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 연습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까지 나를 무섭게 쳐다보는 지민의 얼굴이 선했다. 내가 그도 모르게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분명 트집 잡힐만한 짓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뭐가 불만이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손을 뜯고 있었는지 단검에 베였던 살점이 더 뜯겨 나가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몸짓을 멈추고 피가 새어 나오는 곳을 핥았다. 지혈에 자기 침 만큼 좋은 게 없다고 호탕하게 말하던 오빠가 생각났다.
"아, 일부러 본 건 아니고 ‥ 그, 난 이미 네가 옷을 갈아입었을 거라고 생각, 아니 ‥ 노크 안 하고 들어온 내 잘못이긴 한데."
언제 들어 왔는지도 몰랐다. 위에 입었던 얇은 셔츠를 거의 다 벗었을 때 쯤 제 2 왕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마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가 나를 본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이 황녀와 제 2 왕자는 남매니까.
나는 보란 듯이 웃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아예 얼음이 된 채로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조금 귀여웠던 것 같다. 다 갈아 입은 옷 매무새를 단정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 했을 때는 내가 다 부끄러웠다. 온통 얼굴이 붉어진 채로 내 눈을 피하는 모습이, 손에 든 무언가를 만지작 거리는 모습이.
"아마 3일 내로 네 환영회가 시작될 거래.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검투장에서 박지민이 너한테 전해 달라고 했어. 그리고 이, 이건 네 드레스랑 구두. 장신구는 박지민이 자기랑 맞춰서 준대. 근데 왜 맞춰서 줘?"
박지민이 검투장을 찾아왔던 이유가 그거였나. 환영회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환영회 준비도 안하고 검술을 연습하는 내가 좋게 보이진 않았겠구나 싶어 드레스와 구두를 받기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제 2 왕자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이미 궁에는 다 소문이 난 거 아니었나? 박지민과 내가 공공연한 약혼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었단 말이야?
생각 해 보면 박지민이 선전포고를 한 날 민윤기는 회장에 없었다. 늦게 와서 전정국의 검술 스승이 되러 가버렸지. 게다가 그는 궁 안에서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는 제 2 왕자에게 가십거리를 떠들기엔 쉽지 않았을 터. 근데 전정국도 이걸 안 알려줬다고?
"아, 지민하고 저 약혼했거든요. 결혼 해요."
"아, 어? 결혼?"
"네, 사촌 사이이긴 하지만 뭐 ‥. 많이 당황스러우시죠?"
"아, 어. 당황 … 스럽네."
민윤기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묘하게 그늘이 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뭐, 박지민한테 약점 잡힌 거라도 있어? 걔가 누구랑 그렇게 쉽게 결혼 할 사람이 아닌데.
제 2 왕자가 꾀가 많다더니 순 거짓말 아닐까. 황녀와 왕자의 사촌이 결혼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당연히 왕위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야 없었다.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어 넘겼다. 사실 약점 잡힌 거야 맞지만.
"안 하는 게 좋을 걸."
"왜요?"
"걘 한 번 잡으면 안 놔주거든. 검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제 7화 너의 이름을 걸고
지민은 황녀가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야 민중들이 움직일 거라면서 환영회에 국민들을 초대했다. 어차피 국민 정도야 먹일 수 있을 만한 양을 준비할 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별 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그에게 쓰여지는 도구고, 도구가 말을 해봤자 쓰는 사람은 무시하고 쓸 뿐이다.
환영회는 내 생각보다는 화려하진 않았다. 예산을 맞추기 위한 지민의 계획인 것 같았다. 대신 나보고 좀 고생 하라는 건지 내게 인사하러 오는 국민들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보라색 벨벳 재질의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를 하면 같이 허리를 숙였다.
한 두 명이나 몇 십 명이면 해 볼만 하겠는데, 이게 백 단위를 넘어가니 골병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시중을 드는 시녀에게 이제 몇 명이 남았냐고 물었고 이제 마지막 사람이라고 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여태 내게 말한 이야기들은 모두 생활고나 아니면 감사 인사, 혹은 경멸의 눈초리가 다였다. 마지막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뻔한 이야기일 테니.
하지만 들어오는 사람이 우리 오빠라면 말이 달라진다.
"황녀의 귀환을 축하하며 인사 드리겠습니다. 여씨 가문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비록 몰락한 가문이지만 이름 만은 기억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빠는 유학을 간다고 했지만 말만 유학이었지 거의 도망이나 다름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황녀는 오빠와 나에게 자신의 집에서 사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었다. 처음에야 좋아서 1년 동안이나 편히 살았지만 점점 오빠에게 심해지는 황녀의 집착에 결국 오빠는 도망치듯 유학길에 올랐다. 황녀가 죽은 걸 아는 것도 아닐 텐데 황녀를 다시 보러 왔다는 건 그만큼 오빠가 따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빠는 황녀가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던 황녀가 궁으로 복귀 했다는 소식이 들렸으니 따스한 성품을 가진 그가 축하하러 오지 않을 리 없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은 오빠를 일으켜 궁을 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지민이 태형에게 부탁 해 오빠를 죽일지도 몰랐다. 사전에 방해 되는 인간은 모두 치워버리는 사람이니, 내가 감정에 흔들릴 만한 존재도 제거하겠지. 나는 오빠에게 고개를 들지 말라 명한 뒤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라고 했다. 빨리 이 자리를 마무리 짓고 오빠를 보러 가야 했다.
"저 남자를 뒤따라 가거라. 몰래."
나는 병사 하나를 불러 그를 쫓게 했다. 검술에 뛰어난 오빠가 인기척을 못 알아 챌 리는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병사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벨벳 재질의 의자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드레스 마저도 벨벳이라 마찰 되는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치마 자락을 붙잡으며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내게 귀족 여인들이 몰려들었다. 청혼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얘기부터 귀걸이 하나에 대한 찬사까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청혼은 대체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아, 뭐 ‥."
-네가 최소한 어떻게 청혼을 받았는지는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
습관적으로 얼버무리려다가 곧 지민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귀족 여인들이 내게 물어볼 줄 알았던 거다. 쓸 데 없이 책 잡힐 만한 일을 만들지 않는 사람. 나는 지민이 무서워졌다. 미래까지 예측하는 그가. 나는 청혼 받았던 얘기를 했다. 귀족 여인들은 너무 로맨틱하다며 자신도 그런 남자에게 청혼을 받고 싶다고 했다. 웃는 모습이 기괴했다. 귀족이라고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황녀님, 안색이 붉습니다. 곧 결혼하시는 게 그리 좋으십니까?"
안색이 붉어질만한 일도 하지 않았고, 결혼에 대해 망상하며 심장이 뛴 적도 없다. 그런데 안색이 붉다니?
자세히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 앞에서 별이 터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팔과 다리가 저렸다. 열이 오르는 듯 했다. 너무 격하게 인사를 받았나. 아까 인사를 받을 때 무의식적으로 너무 힘들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신경이 갉아먹히고 있었다.
"황녀는 내가 데리고 가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 나를 받친 건 제 2 왕자였다. 내내 보이지 않던 그가 어디서 튀어 나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나를 부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등장한 박지민에 제 2 왕자는 나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박지민은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내 계획이 무너질 게 분명했다. 나는 조용히 박지민의 손을 치우고 오빠를 뒤따라 갔던 시녀를 불렀다.
검술 연습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까지 나를 무섭게 쳐다보는 지민의 얼굴이 선했다. 내가 그도 모르게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분명 트집 잡힐만한 짓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뭐가 불만이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손을 뜯고 있었는지 단검에 베였던 살점이 더 뜯겨 나가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몸짓을 멈추고 피가 새어 나오는 곳을 핥았다. 지혈에 자기 침 만큼 좋은 게 없다고 호탕하게 말하던 오빠가 생각났다.
"아, 일부러 본 건 아니고 ‥ 그, 난 이미 네가 옷을 갈아입었을 거라고 생각, 아니 ‥ 노크 안 하고 들어온 내 잘못이긴 한데."
언제 들어 왔는지도 몰랐다. 위에 입었던 얇은 셔츠를 거의 다 벗었을 때 쯤 제 2 왕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마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가 나를 본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이 황녀와 제 2 왕자는 남매니까.
나는 보란 듯이 웃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아예 얼음이 된 채로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조금 귀여웠던 것 같다. 다 갈아 입은 옷 매무새를 단정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 했을 때는 내가 다 부끄러웠다. 온통 얼굴이 붉어진 채로 내 눈을 피하는 모습이, 손에 든 무언가를 만지작 거리는 모습이.
"아마 3일 내로 네 환영회가 시작될 거래.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검투장에서 박지민이 너한테 전해 달라고 했어. 그리고 이, 이건 네 드레스랑 구두. 장신구는 박지민이 자기랑 맞춰서 준대. 근데 왜 맞춰서 줘?"
박지민이 검투장을 찾아왔던 이유가 그거였나. 환영회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환영회 준비도 안하고 검술을 연습하는 내가 좋게 보이진 않았겠구나 싶어 드레스와 구두를 받기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제 2 왕자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이미 궁에는 다 소문이 난 거 아니었나? 박지민과 내가 공공연한 약혼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었단 말이야?
생각 해 보면 박지민이 선전포고를 한 날 민윤기는 회장에 없었다. 늦게 와서 전정국의 검술 스승이 되러 가버렸지. 게다가 그는 궁 안에서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는 제 2 왕자에게 가십거리를 떠들기엔 쉽지 않았을 터. 근데 전정국도 이걸 안 알려줬다고?
"아, 지민하고 저 약혼했거든요. 결혼 해요."
"아, 어? 결혼?"
"네, 사촌 사이이긴 하지만 뭐 ‥. 많이 당황스러우시죠?"
"아, 어. 당황 … 스럽네."
민윤기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묘하게 그늘이 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뭐, 박지민한테 약점 잡힌 거라도 있어? 걔가 누구랑 그렇게 쉽게 결혼 할 사람이 아닌데.
제 2 왕자가 꾀가 많다더니 순 거짓말 아닐까. 황녀와 왕자의 사촌이 결혼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당연히 왕위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야 없었다.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어 넘겼다. 사실 약점 잡힌 거야 맞지만.
"안 하는 게 좋을 걸."
"왜요?"
"걘 한 번 잡으면 안 놔주거든. 검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제 7화 너의 이름을 걸고
지민은 황녀가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야 민중들이 움직일 거라면서 환영회에 국민들을 초대했다. 어차피 국민 정도야 먹일 수 있을 만한 양을 준비할 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별 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그에게 쓰여지는 도구고, 도구가 말을 해봤자 쓰는 사람은 무시하고 쓸 뿐이다.
환영회는 내 생각보다는 화려하진 않았다. 예산을 맞추기 위한 지민의 계획인 것 같았다. 대신 나보고 좀 고생 하라는 건지 내게 인사하러 오는 국민들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보라색 벨벳 재질의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를 하면 같이 허리를 숙였다.
한 두 명이나 몇 십 명이면 해 볼만 하겠는데, 이게 백 단위를 넘어가니 골병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시중을 드는 시녀에게 이제 몇 명이 남았냐고 물었고 이제 마지막 사람이라고 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여태 내게 말한 이야기들은 모두 생활고나 아니면 감사 인사, 혹은 경멸의 눈초리가 다였다. 마지막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뻔한 이야기일 테니.
하지만 들어오는 사람이 우리 오빠라면 말이 달라진다.
"황녀의 귀환을 축하하며 인사 드리겠습니다. 여씨 가문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비록 몰락한 가문이지만 이름 만은 기억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빠는 유학을 간다고 했지만 말만 유학이었지 거의 도망이나 다름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황녀는 오빠와 나에게 자신의 집에서 사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었다. 처음에야 좋아서 1년 동안이나 편히 살았지만 점점 오빠에게 심해지는 황녀의 집착에 결국 오빠는 도망치듯 유학길에 올랐다. 황녀가 죽은 걸 아는 것도 아닐 텐데 황녀를 다시 보러 왔다는 건 그만큼 오빠가 따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빠는 황녀가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던 황녀가 궁으로 복귀 했다는 소식이 들렸으니 따스한 성품을 가진 그가 축하하러 오지 않을 리 없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은 오빠를 일으켜 궁을 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지민이 태형에게 부탁 해 오빠를 죽일지도 몰랐다. 사전에 방해 되는 인간은 모두 치워버리는 사람이니, 내가 감정에 흔들릴 만한 존재도 제거하겠지. 나는 오빠에게 고개를 들지 말라 명한 뒤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라고 했다. 빨리 이 자리를 마무리 짓고 오빠를 보러 가야 했다.
"저 남자를 뒤따라 가거라. 몰래."
나는 병사 하나를 불러 그를 쫓게 했다. 검술에 뛰어난 오빠가 인기척을 못 알아 챌 리는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병사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벨벳 재질의 의자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드레스 마저도 벨벳이라 마찰 되는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치마 자락을 붙잡으며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내게 귀족 여인들이 몰려들었다. 청혼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얘기부터 귀걸이 하나에 대한 찬사까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청혼은 대체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아, 뭐 ‥."
-네가 최소한 어떻게 청혼을 받았는지는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
습관적으로 얼버무리려다가 곧 지민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귀족 여인들이 내게 물어볼 줄 알았던 거다. 쓸 데 없이 책 잡힐 만한 일을 만들지 않는 사람. 나는 지민이 무서워졌다. 미래까지 예측하는 그가. 나는 청혼 받았던 얘기를 했다. 귀족 여인들은 너무 로맨틱하다며 자신도 그런 남자에게 청혼을 받고 싶다고 했다. 웃는 모습이 기괴했다. 귀족이라고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황녀님, 안색이 붉습니다. 곧 결혼하시는 게 그리 좋으십니까?"
안색이 붉어질만한 일도 하지 않았고, 결혼에 대해 망상하며 심장이 뛴 적도 없다. 그런데 안색이 붉다니?
자세히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 앞에서 별이 터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팔과 다리가 저렸다. 열이 오르는 듯 했다. 너무 격하게 인사를 받았나. 아까 인사를 받을 때 무의식적으로 너무 힘들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신경이 갉아먹히고 있었다.
"황녀는 내가 데리고 가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 나를 받친 건 제 2 왕자였다. 내내 보이지 않던 그가 어디서 튀어 나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나를 부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등장한 박지민에 제 2 왕자는 나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박지민은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내 계획이 무너질 게 분명했다. 나는 조용히 박지민의 손을 치우고 오빠를 뒤따라 갔던 시녀를 불렀다.
검술 연습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까지 나를 무섭게 쳐다보는 지민의 얼굴이 선했다. 내가 그도 모르게 무슨 실수라도 한 걸까? 분명 트집 잡힐만한 짓은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뭐가 불만이었던 걸까. 나도 모르게 손을 뜯고 있었는지 단검에 베였던 살점이 더 뜯겨 나가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으려는 몸짓을 멈추고 피가 새어 나오는 곳을 핥았다. 지혈에 자기 침 만큼 좋은 게 없다고 호탕하게 말하던 오빠가 생각났다.
"아, 일부러 본 건 아니고 ‥ 그, 난 이미 네가 옷을 갈아입었을 거라고 생각, 아니 ‥ 노크 안 하고 들어온 내 잘못이긴 한데."
언제 들어 왔는지도 몰랐다. 위에 입었던 얇은 셔츠를 거의 다 벗었을 때 쯤 제 2 왕자와 눈이 마주쳤다. 차마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그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긴 했지만 그가 나를 본다고 해서 이상할 것도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지금 연기하고 있는 이 황녀와 제 2 왕자는 남매니까.
나는 보란 듯이 웃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아예 얼음이 된 채로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조금 귀여웠던 것 같다. 다 갈아 입은 옷 매무새를 단정하며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마주 했을 때는 내가 다 부끄러웠다. 온통 얼굴이 붉어진 채로 내 눈을 피하는 모습이, 손에 든 무언가를 만지작 거리는 모습이.
"아마 3일 내로 네 환영회가 시작될 거래.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검투장에서 박지민이 너한테 전해 달라고 했어. 그리고 이, 이건 네 드레스랑 구두. 장신구는 박지민이 자기랑 맞춰서 준대. 근데 왜 맞춰서 줘?"
박지민이 검투장을 찾아왔던 이유가 그거였나. 환영회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환영회 준비도 안하고 검술을 연습하는 내가 좋게 보이진 않았겠구나 싶어 드레스와 구두를 받기 망설여졌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오는 제 2 왕자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이미 궁에는 다 소문이 난 거 아니었나? 박지민과 내가 공공연한 약혼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도 있었단 말이야?
생각 해 보면 박지민이 선전포고를 한 날 민윤기는 회장에 없었다. 늦게 와서 전정국의 검술 스승이 되러 가버렸지. 게다가 그는 궁 안에서 친밀하게 지내는 사람이 없어 보였다. 함부로 다가갈 수도 없는 제 2 왕자에게 가십거리를 떠들기엔 쉽지 않았을 터. 근데 전정국도 이걸 안 알려줬다고?
"아, 지민하고 저 약혼했거든요. 결혼 해요."
"아, 어? 결혼?"
"네, 사촌 사이이긴 하지만 뭐 ‥. 많이 당황스러우시죠?"
"아, 어. 당황 … 스럽네."
민윤기의 입가에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묘하게 그늘이 진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다시 내 얼굴을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뭐, 박지민한테 약점 잡힌 거라도 있어? 걔가 누구랑 그렇게 쉽게 결혼 할 사람이 아닌데.
제 2 왕자가 꾀가 많다더니 순 거짓말 아닐까. 황녀와 왕자의 사촌이 결혼하는 이유가 뭐겠어요. 당연히 왕위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지.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야 없었다. 나는 그냥 어색하게 웃어 넘겼다. 사실 약점 잡힌 거야 맞지만.
"안 하는 게 좋을 걸."
"왜요?"
"걘 한 번 잡으면 안 놔주거든. 검이든 사람이든 물건이든."
제 7화 너의 이름을 걸고
지민은 황녀가 자비로운 모습을 보여야 민중들이 움직일 거라면서 환영회에 국민들을 초대했다. 어차피 국민 정도야 먹일 수 있을 만한 양을 준비할 게 뻔하기 때문에 나는 별 다른 토를 달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그에게 쓰여지는 도구고, 도구가 말을 해봤자 쓰는 사람은 무시하고 쓸 뿐이다.
환영회는 내 생각보다는 화려하진 않았다. 예산을 맞추기 위한 지민의 계획인 것 같았다. 대신 나보고 좀 고생 하라는 건지 내게 인사하러 오는 국민들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보라고 했다. 나는 보라색 벨벳 재질의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인사를 하면 같이 허리를 숙였다.
한 두 명이나 몇 십 명이면 해 볼만 하겠는데, 이게 백 단위를 넘어가니 골병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시중을 드는 시녀에게 이제 몇 명이 남았냐고 물었고 이제 마지막 사람이라고 했다.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여태 내게 말한 이야기들은 모두 생활고나 아니면 감사 인사, 혹은 경멸의 눈초리가 다였다. 마지막 사람이 내게 무슨 말을 할 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뻔한 이야기일 테니.
하지만 들어오는 사람이 우리 오빠라면 말이 달라진다.
"황녀의 귀환을 축하하며 인사 드리겠습니다. 여씨 가문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비록 몰락한 가문이지만 이름 만은 기억 해 주셨으면 합니다."
오빠는 유학을 간다고 했지만 말만 유학이었지 거의 도망이나 다름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황녀는 오빠와 나에게 자신의 집에서 사는 것은 어떻겠냐고 물었다. 처음에야 좋아서 1년 동안이나 편히 살았지만 점점 오빠에게 심해지는 황녀의 집착에 결국 오빠는 도망치듯 유학길에 올랐다. 황녀가 죽은 걸 아는 것도 아닐 텐데 황녀를 다시 보러 왔다는 건 그만큼 오빠가 따스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빠는 황녀가 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랬던 황녀가 궁으로 복귀 했다는 소식이 들렸으니 따스한 성품을 가진 그가 축하하러 오지 않을 리 없었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은 오빠를 일으켜 궁을 나가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지민이 태형에게 부탁 해 오빠를 죽일지도 몰랐다. 사전에 방해 되는 인간은 모두 치워버리는 사람이니, 내가 감정에 흔들릴 만한 존재도 제거하겠지. 나는 오빠에게 고개를 들지 말라 명한 뒤 그대로 뒤를 돌아 나가라고 했다. 빨리 이 자리를 마무리 짓고 오빠를 보러 가야 했다.
"저 남자를 뒤따라 가거라. 몰래."
나는 병사 하나를 불러 그를 쫓게 했다. 검술에 뛰어난 오빠가 인기척을 못 알아 챌 리는 없지만 그래도 명색이 병사니까 알아서 잘 하겠지. 벨벳 재질의 의자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드레스 마저도 벨벳이라 마찰 되는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았다. 치마 자락을 붙잡으며 밖으로 향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릴 리가 없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마자 내게 귀족 여인들이 몰려들었다. 청혼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얘기부터 귀걸이 하나에 대한 찬사까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청혼은 대체 어떻게 받으셨습니까?"
"아, 뭐 ‥."
-네가 최소한 어떻게 청혼을 받았는지는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
습관적으로 얼버무리려다가 곧 지민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귀족 여인들이 내게 물어볼 줄 알았던 거다. 쓸 데 없이 책 잡힐 만한 일을 만들지 않는 사람. 나는 지민이 무서워졌다. 미래까지 예측하는 그가. 나는 청혼 받았던 얘기를 했다. 귀족 여인들은 너무 로맨틱하다며 자신도 그런 남자에게 청혼을 받고 싶다고 했다. 웃는 모습이 기괴했다. 귀족이라고 다 아름다운 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황녀님, 안색이 붉습니다. 곧 결혼하시는 게 그리 좋으십니까?"
안색이 붉어질만한 일도 하지 않았고, 결혼에 대해 망상하며 심장이 뛴 적도 없다. 그런데 안색이 붉다니?
자세히 생각할 틈도 없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눈 앞에서 별이 터졌다. 시야가 흐려지고 팔과 다리가 저렸다. 열이 오르는 듯 했다. 너무 격하게 인사를 받았나. 아까 인사를 받을 때 무의식적으로 너무 힘들었나 보다. 나도 모르게 신경이 갉아먹히고 있었다.
"황녀는 내가 데리고 가지."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진 나를 받친 건 제 2 왕자였다. 내내 보이지 않던 그가 어디서 튀어 나온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나를 부축하려고 했다. 하지만 곧 등장한 박지민에 제 2 왕자는 나를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박지민은 여유롭게 웃으며 나를 데려가려 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내 계획이 무너질 게 분명했다. 나는 조용히 박지민의 손을 치우고 오빠를 뒤따라 갔던 시녀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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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시녀를 부르지? 나로는 부족한가?"
"너무 과해서 부른 겁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성급하단 생각 안 하십니까? 일단 여기선 한 발 물러서 주세요. 귀족 여인들의 가십을 들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요. 여기서 가십 거리를 더 추가하는 일은 삼가주세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직 쟁탈전에 공식적으로 참여도 않았고 나와 결혼한 것도 아니다. 아직 약혼식 조차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 그는 이제야 깨달은 듯 잡은 팔에 힘을 풀었다. 몸에 힘이 없는 나를 곧바로 잡은 시녀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이 오가지 않는 길로 향했다.
그 남자는? 어디로 갔지? 내 말에 시녀는 자신이 어디로 들어 갔는지 봐 두었다며 걱정 말라고 했다. 궁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파란 지붕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다고.
오빠는 이 곳에 자리 잡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쯤 황녀의 안위를 확인 했으니 나를 찾으려 하겠지. 아마 오빠가 자리를 잡은 건 일시적일 확률이 컸다. 대체적으로 집값이 싼 꼭대기 층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아 확실했다. 만약 나와 같이 살 집을 골랐다면 1층이나 2층에 자리를 잡을 확률이 컸다. 그것도 아주 쾌적한 환경으로. 도피식으로 유학을 간 오빠가 떠나기 전 한 약속은 꼭 나를 좋은 곳에서 살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으니. 내가 지금 오빠에게 돌아간다면, 오빠는 이미 사 둔 다른 좋은 집으로 나를 데려가겠지.
"아프다고 해서 깜짝 놀랐잖아.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 건데."
시녀의 부축을 받아 방에 들어온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제 3 왕자가 들어왔다. 한창 진행될 환영식을 빼먹고 내게 온 것 같았다. 곧 진행 될 왕자의 행차복을 입고 있는 것을 보아 분명했다. 아픈 척이라도 해야 하나 싶었지만, 곧 예전에 그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제 이름을 걸고서라도 내 결혼을 파해주겠다고.
"제 3 왕자, 아니 전정국."
"네가 전정국이라고 하니까 되게 신기하네. 말해봐. 뭐든 지 들어줄게."
"내 결혼을 늦춰줘요. 당신의 이름을 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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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 4분의 1정도 온 거 같아요,,! 항상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당!
(((막짤 모자이크 제가 직접함 ㅎㅎ,,,<- 칭찬을 바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