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키가 자랐어요 |
“형- 나랑 결혼해!”
지호형, 지호형 너무 좋아. 좋아해! 그러니까 형, 나랑 결혼하자!
지호의 기억 속 어린 지훈은 작고 하얗고 웃는 얼굴이 토실토실 꼭 호빵처럼 귀여웠던 아이였다. 당시 열여덟이던 지호와 열 살이던 지훈은 옆집에 살면서 오며가며 친해진 케이스. 동생이 없던 지호는 지훈이 귀여워, 가끔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는 지훈과 놀아주기도 하고, 지훈이 초대해 놀러 가면 숙제를 도와주기도 하며 친하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 꼬마 지훈이 불쑥 내뱉은 말. 형, 지호 형. 나랑 결혼하자. 그건 어느 겨울날의 따끈한 전기장판 위에서였다. 고사리 손으로 방학숙제인 독후감을 열심히 끄적이던 지훈이 느긋하게 귤을 까먹던 지호를 쳐다보더니 불쑥 말을 꺼냈다. 난 형이 너무 좋아. 정말 이따만큼, 이따-만큼 좋아해. 눈을 빛내며 열심히 말하는 고백이 귀여워 지호는 지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음- 글쎄. 지훈이가 스무 살이 넘어서 어른이 되면, 그럼 그때 결혼하자!’ 그래. 어린아이가 뭘 알겠냐싶어 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꼬마 지훈은 입이 귀에 걸릴 듯 함박웃음을 지었고 지호도 지훈이 좋아하니 그냥 그걸로 된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호는 고3이 되었고, 지훈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조금씩 줄어만 갔다. 대학생이 된 지호는 타지에서 학교를 다니느라 기숙사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본가에 오는 횟수도 많아야 서너 달에 한번쯤? 가끔은 지훈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전처럼 지훈과 단 둘이 놀아준다거나 숙제를 도와준다거나 하는 일들은 없었다. 대학생이 된 지호는 어린아이보다는 제 친구들과 술과 유흥이 좋았으니까. 가끔 서운한 빛을 얼굴에 띠며 스쳐 지나는 지훈만이 있을 뿐.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다 간다는 군대, 제아무리 날고기는 우지호라도 피해갈수는 없었다. 군대라는 삭막한 곳에서 2년 동안을 묶여 개처럼 일하고 드디어 꿀 같은 전역을 맞이하던 날, 가족들과 다 같이 꽃등심으로 배를 채우고 돌아오는 길에 보았다. 옆집으로 들어가는 낯선 얼굴의 사람을. ‘어? 엄마, 옆집은 지훈이네 아니었어? 저런 사람도 살았나?’ 의아한 표정으로 물어오는 지호에게 지호의 엄마는 대답했다. ‘지훈이네? 아....- 지훈이네 이사 갔어.’ 놀란 표정을 하는 지호, 엄마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 입대하고 1년 쯤 후였나? 너 이제 우상병이라고 전화 왔을 때쯤이었으니까. 이사 간다고 짐을 싸고 있더라. 지훈이도 많이 컸던데, 너 못보고 가서 되게 섭섭하다고 했어.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어렸을 적 잘해주던 꼬마아이, 웃는 얼굴이 동그랗고 귀엽던 그 아이. 지호는 귀여워하던 동생이 소리 소문 없이 이사를 가버려 잠깐 서운한 것이리라 생각하고 잊었다. 지호가 지긋지긋한 국방색 군복을 벗던 스물 셋의 겨울이었다.
클럽에서 춤을 추고, 친구들을 다 불러내 불금을 즐기고, 학교 축제 땐 캠퍼스를 휩쓸며 다니던 우지호는 이제 죽었다. 정말 죽었다 생각하고 도서관에 틀어박혀 미친 듯 공부를 했다. 그동안 모자랐던 학점구멍을 메우려 아둥바둥 노력했다. 취업으로 가는 길은 힘들었다. 정말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제시하는 조건마다 토익은 몇 점 이상 나와야 하며, 이런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며, 게다가 면접은 왜 이리도 어려운건지. 이제 예비역으로써 어엿한 사회인이 된 지호는 발에 땀이 나도록 뛰었다. 그렇게 노력하는 지호를 알아본 것인지 드디어 지호는 어느 중소기업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이제 편한 후드 티와 청바지, 운동화 대신에 몸에 꼭 맞는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어야 한다는 아쉬움은 컸지만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지호는 자신의 목에 매인 넥타이가 학창시절에 매던 그것과는 또 다르게 무겁게만 느껴졌지만, 제 할 일이라 생각하며 묵묵히 신입사원 우지호로써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 . .
“지호씨? 오늘은 퇴근 안하세요?”
“아, 잔업이 조금 남아서요. 이것만 마저 하고 들어가게요.”
“아, 그렇구나. 그러면 먼저 들어가 볼게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사람 좋은 미소를 띠고 인사를 한 지호는 까만 생머리의 여사원이 문을 빠져나가자마자 한숨을 푹푹 쉬었다. 아.... 진짜, 이놈의 잔업. 미치게 하네! 언제 다 끝내. 전기를 절약하자고 넓은 사무실 안에 전등은 달랑 한 개만 켜져 있고, 어둑어둑한 공간 안에서 홀로 빛을 내며 켜져있는 지호의 컴퓨터에는 커서가 깜박깜박. 멍하게 깜박이는 커서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자니 눈이 더 피곤해지는 느낌에 지호는 질끈 눈을 감고 책상위로 엎어졌다. 아. 정말. 말단의 삶은 고달프다. 집에서는 이 취업난속에서도 취직을 했다고 동네방네 자랑이니 어디다 푸념할 곳도 없다. 집에 들어가는 길에 포장마차에서 술이나 한잔할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아직 젊은 우사원. 모양 빠지게 혼자서 무슨 술이냐-싶기도 하다.
“우웅- 정말...... 피곤해, 죽겠어.”
우사원의 꿍얼거림만이 적막한 사무실을 울렸다.
***
입사한지 이제 2년째. 내 나이 스물여덟. 대체 언제 우사원은 우대리가 될까. 우과장이 되고, 우부장이 되고. 그렇게 승진을 하다가 어느 정도 선에 머물러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이렇게 재미없는 삶 속에 갇혀 살다 가겠지? 으으- 정말 우울해. 싫다 싫어.
지호는 결국 혼자 앉아 술을 따랐다. ‘형- 시간 있음 나랑 술이나 마실래?’ 지호는 형 태운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인정 없는 형님은 사랑하는 여친과 데이트가 있으시다며 지호를 거절했다. 평일이라 딱히 불러낼 사람도 없고. 이제 어린 시절 그 친구들도 다 제 갈 길 찾아 가는구나-싶어 서운해졌다. 길거리 포장마차에 앉아 쓴 소주 한 잔을 들이키며 캬-. 탁! 소리 나게 잔을 내려놓고 지호는 생각에 잠겼다. 문득 생각이 났다. 어렸을 적 옆집에 살던 그 아이. 내 나이가 스물여덟. 그래, 나보다 여덟 살이 어리던 그 꼬마는 이제 벌써 대학에 들어갔을 나이겠구나. 와, 시간 정말 빠르네. 지훈을 알았을 그 때가 내 나이 열여덟이었으니까. 지금은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혼자서 레포트 잘 쓸 수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지호는 스스로가 청승맞아 피식 웃었다.
“아- 나는 뭐야 도대체... 이 나이 먹고서 애인도 없고.”
술잔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던지던 그 때, 지호의 테이블 앞에 누군가 의자를 끌어다 놓는다. 갑자기 제 눈앞에 등장한 인영에 지호는 빈 잔에서 눈을 떼고 앞에 선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누구...’ 미처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제 앞에 버티고 선 듬직한 덩치의 남자가 묻는다. ‘합석해도 될까요?’ 와....- 같은 남자지만 저보다 더 낮고 남자다운 목소리. 조금 쫄아붙은것이 사실이었다. 그래도 혼자인 저와 함께 합석을 하자니. 외로웠던 지호에게 말상대만큼 반가운 것이 없었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지호는 앞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라. 근데 내가 벌써 술에 취했나? 이제 겨우 한 병을 다 비운 참인데. 이상했다. 고개를 흔들고 다시 보아도 앞에 앉은 그 사람에게서 왠지 꼬마 지훈의 모습을 찾는 자신이 느껴졌다.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이사 갔다고 하던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젠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날 찾아와. 벌써 십 년인데. 십 년. 지호는 홀로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요.”
-
길에서 만난 사이인데 서로 이름을 물을 필요가 없었다. 그저 하룻밤 술자리에서의 스치는 말상대일 뿐인데. 지호는 그동안 가족들에게 터놓지 못하던 회사생활의 서러움과 힘겨움을 마주앉은 그에게 토로했다. ‘내가 저번 회식 때... 얼마, 끅-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요...?’ 한 잔, 두 잔, 비울 때마다 풀려가는 지호의 눈. 꽤나 쌓인 것들이 많았는지 지호는 이미 풀려버린 혀로 열심히 말했다. ‘에잇 나쁜 차장님..... 이, 끅- 대머리...’ 지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던 그는 가끔 맞장구를 치고, 가끔 웃어주고, 가끔 아주 가끔 저의 생각들을 꺼내놓을 뿐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는 꺼내놓지 않는 그가 왠지 얄미워져 지호는 물었다. ‘왜 말을 안 해요...? 무슨 일로, 혼자 끅- 술 마시러 왔어, 요...?’ 지호의 물음에 마주앉은 그가 빙긋 웃더니 말했다.
“우지호씨, 나 기억 안나요?”
“.......누구...?”
제 이름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왠지 무서워진 지호가 두 팔을 앞으로 들어 엑스 자를 그린 뒤 고개만 빼꼼히 빼고 물었다. ‘누, 누구세요...?’ 남자의 눈에 비친 지호는 술을 마셔 얼굴은 빨갛고, 소심하게 가드 올린답시고 들어 올린 팔에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은 하얗고, 잘근잘근 씹어 부풀어 오른 입술과 적당히 풀린 눈 하며, 그저 귀엽고 섹시하게만 보여 웃음이 났다. ‘우지호씨, 정말 나 몰라요?’ 장난을 조금 쳐 볼까 싶어 미간을 조금 찌푸리고 말을 하자, 이제 얼굴이 울상이 되어 쳐다본다. ‘죄, 죄송해요...-’ 지호는 제 앞에 버티고 앉은 저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기억해내기에 바빴다. 아 저, 저기 혹시 거래처 직원인가? 음? 아닌데, 그 계약은 잘못될 리가 없을 텐데…….
“저, 저기 진짜 진짜 죄송한데요......실례지만.. 누, 누구세요....?”
애써 용기를 낸 지호가 드디어 입을 열고 물었다. 앞에 앉은 남자는 그런 지호의 반응이 귀여워 죽겠다는 듯 인상을 풀고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풉! 푸하핫-!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그 남자 덕에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할 지 몰라 취한 지호의 머릿속은 뒤죽박죽. 울상을 짓고 있는데, 드디어 웃음을 멈춘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형- 나랑 결혼하기로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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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는 연재글은 안쓰고..... 코주부가 미쳤나봐요
팬픽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조각글이네요ㅋㅋㅋㅋㅋ
인사때 피코를 찾아주시던 분들이 많았는데 지권글을 쓰면서부터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셨어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흡 슬프지만 취향존중☆★
그래서 이렇게 짧게 피코글을 데리고 왔어요ㅋㅋㅋㅋㅋㅋㅋ
읽어주셔서 감사해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