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Tiger, Scissors Rabbit
w.문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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뜀박질이야 원래 내 특기라 잘 넘긴 했다만 하고 난 후의 충격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정재현에게 토끼인 걸 들켜버렸다.
정재현은 정체가 뭘까, 이동혁이랑 잘 어울려 다니는 걸 보면 그 비슷한 위치임이 분명하다.뒷통수를 얼얼하게 얻어맞고 혼이 쏙 빠져나간 채로 터덜터덜 우리 반 천막쪽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눈 앞에 보이는 광경이 참 가관이었다. 2인 3각은 진작에 끝났는데 아직까지 이동혁 옆에 붙어있는 건 뭐야.
내 존재를 확인한 이동혁이 나에게 정재현이 어딨는지 아냐고 물었다.
"교실에 있더라."
"어떻게 알았어?"
"어. 그게.. 교실에 뭘 놔두고 와서 올라갔는데 봤어. 있는거."
이동혁은 내 대답을 듣더니 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나갔다. 정재현에게 전화하려고 나간 거겠지. 반장이 이동혁의 뒷모습을 끈질기게 쫓더니 자기 옆자리를 두들기며 이리 와 앉으라고 말했다.
"우리 도화 줄넘기 겁나 잘하더라."
"아니야. 다들 잘했어."
우리 도화 라는 호칭이 새삼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유치하게 짝사랑이 뭐라고 한때는 고맙게 느껴졌던 친구의 행동 하나하나가 아니꼽게 여겨진다.
"도화야, 너 이동혁이랑 말 많이 해?"
"음..글쎄. 그냥 짝꿍이니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돼."
"이동혁 성격 어때?"
"..모르겠어. 막 친하지는 않아서. 그냥.. 무뚝뚝하고, 공부는 열심히 하고.."
나는 이동혁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 아는 거라곤 지겹게 보게 되는 얼굴과 예의 그 투박한 말투, 이동혁 이라는 이름 세글자. 그리고 작년에 김동영이랑 같은 반이었고. 호랑이고. 수박 겉핥기로 누구나 조금만 주변 지인을 캐묻는다면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동혁을 좋아한다. 웃긴다 나도 참. 알고보면 그저 미운 정이 든건데 내가 괜히 낮은 자존감에 예쁜 애가 이동혁이 좋다고 하니까 따라 좋아하려는 못된 심보를 부리는건 아닐지도 생각해본다.
정말 그런거라면 김도화 넌 진짜 별로야.
"..그래서 내가 아까 스텝 잘못 밟아서 넘어지려는데 순간 이동혁이 딱 잡아주는거야!! 와! 이동혁이 한 팔로 딱 잡아주는데 존나 딴딴하더라. 개설렜어.. 그러고 나한테 천천히 구령 세면서 가자고 그래서 내가 존나 열심히 하나 둘 하나 둘 하고 갔는데 호흡 개잘맞아서 결국 2등했잖아. 아으 아직도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도화야~~"
좋겠다. 친절한 이동혁이라서 좋겠다. 설레는 이동혁이라서 좋겠다. 나를 냅다 끌어안고 둥가둥가 하는 반장의 품에 안겨서 이동혁에게로 미움의 화살을 돌렸다. 내가 정말 착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나는 너를 좋아하는게 아니라 단지.
"도화야 어떡해.. 나 진짜 이동혁 너무 좋아."
네가 짝꿍이니까 나 좀 도와주라. 잘되면 진짜 내가 진짜 잘할게. 너 해달라는거 뭐든.
이렇게 예쁜 애가 널 좋아한대. 단지 나는.
비참해지는 나를 어찌 할 도리가 없었다. 내가 못난 탓이다.
자격 없어.
나를 깎아내리는 볼품없는 자존감이 그렇게 꾸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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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대회의 꽃은 계주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했길래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가! 내가 토끼인건 다 알고 짜고 치는 건지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애가 나를 추천하는 바람에 계주 선수로 나가게 되었다. 다른 반 선수들로는 무려 이태용 김도영 이민형 등등이 계시겠다. 치타라니. 망한 거 아니냐. 김동영네 반 출전 선수들을 훑다가 우리 반 계주 선수들을 둘러보았다. 우리 반은 나를 제외하고는 정재현 이동혁 외 한 명. 다들 가장 큰 점수가 달린 만큼 작정하고 압박을 가해오는데 뛰기 전부터 혼절할 것 같았다. 김도영도 그건 마찬가지 일거다. 어쩌다 고양이 파티가 되어서는.
나는 회사에서 부하 직원들을 카리스마 있게 휘어잡으며 일을 하고 있을 북극곰 엄마를 떠올렸다. 엄마.. 왜 나랑 동영이는 북극곰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길러졌을까.
"얘네 미쳤어. 도화야, 나 죽을 거 같애.."
"죽지마 동영아..살아야 돼."
여기저기서 남발하는 바람에 여러 체향들이 섞여 진동하고 난리법석이었다. 순서로는 두번째인 동영이가 자기 위치로 가기 전에 내 옆을 지나가다 잠깐 멈춰서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 울먹였다.
"동영아아!"
"도화야아!"
난 그나마 첫번째라 조금만 달리고 빠져서 괜찮은데 두번째 순서부터 펼쳐진 동물의 왕국에 억지로 껴있는 동영이는 얼마나 버티기 힘들까. 걸음 옮기기도 버거워보이는 동영이의 머리는 우줄우줄 거리며 귀를 밖으로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도화 화이팅!!강연두 화이팅!!이동혁 화이팅!!정재현 화이팅!!4반 화이팅!!!"
우렁찬 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장이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머리 위로 손을 흔드는게 보였다. 나는 햇빛 때문에 저절로 일그러진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줬다. 손에 빨간 바톤이 쥐어졌다. 50m 를 두고 이동혁이 있었다. 이동혁만 보자. 이동혁만 보고 달려가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반장도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자 점차 나와 이동혁 주변의 소음이 줄어들고 다 희뿌연 잔상이 되어 흩어졌다.
운동장 위에 작은 흙먼지가 일었다. 먹먹하게 울리는 총성과 동시에 앞으로 튕겨나갔다. 이동혁이 삐딱하게 몸을 틀고 서서 뛸 준비를 했다. 몸이 점점 가벼워짐과 동시에 이동혁도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동혁의 손에 바톤을 넘겨주자마자 다리가 꼬여버렸다. 넘어지겠거니하고 허리를 동그랗게 마는데 두 다리가 붕 뜨더니 이동혁이 그대로 나를 안아들고 뛰다가 아예 빨라지기 전에 나를 라인 바깥 쪽에 내려놓고 갔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세상이 빙빙 돌았다.
이동혁이 나를 내려놓자마자 주저앉은 내 주위로 손들이 내밀어졌다. 부축해주는 손길을 받으며 일어나 골인 지점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눈 깜짝할 틈도 주지 않고 순서는 마지막 주자인 정재현 앞에까지 와있었다. 나는 자기 차례가 끝나자마자 드러누워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김동영을 일으켜세웠다. 정재현과 이태용이 거의 동시에 바톤을 이어받고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드러낸 둘의 모습에 동물화 완전히 푸는거 반칙 아니냐며 김동영이 주저앉았다.
"계주 뛰는 새끼들 진짜...다 미쳤다고오!"
양반다릴 하고 앉은 김동영이 잡은 내 팔을 흔들며 찡찡댔다. 세번째 주자였던 이민형이 김동영을 향해 달려와 그 위로 엎어졌다.
"이새끼도 똑같애. 치타새끼 치키치키초코초코 흥!"
"뭐래 진짜, 도영식 욕 너무 귀여워."
"귀여운 나한테 한번 맞아볼래?"
그때 결승선 맨 앞 1열을 차지하고 있던 무리들 사이에 환호성이 나왔다.
누가 이겼어 누가 이겼어 누가 이겼어 김동영이 스프링처럼 솟아오르며 일어나, 내 손을 잡고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갔다.
"누가 이겼어? 누가 먼저 들어왔어?"
누구는 이태용이 먼저 들어왔다, 아니다 정재현이 더 빨리 들어왔다로 입씨름이 한창이었다. 선생님들끼리 우승자를 두고 논의를 몇분 하시더니 마침내 조회대 앞으로 학생들을 모았다. 김동영은 이태용이 자기 눈에 보이는 곳 가까이에 서있으라 했다며 잔뜩 침울해져서는 이태용 근처로 갔고, 나는 우리 반 애들 사이로 섞여 들어가 있었다.
"1등은...9반 이태용!"
바로 옆에서 희비가 갈렸다. 손을 모으고 있던 이태용은 자기 이름이 불리자마자 입을 벌리고 웃으며 옆에 있던 김동영을 으스러질 정도로 안고 흔들다 자기 주위로 몰려든 9반 애들의 헹가래를 받았다. 그걸 지켜보던 반장이 질 수 없다며 일단 소리 지르라고 했다. 애들은 더 크게 소리 지르며 정재현을 둘러싸고 서로 얼싸안고 잘했다며 토닥였다. 여기저기서 포옹을 받고 다니던 정재현과 가운데서 만났다.
"안아줄래?"
그 말과 동시에 정재현이 팔을 벌리고 다가왔다. 안아달라고는 정재현이 그랬지만 도리어 내가 안겨버린 상태가 되었다. 나는 인생 최대의 용기를 끌어내어 수고했다 는 짤막한 위로를 전했다. 정재현은 내 등을 두어번 토닥이고는 놓아줬다.
"물어보고 싶은게 많겠지만 오늘은 봐주라. 지금 내가 좀 속상하거든. 응? 김도화."
포옹 때문에 정재현에게 토끼라는 걸 들켰다는 사실을 잠깐 잊고 있었다. 내가 헉소리를 내자 개구지게 웃으며 코를 찡긋하더니 내 양 어깨를 잡고 뒤로 돌려 세웠다. 바로 이동혁이 서 있었다. 옆에는 반장도 같이였다. 또 가슴이 미어지려 했다.
"이동혁한테도 물을게 있을 것 같은데."
"아니야. 어쨌뜬 너도 잘했어. "
"..고마워."
노을이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서부터 꼼질꼼질 올라오려고 했다. 속을 긁는 허기가 찾아오는 걸 보니 벌써 저녁 때가 다가오려나보다. 운동장에 열을 맞춰 서서 마무리 체조를 한 후 최종 결과 발표 자리를 가졌다. 교장 선생님이 맨 앞에 서서 간단하지만 그래도 지루한 연설을 한 후에 종합우수상을 불렀다.
크게 홀수반 짝수반으로 나눴었는데 계주에서 홀수반이 큰 점수를 가져갔기 때문에 압도적인 차로 홀수반 대표로 이태용이 나가서 받았다. 그 다음에도 이태용은 꾸준히 단상 앞으로 나갔다. 개인전에서도 많은 활약을 했었나보다. 마지막으로 MVP와 VIP 많이 남았는데 전자는 의외로 이동혁이 받았고, 후자는 이태용네 반인 9반이 가져갔다. 나머지 자잘한 응원상이라던가 참가상들도 소소하게 받아갔다. 알고보니 반장이 이동혁을 이것저것 과하게 나갈 수 있는 대부분의 종목에 적어넣어서였다는데 이동혁이 자기 의사 없이 결정된 것들에 대해 고분고분 따랐다는게 제일 놀라웠다.
혹시 그렇게 자기를 막 휘두르는게 반장이라서는 아닐까. 또 울적해진다. 이동혁은 상장과 메달과 상금으로 준 문화상품권을 달랑달랑 들고 교실로 들어왔다. 다른 반 애들은 다 운동장에서 종례를 간단히 하고 하교했지만, 우리 반은 반장네 어머니가 치킨 피자를 시켜주셔서 먹고 가는걸 종례로 퉁 치기로 했기 때문이다.
치킨과 피자가 얼른 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학교 구조가 디귿 자 형태라 보이는 김동영네 반에서 나는게 틀림없는 삼겹살 냄새가 났다. 상금이랑 학급비를 합쳐서 여는 고기 파티라는데 아직 책상 위에 아무것도 없이 텅텅 빈 우리는 군침만 흘렸다.
"도영..맛있어..?"
창문에 바짝 붙어 김동영네 반을 애처롭게 쳐다보며 통화했다. 김동영이 얼굴이 빵빵해진 채로 오물오물 거리며 창문 쪽으로 가까이 왔다.
"맛있엉."
"내 생각 좀 해 봐..오빠.."
"이리 와. 종이컵에다 담아줄게."
김동영은 진짜 사랑이다. 트루럽이다 진짜. 어디가서 이런 오빠 만나기 어려운데. 우리가 자란 사랑의 집이 정말 리얼 사랑으로 가득찬 집이 맞나보다. 나는 텐션 높은 콧소리를 내며 입이 찢어지게 웃었다. 지금 갈게 동영아!!
헐레벌떡 문쪽으로 뛰나가다가 막 들어오는 정재현 가슴팍을 제대로 들이박고 말았다.
"괜찮아?"
"어어. 미안해 미안해."
머리보다는 가슴이 더 아플텐데 억 소리 하나 안 내고 정재현이 내 걱정부터 했다. 예의 그 몸에 베인 친절함이겠지만. 나는 정재현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팔을 휘저으며 교실을 나가 복도를 쿵쾅거리며 뛰었다. 한달음에 김동영네 반에 도착해서 환기한다고 열어둔 앞문 벽에 붙어서 김동영을 찾고 있는데 내 앞을 지나가던 이태용과 시선이 얽어졌다.
"오? 혹시 도영이 찾아?"
"ㅇ. .네!"
"도영이~~우리 도영이 어딨지?"
목청껏 김동영을 불러주더니 이태용이 나를 다시 한번 쳐다보며 김동영이랑 엄청 닮았다고 했다. 쌍둥이라서 그렇다고 하려다가 처음보는 애한테 너무 푼수처럼 구는 것 같아 그저 웃었다. 김동영이 뒷문에서 나를 불렀다.
"자. 김치도 넣었다. 마늘도 넣구."
"도영..에인절이야?"
"그래. 알면 됐다. 가라~얼른 가~"
김동영이 내 등을 떠밀며 나를 보냈다. 나는 손을 흔들어주고 김동영이 꽂아준 젓가락을 빼서 삼겹살 한 점을 집어들었다.
우리도영이 옴뇸뇸 먹는거 봐요 세상 사람들
이태용의 애정 가득찬 목소리가 벽 너머로 들렸다. 우리 엄마도 김동영 저렇게 애취급 안 하는데. 진짜 김동영 좋아하나봐 쟤. 어쩌다가 사자한테 잘못 걸려 예쁨 받는 김동영을 향해 아멘을 외쳐줬다.
느긋하게 걸으며 종이컵을 비웠더니 도착한 교실에 때마침 애들이 막 받은 피자와 치킨을 분단별로 놓고 있었다. 방금까지 삼겹살을 삼키던 배는 자기가 뭘 먹었는지 까먹은 모양이었다. 뱃속에서 꾸륵꾸륵 소리가 났다.
반장은 준비성이 철저했다. 야무지게 먹으면서 볼 영화 한 편까지 딱 셋팅 해놓았다. 한 분단 당 여섯명씩 앉았는데, 앞에 두 줄이 나와 이동혁 책상에 세로로 붙여서 따로 책걸상을 끌고 옮기고 할 수고가 없었다. 반장이 저번에 말했던 명당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지 불을 반만 켜 놓고 프로젝터를 칠판에 쏴서 보는데 그렇게 잘 보일 수가 없었다. 치킨과 피자는 영화 중반부 쯤에 동이 났고,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질 겸 책상 위를 깨끗하게 정리 하니 어느새 애들은 자기 집 안방처럼 책상 위나 사물함 위에나 아님 아예 바닥에 편하게 각자 자세를 잡고 자유분방하게 보거나 다른 걸 하며 놀았다.
이동혁은 의외로 잠을 안 자고 영화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빛을 받는 옆모습에 오늘따라 시선이 오래도록 머물었다. 하필 나오는 영화의 장르는 로맨스였다.
남자 주인공이 모두에게 인기 많은 여자 주인공을 혼자 좋아하는데 어느 날은 둘이 있을 수 있게 되는 날이 왔다. 남자는 지금이 기회라 생각되어 여자에게 고백을 하려 한다. 고백은 부담스럽지 않게, 급할수록 천천히, 넌지시.
달빛이 아름답다 말하며 우수에 젖어있는 여자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남자가 고민이 있다며 전형적인 우회적 말하기로 운을 띄운다. 누군갈 좋아하는게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남자의 말에 여자가 또렷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말한다.
-나도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어.
짝사랑도 쳐준다면 그이는 내 첫사랑이야.
지금도 말하려니까 정말 가슴 떨린다.
뭐라고 해야하지, 그래. 나는 그이 손에 내 심장을 쥐어줬어.
내 심장을 이렇게, 자기 손 안에서 폈다 오므렸다 하며 내 기분을 좌지우지하고 감정을 통제하지.
가령, 지금같이-
"..안보여."
책상 위에 올라와 앉은 애 때문에 화면이 안보여 그런다는듯 내 쪽으로 지그시 기댈 때
-난 너라는 부비 트랩을 밟아버린거야.
눈을 비볐다. 영화 속 남녀와 앉아서 영화를 보는 내 상황이 자꾸 교차됐다. 자꾸만 여자의 감정과 내 마음을 동일시하려 들었다. 반장이 그렇게 예쁘다며 칭찬했던 오똑한 코가 비현실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그 위로 내리깐 속눈썹이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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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행사의 끝물인 교내 글짓기 대회는 싫든 좋든 해야만 했다.
전체 참여로 수업 한 시간을 통으로 비우고 시작됐다.
칠판에 서걱서걱 쓰이는 주제를 보고 일제히 검은 머리들이 숙여졌다.
아예 포기하고 엎드려버리는 이들도 많았다. 상..의미 없다.
그래도 막상 샤프를 쥐고 보니 맨 끄트머리라도 받을 글짓기 실력 정도는 되지 않나 하는 자만함이 들었다. 나름 어릴 때 동시 써서 이름 날려도 봤는데.
주어진 키워드 중 2개 이하로 자유롭게 쓸 수 있대서 가을, 하늘, 낙엽, 여름 중 낙엽을 골랐다. 여름이 곧장인 이 시점에 주제들이 저게 뭐람.
바깥에 깔린 하늘은 청명한게 가을 비슷하기도 했다.
낙엽
바스락 거리며, 내 발 아래에 깔리는,
죽어가는 것들의 비명
겨우 두 줄 써놓고 막혀버렸다.
운문 말고 산문으로 넘어갈까 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망했다. 아까의 자신만만함은 온데간데 사라지고 좌절감에 팔이 저리도록 쉬지않고 아무 말이나 끼적여 완성했다.
제출하러 교탁으로 가면서도 망했다는 지배적인 생각에 터덜터덜 슬리퍼를 끌며 갔다.
놀랍게도 교내 2등이라는 상을 받았다. 전혀 염두해두지도 않아 잊었는데 내 이름이 호명되어 입을 틀어막고 앞으로 나갔다.
금색 종이를 팔랑거리며 자리에 앉자 구경 좀 해보자고 애들이 얼굴들을 들이밀었다.
"오오~ 김도화 좀 하는데~?"
"진짜 나 받을 줄 몰랐어.."
"우와, 김도화 글 잘 쓰나 봐.
이동혁은 사행시 해놨던데."
그 말에 가만 있다 불똥 튄 이동혁이 정재현의 옷깃을 잡았다.
정재현은 그저 보조개가 깊숙히 패이게 웃었다.
"뭐더라, 가장 가까이 있는 애가 갑이고 나,"
거기까지하고 이동혁의 손이 정재현의 입을 덮쳤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듯 했다.
나는 눈썹만 들썩거리며 올려준 뒤 상장을 한 번 손으로 쓸어보았다.
생각지 못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가을, 하늘] 이동혁
가 장 가까이 있는 애가 갑이고 나는
을 이다.
하 지만 갑은 모른다.
늘 자기가 을인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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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온갖 지루함이 담겨있는 하품이 이동혁의 입에서 나왔다.
마치 평화로운 오후를 즐기며 햇살 아래서 쏟아지는 졸음에 잠들기 직전인 호랑이 같았다. 진짜 호랑이지 참.
줄넘기 챙겨!
맞다. 그 다음이 체육 시간이다.
잠깐의 쉬는 시간 동안에도 눈을 못 감고 체육복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사실에 이동혁은 짜증이 나 보였다. 절대 건들지 말아야지.
마찬가지로 신체적 활동을 싫어하는 나 역시 얼굴을 찡그리며 운동장으로 나갔다.
오늘은 어제보다 햇빛이 더 강했다. 여기에 뛰고 움직이기까지 하다보니 긴 체육복 팔을 걷어올려야 했다.
의도적인 땡땡이는 절대 아니고 단지 생리가 터져 급하게 생리대를 가지러 교실로 돌아온 것 뿐이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기분도 별로고 김동영한테 짜증내고 싶더라니. 화장실에서 마무리하고 다시 운동장으로 나가려는데 비어있는 교실과 열린 창문들로부터 전해 듣는 아이들의 소리에 산뜻함이 느껴졌다. 뭐 아직 시간이 그렇게 많이 지난 것도 아니고. 똥 싸고 오는 만큼이라 치자 하고는 창가와 가까운 책상 위에 앉아서 눈을 감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들려오는 모든 소리와 냄새가 정겨웠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는데 근처에서 갑자기 섬유 유연제 비슷한 포근한 향이 났다. 우와 뭐야-싶어 눈을 뜨고 고갤 돌리니 이동혁이 나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었다. 놀라서 자빠지려는 걸 붙잡아 주었다.
나는 민망해서 바로 손을 쳐내며 고맙다고 했다.
"급하게 뛰어가더니 농땡이나 피우고 있었네."
"아,아니야! 바로 나가려고 했어. 나갈거야.."
꼬깃하게 구겨진 신발 뒤축을 바로 펴 발을 집어넣고는 먼저 교실을 나왔다. 뒤따라 나오는 이동혁의 발소리를 듣는데 아까 맡은 향기가 계속 얼굴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자꾸,
설렜다.
하필이면 모두가 덥다고 할 때 똑같이 땀을 흘려도 나는 코감기 때문에 에어컨이 달갑지 않았다. 빌어먹을 바이러스. 오늘 진짜 최악이다. 생리에 코감기에.
결국 이르게 선풍기를 돌렸다. 조금만 더워도 시원함을 강력히 원하는 아이들의 성급함 때문에 꺼낸 여름이었다. 천장에서 360도로 회전하며 돌아가는 선풍기 4대로 인해 머리카락이 날려 얼굴에 달라붙는 건 물론이고, 으슬으슬 추워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나 혼자 춥다고 체육 시간에 땀 흘려 아이스크림까지 물고 있는 다수에게 폐를 끼칠 순 없으니까. 닭살이 돋은 팔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는데 이동혁이 내 의자에 팔을 올리더니 누군가를 가리키며 낮게 소곤거렸다.
여기 분단 선풍기 꺼줘
선풍기를 끌 수 있는 스위치와 가장 가까이 앉아 있던 애가 이동혁의 말을 알아듣고 우리 쪽 제일 가까운 선풍기를 껐다.
그리고선 아무렇지 않게 다시 팔을 거두고 펜을 휙휙 돌리는데 차마 그 옆모습을 쳐다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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