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무시하고 갔어도 되는 상황이었다. 괜한 나의 책임감과 오지랖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사실 그 상황에서 황민현씨가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더라면 난 어떻게 했을까. 그냥 지나갔을까, 아니면 끝까지 내 고집을 부렸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한순간의 설렘이었던 그 사람을 다시 만난 것이 나에게 득이 될지 해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저 스처지나기는 기억 속 하나였던 사람을 다시 만나니,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니, 내 머리와 마음은 끝없이 요동쳤다.
미친 사람처럼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는데 황민현씨가 그만 뛰자고 해서 나도 모르게 우뚝 섰다. 그리고 머리가 백지로 허해지면서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했느냐라는 자각으로 난 그대로 주저 앉았다. 황민현씨는 꽤나 흥미롭다듯이 쳐다봤다.
그 말을 듣고 난 뒤 드디어 정신이 들었다. 그대로 일어날 힘도 없이 숨을 좀 고르다가 황민현씨를 쳐다봤다. 전혀 힘든 기색은 없어보였다. 어쩌면 날이 어두워서 안 보이는 걸 수도.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황민현씨가 거기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워낙 내 옆자리 커플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던 탓에 그런 조용한 말다툼에는 눈길도 가지 않았다.
급한 대로 일단 말을 돌렸다. 거기서 왜 그런짓을 했냐는 질문을 받기 전에 내가 선수를 친거다. 괜히 딴소리 듣기도 싫고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도 귀찮았으니까. 더군다나 난 모르겠다. 내가 왜 그 여자한테 그렇게 순간의 분노로 물을 뿌렸는지.
이 남자 사고 회로 단단히 고장 난 것 같다. 어쩌면 그런 말을 저렇게 눈 하나 깜빡 안하고 할 수 있지. 신기하다 신기해. 더 웃겼던 건 이 말에 잠시 철렁한 나였다.
데퉁스럽게 말을 뱉었다. 괜시리 알면 다칠 것 같은 저 말의 의미를 파고 들고 싶지 않았다. 저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 남자는 나에게 위험요소 1위다 1위.
황민현씨는 예상했다는 듯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내 기분은 그 상황만 떠올리면 소름이 돋아서 황민현씨가 너무 괘씸해서 말이 툭툭 던지듯이 나갔다. 첫 만남은 그래도 나름 분위기 좋았었는데. 여러모로 얽히고 얽혔다 아주.
무슨 말인지 이해하는데 조금 걸렸다. 그 여자한테서 떼어내준게 그렇게도 고마웠나 싶었다. 어쩌면 물 뿌려준게 가장 큰 역할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은 어느덧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배가 너무 고파서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얻어먹는 것은 저번 한끼 식사면 됐다. 충분히 비싼 한끼 했던 기억난다. 다시는 또 신세지고 싶지 않았다. 사려면 내가 사야되는게 맞는 거였다. 아무리 그 여자한테 물을 뿌려서 신세를 갚았다고 하더라도 그 식사값은 못 할 것같다.
이 남자는 내가 그 질문을 곤란해 하는 걸 아는 듯 했다. 어디가서 말싸움으로는 져본적이 없는데 이 남자는 내 모든 말을 알고 있었다 듯이 모든 대답을 뱉어낸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기도 한 이 언변은 정말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되돌아 와. 황민현씨 차에 탔다. 조금은 표현할 수 없는 정적이 흘렀다. 밀폐된 공간이어서 그런지 밖에서는 마냥 떠들어댔었는데, 이 곳은 그게 좀 뭐랄까 힘들다.
하 말을 말자. 이 남자. 처음 만날 때와는 정반대다. 저번과 같은 절제된 매너 따위는 개나 준지 오래다. 무슨 말을 하든 간에 작업치는 멘트는 빠지지 않았다. 한 두번 해본 솜씨가 아니였다. 그치만 저번과 다를 것 없는 것은 나에 대해 하나도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점만은 정말 맘에 들었다. 그저 작가지망생인걸 알게 하고 싶지는 않은.
직구로 훅 들어오는 황민현씨의 화법은 나에게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이런저런 얘기들을 하다보니 레스토랑에 다 도착했다. 내려서야 분위기가 풀렸는지 장난을 치면서 레스토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꽤나 키가 큰 남자가 문 앞에 서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듯했다
아니 어디서 많이 봤다. 저 체구는 내가 절대 잊을 수 없는 체구다. 어느덧 나의 추측과 불안감이 확신이 되고, 확인이 된 순간 나불거리던 내 입은 말 하는 법을 잊은 듯 멎었다. 황민현씨는 아무렇지 않게 그 사람한테 나를 소개했다.
그 수레의 정체는 다니엘이었나보다. 외국에서 살다온 사람인가 싶었다. 그래서 그렇게 미국마인드로 편의점에 널브러져 있었던 걸까. 내 눈은 어느덧 호기심으로 가득찼다.
그는 뭔가 탐탁치 않은 듯 나에게 인사를 건넸고 나는 얼떨떨한 표정과 말투로 그의 인사를 받았다.
생각해보니까 이 가게는 내가 우리집 근처에서 생전 본 적 없는 가게였다. 설마 여기가 내가 그리도 찾아해맸던 가게였을까. 그런거라면 몸에 소름이 끼쳤다. 나랑 우연히 연관된 사람들과의 연결고리가 이 가게 될 까 하는 그런 생각. 간단하게 말하자면 나를 포함한 3명의 사람이 모인 공간, 어쩌면 곧 만남의 장소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
서둘러 자리에 앉아서 코스2개를 시켰다. 수레도 수레고 황민현씨도 황민현씨지만 지금 나에게 밥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음식이 나왔고 꽤나 맛있어보였다. 아줌마들이 말했던 집이니까 맛있겠지.
진짜 아무 생각 안하고 눈 앞에 있는 음식들을 흡입했다. 정말 미친듯이 막 먹었다. 신규 레스토랑인데 실력이 이정도면 진짜 미친거다.수레새끼. 생각보다 능력있는 남자인 듯 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했는데, 빈 수레는 아니였네 그래도.
정말 진심을 다해서 맛있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이건 정말 사실이었다. 솔직한 입장으로 레스토랑에서 코스요리 시키는거 되게 돈낭비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 음식이면 돈을 그만큼 내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아 깜짝아. 다니엘씨? 무튼 수레씨가 와서 인사를 건넸다. 정말 민망한 순간에 와서 감사인사를 해서 당황했다. 이 남자 정말 나랑 타이밍 안 맞는다. 다음에도 술 취해있으면 어떻게해서든 무시 한다 내가.
밥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안나게 입에다가 마구잡이로 넣었다. 그 덕에 오랜만에 만난 황민현씨와는 말할 틈도 없었다.
말로 지는건 영 내 특성이 아니였다. 어떻게서든 이겨야 맘이 편했으니까. 저번이랑은 다른 분위기로 시간이 참 빨리 갔다. 밥을 다 먹고 12시가 다 되서야 집에 도착했다.
저번과 같은 낯선 분위기가 나를 감쌌다. 아까와 같은 익숙한 느낌의 황민현씨는 없었다. 저번과 같이 속을 알 수 없는 황민현씨가 앞에 서 있었다. 이 남자 왠지 위험한 것 같다. 우리가 과연 무슨 사이가 될까. 저번과 같은 아무 말이나 하는 그런 사이가 될까 아니면.
아무 말을 해도 알아 듣는 그런 사이가 될까.
적극적인 남자는 위험하다.
위험한줄 알면서도 계속 들어가게 되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니까.
현재 2주후.
저번주에 황민현씨와 그렇게 번호를 주고 헤어졌다. 웃긴게 연락 한 통도 없다. 내가 지금 뭘 기대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기분이 나쁜 건 확실하다.
아무쪼록 오늘 내 결과가 나온다. 황민현씨와의 만남이 나에게 부디 행운이 가져다 주길 바란다. 그러면 연락 영영 안해도 이해 할테니까. 부디 하나님 부처님 제발 좀 붙여주세요.
5시 50분 . ^진짜 정확히 10분후면 결과가 나온다. 정말 10분후면 내 인생이 작가가 될지 아니면 또 지망생이 될 지 결과가 나온다. 작가 하겠다고 갑자기 문예창작과에 들어간 나다. 정말 이번에도 떨어지면 미안해서라도 직장이라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까지 돈 받아먹으면서 백수로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뻘 생각을 하다보니까 어느덧 10분이 지났고.떨리는 맘을 붙잡고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아 떴다 결과. 들어가 말아.
딸깍.
실눈을 뜨고 내 이름을 찾았.
붙었다.진짜로 붙었다. 진짜로 내 이름이고 진짜로 내 글 제목이었다. 혹시나 동명이인이 있을까봐 걱정도 했다. 근데 진짜 내가 붙은거다 정말로. 와 이건 말도 안된다.
방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춤을 췄다.진짜 아무 막춤이나. 기분도 좋은데 이제 술이나 한잔 해볼까요 한번!
노래를 부르면서 편의점에 갈 준비를 했다. 아 진짜 날아갈 것 같다. 집 밖으로 나와서 바로 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면서 편의점에 갔다. 오늘도 알바생은 잘생겨서 기분이 좋았다. 맥주랑 소주를 고르고 있었는데 술을 고르고 있으니까 드는 기억이 하나.
진짜 술병을 보니까 무의식적으로 한달 전인 그 일이 떠올랐다. 신기하게 거기서 밥을 먹고 한번도 앞집남자랑 마주친 적이 없던 것 같다.
좆됐다.
앞집남자와 눈이 마주쳐 버렸다.
죽어서도 모르는척 하고 살아갈려 했는데.
더보기 |
암율이에요ㅠㅠㅠㅠ 왠지 일주일에 1번씩 오는 듯한 저를 용서하십시오ㅠㅠㅠ 여러분..ㅠㅠ틈틈이 평일에 글을 쓰고 있는데 업로드하려면 움짤 찾고 넣는게 워낙 어려워서ㅠㅠㅠ 저를 용서하시고 매우 차세요ㅠㅠㅠ 많이 사랑해주시는데..ㅠㅠ 더 자주 찾아와야하는데ㅠㅠ 여러모로 바쁜 게..ㅠㅜ 댓글도 마구마구 달아주시고 암호닉 신청도 마구마구 주시고ㅠㅠㅠ!!! 어떻게?ㅜ마구마구!! 예고를 써놓으니까 거기까지 써야한다는 부담감에 제가 너무 힘들어서ㅠㅠ 이제는 예고를 넣어도 그게 꼭 그 다음화에 나온다는 보장은..ㅠㅠ 제가 못 해드릴 것 같아요ㅠㅠ
암호닉 정수기/푸딩/파요/찬란한/강낭/알람/뚜뚜 마니마니 사랑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