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락비/피코] 비(雨) |
"우지호-"
"표지훈!!"
"……."
"넌 내가 가끔 만나는 친구일 뿐이지만-! 난....... 난, 널 6년 동안 그리워했어."
".........-!!"
***
혹시나 녀석이 받을까 싶어 몇 번이고 다시 누른 그 번호는 여전히 응답이 없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수화음의 끝엔 익숙한 녀석의 목소리가 아닌 차가운 기계음만이 녀석의 부재를 알린다. 하. 머릿속을 꽉 채운 어제의 사건과 마음속을 꽉 채운 답답함에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애꿎은 핸드폰만 소파위로 던져진 채.
눈을 감으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악에 받힌 듯 소리치던 그 모습이 허공에 선명히 그려진다. 아마 울고 있었을 것이다. 바들바들 떨리던 몸. 차가운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소리쳤다. '난, 널 6년 동안 그리워했어!' 얼굴위로 떨어지는 빗물에도 절대 눈감지 않겠다는 듯 애써 사납게 치켜뜬 두 눈의 끝 속눈썹 위로는 빗물이 마치 눈물처럼 방울졌다. 대롱대롱 위태로이 매달려있던 빗물이 떨어지고, 녀석의 머리위로 흰 얼굴위로 온통 빗물이 얼룩졌지만 그것조차도 우지호의 눈물을 감출 수는 없었다. 작게 떨리던 녀석의 어깨가 그것을 증명했다. 우지호는 울고 있었다. 난 널 그리워했어. 울음 섞인 서러운 외침이 오후 내내 귓가를 떠나지 않은 채 시끄럽게 울리며 나를 괴롭혔다.
불도 켜지 않은 채 멍하니 바닥에 앉아있다 솨아아-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창밖을 바라보니 비가 내린다. 오전 내내 하늘이 흐리더니만 결국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퍼붓기 시작했다. 햇빛조차 들지 않아 어둑한 거리는 잿빛으로 가득했다. 겨울비는 차다. 차디 찬 콘크리트 바닥위로 시린 비가 스며들고 또 다시 시간지나 봄이 오면 그 얼음장 같던 곳에도 푸릇한 새싹이 돋아나겠지만, 아직은 너무나도 춥다. 아직은. 멍하니 내리는 비를 바라보다 느껴지는 한기에 옷을 껴입으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에 보이는 시계는 벌써 5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제 이후로 우지호는 전화도 메시지도 받지 않는다. 비는 멈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더욱 더 거세게 창문을 때려대는데, 머릿속을 괴롭히는 알 수 없는 불안함도 작아질 기색을 보이지 않고 점점 커져만 갔다.
에이 씨발-. 비 내리는 창문을 바라보다 대충 옷을 챙겨 입고는 결국 신발을 신었다. 우산꽂이에 꽂혀있던 검은 우산을 꺼내들었다. 현관을 나섰다. 밖으로 나가자 집안에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비가 쏟아진다. 후두둑- 우산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제법 묵직하다. 이미 거리엔 사람 그림자라곤 모두 숨어버린 지 오래인 듯 했다. 여름도 아닌데 웬 비람. 혼잣말과 함께 내뱉은 숨은 하얗게 허공으로 흩어지며 빗속으로 섞여들었다. 마치 장맛비마냥 억수처럼 퍼붓는 비에 걷는 길목 곳곳엔 웅덩이가 생겨 질척거렸다. 바닥으로 떨어진 빗방울이 바짓단 아래를 적셔 축축한 느낌에 몸은 차갑게 식어가는 것 같다. 이럴 땐 차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신호등을 건넜다. 겨울 해는 일찍 떨어진다고, 비까지 내려 하늘도 흐린 덕분에 한층 더 삭막해 보이는 잿빛의 도시. 그 속에 열심히 빗물을 닦아내는 자동차의 와이퍼와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걷는 나만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
"우지호! 우지호!"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다. 비 내리는 날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녀석이 이런 날 어딜 외출했을 리는 없겠지만, 안에 있을 것이라 짐작하면서도 대답이 없는걸 보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막무가내로 문을 쾅쾅 두드려대다 포기하고서 도어락을 열어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아직 바꾸지 않은 비밀번호는 그 때 그대로였다. 우산에 맺힌 물방울을 털어내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집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보일러도 켜지 않았는지 밟고 선 바닥에선 냉기가 올라와 싸늘함마저 느껴졌다. 혹시나 녀석이 집에 없나 싶어 우지호- 하고 불러봐도 돌아오는 답이 없다. 꺼져있는 TV도, 아무것도 올라와있지 않은 식탁도, 군데군데 열려있는 방문도 집안의 썰렁한 느낌만을 더해주는데 유독 굳게 닫혀있는 방문 하나. 우지호의 방이었다.
우산꽂이가 보이지 않아 대충 벽에 우산을 기대어 세워두고 성큼성큼 닫힌 방문을 향해 걸었다. 문 앞에서 나는 잠시 멈춰 섰다. 녀석과 또 다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벽 하나를 두고서 비겁하게도 나는 도망치고 싶어졌던 것이다. 빗소리에 섞여들던 울음과, 악에 받힌 듯 소리치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를 울렸다. 머릿속을 울렸다. '난, 널 6년 동안 그리워했어.' 그렇게 소리치던 우지호에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멍한 눈빛으로, 바르르 떨리던 녀석의 눈동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빗소리도, 내 심장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것 같았던 찰나의 정적이 지난 후 녀석은 돌아섰다. 찬비를 맞으며 뒤 돌아 걸어갔다. 걷는 뒷모습이 비틀거리는 것도 같았지만, 다가가 잡을 수도 이름을 불러 세울 수도 없었다. 나란 놈은 그런 놈이었다. 비겁했다.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을 이유로 도망쳤다. 대답을 회피했다. 녀석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끝까지 눈을 감지 않고서 나를 바라보던 우지호는 상처받은 젖은 눈으로 뒤돌아섰고, 난 지금 그 눈을 다시 마주 볼 자신이 없다.
문고리 위에 올려놓은 손은 손잡이를 돌리지 못하고서 자꾸 망설이고만 있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후- 심호흡을 하고서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눈앞에 들어오는 침대위로 흰 이불에 파묻힌 우지호의 뒤통수가 보인다. 두꺼운 이불을 온 몸에 칭칭 동여매듯 덮고서 새우처럼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린 녀석. 한발자국을 더 내딛어 가까이 다가가자 뭔가가 이상한 것 같았다. 예민하디 예민한 우지호가 내 외침에 잠을 깨지 않을 리가 없었다. 묘하게 온 몸을 감싸는 불안한 느낌에 성큼 다가가 녀석의 몸을 돌려 바로 뉘였다. 방안은 차디찬데 잡아 쥔 어깨와 목덜미에선 불덩이처럼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대어보니 영락이 없었다. 아- 진짜.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꾹꾹 내리눌렀던 알 수 없던 걱정들이 울컥하고 치솟아 올랐다. 제 머리위에 손을 얹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채,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지호는 다만 차가운 나의 손이 좋았던 건지 얼굴을 부벼왔다. 끙끙거리며 앓는 더운 숨이 내 손목 가까이로 훅- 하고 끼쳤다. 호흡이 불편한 건지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거칠다.
"하- 씨발, 진짜 우지호."
답답한 마음에 삼키지 못한 욕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우지호는 정말 사람 미치게 하는 재주란 재주는 다 갖고 있지 싶다. 녀석이 비를 싫어하는 이유는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비가 오는 날이면 꼭 몸 상태가 안 좋아지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물며 차디 찬 겨울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아댔는데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본인이 제일 잘 알 텐데도 이렇게 방치할 수가 있는 것인지.
꽁꽁 둘러 맨 이불을 풀어 헤치니 추운지 지호의 흰 팔에 닭살이 돋았다.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는 녀석을 똑바로 돌려 눕히며 또 다시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가만히 있어. 좀! 흰 티셔츠는 식은땀으로 도배가 되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끓어오르는 열과 주변에서 끼쳐오는 한기에 지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한숨을 쉬어대니 그제야 내 존재를 알아차린 듯 녀석은 힘겹게 눈을 떠 나를 바라보았다. '표..지훈..?' 온통 쩍쩍 갈라지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에 또 다시 울컥하고 알 수 없는 걱정이 터졌다. '너 가만히 있어.' 마치 협박처럼 움직이지 말 것을 당부하고 욕실로 향했다. 대야 가득히 조금 뜨겁다 싶은 물을 담아 지호의 방으로 가져갔다. 나의 말 때문에 움직이지 않았던 건지, 기력이 없어 움직일 수 없었던 건지 침대위의 우지호는 그대로였다. 나는 녀석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녀석의 옷을 벗겨내었다.
"....뭐..하는 거야.."
결코 매끄럽지 못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잇는 녀석에게 짧게 말했다. '조용히 해.' 대꾸하기도 힘이든지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지호는 머리를 바닥으로 떨어트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꾹 짜내 물기를 덜어내곤 지호의 몸으로 가져갔다. 식은땀으로 얼룩진 그 몸을 닦아냈다. 가슴팍, 허리, 배. 그리고 팔까지. 물에 적신 수건으로 몇 번을 닦아내고 마른 수건으로 다시 한 번 꼼꼼히 닦아낸 뒤에야 뽀송뽀송한 새 옷으로 갈아입힐 수 있었다. 서랍에서 흰 티셔츠를 꺼내 툭툭 털어내고서 녀석에게 입혀주곤 수건과 대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누워."
몸을 닦았던 수건은 빨래바구니에 넣어두고 또 다른 수건 한 장을 따뜻한 물에 빨아 물기를 짜낸 뒤 방으로 가져갔다. 고집을 피우는 건지 아직도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우지호는 미동이 없었다. 제 온몸 가득한 열을 허공으로 토해내는 듯 힘겨운 숨만 몰아쉬었다. '누워있으라니까.' 젖은 수건은 옆에 놓인 의자위에 잠시 놓아두고서 지호의 몸을 앉듯이 들어 자리에 눕혔다. 열이 가득한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다. 바로 눕힌 지호의 이마 위에 젖은 수건을 곱게 접어 얹어놓았다. 충혈 된 눈을 힘겹게 뜨고 다시 입을 연 우지호는 못난 말을 골라한다.
"왜 왔어."
어제처럼, 또 다시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쌕쌕거리는 우지호의 숨소리만이 들려오는 적막한 공간. 하지만 더이상 도망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깨고 입을 떼었다. '나도 몰라.' 응, 그래. 나도 몰라. 그냥 답답하고 답답해서 미치겠어서. 그것뿐이야. 짧은 나의 한마디를 끝으로 다시 방안은 고요함으로 가득 찼다. 지호는 힘겹게 뜨고 있던 눈을 감았다. 벌써 7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쉬지 않고 들려오는 빗소리가 아직 멈추지 않았음을 알게 했다. 겨울비는 차다. 차디 찬 콘크리트 바닥위로 시린 비가 스며들고 또 다시 시간지나 봄이 오면 그 얼음장 같던 곳에도 푸릇한 새싹이 돋아나겠지.
어두워진 거리에 하나 둘 불빛이 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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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제가 아파서 쓴 글이네요....ㅋㅋㅋ 원래는 앞부분에 같잖은 만화가 있었답니다 (독방에서 보신분도 있을듯...)
달랑 한장만 그렸더니 뒷이야기 어딨느냐고 하시는 꿀벌분들이 많았어요...그래서 급조해 낸 이야기ㅠㅠ흡 허접해도 이해해주세요S2
실은 몸살이 나서 어제 하루를 꼬박 앓았어요ㅠㅠ엉엉
그래서 연재하던걸 쓰려다가 몸져 눕고 말았지요ㅠㅠㅠㅠ다시 열심히 쓰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언제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