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 an incurable romantic
: 기약없는 로맨티스트
12
나보다 나를
그래서 둘이 간다고? 남준의 목소리가 삐딱했다. 우석이는 제 손에 들린 표 두 장을 들고는 억울하다 듯 말했다. 아니... 너는 학원 간다면서요. 나는 뭐 좋은 줄 아나.
우석은 아침부터 제 이모로부터 받은 연극티켓을 흔들며, 교실을 돌아다녔다. 너 나랑 연극 보러 갈래? 님, 오늘 뭐하심. 야, 연극 볼래? 하지만 고 삼 반 아이들은 하나 같이 고개를 내저었고, 그 물음에 유일하게 응한 아이는 여주 하나 뿐이었다. 여주는 그렇지 않아도 무료한 하루하루였는데, 잘 됐다며 티켓을 받아들었다. 그런 여주를 본 우석은 남준이에게 말하고 오라며, 괜히 오해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때마침 선생님들께 불려 다니다 교실로 들어온 남준의 여주의 손에 들린 티켓을 물었고, 여주는 우석이와 보러 갈 거라며 들뜬 목소리로 답했다. 우석은 남준의 눈치를 살피며 반 아이들이 다 안 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간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더했다.
"가서 김우석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사달라고 해."
"에이. 그래도 연극도 보여주는데, 밥은 내가 사야ㅈ,"
"아니야. 그래도 사달라고 해. 밥이랑 간식 다 사달라고 해. 알았지?"
그냥 혼자 갈게. 우석은 그 뒤로 차마 뱉지 못한 심한 말들을 겨우 삼켜내며, 인상을 구겼다. 여주에게는 다녀오라고 세상 다정하게 말하고서는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는 다정을 조금도 찾아볼 수가 없어서. 우석은 하다하다 저에게까지 질투를 하나 싶어, 어이가 없다 못해 화도 안 나는 지경이었다.
*
남준은 학교가 끝나고 적성 시험을 위한 학원으로 향하던 걸음을 몇 번이고 멈췄다. 지금껏 저랑도 연극을 본 적이 없는데, 친구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아닌 다른 남자이지 않나. 결국 전화번호부에서 학원 선생님의 이름을 찾아낸 남준은 망설임 없이 문자 메세지를 보냈다. [저 오늘 몸이 좀 안 좋아서... 감기 몸살 같아요. 학원 오늘 하루만 쉬겠습니다. 죄송해요. 선생님.] 여주만이 가능하게 만드는 상황이었다. 남준은 뒤이어 다시 전화번호부에서 이름 하나를 찾았다.
[김우석 ㅇㄷ]
정확한 장소도 모르면서 일단은 지금껏 걸어온 길과 반대로 걷는 남준이었다. 남준은 휴대전화를 손에 든 채로, 수시로 메세지함을 확인했다. 진작에 도착한 선생님의 걱정 어린 문자에는 괜찮다는 말로 답을 한 뒤였다. 남준이 속으로 우석의 욕을 몇 번쯤 곱씹었을까. 우석은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려던 걸 멈추고는 연극 티켓을 제 집 우편함에 넣어두었다.
[우리 집 우편함에 티켓 있음. 8시까지 연극거리 앞 베라에서 만나자고 약속함]
김우석 ㅇㄷ. 지나치게 성의없고 본론만 지닌 글자였다. 하지만 그 문자를 보낸 이의 냉담한 눈을 목격한 사람이라면, 말이 달랐다. 우석은 어쩌면 그 분위기를 느낀 순간 알아챘을 지도 몰랐다. 오늘 연극을 저는 못 보겠구나.
*
여주는 우석과의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미리 약속 장소로 향했다. 연극도 보여주는데, 늦기까지 하면. 그 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래서 꾸미는 것도 포기하고는 학교 체육복에 후리스 하나를 걸쳐입었다. 연극에 집중하기 위해서 렌즈도 빼고 도수가 높은 안경도 꼈다. 완벽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번화가로 나갈 수록 한껏 꾸민 사람들에 초라해진 여주는 괜히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며 바쁜 척을 했다. 학원에 있느라 연락에 답을 하지 않을 남준에게 우수수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대게 의미없는 말들이었다. '으ㅏㅏㅏ. 와ㅏㅏ. 기ㅁ남준~. 바보. 멍청이.' 같은.
여주는 약속 장소에 서서는 우석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곳에 오기 전 찾아본 연극의 후기가 어쩐지 호평일색이더니, 연극장 주변이 사람들로 붐볐다. 천문학자인 여자와 사진작가인 남자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고 했다. 여주는 후리스 점퍼의 지퍼를 올리며, 제법 쌀쌀한 가을 바람을 피했다. 어느덧 약속 시간까지, 2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1분이 지나고, 5분이 지나서도 우석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여주는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전화번호부 목록의 가장 위 'ㄱ' 에서 우석의 이름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여주가 우석에게 전화를 걸기도 전에 휴대전화를 든 여주의 손목이 붙들렸다. 학원과 연극장 근처의 거리가 꽤 돼서 버스에 택시를 타고 왔음에도, 늦은 남준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여주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일단은 극장 내로 입장부터 했다.
극장에 들어서자 연극 시작이 얼마 남지 않아 있었다. 남준은 지정석으로 여주를 데리고 가, 앉고서도 자꾸만 저를 바라보는 여주에게 장난스레 속삭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자리인 거 같아서. 여주는 공연이 시작하기 직전 완전히 암흑으로 가득찬 공연장을 한 번 둘러보고서는 예쁘게 하고 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연극 데이트는 처음인데. 하지만 이제 막 무언가가 시작되려는 분위기가 전해주는 기분 좋은 떨림에 배싯 웃고는 말았다. 어차피 민낯이고 뭐고 다 봤는데. 하루 예쁘게 꾸민다고 그 동안의 정이 어디 가지는 않겠지. 하며.
남준은 암흑 속에서도 꼬물꼬물 움직이는 제 여자친구 때문에 큰 덩치를 구겨가며 작게 웃었다. 제가 오기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잘했다고 생각하며.
*
연극은 후기대로, 아니. 후기보다 더욱 근사했다. 특히 천문학자인 여자가 남자에게 망원경을 통해 밤하늘에 수놓인 무수한 별을 보여줄 때의 연출이 그랬다.
'선물이에요.'
남자 주인공의 생일인 걸 알게 된 여자 주인공의 대사였다. 선물이에요. 남자 주인공을 연기하던 배우는 만원경을 바라보며 손을 천장으로 뻗었다. 와...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의 손을 따라 고개를 들자, 극장의 천장이 서서히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리고는 금세 그 어둠 위로 반짝이는 별이 그려졌다. 당장 그 별들이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름답다 못해 놀라운 풍경이었다. 객석 곳곳에서 감탄 섞인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남준과 여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주는 남자 주인공이 다음 대사를 이어갈 때까지도 천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준은 그런 여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남준은 문득 제 애인이 원래 이리도 예뻤나 생각했다. 학교 체육복에 머리까지 질끈 묶고, 두꺼운 안경까지 쓴 모습이었는데. 분명 이보다 여주가 예쁘게 보였던 적이 많았을 텐데. 이상하게도 지금 모습 밖에 기억나지 않았다. 두꺼운 안경 표면 위로 담긴 천장의 별들과 안경 아래로 깜빡이는 것도 잊은 큰 눈이 그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을 만큼, 예뻤다. 정말로.
여주는 연극이 끝나고도 자리에서 벗어날 줄 몰랐다. 학교에서 우석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연극이 끝나고 제작자와의 짧은 면담 시간이 있다고 했다. 연극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상관없다고. 그때 이모에게 인사를 하고 가자고 했었다.
잠시 뒤, 연극 제작자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여주는 남준에게 잠시만. 이라고 말하고는 연극 전공 학생들이 앉아 있는 앞자리로 가서는 쪼르륵 앉았다. 그리고는 질의응답 시간이 되자 손까지 들고는 질문하는 열의를 보였다. 연극 전공 학생들과 달리 전문용어를 몰라 직접 손으로 가리키다가 답답한 마음에 허락을 구하고는 무대 위로 올라가서 장치를 가리키고는 묻기도 했다. 이거는 뭐예요? 이거는요? 아까 저기 위로 쏜 게, 그럼 이거인 거죠? 우와...
남준은 그런 여주의 모습을 뒤에서 조용히 담으며, 휴대폰 화면 속 여주와 앞에 있는 실제 여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떻게 보아도 한껏 신이 난 모습이었다. 무엇도 재지 않고 무언가에 반짝반짝 취해 있던 여주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더라. 남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영상 녹화 시간이 자꾸만 길어졌다.
*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보고 모든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여주가 신기했던 제작자가 물었다. 연극이 처음이에요? 네! 첫 연극이 우리 연극이라니, 영광이에요. 어떻게 알고 왔어요? 아, 친구네 이모가 여기 연출하신다고 그래서... 티켓 선물 받았어요! 오, 그래요? 그 친구 이름이? 김우석이요! 김, 우석!
"아, 우석이 친구예요?"
"네!"
줄곧 대화를 주고 받던 중년의 여성분이 우석이의 이모라는 걸 알자, 설렘을 더욱 감추기 힘들어진 여주였다. 여주는 마지막으로 인사를 하고 나가는 자리에서 용기 내어, 우석의 이모님께 다가가서는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혹시라도 무례하다고 생각하시면 어쩌나, 이유를 물어보시면 어쩌나. 싶어 이런저런 이유를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런 여주의 생각이 무색하게 우석의 이모님은 전화번호를 알려주시고는 떠나셨다. 어깨도 다정하게 쓸어주시고는.
여주는 극장을 나와서도 쉽게 흥분이 가시지 않는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까 그 장면 너무 근사했지? 그리고 그 대사도, 아. 근데 그 전에 나왔던 음악이 나는 너무 좋았어! 그 작품 쓴 사람은 천재일까? 그런 거 연출하는 거 어렵겠지? 아까 막 연극하는 사람들이 질문하고 하는 거 들어보니까 말도 엄청 어렵고... 다들 뭐 되게 많이 적더라. 나도 노트 가지고 올 걸. 아! 너한테 빌릴 걸 그랬나?
"그렇게 좋았어?"
"응! 완전!"
"막 적고 싶을 만큼?"
"응! 진짜 너 노트라도 빌릴 걸..."
"그 사람들이 하는 말도 다 알아 듣고 싶었어?"
"용어 같은 거?"
"응! 근데 영어도 많고, 막 길고 하더라."
남준은 여주와 맞잡은 손에 살짝 힘을 주며, 답했다. 하고 싶은 게 생겼네. 여주는 남준의 말에 그런 건 아니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남준이 보기에는 분명 무언가를 찾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여주는. 어쩌면 그래서 아까 전의 여주 모습이 그리도 예뻐 보였는 지도 몰랐다. 열정에 차올라 반짝반짝 하는 사람만큼 멋진 사람이 없으니까. 남준은 여주의 대답에 별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천천히 걸음만 옮겼다. 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왔다. 여주는 계속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걸었다. 하고 싶은 거라니.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서.
남준은 자꾸만 하늘을 보고 걷느라 넘어질 것 같은 여주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여주 앞으로 가서, 제 등을 내어주었다. 업혀서 봐. 계속 볼 거잖아.
"괜찮아."
"내가 업고 싶어서 그래."
"거짓말."
"알면 좀 못 이기는 척, 업혀줘라."
여주는 하는 수없이 남준에게 업혔다. 제 책가방을 앞으로 돌린 남준은 제대로 여주를 업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여주는 남준의 등에 업힌 채로, 밤하늘에 듬성듬성 심어진 별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가을 바람과 다르게 남준의 등은 따뜻했다. 그래서 집으로 가는 길에서 여주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깐의 선잠에서 여주는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아래 서 있었다.
남준과 함께.
*
안녕하세요. 겨울입니다.
오늘은 날이 많이 풀려서, 꽤 포근했어요! 내일은 또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던데...! 저는 비 오는 날을 아주 좋아해서, 오늘보다 내일의 날씨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ㅎㅎ 로맨틱은 아직 풀어나가야 할 이야기가 많이 있어요. 남준이가 여주를 얼라라고 부르는 것과 여주네 부모님의 이야기 등등 (?) 그리 무겁지는 않을 예정이니, 그냥 선선하게 소담하게 나눠주시면 됩니다! 로맨틱 속 두 주인공은 서로한테 묻은 게 참 많아서, 서로에게 스며든 점이 정말 많아서. 떨어질 수 없는... 소울 메이트라고 하기에는 너무 거창하고 운명적인 것 같고... 음. 인생 짝꿍? 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무리 다투고 토라져도, 지우개 하나 빌리면 풀리고. 마이쭈 하나에 화해하는. 그런 짝꿍이요. 여러분의 일상에 제가 짝꿍까지는 못 되어도 친구 정도는 되었기를 바라면서!
오늘도 고맙습니다. 게으른 글쟁이 때문에 독자님들이 고생이 많아요. 늘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RoMantic
낭만적인 사람들
For U
*혹시 신청을 하셨는데 없으신 독자님은 댓글로 말씀해주세요 ㅜ_ㅜ 저의 실수일 테니까요... (울무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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