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민은 많이 예민해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를 황녀라고 이미 제 1 왕자와 제 3 왕자에게 소개시켰으니 사람들은 돌아온 황녀를 보고 싶어 할 텐데, 그 사람 중 황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제 1 왕자의 어머니가 없을 리 없었다. 자신이 직접 쳐 넣은 황녀가 해적에게 구출 당했다는 소리를 듣는 날에는 그 의심이 여과 없이 커지고 말 것이었다.
"제 1 왕자가 어머니께 황녀가 해적에게 구출 당했다는 말을 할까요?"
"제 1 왕자는 어머니와 사이가 그렇게 좋지는 않아. 요샌 더 하지. 아마 눈도 안 마주칠 거야. 공식적인 자리 빼고는. 그나저나 이걸 어떡한다."
"너 누구야?"
민윤기는 제 2 왕자보다는 기사에 가까워 보였다. 얼굴에는 자잘한 흉터들이 많았고 옷도 왕족처럼 입었다기보단 귀족 중에서 조금 낮은 귀족들이 입을법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예전에 그랬던 우리 오빠처럼.
"아, 저는 ‥그게."
"너 설마, 돌아왔다는 황녀냐?"
제 2 왕자는 꾀가 많다. 즉, 눈치가 빠르다는 거였다. 그는 내 금발머리만 보고도 내가 황녀라는 걸 알아챈 듯 했다. 그는 내게 서서히 다가왔다. 타이밍 좋게 복도에 있던 창문에서 달빛이 새어 나왔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움직인 듯 했다. 그는 복도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보더니 설명하라는 듯이 고개를 까딱였다. 역시 3명의 왕자 중 가장 검술이 뛰어난 제 2 왕자다웠다. 시체를 보고도 동요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없는 눈물을 짜내기 시작했다.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어떤 사람이 쫓아왔어요. 아직 궁 구조가 익숙하지 않아 여기저기로 도망을 왔는데 여기 이런 시체들이 ‥.
"세 번."
"네?"
"나는 널 딱 세 번 도와 줄 거야."
"지금 그게 무슨 말 ‥."
"솔직히 네가 내 누나라는 건 전혀 와 닿지 않지만."
민윤기는 조용히 칼을 뽑았다. 그가 문을 열 때까지 딱 열 발자국이 남았을 때였다.
"그래도 넌, 나랑 같은 민씨니까. 도와주는 거야. 이제 두 번 남았어."
민윤기가 문을 열었다. 아직 닦아내지 못한 눈물 덕이 시야가 흐렸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김태형은 제 1 왕자의 어머니를 죽이지 못했다. 복면 쓴 남자가 암살자라는 걸 알아챘던 것 같지만 민윤기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김태형을 뒤쫓지는 않았다. 뭐랄까, 별 미련이 없어 보였다.
야, 누구 좀 불러 와. 이 여자 정신 나갔어.
*윤기 (제 2 왕자) 시점*
황녀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밖으로 튀어나갔다. 내가 황녀를 도와준다는 말을 했다는 것을 알면 아마 김남준이 나를 엄청나게 비웃을지도 모른다. 네가? 누굴 돕는다고? 그만큼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본처의 자식이긴하나 황녀를 잃고 그 다음에 태어난 나는 잃어버린 황녀와 같은 성별, 같은 얼굴을 가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궁에서 쫓겨났다. 당시 나라에서 나는 바리왕자라고 불렸었다. 갓난아기인 나를 거둬준 사람은 김남제 학자 부부였고, 그들은 현재 왕권에 아주 많은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비판과 비평을 그들의 아들 김남준과 함께 들으며 자랐다. 덕분에 나는 왕자임에도 불구하고 왕권에 큰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왕위를 이어받을 생각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쓴 책이 왕권에 반反한다는 이유로 집에 왕위기사단이 찾아왔다. 그들은 내 머리카락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 2 왕자를 찾았다. 나를 거두었다는 명분 덕에 김남준 부모님은 죄를 피해갈 수 있었지만 솔직히 나는 학자 부부의 품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버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제 2 왕자를 찾았다는 거야?
나는 한 번 버려졌다는 이유로 어머니의 성인 '전' 씨를 따를 수 없었고, 결국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의 '민' 씨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김석진도 어머니의 성씨를, 박지민도 어머니의 성씨를 물려받았지만 나만 '민'씨였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만 그런 거라고. 오늘 아침 일어나 거리를 산책하던 도중, 나는 나만 '민'씨가 아니라는 걸 듣게 됐다.
자식은 부모의 품을 한 번 떠나면 무조건 '민' 씨라는 성을 받게 된다. 아무리 잃어버렸었다고 한들 황녀도 '민'씨 성을 피해갈 순 없었다. 그녀의 이름은 민여주였다. 나와 같은 '민'씨. 비록 계기는 다르더라도 궁 내에 나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게 이렇게 의미 있는 일일 줄은 몰랐다. 왕이 죽었을 때도 가지 않았던 궁으로 갔다. 비록 늦은 시간이었지만 방에 들렀다 바로 황녀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시체와 함께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녀는 나와 같은 금발을 가지고 있었다. 덤으로 나와 같은 하얀 피부도. 피가 확실히 끌어당기는 힘이 있긴 한 건지 그녀가 울자마자 어디서 부터인가 자꾸 울분이 울컥 터져 나왔다. 우는 건 넌데, 왜 내가 서러운 건지.
"고마워요. 제 2 왕자님 아니었으면 전 어떻게 됐을지도 몰라요."
눈물 덕분에 푹 젖은 속눈썹은 무거워서 잘 움직이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곱슬거리는 민여주의 머리칼을 쓸어 내리며 말했다. 다치지 마. 귀찮은 거 싫으니까.
세 번만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결국 그녀를 도와주고 말 것이다. 귀찮겠지만, 귀찮음을 느끼지 못한 채로 그렇게, 널 뒤에서 바라보겠지.
달빛이 내리쬐는 그 순간, 처참한 시체들 보다 달빛을 받아 은빛으로 변한 네 머리칼이 먼저 눈에 띄었다고 하면
너는 나를 잔인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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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립니드아~~~~~~~~~~ 열븐 댓글 감사해요!!!!! 진짜루,,,, 오랜만에 왔는데 이렇게 반겨주시다니 너무 감동이여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