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가 진정한 황녀가 아니라면 누가 진짜 황녀라는 거야? 왜, 제 2 왕자인 나도 같은 '민'씨니 진정한 왕자가 아니냐?"
"제가 제 2 왕자님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을 했다면 사죄드리지요. 하지만 진정한 황녀가 아니라는 것이지 황녀의 자질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분은 황녀의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훗날 왕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실 분이거든요. 지금 제 2 왕자님께서는 황녀임을 제가 부정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녀의 말에 민윤기는 곧 칼을 뽑을 태세였다. 마녀는 조용히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황녀님, 황녀님이 누구의 손을 잡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왕이 바뀝니다.
황녀님이 제 1 왕자 곁에 머무신다면 당신은 그의 눈이 될 것입니다.
제 2 왕자 곁에서는 나침반이 되실 것이며,
제 3 왕자 곁에 계신다면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저는 당신을 부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사실 만을 말했을 뿐. 하지만 저는 당신이 이 나라를 바꿀 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미리 감사드리지요.
"황녀님, 이 자의 이름은 정호석으로 현재 저를 도와주고 있는 사람입니다. 편하게 ‥."
"마녀라고 불러주십시오."
제 5 화 나는 그에게로 가서 진정한 황녀가 되었다.
제 2 왕자는 나의 고맙다는 말에 아까와는 전혀 다른 미소를 보여주며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마치 어젯밤처럼. 나는 그에게 이제 도움을 받을 날에 2번 남은 거냐고 물었다. 그는 이게 무슨 도와준 거냐며 이번 건 퉁치자고 했다. 만약 민윤기가 없었다면 나는 꼼짝 없이 마녀에게 내 정체를 들켰을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들켰을 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을 했으니까. 게다가 결정적으로 나를 지나갈 때 이런 말을 했다.
- 혹여 당신의 비밀이 새어나갈까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재미있는 걸 꽤나 좋아하는 편이거든요. 그리고 당신이 만약 '그'의 손을 잡는다면 ‥ 그의 손에 쥐여진 칼이 될 것입니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그도 내가 황녀의 대역이라는 걸 알아챈 듯 싶었다. '그'가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렇게 민윤기가 볼일이 있다며 사라지고, 나는 곧장 박지민의 방으로 향했다. 워낙 넓어 도중에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가야 했다. 양피지 위에 적힌 글씨들을 읽고 있던 박지민은 내가 들어와도 계속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책상에 다가가 단검을 올려놓았다. 단검과 책상의 나무가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무슨 볼일이야?"
"마녀가 내 정체를 알아요."
"그렇겠지."
"뭐가 그렇게 태평해요? 그 자가 제 1 왕자한테 내가 가짜 황녀라는 걸 알리면 어떡해요!"
"지금 네가 큰 소리 내는 게 더 잘 들릴 것 같은데. 일단 앉아, 얘기는 차분히.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알겠어? 황녀의 기본 자세야 그게."
"설마, 마녀한테 당신이 정보를 흘렸어요?"
"세상에 마녀가 어디 있겠어. 다 정보를 팔아먹으면서 있는 척 하는 허풍쟁이들 뿐이지. 나는 그 자에게 정보를 팔아 제 1 왕자의 정보를 교환 해. 이게 전부야."
"그렇다고 가짜 황녀라는 걸 알려주면 어떡해요! 게다가 마녀가 제 1 왕자랑 제 2 왕자가 있는 앞에서 그걸 말했다고요! 저는 진정한 황녀가 아니라고. 당장 그를 죽여요. 이 단검으로."
"너 꽤나 사람 죽이는 걸 쉽게 보는구나. 게다가 이 단검은 발라리아 강철로 만들어졌어. 황실의 물품이지. 이걸로 죽였다고 치자, 누군가 그의 목을 자세히 본다면 잘려진 단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게 발라리아 강철이라는 걸 알 수 있겠지. 그렇다면 누가 가장 의심을 받을 것 같아?"
"…오늘 왕좌를 차지 하겠다고 선포한 지민이요."
"궁 생활을 하면서 지켜야 할 점이 있어. 무조건 수가 틀어진다고 상대를 죽이지 말 것. 한 번 더 생각 할 것."
"네."
"그나저나, 이 발라리아 단검은 어디서 났어?"
이 단검은 내가 황녀를 죽일 때 썼던 단검과 비슷하지만 다른 단검이었다. 바로 우리 부모님을 죽인 단검. 황녀의 집에 있던 똑같은 단검은 그곳에 두고 왔고, 부모님을 죽인 이 단검은 여태 보관하고 있었다. 그냥 장식이 화려한 단검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왕가에서 내려오는 발라리아 강철로 만든 단검이라니.
"부모님이 죽은 곳에 떨어져 있었어요."
"그러니까, 네가 부모님을 죽인 사람이 황녀라는 걸 알게 된 계기가 이 단검이란 말이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더니 그는 이 단검을 지니고 있으라고 했다. 마녀는 어차피 입을 다물 수 밖에 없고, 오히려 목숨이 위험한 건 난데 없이 등장한 황녀가 아니냐고. 당장 암살자가 들어와 너를 죽여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니 일단 몸에 지니고 있으라고. 그리고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한 쪽 무릎을 꿇었다.
"나는 아까 네게 청혼을 한 거나 다름없어. 하지만 지금 다시 청혼을 할 게. 최소한 다른 귀족들이 네게 어떻게 청혼을 받았냐고 물어보면 대답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니까. "
지민은 장난스럽게 걸려있던 웃음을 지웠다. 그는 이제 나를 진정한 황녀로 대우 해 주려는 거였다. 비록 나는 진정한 황녀가 아니었지만.
"나의 도구가 기꺼이 되어주시겠습니까."
그에게로 가서 진정한 황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