. 뭐가 그렇게 안 풀리는지 머리를 꽁꽁 싸매는 너를 한참을 쳐다만 보다가 이내 고개를 틀어 거실 한편에 놓인 기타로 시선을 옮겼다. 저 기타로 말하자면 지금 이석민이 과외 시간을 훌쩍 넘기고도 책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이자 최근에 생긴 취미다. 갑자기 무슨 열정이 생긴지는 몰라도 밥 먹고 과외하는 시간 빼고는 죽고 못 살 정도로 기타만 껴안고 사는 날이 늘었다. 커피만 홀짝대며 문제 풀기를 기다리던 승철쌤도 함께 기타를 쳐다보다가 이내 기타로 다가서셨다. 소파에 멋들어지게 기대앉으셔서는 몇 번이나 자세를 고쳐 앉고 이리저리 반복되는 코드만 짚기를 반복. '내가 손톱이 길어서'로 시작한 변명은 '기타가 별로네'로 끝맺곤 어색한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쌤 한 번도 쳐본 적 없죠. 낄낄 비웃는 석민의 이마에 꿀밤을 놓고는 내게 기타를 건네주셨다. 너도 쳐봐. 칠 줄 아는 노래도 없고 잡을 수 있는 코드도 없지만 처음 잡아보는 기타에 기분이 좋아 꼭 끌어안고는 줄만 디리링 울려댔다. 몸에 바짝 붙은 기타가 울릴 때마다 진동이 이는 게 기분이 좋아 웃음이 나왔다.
" 그렇게 재밌어? "
" 네. 그냥 기분이 좋네요. "
" 근데 넌 왜 웃냐 석민아. "
。
자습시간. 김민규와 한 빙고에서 또 졌다. 늘 안 한다고 내빼도 자기가 뭘 먹고 싶을 때면 일부러 이용해 먹는 놈이 괘씸해 팔꿈치로 옆구리를 팍 치고는 텅텅 빈 지갑을 아래 위로 흔들었다. 먼지도 안 나는 거 보이냐고 툴툴대면 실력을 늘려 라며 혀만 빼꼼 내밀어댄다. 다음부터는 꼭 놈이 무슨 말을 하던지 자야지. 반으로 올라가던 도중 음악실 앞에 여자애들이 바글댔다. 창문에 다닥 다닥 붙어서 뭘 그리 보는지는 몰라도 궁금했던 우리는 애들을 따라 창문에 붙었다. 김민규는 큰 키를 이용해 쉽게 창문 너머를 보곤 '이석민 있는데?'라며 간신히 까치발로 눈만 빼꼼 내민 나를 내려다봤다.
" 저기 있잖아. 아니 거기가 아니라. "
김민규가 창 너머 가리킨 손끝에는 뒤통수만 간신히 보이는 남자애들이 있었다. 어디 있냐며 콩콩 뛰어대는 내게 푹 한숨을 쉬던 김민규는 내 머리를 죽 빼서는 저기 저기라는 말만 반복했다. 아프다는 내 말은 귓등으로 들으면서. 야 됐다 됐어. 안 봐.
" 점심시간에 공연 찍으러 가야 하는 거 알지? "
" 밥 빨리 먹어야겠네. "
" 밥은 무슨 밥이야. 애들 뚫으려면 바로 나가야 돼. "
" 그럼 밥은? "
" 몰라. 나는 빵 사 왔는데. "
" 뭐야 그럼 나는. "
' 나는! '
되물어보자 놈이 빠르게 반으로 튀어갔다.
" 굶던가! "
。
"성이름!"
"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선크림은? 햇볕 강한데. "
" 난 괜찮지. 무슨 노래 불러? "
" 그건 비밀인데 가사 진짜 예뻐. 평소에도 들려주고 싶었는데
오늘 집중해서 잘 들어봐. "
" 야 석민아! "
" 가볼게. "
황급히 뛰어가는 뒷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자신감 있어 보였다. 저녁 늦게까지 연습하더니 되게 많이 준비했나 보네. 카메라 렌즈를 닦으며 준비하고 있던 김민규에게 무슨 노래냐고 물어봤지만 사랑의 세레나데.라는 엉뚱한 얘기만 할 뿐이었다. 그 옆으로 다가온 아빈은 사현과 두 손을 꼭 잡고 제가 건네준 물을 받았다며 히히덕댔다. 카메라를 유심히 보던 아빈은 예쁘게 나온 사진 있으면 저도 달라고 작게 귓속말을 했다. 그걸 용케 채 들은 김민규는 비아냥대다가 사진 넘기기만 해봐. 너 진짜 내 손안에 죽는 거야.라고 반대편 귓가에 속닥댔다. 대체 무슨 기싸움인지 몰라 김민규를 어깨로 밀어내고 마이크를 툭툭대며 테스트하는 밴드부를 카메라로 담기 시작했다.
" 기타가 처음이라 한 곡밖에 준비를 못했지만
많이 부족하더라도 너그럽게 들어주세요. "
일학년의 무대 뒤에 나타난 네가 모두가 사라진 농구 코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곧 무대를 할 것 같은 찰나의 순간에 내가 있던 자리를 콕 집어 바라본 네가 귀를 두어번 톡톡 거렸다. 잘 들을게 입모양으로 대답하면 너는 또 활짝 웃었다가 감정을 다 잡더라. 여의치 않은 환경에 괜찮을까. 무대하는 너를 볼 때면 모든 긴장은 나의 것이 되는 게 여러번 곱씹을수록 묘했다. 설명은 안되지만 속이 괜히 울렁거려 카메라를 고쳐 잡고 다시 사진 찍기에 열중했다.
。
반에 돌아와서 찌뿌둥한 어깨에 기지개를 펴며 몸을 풀고 있는데 김민규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사진이 잘 나오지 않은 것인지 이리저리 고개를 꺾어대며 작게 뭐라 웅얼대기도 했다. 이것 봐라?
" 이석민 이제 카메라 쳐다도 안 보는 것 봐. 연예인병 다 고쳤나. "
주변에서 수다를 떨던 아빈과 사현도 민규가 넘기는 카메라 주위를 서성이다 이내 자리를 잡고 함께 사진을 보기 시작했다. 하도 김민규가 제 마이로 카메라를 가리는 탓에 아빈과 사현은 이름 자리로 넘어와 이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함께 보긴 했지만.
" 카메라 잘 봐주는데? "
김민규가 한 말과는 다르게 내가 들고 있던 카메라에는 선명한 눈도장들이 많았다. 앞으로 넘기던 뒤로 넘기던 모두 선명한 눈도장 사진들에 무슨 일인지 김민규 카메라를 받아들고 살펴보면 그 사진들은 어딘지 모르게 시선이 넘어가 있었다. 아빈은 사현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다가 자리를 벗어났고, 같이 확인을 하던 김민규는 눈이 커지더니 이내 핏 코웃음을 쳤다.
" 야 완전 사랑꾼 다 됐네. "
" ...뭐가? "
우당탕 큰 소리를 내며 들어온 이석민은 김민규를 밀쳐낸 자리에 앉아 카메라를 잡은 내 손을 덧대 잡고는 사진을 확인했다. 잘 나왔네. 네가 사진을 옆으로 넘길 때마다 함께 눌려지는 내 엄지손가락에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 손을 슬쩍 빼려고 하면 너는 더 힘을 실어 내 손과 함께 사진을 넘겼다.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이야. 넘기는 사진마다 여기저기 널린 이석민과 눈이 맞는 게 기분이 묘하다 못해 가슴이 쿵쿵댔다. 모르는 척해야 할 감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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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습시간 내내 엎드려 책상 아래로 내린 카메라를 몇 번이고 돌려봤다. 책상에 닿은 이마가 딱딱해서 불편할 법도 한데 그건 크게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석민은 뒤돌아 엎드려있는 내 이마를 들어 제 손을 책상 위, 내 이마 사이로 포개어 넣었다. 어디 아파? 정리 안되는 감정도 모르면서 뒤통수를 조심히 쓰다듬는 게 사람을 너무 헷갈리게 만든다. 집에 가는 내내 눈이 맞는 사진들이 잊히질 않았다. 쫑알대는 김민규와 이석민의 얘기에 끼지도 못한 체 바닥만 보고 걸었다.
바닥만 보는 내 시선에서는 한걸음 반 정도 빠른 김민규 발이 눈에 걸렸다. 그 옆에는 나와 걸음걸이가 딱 맞는 이석민 발. 그러고 보니 걸음이 참 빠르던 넌데 왜 항상 뒤였던 나랑 같은 선일까. 언제부터 같은 선이였을까? 다시 만났던 날 너는 어떻게 날 다 기억하고 있었을까? 공연곡을 흥얼거리는 이석민의 콧노래가 깊은 생각을 뚫고 들어왔을 때 나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네가 불렀던 노래 가사가 하나씩 선명해졌다.
' 너와 마주 앉아 얘길 할 때면 나의 계절이 변해
자꾸만 니 손을 잡고 싶고 니 옆에 바짝 또 앉고 싶은 건 '
' 실은 내가 너를 좋아해서야. '
멍 때리던 나를 낚아챈 너는 나를 한품에 안았다.
" 신호등인데 위험하게 서있으면 어떡해. "
흩날리는 벚꽃 아래 가까운 네 얼굴에 금세 귀가 터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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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었네요...?
매우 치세요 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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