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버튼 꾹~*)
<응답하라112> - 미스터몽룡
*
"저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요?"
의자에 앉아 멍하니 벽을 보고 있던 성열이 툴툴댔다. 그러자 성규가 픽, 하고 웃었다. 10분도 가만히 못 있는구나.
성규는 시선을 옮기지 않은 채 서류를 바삐 뒤적이면서 물었다.
"이순경. 안중근 의사가 남긴 유명한 명언이 뭔지 알아요?" "당연히 알죠! 그 뭐더라…. 가시 돋는 거 아니에요?" "맞아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하셨죠." "어? 그럼 제가 맞춘 거 맞죠?"
정답 돋네! 문제를 맞혀서 신이 난 성열이 눈앞에 있는 흰 벽을 보며 짤깍짤깍 박수쳤다.
"이거 맞혔으니까 생각하는 의자에서 내려와도 되죠? 대박. 저 천재인가 봐요!"
낄낄. 깔깔.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기분 좋게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뒤를 돈 성규가 빛의 속도로 제지하고 나섰다.
"앉아요. 아직 일어나란 소리 안했는데." "…에이, 좋다 말았네."
진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성열이 의자에 털썩 앉았다. 여기가 바로 개미지옥. 모든 걸 포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벽에 기대니, 등이 서늘하면서도 시원하다.
"근데, 경위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요?" "아뇨." "거참 되게 야박하시네." "여태까지 야박의 구렁텅이로 등 떠민 사람이 누군데 그래요."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완전 쌀쌀 맞으시네요. …혹시 쌀이세요?"
실없는 성열의 말장난이 어이없는지 성규의 웃음이 픽 터졌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성규의 귀한 웃음.
"어? 웃었다!"
성열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면서 신기한 듯 요리조리 쳐다봤다. 경위님, 방금 웃은 거 맞죠?
그 바람에 후다닥 미소를 지우고 원래 표정으로 돌아온 성규. 얼굴을 뒤로 조금 빼더니 딱딱한 서류철로 성열의 머리를 통 때렸다.
"어이가 없어서 웃은 거예요. 그런 개그하면 재밌어요? 감히 저질 개그를 한 벌이니까 달게 받아요."
통!
한 번 더 때리자, 지우개로 공책 위를 빡빡 미는 것처럼 머리를 쓱싹쓱싹 문대는 성열이었다. 서류철이 겉보기에는 별로 아파 보이지 않는데 의외로 꽤 아프다.
"우이씨! 너무 하세요! 못 움직이게 하고, 못 물어보게 하고, 못 잡아둬서 안달이고!!!!"
마음속에서 간질간질 거리던 그 무언가가 펑, 하고 폭발한 성열이 징징대자 성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못 움직이게 하고! 못 물어보게 하고! 못 잡아둬서 안달이라고요!!!!" "뭐라고요? 지금 제가 못 잡아둬서 안달인 것처럼 보여요? 오히려 안달인 건 이순경이겠죠. 못 움직여서, 못 물어봐서, 그리고 못 도망가서." "아잇, 진짜!!!!! 그렇게 잘 알면 좀 놔주시지!!!"
벌떡. 순간적으로 욱한 성열이 패기 넘치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러나 성규는 별로 놀라지 않은 기색. 무표정을 유지한 채 자리에 앉으라는 뜻으로 조용히 검지를 움직인다.
까딱까딱.
"하루라도 얌전히 있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나 봅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대체 왜 그러고 살아요?" "경위님은 이해 못해요. 이게 바로 저만의 라이프스타일이에요!"
마지못해 자리에 앉으면서 말하는데, 이건 마치 초등학생과 대화하는 것처럼 답이 없다. 뚜렷한 기승전결도 없고 그저 막무가내식.
잠시라도 입을 다물지 않고 쉴 새 없이 칭얼대는 성열의 모습을 본 성규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어휴…, 저 진상.
"…줄 알아, 김명수. 너 그러다 뒤진다, 진짜."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오는 투박한 발걸음에 맞춰 이를 악물고 단단히 경고하는 소리가 들린다.
뭐지? 눈을 뜬 성규와 징징거리며 떼를 쓰던 성열은 궁금함에 고개를 슬쩍 돌렸다.
명수의 상황 설명을 듣고 1층으로 내려온 의경들은 그들을 지나쳐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미간을 좁히며 뜨겁게 내리쬐는 땡볕을 보더니 신세한탄처럼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아침에 일기예보에서 그러던데 오늘도 엄청 덥대요." "굳이 그런 말 안 해도 충분히 알 것 같다. 저기 도로에 아지랑이 보이냐? 오늘 김이경 때문에 완전 죽어나겠다." "어디? …어, 정말이네. 우린 망했다. 이경에서 일경으로 올라간다고 어지간히 방방 뛰어야지, 원." "아…. 나가기 너무 싫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최고참이 명수의 뒤통수를 퍽 때렸다.
"들었지? 괜히 이순경님이랑 엮여서 사고 좀 치지 말란 말이야, 임마."
뭐? 나랑 엮여서?! 가만히 듣고 있던 성열이 욱해서 한마디 하려는 찰나, 누군가의 목소리가 먼저 튀어나갔다.
"다들 얼른 안 나가고 뭐해? 더위 앞에서 그렇게 몸 사릴 거면 방순대는 왜 지원했나 몰라."
그들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성규였다.
한숨을 길게 쉰 성규가 쥐고 있던 서류철을 소리 나게 탁, 내려놓았다. 그리고 무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사실 말이 좋아서 무표정이지, 어째 싸늘한 기운마저 으실으실 감돈다.
"김의경 때문에 순찰 돌게 돼서 화난 건 알겠지만, 원래 이렇게 연대책임 지는 게 군대 아닌가? 덥다고 순찰 안 나가고 이런데서 하루 종일 에어컨이나 쐬고 그러려면, 뭣 하러 국방의 의무를 지러 왔나? 그게 궁금하네. 이럴 바에야 다른 데 가서 여름에는 홍수 피해 복구 작업하고, 겨울에는 제설 작업이나 하시지 그래요." "……."
성규가 꾸짖듯이 말하자 지구대 내에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평소에 순찰 돌다가 근무 이탈하는 것도 눈감아주니까, 이것들이 자기 몸뚱아리 편한 줄만 아네요."
틀린 말 없는 꾸짖음. 기가 푹 죽어서 고개를 숙인 의경들은 몸을 쭈뼛쭈뼛. 아무런 대답조차 못하고 애꿎은 신발 끝만 바라본다.
"그럼 이만 나가봐요."
까딱거리며 출입문을 향해 고갯짓을 하자, 다들 종종 걸음을 하며 일사분란하게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따라 쫄래쫄래 따라 나가는 명수.
이때, 성열이 뭔가를 봤는지 성규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팔을 다급하게 흔들어댄다.
"아, 또 왜 이래요…!" "경위님, 저거 봐요. 구타! 구타의 흔적!!" "뭐요? 구타?!"
휙. 성열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린 성규가 밖으로 나가려는 명수를 일단 멈춰 세웠다. 잠깐만요, 김의경!!!
난데없는 부름에 걸음을 멈춘 명수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돌아봤다. 그러자 보란 듯이 보이는 자그마한 휴지 뭉치 하나. 베베 꼬아서 쏙 넣은 게 명수의 한 쪽 콧구멍을 콕 틀어막고 있다.
"거봐요. 내 말 맞죠?"
속닥속닥. 참견 많은 뽀글머리 동네 아줌마처럼 성규의 귓가에 속닥속닥.
귓가를 파고드는 불쾌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린 성규가 조용히 하라며 성열의 얼굴을 저 멀리 밀어냈다. 덕분에 뒤로 밀려난 성열이 벽에다가 머리를 콩, 하고 박았다. 으악!
"김의경. 코에 그거 뭐에요." "…네?" "그거 뭐냐고요." "아, 이거요? 그냥 휴진데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명수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던 성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못 믿겠어. 이리 와서 빼 봐요." "진짜로 그냥 휴지에요." "잘 알겠으니까 이리 가까이 와서 빼보라고요."
어서. 성규가 손짓하는데 옆에 있던 성열도 따라서 손짓한다. 넌 또 뭐야, 라는 눈빛으로 쏘아보자 성열이 새침하게 콧방귀를 낀다. …뭐야, 진짜.
때마침 터벅터벅 걸어온 명수가 그들 앞에 섰다.
피해자로 추정 되는 명수의 팔을 사이좋게 나눠잡은 두 사람. 얼굴, 목, 그리고 팔 등 옷가지로 감춰지지 않은 살갗을 이 잡듯이 샅샅이 살폈다.
"…대체 두 분 다 뭐하시는 거예요." "뭐하긴. 군대 내 가혹 행위가 의심 되서 이러는 거야. 이게 다 김명수 널 위해서 이러는 거라고." "안 그러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까 굉장히 오글거리네요. 김경위님이라면 모를까." "뭐? 위에서 탈탈 털렸을까봐 걱정 되서 기껏 살펴줬더니, 이게 감히 은혜를 원수로 갚네?"
성열의 주먹이 불끈!
둘이서 또 싸울 조짐이 피어오르자 미간을 좁힌 성규가 중간에서 제지했다.
"또 시작이네. 탈수기처럼 탈탈 털어버리기 전에 그만하시지?"
…….
"……." "…아, 김경위님…."
개그 실패의 좋은 예.
회심의 일격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명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성열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탄식을 푹…. 초라해진 성규의 어깨 또한 아래로 푹 꺼졌다.
"아…알았어, 알았다고. 뭐라고 쏴붙이려는지 아니까 그 말만은 제발 넣어둬요. 충분히 민망해 죽겠으니깐…. 아무튼, 김의경은 콧구멍에 쑤셔 넣은 휴지 좀 빼보고." "정말 별 거 아니라니깐요." "아무래도 선임들이 때린 것 같아서 그래요." "맞아, 맞아. 그러니까 한 번 빼보셔!"
오지랖 넓은 아줌마들이 따로 없다. 계속 되는 경찰들의 계속된 요구에 나 몰라라 한숨을 쉰 명수가 휴지를 쑥 뺐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피 묻음 없이 깨끗한 휴지.
오잉? 성규와 성열은 휴지 끝을 보며 두 눈을 깜빡깜빡.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서 서로 마주 보고 다시 한 번 깜빡깜빡.
"그러니까 별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어제 이불을 걷어차고 잤더니 자꾸 콧물 나요."
킁킁. 명수가 코끝을 찡긋거리며 훌쩍 들이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