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밤의 상사화
그 봄에, 나누던 사랑은 다 어이로 가 버리고 이리 녹음만 남았나.
그대와 등을 맞대고 연서를 주고 받던 그 날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는가.
사랑은 왜, 내게만 고된가.
봄 날, 흐드러지게 피어 살랑거리는 도화보다 더한 요기는 없다고 누가 그리 말했는가.
잠을 청해도 눈이 뜨이는 달밤, 순간의 결정이 나를 그대에게 데려다 놓았는지, 도화가 날 이끌었는지.
"아,"
단 한 번도 마주치지 못한 얼굴이 그 날 따라 담장 너머에서 아른거린 것이 홍연이기를 바란다면, 과할까.
동혁과 여주의 눈이 담장 너머로 마주쳤다. 여리게 핀 복숭아 꽃에 손을 뻗어 살살 쓰다듬던 여주의 손길이 멈추고 곧이어 거두어졌다. 규수가 외간 남자에게 제 맨 얼굴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일. 여주가 두리번 거리며 쓰개치마를 찾았으나 하필이면 동혁이 서 있는 그 담장에 걸려있을 게 무어란 말인가. 입술을 잘근거리며 돌아선 여주가 동혁에게는 동그란 그 뒷모습만 보이면서 한 발, 두 발, 뒷걸음질로 천천히 담장에 다가갔다.
"조심하세요."
혹여 그녀가 돌담에 등을 부딪힐까, 동혁은 걱정이 스며든 목소리를 건네었다. 뒤돌아 제 마당으로 돌아가도 될 일을, 무엇이 두 발을 붙들고 섰는지 도저히 물러날 수가 없었다. 꽃잎을 흔들던 그 바람이 이제는 동혁의 볼을 간질이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온 여주는 손을 뻗어 담 위에 걸쳐져있던 치마를 쥐어 서둘러 머리에 덮어썼다. 작은 손이 어설플 법도 한데 고운 손끝이 자락을 단단히 여며 봉긋하게 솟아있던 이마와, 곱게 뜨인 선을 따라 늘어졌던 속눈썹을 가리고는 입술 끝과 콧망울만 내보였다. 그대로 사라질까, 동혁은 서둘러 운을 떼었다.
"늦은 시각에 어찌 홀로 와 계셨는지 여쭙는 무례는 삼가하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대신? 동혁은 그만 뚝 떨어진 말끝에 침을 꿀걱 삼키고 눈을 굴리며 자책했다. 무슨 말을 이어야 하는가. 영 서툰 제 자신을 질책하며 소매자락을 쥐었다. 아,
"도화가 어여뻐 왔습니다."
아아. 신음과도 같은 그 단말마를 동혁은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찌 음성마저. 조금은 거센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와 복숭아 나무를 흔들었다. 달큰한 도화향만 동혁과 여주 사이를 매꾸고는 바람은 떠났다.
***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만나는 월하연인(月下戀人).
목소리는 진심을 실어 돌담 위를 부드럽게 넘나들고, 주고 받는 연정은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도화가 흐드러지던 그 날 밤 이후로 동혁과 여주는 그 담에서 만나,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 벽에 등을 맞대고 서서 이야기를 나누면, 차디찬 돌담에 온정이라도 서린 듯, 서로에게 기댄 듯 따스하였다. 누구의 마디가 더 길거나 짧은 법이 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을 고했다. 간혹 웃음소리라도 들려오는 날이면 그 것이 귓속에 자꾸만 맴도는 것도 아쉬워 어디 비단주머니에 넣어 간직하고 싶었다. 동혁은 이제 밤에 자는 법을 잊고 해가 떠오른 후에야 서책을 쥐고 꾸벅, 꾸벅 고개를 떨구며 조는 법을 익혔다. 이런 제가 부끄러워 피곤하지는 않느냐고 묻는 여주의 말에는 짐짓 아닌 척 제가 낼 수 있는 가장 나긋한 소리로 그대는 어떠한가 되물었다. 저는,
"달이 주는 시간에 익숙해져 그만, 햇빛이 드는 시간에 잠이 찾아오고는 합니다. 고운 개나리색 비단에 붉은 실로 수를 놓다가는 그만 손끝을 찔러 피가 맺히기도 하였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동혁은 저 너머로 가 빨간 방울이 맺혔었을 그 손끝을 매만지며 흉이 남지는 않았는지 많이 아프지는 않았을지 제 눈으로 확인하며 묻고 싶었으나 이내 파렴치한 생각이라며 스스로를 질책했다. 하지만 처음 본 날 이후로 보지 못한 얼굴에 대한 그리움을 지울 수는 없었다. 그 입술이 어떠한 모양새로 움직여 제게 말을 건네고, 마주보는 두 눈망울 속에는 어떤 빛이 들었을지 보고 싶은 마음이 피어올랐다.
여주의 손끝에 빠알갛게 맺혔던 동그란 방울은 비단을 적시지 못했건만 무어가 그리 옷자락을 적셨는지, 담장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달이 기울고 차오르는 것을 함께 바라보자 마음은 기우는 법이 없이 차오르기만 했다. 아아, 돌담을 사이에 둔 연인이여.
***
도통 책을 손에 쥐지 못하는 것이 요 근래 날이 따스해져서 그러하냐고 묻는 부친의 앞에서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지난 번 초시를 건너뛰었으니 이번에라도 응해야 하지 않겠느냐."
"아직은.. 아직은, 배움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동혁의 부친은 더 이상 다그치지 않고 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어 건네며 책방에라도 다녀와 바깥 공기를 쇠라고 일렀다. 그리하겠다 답하며 물러선 동혁이 그 길로 신을 신고 대문을 나서 걸었다. 관직에 나아가고자 하는 뜻은 변하지 않았으나 시험을 위해 수도를 오가야 하는 여정 동안에 빈 자리로 남겨질 담장 앞이 걱정된다 이르면, 어리석은 것일까. 머리를 흔들어 그 안에 있는 생각을 정리하려고 애를 쓰며 걸었다. 오랜만에 혼자 나서는 길이 소란스러웠다. 어디, 이사라도 가는 모양인가 싶어 둘러보는 찰나에 동혁의 앞으로 말이 마차를 끌고 지나갔다. 귀한 이가 떠나나, 그리 생각했다.
오래되고 눕눕한 종이 냄새가 가득 찬 책방에 들어가 새로운 서책을 고르고 있으려니 주인되는 양반이 다가와 동혁에게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이번에 역서가 새로이 들어왔는데 좀 보시렵니까? 참시댁 도련님도 아주 좋다 이른 글들이 많은 책입니다. 그 분도 그렇고, 도련님도 그렇고 과거를 준비하는 귀재들께서 더 좋은 문장을 익히셨으면 하여 제가 특별히 들여온 책이니 한 번 보시기라도 하시는 게.."
"그대가 추천하는 책이 나빴던 적은 없지. 한 번 보여주시겠는가?"
"예예. 마침 참시댁 도련님이 떠나면서 돌려주셨으니 바로 여기 있을 겁니다."
사람 좋게 웃으며 책을 권하는 탓에 동혁은 그만 저도 따라 소리내어 웃고는 건네지는 책을 받아들었다. 다른 이의 손길을 탄 책이었으나 어쩐지 밉지 않았다. 책을 펴 들어 흝어보던 중, 문장이 어쩐지 낯이 익다 생각한 동혁이 주인에게 가져가겠다 일렀다. 조금 깊게 구절을 읽은 동혁은 오늘 밤, 그대에게 전하리라 다짐했다. 단정하고도 유려한 글솜씨가 그대를 닮은 것 같다고, 그런 생각이 한 자락 얹어지자 손에 쥔 서책이 달게 느껴졌다.
"왜, 오지 않으십니까."
담장에 기대어 저 하늘에 뜬 달을 바라보며 동혁이 외로이 속삭였다. 저 너머의 부재가 시리게 느껴져서 그만 고개를 떨굴 수가 없었다. 제 눈시울이 뜨거워질까, 고개를 높이 들어 달을 마주할 수 밖에 없었다.
휘영청 밝아 우리를 비추던 달빛이 따스하다 생각했는데 이리 보니 혼자 맞는 달빛은 참으로 시립니다.
걸음이 조금 늦는 것일테니 기다려보자. 피곤하여 잠에 들었을 수도 있으니 내일 다시, 다시, 더 기다려보자 하는 것이 그만, 견디지 못할 기다림으로 남았다.
그 날 떠난 것이 혹 그대였습니까?
한 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고 스친 그 얼굴이 떠올랐다. 무엇이 두렵다고 그녀의 얼굴조차 다시 보지 못하고 이리 보내게 되었는지. 그리워 떠올리려고 하니 도화 핀 밤 보았던 얼굴이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동혁은 결국 고개와 함께 눈물을 떨구었다. 버석하게 마른 흙바닥 위로 눈물 방울이 떨어지자 짙은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나눈 밤의 수만큼, 딱 그 만큼의 빗방울이 동혁이 딛고 선 바닥 위로 떨어지고는 그쳤다.
***
또 홀로 눈물을 흘릴까 두려워 마당에도 나서지 않고 제 방에만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장을 넘기기를 사흘, 시중이 들어와 제게 소식을 전했다. 식구가 모두 한양길에 오른 저 너머 참의댁 도령이 기어이 초시에 합격했다 합니다. 그러하느냐? 관심이 없다는 듯, 한 자도 읽지 않은 책장이 다시 사락하고 넘어갔다. 해서, 주인 어른께서 심기가 조금 불편하신 듯 하니,
"알겠으니 물러나거라."
가시 돋친 말이 괜한 곳을 향했다. 고개를 조아리며 시중이 물러나자마자, 동혁은 소리나게 책을 덮고는 다시 고개를 치들었다. 방 안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달이 갑자기 그리웠다.
그대가 한양 길에 오르셨습니까?
그대가 왜, 하는 괜한 원망이 들었다.
그 날 밤 동혁은 다시 담장 아래에 섰다. 머리 위에서 곱게 흔들리던 복숭아 꽃도, 저 너머에 있던 이도 사라지고 푸른 잎과 동혁만 남았다. 왜 나를 이리 두고 떠나십니까. 모든 것이 무색하게도, 울음은 다시 밤을 적셨다.
내가 가야만 하는 길에 그대가 어찌하여 오르셨습니까.
한 번 피워보지도 못한 내 연정이 이렇게 집니다.
그립다 말해 그대를 다시 볼 수 있다면 그리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어찌, 사랑이 이리 내게만 가혹합니까.
꽃이 피면 잎이 지고, 꽃이 지면 잎이 피는구나. 아아, 한 여름의 상사화여.
***
댓글로 주신 사진이 저의 머리를 세게 때리고 지나가서 이 밤에 글을 쓰고 말았습니다.
노래 꼭 들으면서 읽어주시고, 급하게 쓴 글이라 질이 좋지 않은게 조금 속상하네요.
아무튼 사극 동혁이 보고 싶었습니다..
**암호닉 : 루니 릴리 토쟁이 또잉 야다 동쓰 코코 참새쨍 베리 스윗 베니 미니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