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략 결혼과 사랑의 상관관계.
그렇게 호텔에서 나와버린 뒤, 나는 어떠한 비난과 질책이 날아와도 상처받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을 서재로 들어서니 책상 의자에 앉아있는 풍채 좋은 그가 보였다.
무언가가 날아오진 않을까-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순간, 그가 입을 열었다.
“그쪽 아들이 네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는구나.”
“…네?!”
“미국에 갔다와서 꼭 결혼하자고, 네가 아니면 안된다고 했다던데. 네 앞에선 그런 내색을 보이지 않았던게냐?”
황쉬시, 그 애는 정말로 미친걸까. 내가 그렇게 무례하게 굴고 자신과 결혼하기 싫다고 말 했는데도 내가 마음에 든다 했다니.
아버지는 흐뭇하게 웃으며 독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네가 그쪽이랑 결혼하게 된다면 자연스레 황장웨이의 재산에도 개입할 수 있게 되겠지. 잘했다. 그만 나가봐.”
“…전 그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뭐?”
아버지가 독사같이 표독스러운 얼굴로 나를 향해 눈알을 부라렸다.
숨이 막혀왔지만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황장웨이보다 돈이 많은 사람이 있을텐데, 왜 그 사람의 아들이죠?”
“…그가 정부 쪽에 많은 연줄을 두었기 때문이지.”
“그 만한 다른 사람을 알고 계시잖아요. 전 황쉬시와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그렇게 사랑만 가득 받고 자란 빛같은 사람을 나 같은 어둠에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 애가 나 처럼 자신의 이득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면 이렇게까진 하지 않았을텐데.
하지만 아버지는 귀찮다는 듯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내게 나가라 손짓 했다.
“어차피 너는 결혼만 하면 우리 집안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질텐데, 무슨 상관이야?”
“…관련이 왜 없어요?”
“뭐라고?”
“전 결혼도 안하고 후계 자리도 제가 물려받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줄 아셨어요?”
“…”
“절 그렇게 보지 마세요, 아버지. 제가 여태껏 살면서 배운거라곤 이렇게 악착같이 제가 원하는 걸 얻어내는 것 밖엔 없었는걸요.”
“네가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서 말 하는데,”
“…”
“나는 네 의견 따윈 필요 없다. 넌 결혼해서 이 집안에서 나가게 될 것이고 내 자리는 네 동생이 받게 될거다.”
“동생이요? 누가 동생인데요? 언제부터 사생아를 그렇게 귀하게 여기셨다고.”
“김여주!”
“아버지,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저 말고도 자식이 몇이나 더 된다는걸? 순진해빠진 어머니는 몰라도 절 그렇게 무시하시면 안되죠. 네, 저 다 알아요. 저 말고 다른 여자 밑에서 태어난 애들은 다 지금 어떻게 된 지 행방이 불명하다는 거. 분명 아버지가 손을 쓰셨겠죠. 치부를 드러낼 순 없었겠거니와 전부 다 계집애들이었으니까!”
날 향해 재떨이가 날아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피해 맞지는 않았지만 유리 재떨이는 그대로 산산조각 나 그 파편들이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노여움이 가득 담긴 얼굴이 내게 다가와 내 목을 조르려 했다.
피할 길이 없어 그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두렵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 사람은 타인의 시선이 두려워 날 죽이진 못한다.
두꺼운 손가락이 내 목을 잡는 순간, 아주 절묘한 타이밍에 아버지의 비서와 경호원들이 들어와 우리 둘을 목격했다.
아마 방금 재떨이가 깨지며 나는 소리에 놀라 들어온 것 같았다.
비서가 기함을 하며 아버지를 뜯어 말렸고, 경호원들 또한 우리 둘을 떼어놓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나를 문 밖으로 밀어냈다.
순순히 문 밖으로 나와 내 방으로 올라간 나는 간단한 짐을 싸들고 우리 집안 소유가 아닌 호텔로 향했다.
피신 아닌 피신을 하게 된 내 자신이 너무 우습고 한심해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에게 목숨을 위협받고 호텔로 피신한 재벌 3세라니. 들어본 적도 없었다.
방에 들어와 혼자 문을 걸어 잠그고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똑똑- 노크를 했다.
룸서비스는 시킨 적이 없고 하우스 키퍼도 필요 없다 했으니 찾아 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아버지가 보낸 사람일까 싶어 경계하며 문의 렌즈를 통해 바깥을 보는데,
맙소사. 황쉬시가 그 곳에 서 있었다.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리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자, 그 애가 다시 한번 똑똑- 문을 두드렸다.
없는 척을 하려고 서서히 문에서 멀어지는데 그 애가 한숨을 폭 내쉬며 큰 소리로 말 했다.
"여주, 그 안에 있는거 다 알아. 이 호텔 우리 외할머니꺼야. 어떻게 하려는거 아니니까 이 문 열어."
그 말에 차마 더 이상은 모른 척 할 수가 없어서 그냥 문을 열어주자 황쉬시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불쑥,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주, 괜찮아?"
"아니 괜찮은데 왜 반말,"
"피 봐! 당장 응급실에 가야겠,"
"아냐! 부르지마! 괜찮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황쉬시가 호들갑을 떨며 내 팔다리의 상처들을 보고 당장 구급차를 부르려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일을 더 크게 벌릴 순 없어 그를 저지하니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럼 자신의 주치의를 이곳으로 부르겠다 고집을 부린다.
그것까진 막을 수 없어 그러라 고개를 끄덕이고 의자에 앉으니 그제서야 상처들이 따끔거리며 아파오기 시작했다.
"...괜찮아?"
"어떻게 된 건지 벌써 들었어?"
"넌 왜 반말, 아니다. 내가 쓰고 있네. 아무튼. 이 바닥 소문 빠르잖아. 벌써 가까운 사람들은 다 알고 있어."
아 망했다. 이제 회사의 주가가 내려갈 것이다. 그럼 아버지는 또 내 탓을 하며 내 능력을 폄하하겠지.
인상을 찌푸리니 황쉬시는 내가 아파서 그러는 줄 알고 허둥지둥, 주치의를 재촉했다.
"...황쉬시."
"응?"
"당신, 왜 나랑 약혼을 파기하겠다고 하지 않은거야?!"
내 짜증에 그저 눈만 끔뻑이던 쉬시는 살풋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수건을 건넸다.
"이걸로 피나 좀 닦아. 흐른다."
"..."
"내가 말 했잖아. 예뻐서 첫 눈에 반했다고. 널 놓치고 싶지 않았는걸."
"웃기지마. 내가 받을 재산이 탐나서 그러는거지? 그런게 아니라면 아까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굴었는데도 나와 결혼하고 싶어할 리 없잖아."
"아니야."
"그럼 증명해."
"..."
"너도 알다시피, 난 너 별로 안좋아해. 내가 애써 이룬 것들을 결혼 한번으로 누군가에게 빼앗겨 버린다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해."
"응. 알아."
"그러니까, 나한테 증명해봐. 니가 지금 이러는게 내가 가진 것들이 탐 나서가 아니라 정말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거라는 걸 증명해봐."
"…"
"내가, 내가 가진 모든 걸 너와 함께 나눌 수 있겠다- 라고 생각하게 만들어 보라고. 황쉬시."
그저 차분하게 앉아있던 쉬시는 그 말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증명할게. 남은 반 년간. 니가 날 믿을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 둘의 이상한 정략 결혼이 시작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