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생쌤
下
21:04 쌤 내일 체육대횐데
21:04 반티 입으실 거죠?
아 정국아 진짜 안 입으면 안돼? 21:07
남자가 무슨 그런 걸 입어ㅠㅠㅠㅠㅠ 21:08
21:09 안 입으시면 화낼 거예요ㅡㅡ
21:09 안 입고오기만 해봐요
아 너 진짜 싫어 21:11
아 21:11
아 21:12
21:13 ㅎ
21:13 기대할게요 선생님^^
입고 가면 되잖아ㅡㅡ 21:14
입고 간다고ㅡㅡ 21:15
21:16 역시 쌤이 짱이에요
21:16 잘생겼다
몰라 너랑 톡 안해 21:18
*
햇살은 정말이지 눈이 부셨다. 정말 여름인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뜨거웠으나 아주 봄 기운이 가시지는 않아 그닥 불쾌하지는 않은, 그런 싱그러운 오월의 마지막 주였다. 일찌감치 학교에 도착해 천막 아래 스탠드 한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앉은 정국이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체육대회는 그야말로 고등학교 생활의 꽃이라고 할 법한 그런 행사였지만, 남고의 체육대회는 꽃이라기보다는 그저 싸움박질과 땀냄새가 공존하는 곳일 뿐이었다. 일 학년 때도 정국은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체육대회 날 하루 종일 양호실에서 숙면을 취했었다. 일찍 끝나는 하교 시간에 즐거워하며 그대로 김태형과 피씨방으로 직행했고.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오늘따라 초등학교 때 부터 매번 봐오던 파랗고 하얀 천막과 수많은 국기들이 즐거워 보였다.
제각각 반티를 맞춰입고 있었는데, 남고라 그런지 딱히 상큼발랄하다거나 하는 느낌의 의상은 없었다. 진부한 런닝맨 티라거나, 혹은 죄수복이라거나. 아, 물론 정국의 반이라고 딱히 상큼하거나 깜찍한 류의 의상은 아니었다. 전정국의 반 반티는, 환자복이었다. 역시나 진부한 반티였으나 전정국의 아-주 강력한 권유(혹은 협박) 에 의해 반 아이들은 모두 환자복에 동의했다. 그리고 체육대회날 이틀 전, 반티가 배달되었는데 수많은 하늘빛 환자복들 사이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것이 있었으니 그건,
「야, 이, 이게 뭐….」
「선생님을 위해서 제가 특별주문했어요. 맘에 드시죠?」
「전, 전정국 너-」
「난 진짜, 맘에 너무너무 드는데.」
분홍색 간호사복이었다.
물론 호석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이런 손바닥만한 천쪼가리는 절대로 입지 않겠다 발버둥쳤으나, 다 헛수고였다. 갯수가 딱 반 아이들 수에 맞게 와서 입을 것이 없었던데다, 정국이 아이들을 둘러보며 얘들아, 잘, 어울리지? 하고 한 번 웃어주니 모두가 그렇다고 끄덕끄덕 긍정의 대답을 해 버린 것이다. 첫 교생에, 첫 제자들의 간절한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던 천생 순둥이 정호석은 울며 겨자먹기로 그 간호사복을 품에 끌어안았다. 잔뜩 눈꼬리가 축 내려가 강아지마냥 낑낑거릴 정호석을 상상하자 주체할 수 없이 입가에 어리는 웃음을 정국은 멈출 수가 없었다. 빨리 호석을 보고 싶었다.
「쪽팔려서 그러나, 어지간히 늦게도 오네.」
정국이 중얼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교문 앞에서부터 걸쭉한 함성이 터져나왔다. 점점 퍼져 자신에게까지 선명히 들려오는 함성에 정국이 고개를 돌렸다. 정국의 얼굴이 굳었다. 물론, 곧 환한 웃음으로 바뀌었지만.
「…씨발.」
호석이었다. 여성용이어서 조금 짧겠다고는 예상했으나, 연분홍빛의 그 간호사복은, 정말 너무 지나치게도 짧았다. 엉덩이를 아슬아슬하게 덮는 길이에, 몸에 쫙 달라붙어 얇은 천조각이 그대로 라인을 드러내었다. 목 부분이 차이나 카라로 되어 있고 흰 단추 네 개가 천조각을 여미고 있는 전부였다. 단추 하나만 풀려도 살이 훤히 보일 구조였다. 센스있게도 딸려온 간호사 머리띠까지 착용한 호석은 도대체 어디서 구한 건지 하얀 반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맨다리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다리가, 생각보다 굉장히…
「예쁘잖아, 미친.」
환호성을 질러대는 사내놈들 새에 둘러싸여 어쩔 줄을 모르고 웃고 있던 호석이 정국을 발견하고는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손을 들어 휘휘 저었다. 정국이 이리 오라는 듯 손짓을 하자, 총총총 그쪽으로 달려왔다. 다리가 이쪽 저쪽으로 움직이면서 일으켜지는 바람 때문에 치마가 슬쩍 살랑거린다. 홀린 듯 그 뒤태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사내새끼들을 향해 당장이라도 정호석 엉덩이에서 눈 떼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제 눈앞에 정호석이 있었기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스탠드까지 달려온 호석이 헥헥거리며 정국을 향해 웃어보였다. 아니, 그런데 진짜 이건 심각하게 예쁘다.
「나 너랑 약속 지켰다-」
「…쌤.」
나 잘했지? 칭찬해줘 칭찬해줘, 정도의 표정을 지으며 스탠드 계단 한 칸 위에 서 있는 정국을 올려다보는 모양이 정말로 애완견 같았다.
「치마가 좀 많이 짧네요.」
「아 그르니까 내가 입기 싫댔잖아 진짜-」
아뇨, 이쁘다고요. 근데 조심해서 걸어다녀요. 얼굴을 구기고 찡찡대던 호석의 얼굴이 괜찮아? 그럼 다행이고. 하며 제법 피어졌다. 선생님은 일어나서 다니지 말고 그냥 스탠드에 앉아있는 게 낫겠다. 알았죠? 아 싫은데 그건…. 그냥 좀 앉아있어요. 알았어어.
*
「와아아아! 우리 반 잘한다아! 화이팅!」
정국의 쏘다니지 말고 가만 앉아있으란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지, 정국의 반 아이들이 경기를 뛸 때마다 호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마구 뛰어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흘긋거리며 다리와 허리에 남들의 시선이 머무르는 것이 정말 꼴보기 싫었지만, 호석이 너무 즐거워 보였기에 정국은 차마 앉으라고 다시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냥 뛰어다니기만 하는 거면 어느 정도 양해를 해 주겠다만은, 남고 체육대회랍시고 걸그룹 노래들만 주구장창 틀어제끼는 방송부에, 정호석은 그걸 또 따라하고 난리였다.
「미스터 미스터- 미스터 미스터-」
「쌤, 좀 가만 있어요. 정신사나워.」
「아 왜, 나 춤추는 거 진짜 좋아한단 말야.」
아 좋아하고 나발이고 그만- 정국이 인상을 팍 쓴 채로 소리를 지르려던 참에,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운동장을 울렸다. 바로 정국에게서 고개를 돌리곤 방방 뛰어다니기 시작한 호석을 정국이 한숨을 내쉬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래가 바뀌었는데, 노래가, 하필이면.
짧은 치말 입고-
어! 나 이거 아는 거다! 쿵짝쿵짝 신나게 들려오는 비트에 신이 난 호석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따라했다. 그리고 그, 그 부분. 역시나 모든 안무를 따라하던 호석은, 아무 생각 없이 그 부분의 안무를 추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며 아래로 내려가는 동그란 엉덩이, 유연하게 쭈욱 휘어진 허리, 탱탱한 허벅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노래 가사와 완벽히 들어맞는 짧은 간호사복. 모두의 이목이 제게 꽂혀 있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제 세상에 빠진 호석을 바라보고 있던 정국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손목을 낚아채 강제로 춤사위를 멈추게 하니 동그랗게 커진 눈망울로 저를 바라본다. 내가 뭐 잘못했어? 라는 저 순진한 눈빛이, 정국은 오늘따라 미웠다. 그대로 스탠드 위로 호석을 끌고가 제 옆에 털썩 앉힌 정국이 입고 있던 환자복 윗도리를 벗어 호석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안에 티 하나 더 입고 오기를 잘했지, 씨발. 엉덩이라도 보였어봐, 내가 제 명에 못 죽지. 정국이 표정을 잔뜩 굳히고는 호석을 바라보았다.
「일어나지 마요.」
「뭐야, 갑자기!」
「간호사복 입혀서 미안해요. 그러니까 일어나지 말자.」
「아우 씨 진짜… 너 땜에 이게 뭐야, 응원도 못 하고!」
정국이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었다. 낸들 간호사복 입히는 게 이렇게 파장이 클 줄 알았냐고…. 그냥 눈호강 좀 하자 싶어서 주문했더니.
어쨌든, 그렇게 체육대회가 끝날 때까지 정국은 호석의 곁에 딱, 붙어 앉아 있었다.
*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입맛이 없었다. 점심도 그닥 구미를 당기는 메뉴로 구성되지 않았고, 정국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매점으로 직행했다. 뚱뚱한 바나나우유 하나와 두툼한 피자빵 하나를 손에 들고 어디가 조용할까, 정국은 생각했다. 그리고 학교 뒷편, 공원과 연결된 잔디밭으로 결정을 내렸다.
「아, 존나 더워.」
막상 잔디밭으로 나오니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이 정국을 강타하는 바람에 정국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 진짜 도와주는 게 하나도 없어. 학교 건물이 어느 정도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고 정국은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 빵 봉지를 뜯어 한 입 가득 베어물고는 그 맛을 음미하기도 전에 정국은 꽤 가까이서 들려오는 두어 명의 수군거림에 제 의도는 아니었지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야, 씨발 어제 교생 봤냐?」
정국이 빵을 씹던 입놀림을 멈추었다.
「존나 춤 추는 거 씨발, 개 꼴려서 화장실 갈 뻔.」
「간호사복 좆된다, 진짜. 야동에서도 요샌 잘 못 보는 건데 존나-」
「교생 엉덩이 봤냐고, 아 허벅지 봄? 걍 허리 돌리는 것도 한두 번 해본 것 같진 않던데.」
「아, 근데 그 간호사복 전정국이 입힌 거라매.」
「전정국 그 새끼 교생 앞에서 존나 착한 척 하는 거 보이냐? 씨발 게이새끼.」
「둘이 잔 거 아냐?」
「잤나?」
「잤겠지- 존나 전정국, 안 그렇게 생겨서 크다던…」
정국이 씹던 빵을 바닥에다 뱉었다.
「얘들아.」
「-헐, 야, 씨발 잠깐만…」
「내 좆이 작은지 큰지 너네가 알 바는 아닌데 말이야,」
「정, 정국아.」
「적어도 그런 말을 할 때는 뒤에 사람이 있나 없나 확인 정도는 해라.」
미련 없이 주먹을 배에다 내리꽂았다.
*
「전정국, 말 안해?」
「…….」
「전정국!」
「아 몇 번 말해요, 저 새끼들이 먼저 귀찮게 했다니까.」
「그게 말이 돼? 쟤들이 너한테 뭘 어떻게 했길래 저렇게 애들을 떡이 되도록 패!」
정국은 호석과 눈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소의 그 순둥하니 말 잘 듣고 예쁘던 아이는 어디 가고, 눈 앞의 정국은 너무도 살벌하고 무서웠다. 늘상 웃고 있던 아이라 몰랐는데, 표정을 굳히면 분위기가 확 달라지는구나.
「너 진짜 말 안…」
「신경 끄세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 정국이 쾅, 하고 교실 문을 닫고 사라졌다. 한숨을 길게 내쉰 호석이 제 옆에 나란히 앉아 있는 세 명의 남자아이들을 슥 쳐다보았다. 원체 정국이 머리가 좋아 티가 쉽게 나는 얼굴은 건드리지 않고 혹여나 뼈라도 부러질까 복부만을 집중적으로 때려서 그런지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저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나오는 건 정말로 한숨뿐이라.
「너네 도대체 무슨 말을 한 거니?」
「…저, 저희 진짜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럼 쟤가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
아아, 진짜 미치겠네. 호석이 머리를 감싸쥐었다.
내 님들 안녕 안녕!!
아아아ㅏㅏ아아아 진짜 너무너무! 너무너무 반가워요!
오늘 시험 끝났어요 :)
이제 열심히 글 업뎃할 거니까 같이 놀아요 내 사랑들 ^_^♡